'손흥민 70m 골'만큼 멋진 , 한국축구 '사상 최고의 3골'

  • 기자명 김형민
  • 기사승인 2019.12.09 08:0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손흥민의 ‘원더풀’ 골을 몇 번이고 다시 돌려 본다. 펠레건 에우제비오건 마라도나건 메시건 호나우두이건 그 누구를 대입해 봐도 꿀릴 것 없는 아름다운 골이었다. 상대방이 이건 반칙을 해서라도 막아야겠다는 생각할 틈도 주지 않는 폭풍 같은 질주, 거침없는 드리블과 대담한 슛 감각이 어우러진 그야말로 예술이었다. 찬탄을 금치 못하며 다양한 각도에서 본골 장면을 연거푸 보다 보니 지금껏 축구 보아오면서 한국 축구팀 (청소년 포함) 선수들이 넣었던 멋진 골들을 기억 속에서 호출해 보고 싶어졌다. 그래서 몇 건을 꼽아 본다.

 

1. 1977년 아르헨티나 월드컵 예선전 이스라엘 전의 최종덕

월드컵이라는 단어가 인식된 건 초등학교 1학년 때였다. 1977년, 1년 뒤 1978년 아르헨티나 월드컵 아시아 예선전이 시작됐기 때문이다. 축구광이었던 할아버지와 역시 축구를 좋아하셨던 아버지 옆에서 이런 저런 ‘코치’를 받으며 나는 축구 관람에 입문했다. 아시아 지역 1차 예선이 벌어졌는데 상대는 일본과 이스라엘이었다. 요즘은 이스라엘을 아시아 무대에서 볼 수 없지만 이스라엘은 본디 아시아 축구 연맹 소속이었다. 아시안컵과는 좀체 인연이 없는 한국이 60년 전 아시안컵 대회를 우승했을 때 준우승팀이 이스라엘이었다.

역대 전적에서는 한국이 우위지만 이스라엘은 유럽식 축구를 구사하며 한국을 괴롭혔고 1976년 몬트리올 월드컵 예선전에서는 한국을 3대1로 완파하며 올림픽의 꿈을 망가뜨렸다. 원정경기에서 비긴 한국은 절치부심 홈 경기를 준비했다. 당시 한국 축구팀은 골드 제너레이션으로 회상될만큼 좋은 선수들이 많았다. 차범근, 허정무, 조광래, 박상인, 쌍둥이 김강남, 김성남, 박성화 등등. 그리고 당시 고려대 74학번이던 최종덕도 끼어 있었다.

차범근이 선취골을 넣어 장군을 부르자 이스라엘이 만회골을 터뜨렸다. 또 비기나 했지만 한국팀이 한 골을 넣어 2대 1로 앞서기 시작했다. 당시 안방 분위기는 환호 일색. 할아버지는 “이영무 (독실한 기독교 신자로 유명했던 선수. 경기 시작 전 혼자 기도를 올렸다.)가 기도를 열심히 해서 이기는 거야.”라며 손자에게 교회 열심히 다니라고 채근하셨고 아버지는 “하느님은 이스라엘 편 아닙니까?” 하면서 폭소를 터뜨렸다. 거의 이기는 분위기. 그런데 거기서 나에게 축구의 마력을 일깨우는 일이 벌어졌다.

차범근이 몰고 들어가다가 마크를 당하자 공을 뒤로 돌렸는데 갑자기 그야말로 갑자기 뒤에서 뛰어들던 최종덕이 냅다 롱 슛을 때려 버린 것이다. 대략 한 40미터는 됐을 것이다. 요즘 말로 울트라 캡숑 나이스 짱 롱 슛이었다. 당시 신문의 표현을 빌리면 “지구궤도를 벗어나 달의 인력에 빨려 들어가는 인공위성 모양” (1977년 3월 21일) 이스라엘 네트에 꽂히고 말았다. 최종덕은 이 골로 한국 축구사에 남는 ‘중거리슛의 대명사’가 됐다. 일곱 살 어린 나이의 눈에도 그 공의 궤적은 경이롭게 꽂혔고 지금도 선명하게 남아 있다.

당시 경기인데 마지막 골이 최종덕의 골 같지는 않다.. 내 기억과는 다르다.
이 경기는 한국이 지역 예선에서 마지막으로 이스라엘을 만난 기회이기도 했다. 수십 년 한국의 라이벌이었던 이스라엘은 중동세가 부상한 아시아 축구무대에서 축출돼 국제 미아로 유럽에 붙었다가 오세아니아에 붙었다 하는 국제 미아로 전락했던 것이다.

 

2. 1980년 아시안컵 준결승 북한전 정해원 골

북한이 1966년 월드컵에서 돌풍을 일으킨 이래 한국은 엄청난 콤플렉스에 시달렸다. 북한이 저렇게 축구를 잘하니 맞붙었다가 5대0 정도로 깨지는 날이면 좀 불려 말하면 역적으로 몰릴 분위기였다. 그래서 택한 방법이 풍신수길이 이순신의 조선 함대에 대항해 쓴 전략이었다. “적이 보이면 도망쳐라.” 1966년 런던 월드컵 지역 예선에서는 악착같이 핑계를 대서 참가하지 않으려다가 벌금을 물었고 1974년 테헤란 아시안 게임에서는 두 번이나 져 주면서 북한을 피하기 위해 발버둥쳤다.

하지만 외나무다리는 항상 원수 사이에 즐겨 놓이는 법. 1978년 방콕 아시안 게임 결승전에서 기어코 남북은 만났고 승패 없이 공동우승을 한다. 그런데 2년 뒤 남북은 쿠웨이트에서 열린 아시안컵 준결승에서 또 만난다(대한민국 축구국가대표팀 페이스북 영상). 남한은 전반 초반, 페널티킥을 허용했고 후반 35분까지 1대0으로 패색이 짙었다. 그런데 10분을 남기고 공격수 정해원이 멋진 헤딩슛으로 동점골을 터뜨렸다. 분위기가 달아올랐다. 쿠웨이트에 ‘외국인 노동자’로 엄청나게 가 있던 시절, 쿠웨이트 현지는 완연한 한국 홈 경기장이었다.

종료 2분전, 한국팀 공격 라인이 북한의 왼쪽을 헤집었다. 위에서도 언급됐던 부지런한 ‘링커’ (미드필더를 이렇게 불렀다) 필사적으로 공에 머리를 들이미밀었는데 그만 북한 선수의 발에 이마가 채여 데굴데굴 굴렀다. “저 빨갱이 새끼들이!” 아버지의 입에서 욕설이 날았고 그만큼 험악한 말들이 쿠웨이트 현지에서 7천명의 입에서 터져 나왔다. 이 프리킥으로 공격의 실마리가 풀렸다. 이강조가 이영무에게 연결하고 이영무가 치고들어가는 척 하면서 오른쪽으로 슬쩍 흘렸는데 이걸 첫골의 주인공 정해원이 그야말로 맹수의 기세로 덤벼들어 왼발 강슛을 날렸다. 금강산전도같이 화려하고 몽유도원도처럼 환상적인, 그야말로 그림같은 슛.

온 동네가 난리가 났다. 불이 훤하게 켜지고 어떤 아저씨는 대한민국 만세를 불렀다. 우리 어머니도 어깨춤을 추셨고 내 머리도 천정에 닿았을 것이다. 한국팀은 북한전에 힘을 너무 빼서인지 결승에서 쿠웨이트에게 참패하고 준우승에 그쳤지만 전두환은 이에 개의치 않았던 것 같다. 한 달쯤 뒤 다른 종목 선수들과 함께 당시 한국 대표팀 단장 이하 엔트리 18명을 죄다 청와대에 불렀고 훈장을 수여했던 것이다. 정해원은 체육 훈장 백마장을 받는다. 정해원은 탁월한 공격수였다. 이후로도 국내리그에서 여러 명의 선수를 개인기로 제치고 단독 대시에서 골을 넣는 ‘손흥민급’의 활약을 펼친 일로도 유명하다. 하지만 내 생각에 그의 인생골은 북한전의 그 골이었을 것이다. 정말로 멋진 골이었다.

 

3. 1984년 4월 LA 올림픽 예선 사우디전 전종선 골

1983년 박종환 감독이 이끄는 청소년 대표팀이이 멕시코에서 무려 4강 신화를 쓰면서 변방 콤플렉스에 절어 있던 한국 축구의 분위기는 급작스레 반등했다. 원래는 청소년팀을 88 올림픽을 대비한 팀으로 따로 꾸리겠다는 방침을 밝혔던 축구협회는 아래 위로 압력을 받으며 박종환 감독에게 대표팀을 맡기고 청소년 대표팀을 대거 국가대표로 선발했다. 이 와중에 최순호, 변병주, 박경훈, 최인영 등 고참 선수들이 박종환 감독의 지휘 방식에 불만을 품고 팀을 이탈했다가 2년간 자격 정지를 당하고 또 어찌어찌 사바사바 화해 세레모니를 거쳐 읏샤읏샤 다시 해 보자고 나서는 해프닝도 있었다. 그래도 사우디를 잡으면 LA 올림픽 티켓을 거머쥐고 ‘나성에 가서 편지를 띄울’ 수 있다는 희망에 온 나라가 부풀고 있었다.

그 기대에 부응하는 첫골 역시 한국 축구사에 남을 골이었다. 페널티에리어에 진입하지 못하고 돌던 공이 흘러나왔고 갑자기 또 한 번 갑자기 어디선가 나타난 수비수 전종선 (요즘 문제가 된 정종선과 이름이 비슷하지만 전혀 다른 인물)이 그대로 슛을 때린 것이 마치 UFO처럼 날렵하게 사우디 문전을 공습했던 것이다. 환상적인 중거리슛. 당시 방송사 카메라 하나는 박종환 감독의 죽마고우였던 코미디언 이주일씨 집에 가 있었다. 사우디만 이기면 LA에 갈 판이었으니 친구의 영광을 함께 나누는 코미디 스타의 모습을 잡고 싶었으리라.

전종선의 골에 이주일은 글자 그대로 기뻐 날뛰었다. 이주일씨의 가족들도 함께 발을 동동 구르며 기뻐하는 가운데 이주일은 환호하다 못해 집 밖으로까지 뛰쳐 나왔다. 말을 잇지 못하며 그는 “이 골은 한국 축구 역사에 기록될 골이다.”라고 부르짖었다. 그 뒤 북한격파의 영웅 정해원이 추가골을 터뜨릴 때만 해도 그 기쁨은 그치지 않을 줄 알았다. 그러나 오일 머니를 족히 먹었을 듯한 심판이 문제였다. 심판은 엄청난 농간을 부리며 사우디의 열 두 번째 선수로 뛰었고 한국 선수들이 미친 듯이 골을 넣어도 사우디는 그 이상을 넣었다. 스코어는 5대 4. 경기 후 심판이 악수를 청할 때 한국 선수들은 침을 뱉으며 외면했다. 그때 인도네시아 심판은 멋쩍게 웃기만 했다.

전종선의 첫골에 미친 듯 기뻐하던 이주일의 침울한 모습 역시 방송을 탔다. 그리고 그의 각오까지도. “이 길로 싱가포르 갈 겁니다.” 사우디에 졌으니 다른 조의 이라크와 마지막 티켓을 놓고 겨뤄야 했는데 이주일은 모든 스케줄 접고 싱가포르로 날아갔다. 붉은악마도 없던 시절 해외 교포가 다였던 한국팀 응원단장을 자처한 것이다. 특유의 엉덩이춤을 추며 열심히 응원했지만 한국은 이라크에 발목이 잡혀 나성에 가지 못했다. 박종환 감독은 일종의 축구판의 ‘박정희’ 느낌이 드는 분이다. 대단한 성과를 낸 것은 사실이지만 그의 전술은 ‘하면 된다’ 식의 ‘정신력’에 의지하는 바 컸다. 이주일이 패배를 위로하는 가운데 박종환 감독이 남겼다는 패인 분석은 당시가 어떤 시대였는지를 짐작케 한다.

“경기 전날 ‘사랑의 매질’로 강한 정신력을 주입하지 못한 것을 패인으로 들고 있다.”

사우디의 돈 축구에 밟히고 ‘사랑의 매질’이 국가대표팀에도 당연하던 시절에도 전종선의 슛의 궤적은 지금도 찬란한 빛줄기로 남아 있다.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오늘의 이슈
모바일버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