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의 기초과학 투자가 '밑빠진 독 물붓기'인 이유는

  • 기자명 김우재
  • 기사승인 2020.02.12 10:4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지금까지 말한 것들을 바탕으로 하면, 과학자는 과학의 전통과 가치를 보존하는 방법으로 행동해야 한다는 도덕적 책임을 이 선언문이 강조하는 것은 당연할 것이다. 과학자가 그렇게 하지 못하면 우리는 그들을 지지할 수 없고, 그렇게 되면 민주 사회를 지탱하는 문화의 중요한 한 요소는 상실될 것이다."

-해리 콜린스, 로버트 에번스 <과학이 만드는 민주주의>의 서문 중에서

 

유사과학은 과학을 빙자한다. 과학이 아니면서 과학을 참칭하고, 오랜 세월에 걸쳐 사회로부터 과학이 얻어낸 권위를 악용해 대중을 현혹한다. 유사과학이 그토록 대중에게 효과적으로 작동할 수 있는 이유 중 하나는, 바로 과학이 우리 사회에서 강력한 권위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과학은 전염병의 실체를 밝혀냈고, 우주의 크기를 측정했으며, 지구에 사는 생물이 지닌 역사를 밝혀내고 있는 유일한 학문이다. 과학이 밝혀낸 지식을 거부하고 살아가는 건 개인의 취향이지만, 사회 속에서 타인과 함께 살아가기 위해선 과학이 지탱하고 있는 문명의 상식과 어떤 방식으로든 마주할 수 밖에 없다. 과학은 정치처럼 우리에게 표면적이고 직접적이며 단기적으로 영향력을 발휘하지 않지만, 우리 감각의 배후에서 암묵적이고 간접적이며 장기적으로 그 권위를 드러낸다. 유사과학은 우리 삶을 지배하는 그 과학의 권위를 악용하는 활동이다.

과학이 권위를 획득하는 방식은 과학이 진리를 발견하는 활동 그 자체에서 나온다. 상아탑의 지식인이라는 단어가 속세의 일에는 관심 없이 자신의 연구에만 골몰하는 지식인을 부정적인 방식으로 묘사하게 됐지만, 역설적으로 과학의 권위는 바로 그 상아탑 지식인들에게 나왔다. 근대과학이 확립되던 17세기에, 실험실에서 자연을 측정하고 재현하는 과학적 방법론이 등장했고, 그 방법론이 측정해낸 숫자들이 자연을 설명하는 이론으로 승화되었다. 근대과학은 그렇게 실험실과 형이상학을 하나로 조율해 진리를 발견해나간다. 그것이 우리가 여전히 과학적 방법론이라 부르는 소중한 인류의 자산이다. 뉴턴의 고전역학도, 다윈의 자연선택설도,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도, 모두 그 과학적 방법론의 틀 속에서 탄생했고, 도전받았고, 변화해가는 과학이다. 

과학적 방법론이 과학적 권위의 기반이라면, 과학적 방법론이야말로 유사과학을 막기 위해 인류가 지켜야할 자산일 것이다. 이미 다른 글에서 살펴본 것처럼, 과학이 발견한 결과물들로 유사과학을 공격하는 과학적 회의주의자들의 방식은 필연적으로 실패한다. 그들은 과학적 권위가 과학의 결과물들에서 기원한다고 착각하기 때문이다. 과학의 결과물인 이론은 언제나 도전을 받고 변화한다. 따라서 지금 우리가 기대고 있는 이론이 몇 십년 후엔 더 나은 이론으로 대체될 수도 있다. 그렇게 동적평형을 이루는 과학적 결과물들로 유사과학을 상대한다는 건, 단단하지 않은 망치로 벽을 무너뜨리겠다는 것과 마찬가지다. 과학의 권위가 생겨나는 유일한 출처는 과학적 방법론이다. 따라서 유사과학을 무너뜨리기 위해 과학의 결과물들로 그들을 공격하는 일은, 근본적 해결책이 될 수 없다. 유사과학을 무너뜨리기 위해서 우리에게 필요한 태도는 과학적 방법론이 기대고 있는 그 합리성일 뿐이다.

바로 그런 이유로, 과학은 유사과학을 공격하는 치료제가 아니라, 유사과학으로부터 사회를 보호하는 백신이 되어야 한다. 그리고 과학이 제공하는 백신은 과학이 발견한 사실들이 아니라, 과학적 방법론이 사회에 제공하는 합리성이어야 한다. 과학적 방법론이라는 미덕이 사회에 유사과학에 대한 백신을 제공하는 방식은, 햇볓정책과 정치적으로 유사하다. 우리는 유사과학을 때려서 제거하지 말고, 강한 햇볕에 녹여 서서히 그 영향력이 사라지게 만들어야 한다. 햇볕이 강하면 스스로 옷을 벗듯이, 과학적 방법론이 사회에 광범위하게 퍼지면, 유사과학의 영향력도 약해질 수 밖에 없다.

오래 걸리더라도, 과학이 유사과학을 사회에서 사라지게 하는 정치적 해법은 햇볕정책과 비슷한 방식을 따르는 수 밖에 없다. 과학이 그 권위로 유사과학을 직접 상대하는 것보다, 과학이 사회에 미칠 수 있는 선한 영향력을 통해 사회가 유사과학을 녹아 없어지게 만드는 게 더 강력하고 지속가능한 방식이기 때문이다. 마치 김대중 대통령이 북한에 별다른 조건 없이 식량을 원조해 북한 내부의 변화를 이끌어 낸 것처럼.
오래 걸리더라도, 과학이 유사과학을 사회에서 사라지게 하는 정치적 해법은 햇볕정책과 비슷한 방식을 따르는 수 밖에 없다. 과학이 그 권위로 유사과학을 직접 상대하는 것보다, 과학이 사회에 미칠 수 있는 선한 영향력을 통해 사회가 유사과학을 녹아 없어지게 만드는 게 더 강력하고 지속가능한 방식이기 때문이다. 마치 김대중 대통령이 북한에 별다른 조건 없이 식량을 원조해 북한 내부의 변화를 이끌어 낸 것처럼.

 

과학의 선한 영향력을 어떻게 사회에 넘쳐흐르게 할 것인가

유사과학을 상대하는 유일한 방법이 과학적 방법론이 사회 속에서 영향력을 갖게 만드는 것이라면, 사회 속에서 과학은 무엇이 되어야 할지 고민해봐야 한다. 그리고 그 방법을 상상하기 위해선, 우리가 지금까지 과학에 대해 생각해온 모든 관념을 떨쳐버려야 한다. 왜냐하면 한국사회에서 우리가 경험했던 과학은, 첫 단추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죄다 유사과학과 똑같은 방식으로 사회에 영향력을 행사해왔기 때문이다. 첫째, 한국의 과학은 과학만으로 존재해 본적이 없다. 한국사회에서 과학은 과학기술이다. 과학기술이라는 단어는 한국에만 존재하는 혼종이다. 멀게는 일제 식민지에서 벗어나 자주적인 독립국의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삼기 위해서 과학은 과학기술로 왜곡되었고, 가깝게는 기술혁신을 통한 경제발전의 도구로 삼기 위해 과학은 과학기술로 변용되었다. 한국은 과학을 과학 그 자체로 받아들여 다듬고 키워내지 못했다. 따라서 한국엔 과학이 사회 속에 잘 자리잡았을 때에만 나타날 수 있는 사회적 영향력이 없다.

누군가는 반박하려 할 것이다. 한국도 이제 세계의 유수한 고급학술지에 논문을 내는 과학자들이 많아졌고, 국가의 연구개발비 규모도 세계 5위 안에 들 정도로 과학에 투자하는 국가라는 말을 하고 싶을 것이다. 물론 여전히 노벨과학상 수상자가 한 명도 없는 나라지만, 그런 변명에도 일리는 있다. 지난 수십년간 한국 정부는 과학기술에 - 과학이 아니라 - 크나큰 투자를 해왔고, 그 돈의 대부분이 기업연구개발과 국가주도 산업발전에 사용되었지만, 과학계도 양적∙질적으로 성장한 것이 사실이다. 심지어 이명박 정부에서부터 주도된 과학비즈니스벨트 사업은 박근혜 정부를 거쳐 문재인 정부에 이르기까지 이어져 오고 있으며, 과학자 한 명이 매 년 100억원의 연구비를 지원받는 기초과학연구원 IBS의 설립을 이루어냈으니, 한국에 과학이 없다는 말은 어불성설로 들릴지도 모른다(기초과학연구원 IBS에 대한 비판은 동아사이언스 기고 글을 참고).

하지만 여전히 한국에서 순수한 기초과학 연구는 어렵거나 거의 불가능하다. 예를 들어, 한국의 국립대에서 진화생물학 강의를 듣는 건 거의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진화생물학을 연구하는 과학자가 없기 때문이다. 진화생물학 연구자가 한국에서 멸종되고 있는 이유는, 한국 대학의 생물학과들이 진화생물학 연구자를 거의 고용하지 않기 때문이다. 진화생물학이 돈이 되지 않는 학문이라는 고용담당 교수들의 단견과 편견으로 인해, 한국의 생물학계에서는 진화생물학의 씨가 마르고 있다. 누군가는 말할 것이다. 한국에 출판된 과학교양서의 대부분이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를 위시한 진화생물학 책들이고, 대중매체에 등장해서 강의하고 대중과 소통하는 유명한 국내의 진화생물학자들이 있는데, 도대체 왜 한국에 진화생물학자가 없다고 말하느냐고 반박하고 싶을지 모른다(내 말이 의심스러우면 한국 최고의 진화생물학자의 입으로 들어보면 된다. 진화생물학은 연구비 지원이 거의 이루어지지 않는 분야다). 하지만 과학연구는 스타과학자 한 두명에 의해 이루어지는 게 아니다. 과학은 김연아나 박지성이 활동하는 스포츠계와 다르다. 한 두명의 스타과학자의 존재가 과학계의 하부구조를 견인할 수는 없다. 특히 대중매체에 등장하는 대중과학자의 존재와, 실제 과학계의 수준 사이에는 별 다른 상관관계가 없다(바로 이 부분에서 한국의 대중과학계가 미치는 해악이 있다. 한국에 필요한 것은 과학관이 아니라 연구소인데, 이들은 과학과 대중이 소통하기만 하면 될 것처럼 떠들고 다니기 때문이다). 기초과학이 한국사회의 표면이 아니라 심층부에 스며들기 위해서는, 제도적/문화적으로 지금까지와는 완전히 다른 접근방식이 필요하다.

한국에 진화생물학 교양서가 넘쳐나지만, 국내 대학에서 진화생물학을 제대로 가르치는 곳은 없다. 진화생물학을 연구하는 건 위험한 도박이다. 왜냐하면 한국의 과학이란 기술과 결부된 과학기술일 때에만 의미를 갖는, 산업개발 시기의 패러다임 속에 적체되어 있기 때문이다.
한국에 진화생물학 교양서가 넘쳐나지만, 국내 대학에서 진화생물학을 제대로 가르치는 곳은 없다. 진화생물학을 연구하는 건 위험한 도박이다. 왜냐하면 한국의 과학이란 기술과 결부된 과학기술일 때에만 의미를 갖는, 산업개발 시기의 패러다임 속에 적체되어 있기 때문이다.

 

기초과학의 부흥을 위한 몇 가지 조건

과학이 과학기술로만 소비되는 한국사회의 고질적인 적폐, 과학대중화를 외치면서도 과학현장에서 기초과학이 사멸해가는 문제를 방치하는 과학대중화세력의 모순, 기초과학의 부흥을 위한다면서도 여전히 노벨상에 목표를 두고 있는 한국 과학계 원로들의 해악, 바로 이런 문제들을 해결하지 않고는, 한국사회에 기초과학이 스며들게 만들 방법은 없다. 그리고 바로 이런 문제들이 해결되고, 더 많은 기초과학자들이 더 많은 연구소에서 더 창조적이고 역동적이며 다양한 연구들을 수행할 수 있을 때, 우리는 유사과학이 발붙일 수 없는 건강한 사회를 갖게 될 것이다. 즉, 과학이 유사과학에 대한 백신으로 작동하기 위해서 한국에 필요한건, 더 많은 기초과학 연구다. 더 많은 기초과학 연구가 가능하려면 과학관이 아니라 연구소를 지어야 한다. 그렇게 지어진 연구소에서 더 많은 기초과학자들이 안정적으로 다양한 연구를 수행할 수만 있다면, 그들 중 일부는 사회적 책임을 느끼고 대중과 연구를 공유하려 할 것이고, 바로 그런 활동이야말로 진정한 과학의 대중화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바로 그런 분위기 속에서 유사과학은 과학이 사회에 비추는 햇볕에 의해 서서히 녹아 사라지게 될 것이다.

누군가는 또 반박하려 할 것이다. 바로 그 기초과학 진흥을 위해 한국정부는 지금까지 열심히 노력해왔고, 수 조원의 자금을 투입해서 기초과학연구원 IBS까지 건설했는데, 어떻게 지금보다 더 많은 기초과학 연구소를 지을 수 있느냐고 말하고 싶을지 모른다. 일리가 없는 말은 아니다. 한국정부는 전세계 어떤 국가보다 더 많은 연구비를 기초과학에 투입하고 있다. 하지만 현재 한국정부가 기초과학에 투입하고 있는 연구비의 대부분은 밑빠진 독에 물붓기다. 내가 이렇게 말할 수 있는 이유는, 표면적으로는 크게 증가한 기초과학 연구비에도 불구하고, 현장 과학자들의 불만이 전혀 줄어들지 않을 뿐더러, 한국 기초과학의 경쟁력이 크게 발전하고 있지도 않기 때문이다. 오히려 한국의 과학경쟁력은 IBS가 생기기 이전보다 하락했고, 한국에서 기초과학을 수행하는 대학의 경쟁력조차 계속 추락 중이다. 기초과학에서는 중국에 앞섰다는 자부심도 이제 내세울 수 없는 지경이고, 이공계 대학원은 미달사태로 신음중이며 지방대학들은 이제 신입생조차 채울 수 없는 인구절벽의 시대에 들어섰다. 현재의 상태로라면, 한국 대학에서 인문학이 빠르게 사라진 것처럼, 기초과학도 곧 사라지게 된다.

이런 상황은 과학계의 원로와 오피니언 리더들도 잘 인지하고 있다. 매년 10월이 되면, 평소에는 정부에 대해 제대로 비판도 못하던 기초과학계 인사들이 각종 매체에 등장해 노벨상에 대해 훈계를 한다. 그들의 주장은 대체로 판박이다. 한국정부는 기초과학에 더 많은 지원을 해야 하고, 연구자들에게 더 큰 자율성을 부여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대체로 이런 주장을 하는 이들의 직업은 대학교수다. 하지만 얼마나 더 큰 예산을 기초과학에 쏟아부어야 노벨상을 탈 수 있단 말인가. 한국은 국가단위 연구개발비로는 세계최고에 가깝고, 이젠 IBS 같은 세계적 기초과학연구원도 있는데, 국가가 뭘 더 할 수 있을까? 게다가 다른 분야와는 달리 과학계만 감사 없는 자율성을 달라는건 과연 사회적 책임이 뭔지 아는 과학자가 할 수 있는 말일까? 기초과학이 위기인건 사실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지금까지 해왔던대로 모든 책임을 정부에 떠 맡기고, 형평성 차원에서도 지나친 특혜에 가까운 자율성을 주장해서는 안된다. 과학계가 정말 기초과학을 발전시키고 싶다면, 그래서 가까운 장래에는 한국에서 수행된 연구들 중에서 노벨상이 나오는 모습을 보고 싶다면, 현재 우리가 당연시하고 있는 여러 제도와 문화들을 급진적으로 개혁해야만 한다.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관련기사
오늘의 이슈
모바일버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