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난소득 '부자 혜택 프레임'은 틀렸다

  • 기자명 김만권
  • 기사승인 2020.03.18 10:12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재난기본소득을 두고 여러 가지 찬반의사가 나오고 있다. 개인적으로 이 글을 쓰는 이는, 기본소득을 지지하지만 기본소득주의자는 아니다. 하지만 한 때 기본소득을 공부했던 경험이 있는 사람으로서, 지금의 재난(기본)소득 논쟁에서 발견되고 있는 오해 몇 가지는 바로 잡고 싶다. 이 오해가 바로 잡혀야 논의의 균형이 맞춰질 것이란 생각이다. 이런 균형을 맞추기 위해선 기본소득에 대한 오해를 바로 잡는 것에서 출발해야 한다. 지금 벌어지고 있는 재난기본소득에 대한 오해가 기본소득에 대한 오해와 겹치는 부분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런 오해들이 어떻게 재난기본소득에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 이야기해 보려 한다.

 

의문 ① 기본소득은 부자들에게도 돈을 줘서 필요를 맞추지 못한다?

많은 분들이 기본소득이 부자들에게도 돈을 주는, 그래서 정작 필요한 사람들에게 돈을 주지 못하는 일종의 자원낭비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여기에 오해가 두 가지 있다.

첫 번째 오해는 기본소득이 부자들에게도 돈을 줘서 정작 필요한 사람들에게 돈을 주지 못한다는 주장이다. 그런데 기본소득을 모든 사람들에게 주자는 건, 심지어 부자들에게도 주자는 건 그 방법만이 유일하게 필요가 닿아야 할 모든 사람들에게 혜택이 가는 방법이라 보기 때문이다. 선별적 방식은 어떤 방식으로든 그 보호망에 구멍이 만들어진다. 그리고 대개의 경우 그 구멍으로 빠져나가 보호망 밖에 놓이게 되는 사람들은 극단적 빈곤층이나 교육을 받지 못한 사회적 계층이다. 선별적 복지가 자발적 신청에 기초해 있다면 더더욱 이런 일이 쉽사리 일어난다. 피케티의 스승으로도 유명한 불평등 연구자 앤서니 앳킨슨은 불평등(Inequality)(2015)에서 소득과 연계된 혜택을 청구하는 이들은 프랑스에선 65-67%, 독일에서는 33%, 아일랜드에선 30%로 떨어진다.”(210-211)고 밝히고 있다. 그리고 이 안을 잘 들여다보면, 수혜율은 최저소득층보다 차상위소득층이 높다. 정작 더 필요한 사람들에게 혜택이 돌아가지 않는 것이다.

필요를 선별해 가르는 정책은 필연적으로 이런 불완전 혜택 구조에 이르게 되어 있다. 그 시작점이 자원에 한계가 있어 아껴야만 한다는 데서 출발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기초수급자들 중에 잠재적 부양자가 있다는 이유로 혜택을 받지 못하는 사람들이 이런 선별적 구조에서 배제되는 대표적인 사람들이다. 기본소득은 이 점에서 다르다. 기본소득은 우선 모든 이들에게 혜택이 가야한다는 것에서 출발하며, 이로 인해 어느 정도 최소한의 자원을 낭비할 수밖에 없다는 전제를 받아들인다. 그래서 필요가 있는 모든 사람에게 이르는 유일한 방법으로 구성원들 모두에게 주자고 주장한다. 부자들을 포함해 모든 사람들에게 조건 없이, 예외 없이 다 줄 때만 정작 그 혜택이 필요한 모든 사람들에게 자원이 닿기 때문이다. 일면 자원 낭비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이 방법만이 소외된 사람들이 소외되지 않는 유일한 방법이라 본다.

 

여기서 두 번째 논점이 나온다. 기본소득은 최소한의 자원이 비효율적으로 분배될 수도 있다는 전제를 암묵적으로 받아들인다는 점이다. 물론 그 비효율을 얼마나, 어떻게 줄일 수 있느냐는 중요한 논쟁거리다. 그렇지 않아도 많은 예산이 드는 일이라 지속적으로 거대한 재원을 효과적으로 확보하는 일은 자원을 얼마나 아끼는지와 분리될 수 없는 사안이다. 하지만 자원을 어떻게 아낄 것인가는 기본소득의 두 번째 관심사다. 이들의 우선적인 관심사는 필요한 모든 사람들에게 돌아가는 혜택이다. 기본소득주의자들은 주장한다. ‘이렇게 풍요가 넘쳐나는 사회에서 자원이 모자란다는 말은 거짓말이다! 인류는 우리가 최소한 것을 나눌 만큼 충분히 생산하고 있다. 우리에게 모자란 것은 나누고자 하는 의지일 뿐이다.’ 이건 분명 시선의 차이다. 자원의 한계를 출발점으로 보는 시선과 필요가 닿아야 할 모든 사람들을 출발점으로 보는 시선이다.

그런데 때로 이들 간에 역설적인 관계 전환이 일어난다. 자원에서 출발하는 사람들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더 주자는 주장을 펼칠 때, 표면적으론 그 출발점이 뒤집혀 버리는 효과가 나기 때문이다. 그 의도와 상관없이 필요한 모든 사람들에게 집중하자는 주장 앞에서 필요가 닿아야할 사람들에게 빠짐없이 전달하자는 모토를 지지하는 기본소득주의자들이 보호가 필요한 대상을 무시하는 사람들로 전락하고 만다. ‘필요한 사람들에게 더 집중하자는 레토릭의 탁월한 효과다.

필요한 사람들에게 집중하자는 주장만큼 강력한 레토릭이 있을까? 듣기에 따라 이 말은 정당성과 효율성 모두를 담고 있다. 그런데 다시 강조하지만, 선별적 분배는 필요한 사람들 사이에서도 반드시 구멍을 만든다. 그게 우리가 지난 신자유주의 시대에 서구복지국가의 쇠퇴과정에서 배운 명확한 교훈이다. 무엇보다 필요한데도 혜택을 받지 못하는 이들의 상처는 두 배로 커진다. 배제된 가운데 또 한 번의 배제라는 이중의 배제를, 심지어 자신을 보호해줄 마지막 보루인 국가를 통해 경험하기 때문이다. 물론 이들 가운데는, 이런 선별적 혜택을 주는 제도가 존재하는지 조차 모른 채 인생을 보내는 이들도 있다.

리얼미터가 YTN 의뢰로 3월 13일 발표한 여론조사 결과에 따르면 재난기본소득제 도입 찬성이 48.6%로 반대(34.3%)를 앞섰다.
리얼미터가 YTN 의뢰로 3월 13일 발표한 여론조사 결과에 따르면 재난기본소득제 도입 찬성이 48.6%로 반대(34.3%)를 앞섰다.

 

의문 ② 재난소득은 기본소득이 아니다? 

코로나라는 전염병이 우리를 덮치고 있는 지금, 재난기본소득을 주자는 제안이 나오고 있다. 더하여 재난소득을 어떻게 지급할 것인가를 두고 다양한 방안도 제시되고 있다. 물론 찬반 논의는 당연히 있다. 이 찬반논의에는 재난소득을 왜 기본소득이라 불러야 하냐는 비판도 있다. 이런 주장은 일면 타당하다. 기본소득은 일상의 시기에 일정한 소비력을 주는 제도인 반면, 재난 소득은 위기의 시대에 일시적으로 소비력을 주는 제도이기 때문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해 기본소득은 ①자산조사나 근로조건부과 없이, ②모든 구성원들이, ③개인 단위로, ④정기적으로, ⑤정치공동체(주로 국가)로부터 ⑥현금으로 지급받는 소득이다. 그런데 이 항목과 비교하면서 보면 이번 재난소득제안은 기본소득과 몇몇 측면에서 닮아 있다. 이번 재난소득의 제안 형태가 ①자산조사나 근로조건부과 없이, ②모든 구성원들이, ⑤정치공동체(주로 국가)로부터 ⑥현금으로 지급받는 소득이기 때문이다. ③개인 단위로 주는 것이 확정된다면, ④정기적으로 준다는 항목 외엔 모두 겹치게 된다. 이런 점에서 이번에 제안된 재난소득은 기본소득과 많은 속성을 공유하고 있다. 이런 점을 고려해 본다면, 재난기본소득이란 표현이 그리 무리한 것도 아니다. 아니 일면 타당한 측면도 있다. 기본소득의 가장 중요한 측면, 정기적 지급 측면에서 명확하게 다르다고 주장하는 분도 있겠지만, ‘재난기본소득이란 이 용어, 바로 재난이란 말에 이 소득이 일시적이란 의미는 이미 담겨 있다. 굳이 아니라고 부정할 근거도 명확치는 않다.

하지만 이런 호칭이 무슨 상관이랴. 솔직히 나는 철학, 개념으로 밥 먹고 사는 사람이지만 이런 시기에 쓸데없는 논쟁으로 시간을 보내느니 재난소득이라 불러도 괜찮다고 말하고 싶다. 그런데 반대로 또 묻고 싶기도 하다. 이 시기에 이걸 기본소득이라 부른다고 이걸 가지고 또 싸워야 할 일인가? 명칭에 대한 논쟁은 시간이 지나고 우리가 시행했던 일을 복기하며 충분히 할 수 있지 않을까? 이런 이유로 재난기본소득 하시자는 분들에게 먼저 부탁드린다. 그냥 재난소득이라 부르도록 하자.

서울시는 재난 긴급생활비 및 재난기본소득에 대한 설문조사 결과 시민 71.4%가 찬성했다고 3월 16일 밝혔다.  이중 재난기본소득은 29.4%가, 재난긴급생활비는 61.5%가 찬성했다.
서울시는 재난 긴급생활비 및 재난기본소득에 대한 설문조사 결과 시민 71.4%가 찬성했다고 3월 16일 밝혔다. 이중 재난기본소득은 29.4%가, 재난긴급생활비는 61.5%가 찬성했다.

 

의문 ③ 재난소득을 모든 국민에게 현금으로 주는 방식은 비효율적이다?

이번 재난(기본)소득의 요점은 필요한 모든 이에게, 신속하게 혜택을 주자는 것이다.재난소득주의자들의 주장은, 모든 국민들에게 현금으로 지급할 때에만, 필요한 모든 이들이 빠짐없이 신속하게 혜택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이런 방식의 분배가 비효율적이라고 비판한다. 물론 거기에는 왜 부자들에게도 돈을 주냐는, 그것이 옳지 못할 뿐만 아니라 비효율적이라는, 기본소득에서 볼 수 있는 오해가 깔려 있다. 이들은 좀 더 필요한 사람들에게 집중하는 것이 자원도 아끼고, 효율적인 분배라고 주장한다. 이와 함께 선별적으로 필요한 모든 이에게 신속하게 줄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런 표현을 허락한다면) 나는 이런 주장이 오만하다고 생각한다. 평소 때도 누가 필요한지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해 그 혜택을 다 전달하지 못하고 있는데 재난의 시기에 선별적 방식으로 누가 어떻게 무엇이 필요한지 정책을 만드는 사람들이 진정 알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선별적 지급방식으로 우리가 혜택을 줄 수 있는 대상은 우리가 기준을 설정했을 때 그 기준 안에 들어오는 이들뿐이다. 관련하여 수혜대상을 늘리기 위해 느슨한 선별로 신속하게 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다. 하지만 이런 주장은 그 자체로 모순이다. 느슨한 선별이란 말 자체에 이미 어떤 기준이든 논란이 될 수도 있다는 가능성이 내포되어 있으며, 속도의 압박은 부정확성으로 이어질 가능성을 높인다. 일상의 시기에도 명확히 구축되지 않는 선별기준을 위기상황에서 신속하게 만든다는 것이 얼마나 가능한 일일까. 무엇보다 인간이 어떤 기준을 만들든 그것이 선별적이라면 배제되는 자가 생겨나게 되어 있다. 선별적 정책에 따라오는 현상, ‘문턱효과가 선별적 정책의 배제성을 고스란히 드러낸다. 그것을 느슨하고 신속하게 하겠다면 더더욱 그럴 수밖에 없다.

재난소득은 호칭이 어떠하든 결국 1회성 자원분배이다. 정기적 자원 배분의 문제는 안정적 재원의 지속성에 있다. 하지만 1회성은 그렇지 않다. 오히려 1회성 자원분배에 선별을 위해 행정력과 재원을 쏟아 붓는 게 더 비효율적이지 않을까? 우리는 이미 아동수당 배제 10% 대상자를 가려내는데 1150억 원을 낭비한 경험이 있다. 더군다나 사람의 경제적 능력은 지속적으로 바뀌는지라, 이번에 선별을 위해 쏟아 부은 행정력과 재원은 시간이 지나면 결국 매몰비용으로 처리될 것이다.

위기의 상황에서 1회성 자원분배에 우리가 집중해야할 부분은 어디일까? 1회성 자원분배 논의가 마치 지속적 기본소득논의마냥 과장되고 있는 것은 아닐까? 1회성 안전망 보다는 촘촘히 안전망을 짜야한다는 주장은 상당부분 설득력 있다. 그런데 수 십 년을 노력해도 아직 제대로 구축되지 않은 촘촘한 안전망이 두어 달 안에 어떻게 만들어진단 말인가? 촘촘한 안전망이란 것 자체가 단기적 대안이 아니라 장기적 방안임을 뜻하는 것 아닐까? 우리는 지금의 재난을 극복하는 단기적 대책을 만들고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한편 재난기본소득과 관련하여, 부자들에게 지급된 소득을 나중에 어떻게 걷어 들인 것인가, 실제로 걷어 들일 수 있는가라는 기술적인 부분과 관련된 문제제기도 있다. 이 문제 역시 부자들에게 왜 소득을 국가가 지급해야 하냐는 문제와 연결되어 있다. 만약 우리가 정기적으로 지급되는 기본소득을 구축하려 한다면, 이 문제는 심각히 논의되어야 할 사안이다. 하지만 다시 강조하건데 우리가 다루고 있는 지금 이 문제는 위기를 다루는 1회성 소득이다. 위기를 맞고 있는 사람들 앞에서, 우리는 너무 엄밀한, 한편으론 너무 기술적인 차원에서 공정성 논쟁을 벌이고 있는 것은 아닐까? 소중한 국가의 자원을 그 따위로 다루자고 하냐고 비판한다면 진심을 다해 고개 숙여 사과드린다. 시간이 지난 뒤 연말정산 등의 기존절차를 활용해 이 소득이 필요가 없던 사람들로부터 재회수하기 위해 노력하겠다고 약속드릴 뿐, 그 밖에 달리 할 말은 없다.

재난의 시기, 국가의 역할을 다시 묻는다

모두가 난감해 하고 있는 재난의 시기 앞에 묻는다. 이 시기에 우리가 속한 국가로부터 우리가 바라는 것은 무엇일까? 우리 모두가 어느 정도 견고히 보호받고 있다는 사실에 대한 확인, 우리의 삶이 앞으로도 지속될 수 있다는 신호가 아닐까? 개인적으론 모든 국민들에게 무조건적으로 지급되는 재난소득이 이런 일을 할 수 있다고 본다.

재난 상황 앞에서 선별적으로 필요가 닿아야 할 모든 사람들에게 필요한 만큼의 혜택을 줄 수 있다는 주장과 모든 사람들에게 줘야 결국 필요한 모든 사람들에게 갈 것이라는 주장이 있다. 이 글을 쓰는 사람이 파악하는 논리로 좁혀 보자면, 선별정책주장은 위기 속에 도움이 필요한 모든 사람들을 가려낼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어느 정도 전제로 하고 있다. 그것이 아니라면, 위기의 상황에 배분할 수 있는 자원에는 한계가 있으며 어쩔 수 없이 소외되는 사람이 있을 수밖에 없다는 연결된 전제가 암묵적으로 깔려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후자는 급박한 위기 상황에서 누가 어떤 도움이 필요한지 가려내는 일을 사실상 국가가 수행할 수 없다고 본다. 그렇다면 여기 저기 보이지 않는 곳에서 도움이 즉각적으로 필요한 사람들을 위해 1회성에 한해 국가가 일부 자원이 낭비될 수도 있는 비효율을 각오하자는 것이다. 결국 선택은 여러분의 몫이다. 개인적으론 후자가 더 옳다고 본다.

덧붙이는 말. 그래도 선별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면, 재난소득이 필요 없는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관청에 재난소득을 수령하지 않겠다는 의사를 밝히도록 하는 일시적 제도를 만들자고 제안한다. 개인들의 자발적 통지를 통해 선별비용을 줄이고, 재난소득에 대한 예산을 줄일 수 있는 효과를 낼 수 있을 것이다. 더하여, 물질적으로 더 여유 있는 사람들이 그에 비례하여 사회적 재난에 물질적 기여를 할 수 있는 기회도 될 수 있을 것이다.

 

필자 김만권은 경희대 학술연구교수다. 참여사회연구소장을 맡고 있다. 풀브라이트 장학생으로 뉴욕 뉴스쿨 정치학과에서 정치이론 및 법철학을 전공했으며, '정치적 적들의 화해를 위한 헌법 짓기"를 주제로 박사논문을 썼다. 『열심히 일하지 않아도 괜찮아』, 『김만권의 정치에 반하다』,『호모 저스티스』,『정치가 떠난 자리』, 『참여의 희망』, 『자유주의에 관한 짧은 에세이들: 현대자유주의 정치철학 입문』, 『불평등의 패러독스』, 『세상을 보는 열일곱 개의 시선: 정치와 사회에 관한 철학 에세이』등을 썼으며 『인민』, 『민주주의는 거리에 있다』와 『만민법』(공역)을 우리말로 옮겼다.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관련기사
오늘의 이슈
모바일버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