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나에 머물러 있지 않는 "치열한 모순의 존재", 한영혜

  • 기자명 홍상현
  • 기사승인 2020.03.16 0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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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열한 모순의 존재(creature of intense contradictions)”

한영혜가 분했던 극중 캐릭터에 관한《할리우드 리포터》의 평은 대단히 강렬할뿐더러, 그를 일반적으로 설명하는데 있어서도 유효하다.

‘이누가미의 결혼’카타시마 익키 감독과 함께. 카타시마 감독은 한영혜에 대해 “친자식 같은 사람”이라고 표현한다. 물론 그도 “촬영장에 카타시마 감독이 계시면 아버지가 보고 있는 느낌이라 사무실로 돌아가 주셨으면 하는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사진촬영: 하세가와 료
‘이누가미의 결혼’카타시마 익키 감독과 함께. 카타시마 감독은 한영혜에 대해 “친자식 같은 사람”이라고 표현한다. 물론 그도 “촬영장에 카타시마 감독이 계시면 아버지가 보고 있는 느낌이라 사무실로 돌아가 주셨으면 하는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사진촬영: 하세가와 료

인구 10만을 조금 넘는 시즈오카 현의 중소도시에서 한국인 아버지와 일본인 어머니의 딸로 태어난 그는 열 살에 영화배우로 데뷔했다. 거장의 베니스국제영화제 초청작이었다. 2년 뒤 캐스팅된 작품감독칸영화제 황금종려상에 노미네이트되었고, 공연자(costar)는 영화제 사상 최연소 남우주연상을 받았다.

다만, 그자신은 연기를 제외한 어떤 이슈로도 대중의 관심을 끌어보려 한 적이 없어 보인다. 폭풍 같은 커리어에 대조적인 일상. 가정에서는 일찍부터 사회생활을 시작한, 책임감 강한 큰딸이었고 대학에서는 국제관계학부의 평범한 학생이었다. 다만, 남들처럼 학창시절을 만끽할 여유가 있었는지는 알 수 없다. 학업을 마칠 무렵까지 20편 가까운 영화와 TV드라마에 출연하며 CF모델로도 활약했으니까.

하지만 단 한번 ‘자연인 한영혜의 삶’이 화제가 된 일이 있다. 과거 <어느 가족>의 고레에다 히로카즈가 연출을 맡기도 했던 프라임다큐멘터리 <논픽스>의 후속프로, <더 논픽션>을 통해서다. 한국과 마찬가지로 일본의 현행법은 이중국적을 인정하지 않는다. 서로 다른 국적의 배우자가 가정을 이룰 경우, 자녀는 출생과 더불어 양친의 국적을 모두 취득할 수 있으나, 만 22세가 될 때까지 어느 한쪽을 선택해야만 한다. 2013년 6월 방송된 “하나에, 흔들리다. 어느 가족의 길”편에서 한영혜는 선택의 기로에 선다. 나고 자란 곳에서 평생 이방인으로 살아야 할 상황을 걱정하는 어머니와 그 자신 재일한국인이기에 도리어 딸에게 어떤 강요도 하지 못하는 아버지. 서울의 친척들을 만나고, 같이 런던올림픽 한일전 응원도 해보지만 한글조차 배우기 힘든 환경에서 배우생활까지 하며 자란 한영혜가 역경(逆境)을 선택하기란 쉽지 않다. 그렇게 ‘현실적으로 어쩔 수 없을 것’이라는 분위기로 흘러가던 다큐멘터리.

열 살 때 베니스국제영화제 초청작 ‘피스톨 오페라’(스즈키 세이준 감독)로 데뷔한 한영혜는 2년 뒤 ‘아무도 모른다’(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에 캐스팅 된다. 이 작품은 칸영화제 황금종려상에 노미네이트되었고, 공연자인 야기라 유야는 영화제 사상 최연소 남우주연상을 받았다. 사진은 ‘아무도 모른다’에서.
열 살 때 베니스국제영화제 초청작 ‘피스톨 오페라’(스즈키 세이준 감독)로 데뷔한 한영혜는 2년 뒤 ‘아무도 모른다’(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에 캐스팅 된다. 이 작품은 칸영화제 황금종려상에 노미네이트되었고, 공연자인 야기라 유야는 영화제 사상 최연소 남우주연상을 받았다. 사진은 ‘아무도 모른다’에서.

하지만 이야기는 끝내 반전으로 마무리 된다. 그가 ‘대한민국국적 보유자 한영혜’의 삶을 살겠다는 결정을 내렸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재일한국인이라는) 디메리트(demerit)를 오히려 (삶의) 양식으로 삼아왔듯이,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는 말과 함께. 실로 ‘치열한 모순’의 절정이었다.

그리고 그녀는 보란 듯이 전력질주를 시작한다.

<아시아의 순진>(카타시마 익키 감독, 로테르담국제영화제레인댄스영화제 초청작)에서 살해당한 쌍둥이 언니의 복수를 위해 테러를 계획하는 재일한국인 소녀를 연기, 유럽 관객의 가슴을 흔들었고, <파란만장 청춘! 짐승처럼 가라!>(우치다 에이지 감독, 판타지아영화제시체스영화제우디네 극동영화제 초청)로 장르영화에서의 재능을 재차 각인시켰다. <서북서>(나카무라 타쿠로 감독, 뮌헨국제영화제, 부산국제영화제 초청작)와 <오컬트 볼셰비즘>(다카하시 히로시 감독,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초청작)로 한국의 국제영화제에까지 진출했다. 두 번째 부산국제영화제 초청작 <국화와 단두대>(제제 타카히사 감독)로는 33년의 역사와 권위를 자랑하는 다카사키영화제의 연기상(최우수조연여우상)까지 거머쥐었다.

연기상 수상 3개월 뒤, <이누가미의 결혼>(카타시마 익키 감독)으로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를 찾은 한영혜를 다시 만났다.

한영혜는 연기 외에 그 어떤 이슈로도 대중의 관심을 끌어보려 한 적이 없어 보인다. 폭풍 같은 연기 활동과 대조적인 일상. 가정에서는 일찍부터 사회생활을 시작한, 책임감 강한 큰딸이었고 대학에서는 국제관계학부의 평범한 학생이었다. 사진촬영: 하세가와 료
한영혜는 연기 외에 그 어떤 이슈로도 대중의 관심을 끌어보려 한 적이 없어 보인다. 폭풍 같은 연기 활동과 대조적인 일상. 가정에서는 일찍부터 사회생활을 시작한, 책임감 강한 큰딸이었고 대학에서는 국제관계학부의 평범한 학생이었다. 사진촬영: 하세가와 료

홍상현

영화와 관한 건 아니지만 독자들이 가장 많이 궁금해 하셨던 질문으로 시작해 보자. 한국어 발음 공부는 열심히 하고 계신지?

한영혜

물론. 최근에는 영어공부까지 하다 보니 일본어를 점점 까먹는 느낌이다. (웃음)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에 온 김에 서울 할머니 댁에 들렀다. 대화를 나누는데 전보다 편안해진 느낌이 들더라.

 

홍상현

‘서울 토박이’이신 할머님의 언어적 배경과도 관련이 있겠지.

한영혜

읽고 쓰기 때문에 한국어를 공부하지만 아무래도 독학이라 한계가 있는데, 신기한 건 할머니나 아버지의 말은 어떤 경우든 완벽하게 이해가 된다는 사실이다. 물론 가족이라는 ‘특수 조건’이 결정적 역할을 하겠지. (웃음) 다만, 뉴스의 시사용어나 사투리에는 좀 더 시간이 필요할 것 같다. 또, 한국문화가 워낙 예절을 중시하지 않나. 배울수록 더 조심해야겠다는 생각도 들고.

이 모든 일들에 전제되는 원칙은‘좀 더 자신 있게 자연스러운 한국어를 구사할 수 있도록 하자’는 거다.

 

홍상현

영어실력도 나날이 늘고 있으니 이제 유럽이나 할리우드에서의 활동을 기대해도 되겠다. (웃음)

한영혜

안 그래도 그런 기회가 있으면 좋겠다 싶어서 카타시마 감독에게 “혹시 영어권에서 들어오는 캐스팅 없어요?”라고 물었더니, “없는데?”라면서 한 칼에 자르시더라. (웃음)

어디서든 주어진 일을 충실히 하자는 생각을 하면서 기다려야지.

로테르담국제영화제와 레인댄스영화제 등에 초청된 ‘아시아의 순진’(카타시마 익키 감독)에서의 한영혜. 그는 살해당한 쌍둥이 언니의 복수를 위해 테러를 계획하는 재일한국인 소녀를 연기해 유럽 관객의 가슴을 흔들었다. 사진제공: DOGSUGAR INC.
로테르담국제영화제와 레인댄스영화제 등에 초청된 ‘아시아의 순진’(카타시마 익키 감독)에서의 한영혜. 그는 살해당한 쌍둥이 언니의 복수를 위해 테러를 계획하는 재일한국인 소녀를 연기해 유럽 관객의 가슴을 흔들었다. 사진제공: DOGSUGAR INC.

홍상현

<이누가미의 결혼>이 초청되면서 2년 연속으로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에 참가하게 되었다. 게다가 2019년은 한국영화 100주년이기도 하고.

한영혜

기념할만한 때에 올 수 있어 정말 기쁘다. 근래 한국에 올 여유가 없었다. 가족ㆍ친지가 아닌 다른 이들과 소통할 수 있다는 것도 좋다. 같은 한국인이라도 여기서 지내시는 분들은 열정적이고 의사표현이 분명해 만나면 즐겁다.

 

홍상현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는 장르영화제인데, 평소 장르영화를 좋아하시는가?

한영혜

재작년 출연한 <파란만장 청춘! 짐승처럼 가라!>가 캐나다 몬트리올의 판타지아영화제에 초청되는 등 필모그래피에 장르영화가 적지 않다. 넷플릭스 드라마 <기묘한 이야기>도 즐겨보고.

한국영화 중에도 뛰어난 장르영화가 많지만 개인적으로는 특히 휴먼드라마가 강세라는 인상이 강하다. 다들 감성이 풍부한데다 표현력도 뛰어나시지 않나.

 

홍상현

부천에 오시기 바로 전에 일본영화를 대상으로 하는 영화제로는 정상의 권위를 자랑하는 다카사키영화제에서 연기상을 받았다.

한영혜

출연한 작품 중에 각종 영화제 수상작이 좀 있지만 딱히 신경을 써 본 적이 없고, 저 혼자만의 힘으로 그런 결과를 거둘 수 있을 거란 생각도 하지 않는다. 다만, 연기를 시작할 때 제 안에서 어떤 ‘스위치’가 들어오는 순간이 있다. 저도 모르게.

한영혜의 소속사인 도그슈거는 매니지먼트사가 아니라 카타시마 익키 감독의 제작사다. 카타시마 감독은 일상생활을 물론 한영혜의 연기에 대해서도 일체 말을 보태지 않는다. “본인이 좋아하는 영화에 오롯이 힘을 쏟을 수 있는 연기자로 부단히 성장해 갈 수 있도록 돕는 것”이 당신의 일이라고 생각해서다. ‘예를 들어, 레몬’(카타시마 익키 감독)의 한 장면. 사진제공: DOGSUGAR INC.
한영혜의 소속사인 도그슈거는 매니지먼트사가 아니라 카타시마 익키 감독의 제작사다. 카타시마 감독은 일상생활을 물론 한영혜의 연기에 대해서도 일체 말을 보태지 않는다. “본인이 좋아하는 영화에 오롯이 힘을 쏟을 수 있는 연기자로 부단히 성장해 갈 수 있도록 돕는 것”이 당신의 일이라고 생각해서다. ‘예를 들어, 레몬’(카타시마 익키 감독)에서. 사진제공: DOGSUGAR INC.

홍상현

뒤에서 연기론에 대한 부분을 좀 더 자세하게 이야기해보도록 하자. 한국 연기자 중에서는 배두나 배우를 특히 좋아하신다고.

한영혜

우선 아주 심플하게, 그의 얼굴이 좋다.

보통 배두나 배우의 출연작 중에서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공기인형>에 대한 언급을 많이 하지만, 저는 <린다 린다 린다>를 가장 먼저 꼽는다. 영화를 보았을 당시 중학생이었는데 내면의 흔들림을 겪던 시절이었다. 외국어 대사를 소화하면서 밴드의 멤버로 출연하는 모습에 많은 영향을 받았다.

 

홍상현

특히 인상적이었던 부분이 있나.

한영혜

노래방 장면이었는데 일본어로 노래하다 중반부터 모국어로 노래를 부르기 시작한다. 순간 ‘아, 내가 이 배우를 좋아하는구나’하는 생각이 들더라. 연기가 아니라 평소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홍상현

연기상을 받은 다카사키영화제 폐막작이 공교롭게도 이번에 <투어리즘>으로 같이 부천에 초청된 미야자키 다이스케 감독의 <야마토(캘리포니아)>(몬트리올 누보시네마영화제 초청작)였다.

한영혜

주인공이 래퍼 아닌가. 그런데 저는 약간 고지식한 스타일인 데다, 결정적으로 랩을 못 한다. 그래서 내키지 않았는데 감독이 워낙 적극적이었다. “랩도 굳이 잘 할 필요가 없다”고 하더라.

‘야마토(캘리포니아)’에서 엔도 니이나와 함께. 두 사람은 한국인 아버지와 일본인 어머니, 그리고 잉글랜드ㆍ아일랜드인 아버지와 역시 일본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는 개인적 배경 때문에 쉽게 가까워질 수 있었다고 한다. 사진제공: DEEP END PICTURES INC.
‘야마토(캘리포니아)’에서 엔도 니이나와 함께. 두 사람은 한국인 아버지와 일본인 어머니, 그리고 잉글랜드ㆍ아일랜드인 아버지와 역시 일본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는 개인적 배경 때문에 쉽게 가까워질 수 있었다고 한다. 사진제공: DEEP END PICTURES INC.

홍상현

필자도 만나본 감독이지만 단지 캐스팅 욕심에 그런 말을 할 인물은 아닌데.

한영혜

그렇다. 단순히 ‘하지 않아도 좋다’는 게 아니라 ‘리듬감에 치중하기보다 한 마디 한 마디를 미국의 영가처럼 스피리추얼(spiritual)하게 표현해 달라’는 요구였다. 마침 이래저래 예민해져있던 시기였는데 시나리오를 읽다 보니 제 그런 상황과 맞물리는 지점이 많았다. 그의 말처럼 랩 말고도 보여줄 수 있을 만한 게 많이 있겠구나 싶었지.

 

홍상현

개인으로서의 일상과 작품의 내용이 시기적으로 맞물려 있었다는 이야기인가. 무척 흥미롭다. <야마토(캘리포니아)>는 특히 북미권에서의 평가가 좋았다.

한영혜

마침 연기가 아닌 다른 작업을 하다 업계의 부조리를 실감한 참이었다. 영화는 아니었는데 집단 따돌림이나 수직적 상하관계, 불필요한 자존심 등을 목도했다. ‘일’이 아닌 부차적인 것들이 결과에까지 영향을 주는 상황.

한동안 스트레서(stressor)가 사라지지 않아 심리적 어려움을 겪었는데, 이 경험을 감독에게 토로하니“그런 게 바로 랩이다, 하고 싶은 이야기를 다 해 보라”고 했다. <야마토(캘리포니아)>에서 보여드린 모습에는 그런 배경이 있다.

 

홍상현

<투어리즘>과 함께 끝까지 초청에 고심했던 작품인데, 본인에게도 남다른 의미가 있었구나.

한영혜

그렇다. 제 안의 어떤 응어리가 또 다른 동력으로 승화되었던 경험이라 할 수 있다.

‘이누가미의 결혼’(카타시마 익키 감독)으로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를 찾기 3개월 전, 한영혜는 두 번째 부산국제영화제 초청작 ‘국화와 단두대’(제제 타카히사 감독)로 33년의 역사와 권위를 자랑하는 다카사키영화제의 연기상을 거머쥐었다. 사진은 ‘국화와 단두대’의 한 장면. 출전: ‘국화와 단두대’공식트위터
‘이누가미의 결혼’(카타시마 익키 감독)으로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를 찾기 3개월 전, 한영혜는 두 번째 부산국제영화제 초청작 ‘국화와 단두대’(제제 타카히사 감독)로 33년의 역사와 권위를 자랑하는 다카사키영화제의 연기상을 거머쥐었다. 사진은 ‘국화와 단두대’에서. 출전: ‘국화와 단두대’공식트위터

홍상현

<야마토(캘리포니아)>에서 공연(共演)했던 엔도 니이나와는 개인적으로도 좋은 관계라고 들었다. 동료의 입장에서 보는 그는 어떤 연기자인가.

한영혜

우선 한국인 아버지, 일본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저와 비슷한 가정환경(잉글랜드ㆍ아일랜드인 혼혈인 아버지와 일본인 어머니)에서 자란 친구라 공감대가 있었다. 연기하는 모습이 일상과 거의 다르지 않은 것도 인상적이었고. 모델 일을 하는 분들 가운데 먼저 이미지 콘셉트를 정하고 스스로를 거기 맞추어 가는 스타일이 종종 있는데, 그녀의 경우 완전한 자연체라고 할까. 모델이지만 어떤 스테레오타이프도 없다는 게 매력이었다.

 

홍상현

<이누가미의 결혼>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자. 민담이 모티브지만 실은 판타지의 외피를 쓴 사회파 영화다. 처음 시나리오를 읽었을 때 어땠나?

한영혜

‘꽤 긴데?’(곁에 있던 카타시마 익키 감독까지 일동 웃음)

평소 같으면 먼저 시나리오를 전달받고 참여할지 여부를 결정하는데 당시는 스케줄이 확정되지 않은 상황이었다. 바로 다음날부터 도쿄국제영화제에도 참석해야 했고. 그래서 따로 생각해 볼 겨를이 없었는데 정신을 차려보니 현장에서 촬영을 하고 있더라. (웃음)

 

홍상현

그도 그리 나쁘지는 않았을 것 같다. 카타시마 감독은 20년 이상 당신과 함께해 왔고, 애초부터 당신을 염두에 두고 캐릭터를 설정했다고 하니까. (웃음) 주연인 아리모리 나리미와는 <예를 들어, 레몬>에서 모녀로 출연했는데. <이누가미의 결혼>에서도 케미스트리가 훌륭했다.

한영혜

<예를 들어, 레몬>에서는 둘 다 주연이라도 겹치는 신이 거의 없었다. 그러니 진정한 의미에서의 공연은 이번이 처음이었던 셈인데, 역시 긴장되더라. 다만, 제 출연 부분이 작품의 종반부였던지라 아리모리 씨와 마주쳤을 땐 그가 워낙 절박한 상황이었다. 현장에서도 거의 대화를 하지 못할 만큼. 저와의 케미스트리가 아니라 히로인을 연기하는 자체로도 고생을 많이 하셨다.

‘이누가미의 결혼’에서 한영혜는 남자 주인공의 정혼자인 공주로 분했다. 출연 분량은 많지 않지만 그의 삶에서 가장 행복한 시간이 이어지는 시퀀스에 ‘균열’을 내는 캐릭터로 특유의 존재감을 유감없이 발휘한다. 사진제공: DOGSUGAR INC.
‘이누가미의 결혼’에서 한영혜는 남자 주인공의 정혼자인 공주로 분했다. 출연 분량은 많지 않지만 그의 삶에서 가장 행복한 시간이 이어지는 시퀀스에 ‘균열’을 내는 캐릭터로 특유의 존재감을 유감없이 발휘한다. 사진제공: DOGSUGAR INC.

홍상현

카타시마 감독과 함께해 온 세월에 대한 화제가 나와서 말인데, 세상에 태어나 지금까지 정확하게 3분의 2를 ‘배우’로 살았다. 문득 궁금해진다. 그런 당신에게 ‘영화’란 무엇인가.

한영혜

아주 광범위한 질문인데. (웃음) 요전엔 ‘미래’라고 답했는데, 생각해 보니 ‘현실도피’라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누구든 늘 좋은 일만 이어지기를 바라지만 막상 삶이란 게 그렇지 않거든. 때로는‘영화처럼 대략 2시간 분량으로 마무리되면 좋을 텐데’하는 시기도 찾아오기 마련이고.

 

홍상현

불가능성(impossibility)에 대한 이야기인가? 여느 때의 당신과 좀 다른 느낌이다. 그간 함께해 온 어떤 감독들보다 강하게 영화를 통해 세상을 변화시키기를 갈망하지 않나.

한영혜

그리고 보니 우리, 개막식 뒤풀이에서도 이런 이야기를 했었네? (웃음)

우리가 발 딛고 선 세계는 현상적으로 그 모습이 견고해 보이기 쉽다. 당연히 언제까지라도 변화하지 않을 것 같다는 인상을 받을 수도 있지.

하지만 저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말의 가능성, 즉, ‘희망’을 버리지 않는 사람이다. 무슨 거창한 이야기를 하자는 건 아니고. 제 SNS에도 써놓았듯이, 오늘 삶을 마감하려 했던 누군가가 어떤 영화를 보고, ‘하루만 더 살아볼까’생각을 하게 된다면 그걸로 충분하지 않을까.

한 사람의 배우로서, 영화가 사람들에게 그런 역할을 해주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홍상현

영화를 무척 많이 보는 배우로도 유명한데 평소 접하는 작품들도 그런 기준에서 선택할 것 같다.

한영혜

‘문제’를 안고 있는 나라의 영화에 흥미를 느낀다. 인류사를 통해서 예술이 사회적인 부담감, 혹은 책임감을 짊어짐으로써 발전해 온 사례를, 우리는 숱하게 보아왔다.

영화는 ‘피스풀(peaceful)’과 배치되는 세계에 서있는 게 더 재미있다. 물론 ‘피스풀과 배치되는 세계’가 전화(the miseries of war)에 휩싸인 환경을 의미하는 건 아니고, 이를 바꾸고 싶다는 의지에 따라 또 하나의 새로운 작품이 탄생할 수 있을 테니까.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이누가미의 결혼’ 게스트뷰(GV)에서. 한영혜의 어조는 살가우면서도 또랑또랑하다. 특히 연기에 대한 견해를 피력할 때는, 결코 잰체하지 않으나 세상에 태어나 3분의 2를 배우로서 살아온 사람 특유의 내공이 자연스럽게 배어나온다. 사진촬영: 하세가와 료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이누가미의 결혼’ 게스트뷰(GV)에서. 한영혜의 어조는 살가우면서도 또랑또랑하다. 특히 연기에 대한 견해를 피력할 때는, 결코 잰체하지 않으나 세상에 태어나 3분의 2를 배우로서 살아온 사람 특유의 내공이 자연스럽게 배어나온다. 사진촬영: 하세가와 료

“지금까지의 제 필모그래피에서 공통되는 스타일, 혹은 연기적 스탠스는, 시나리오보다 저 자신의 감정이나 본능에 따르는 거였습니다.

하지만 요즘 드라마에 출연하면서 먼저 하나의 인물상을 창조하고, 이를 현실화시키는 패턴을 시도하고 있어요. 영화와 다른 접근법인 거죠. 그 와중에 제 영역 또한 넓어지는 느낌입니다. 다만,‘면역체계’또한 필요하기에 이 부분을 위한 노력도 병행하고 있지요. 그 과정에서 또 다른 과제도 주어졌고요. 서사의 흐름에 따를 것인지, 혹은 감정의 흐름에 따를 것인지에 대한 물음인데요. 저는 둘 다를 해내고 싶습니다. 제 컬러를 바꿔볼 수도 있을 거라고 생각하거든요. 앞으로도 많은 작품을 해나가야 할 테니까. 그저 ‘한영혜’인 채로 머물러 있지 않겠습니다.”

인터뷰를 마치고 얼마나 되었을까. 그녀의 차기작 <원 나잇>이 도쿄국제영화제에 초청되었다는 낭보가 들려왔다. 택시운전사를 연기하기 위해 실제로 기사 아르바이트를 했다는 후일담과 함께.

예의 살가우면서도 또랑또랑한 어조가 귓가를 맴도는 느낌. 문득 입가에 미소가 번진다. 왠지 한 30년쯤 지난 후에도 그녀의 활약상에 대한 기사를 쓰고 있을 것만 같은 예감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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