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MLB에서 '위성구단'이 사라진 이유

  • 기자명 최민규
  • 기사승인 2020.03.31 08: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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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27일은 4.15 총선 후보 등록 마감일이었다.

이날 윤일규 의원은 더불어민주당을 탈당해 더불어시민당에 입당했다. 윤의원의 합류로 더불어시민당은 지역구 의원 5명을 채우면서 정당투표용지에서 정의당보다 앞선 순번을 차지하게 됐다. 김종철 정의당 선대위 대변인은 이에 대해 “이왕이면 열 명 정도 더 보내지 그랬습니까. 그러면 미래한국당보다 앞 순번을 받았을 텐데 말입니다”고 비난했다.

언론매체에선 더불어시민당을 더불어민주당의 ‘위성정당’으로 표현한다. 역시 위성정당인 미래한국당은 모정당 격인 미래통합당에서 의원 20명을 받아 국회교섭단체를 구성했다. 이른바 ‘의원 꿔주기’다. 의원 수가 많을수록 정당투표용지에서 앞 순번을 받고, 더 많은 선거보조금을 국고에서 지원받는다. 미래한국당은 30일 61억원의 선거보조금을 받았다. 

 

야구에 위성구단과 선수꿔주기는 없는 이유

반대의 경우도 있지만, 야구가 정치보다 나은 점은 여러 가지다. 지금 한국에선 하나가 더 추가됐다. 야구에는 ‘위성구단’이 없다. ‘선수 꿔주기’도 존재하지 않는다.

한국야구위원회(KBO) 규약 85조는 “구단은 다른 구단에 선수를 대여하거나 소환권을 유보하는 등 조건부로 선수계약을 양도할 수 없다”고 규정한다. 미국 메이저리그에서도 마찬가지다. 마이너리그 선수라면 커미셔너 승인을 받은 뒤 임대가 가능하다. 하지만 메이저리그 레벨에선 규약이 엄격하게 금지하는 행위다.

 

“No arrangement between Clubs for the loan or return of a player shall be binding between the parties to it or recognized by other Clubs.”

 

예외적인 사례가 발생한 적은 있다. 1964년 9월 1일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는 일본인 투수 무라카미 마사노리를 싱글A에서 메이저리그로 승격시켰다. 무라카미는 일본프로야구 난카이 호크스가 이해 샌프란시스코에 ‘야구 유학’을 보낸 선수였다. 마이너리거 신분일 땐 문제가 없었다. 처음에는 난카이도, 샌프란시스코도 무라카미가 메이저리그에서 뛴다는 가능성을 염두에 두지 않았다. 그런데 무라카미가 워낙 잘 던져 더블A와 트리플A를 건너뛰고 메이저리그에 데뷔하는 이변이 일어났다. 무라카미 이전에 메이저리그에 진출한 일본인 선수는 아무도 없었다.

아시아 최초의 메이저리거가 된 무라카미 마사노리.
아시아 최초의 메이저리거가 된 무라카미 마사노리.

 

당장 무라카미의 다음해 신분이 문제가 됐다. 메이저리그에는 임대 선수라는 개념이 없다. 샌프란시스코는 무라카미의 보류권이 자기에게 있다고 주장했다. 포드 프릭 메이저리그 커미셔너도 샌프란시스코의 입장을 지지했다. 이 소동은 우치무라 유시 NPB 커미셔너가 1965년까지 샌프란시스코에서 뛰고 1966년에 일본으로 복귀한다는 타협안을 내는 것으로 마무리됐다. 히지만 무라카미의 회상에 따르면 자신은 난카이와의 신의를 지켜 귀국했을 뿐, 마음만 먹으면 미국에서 계속 뛸 수 있었다고 한다.

한일 관계에서도 과거 선동열이 주니치 드래건스에 해태 타이거스의 ‘임대 선수’로 뛴 적이 있다. ‘임대’는 두 구단 간 거래였을 뿐, 두 나라 야구규약에는 없는 개념이었다. 그래서 선동열은 국내에선 해태의 임의탈퇴선수, 일본에선 주니치가 계약 기간 뒤 방출시켜야 하는 선수라는 복잡한 신분이었다.

야구에 선수 임대가 존재하지 않는 데는 이유가 있다. ‘위성구단’이 없는 이유와 이어지며, 19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이야기다.

미국 프로야구 내셔널리그는 1876년 창설됐다. 1880년대는 메이저리그 역사에서 최초의 황금기로 불린다. 경제성장과 도시인구 급증 등 요인으로 야구 인기와 관중도 크게 늘어났다. 그러자 ‘새로운 메이저리그’를 자처하는 라이벌리그가 여럿 생겨났다. 피튀기는 싸움 끝에 내셔널리그는 라이벌들을 물리치고 1982년부터 다시 독점 메이저리그의 지위를 획득한다.

경쟁자가 사라지자 내셔널리그 구단주들은 오만해졌다. 야구 역사가 존 보이트는 “이 시기 구단주들의 기행은 신문의 단골 기사”였다고 기술한다. 라이벌 리그의 소멸로 지위가 크게 추락한 선수들에게 최저 연봉제를 강요했고 엄격한 팀내 규율을 도입한 것도 이 시기의 일이다. 오만의 극치는 1898년 시즌 뒤 ‘신디케이트 베이스볼’의 탄생이었다. 신디케이트란 한 명의 구단주가 두 개 이상 구단의 회장을 겸직할 수 있게끔 하는 제도다.

 

19세기 메이저리그에 등장한 '위성구단'의 결과는?

8개 구단으로 출범했던 내셔널리그는 1892년 12개 구단으로 늘어난다. 라이벌리그였던 아메리칸어소시에이션에서 네 개 구단이 합류했다. 갑작스런 리그 확대로 구단 간 수입 격차가 늘어났다. 그러자 기존 구단 주주가 다른 구단에도 투자를 하는 현상이 나타났다. 1890년대 말이면 거의 모든 구단 이사회에 타 구단 주주가 이사로 참여했다. 새로운 신디케이트 제도는 투자, 혹은 재정 지원 수준을 넘어 타 구단에 대한 지배권까지 가능케 했다. 세인트루이스 구단주 프랭크 로비슨은 클리블랜드의 구단주를 겸했다. 클리블랜드는 말하자면 ‘위성구단’이 됐다. 브루클린과 볼티모어도 신디케이트로 운영됐다.

신디케이트와 위성구단이 갖고 있는 문제는 이듬해 곧바로 나타났다. 클리블랜드는 1898년 85승 65패로 리그 4위에 오른 강팀이었다. 하지만 신디케이트 첫 시즌엔 최하위로 떨어졌다. 그냥 꼴찌가 아니었다. 이 해 클리블랜드는 20승 134패로 메이저리그 역사상 최저 승률 기록(0.130)을 세웠다. 로비슨이 클리블랜드의 우수 선수들을 죄다 세인트루이스로 몰아줬기 때문이다. 그 덕에 앞 시즌에 39승 111패로 꼴찌였던 세인트루이스는 84승으로 4위에 올랐다. 1898년에 10위던 브루클린은 101승으로 일약 우승팀이 됐다. 28승으로 다승왕에 오른 제이 휴이와 19승의 독 맥제임스가 투수진의 핵심이었다. 두 투수 모두 전해 2위였던 위성구단 볼티모어에서 이적했다.

1898년 클리브랜드 스파이더스. 출처: www.wikiwand.com/en/Cleveland_Spiders
1898년 클리브랜드 스파이더스. 출처: www.wikiwand.com/en/Cleveland_Spiders

 

1899년 리그 전체 관중이 전해보다 소폭 늘었다는 점은 흥미롭다. 하지만 전해부터 시작된 급격한 관중 하락을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더구나 위성구단으로 전락한 팀 팬들이 경기장을 찾을 이유는 만무했다. 신디케이트도 꼼수를 썼다. 클리블랜드의 경우 시즌 대부분의 경기가 원정으로 열렸다. 홈 27경기에서 관중은 6008명에 불과했다. 이런 시스템이 오래 유지되는 건 불가능하다. 그래서 내셔널리그는 1900년에 네 개 구단을 퇴출시키고 8개 구단 체제로 복귀한다.

하지만 힘센 구단주들의 욕망은 줄어들지 않았다. 내셔널리그는 1901년 표면적으로나마 유지되던 각 구단의 독립 방침을 포기한다. ‘내셔널베이스볼트러스트’라는 일종의 지주 회사를 설린한 뒤 8개 구단을 모두 그 산하에 몰아넣기로 했다. 뉴욕, 신시내티, 세인트루이스, 보스턴 등 4개 구단이 지분 66% 나머지 4개 구단이 34%를 갖는 불평등 구조였다. 위성구단 차원을 넘은 ‘신디케이트의 전면화’였다.

내셔널리그의 폭주에는 결국 제동이 걸렸다. 구단주들이 자정 노력을 기울였다거나 등의 이유는 아니었다. 외부로부터 위기가 찾아왔기 때문이다. 1901년 새로운 라이벌리그인 아메리칸리그가 등장했다. 앞 라이벌 리그들과 마찬가지로 아메리칸리그는 내셔널리그에서 선수들을 빼오며 ‘전쟁’을 걸었다. 1901년 아메리칸리그에서 뛴 선수 182명 중 111명은 내셔널리그 출신이었다. 과거와의 차이는, 신생리그가 내셔널리그보다 더 성공적이었다는 점이었다. 출범 이듬해인 1902년 아메리칸리그 관중은 전년 대비 52만 명 늘었고, 내셔널리그는 반대로 24만 명 줄었다.

흥행 부진에 아메리칸리그라는 강적까지 상대해야 하는 처지에 빠진 내셔널리그는 야구팬들의 지지 회복이 필요했다. 그래서 결국 신디케이트 제도를 포기했다. 이후 메이저리그에는 타구단의 주식 취득을 금지하는 규정이 생겼다. 이에 영향을 받은 KBO 규약도 154조에서 “구단 및 당해 구단 임직원, 감독, 코치, 선수는 명의를 불문하고 자기의 계산으로 소속구단 외 다른 구단의 주식을 소유할 수 없다”고 규정하고 있다.

 

"진정성 있게 받아들여지려면 진짜 경쟁을 해야 한다"

스포츠로 정치를 비유히는 데는 늘 견강부회의 위험이 따른다. 국회의원 선거는 흔히 스포츠 경기에 비유되지만 두 영역 사이에는 커다란 차이가 있다. 다만 총선은 국회의원 정원. 프로야구는 시즌 전체 승수라는 제약이 있는 제로섬 게임이라는 점은 같다. 남의 실패가 나의 성공이 되는 제로섬 게임에서는 위성정당이나 위성구단을 동원해서라도 승리를 추구하는 게 정답처럼 보인다.

하지만 120년 전 미국 프로야구에서 위성구단은 오답이었다. 어떤 시즌일지라도 경기 수가 같은 이상 구단들의 승리를 모두 더한 값은 동일하다. 하지만 팬들의 관심과 사랑은 그렇지 않다. 그들이 야구가 만들어내는 스토리에 공감할수록 야구의 가치는 더 높아진다. 구단주의 이해 관계에 따라 유니폼을 바꾸는 스타와 급조되는 우승을 높게 평가할 야구 팬은 드물다. 한국 프로야구에서도 경영난에 빠진 쌍방울 레이더스와 해태가 사실상 ‘위성 구단’ 노릇을 했던 시기가 있었다. 이 시기인 1990년대 후반~2000년대 초반은 한국 프로야구 최대 암흑기로 꼽힌다.

1871년 앨버트 스폴딩 보스턴 레스삭스 야구 카드.
1871년 앨버트 스폴딩 보스턴 레스삭스 야구 카드.

 

1952년 미국 하원 법사위원회는 메이저리그의 독점 문제에 대한 보고서를 채택한다. 이 보고서에는 내셔널리그가 신디케이트 제도를 포기하게 된 내막이 기술돼 있다. 1901년 12월 리그 회장 투표에서 신디케이트 찬성파와 반대파가 격돌했다. 투표 결과 찬성파와 반대파는 각 4표씩을 얻어 새 회장 선출은 실패로 돌아갔다. 이어진 여론전에서 반대파가 승리를 거둬 메이저리그 야구에는 ‘위성구단’이 사라지게 됐다. 당시 반대파에서 여론을 주도했던 인물이 앨버트 스폴딩(Albert Goodwill Spalding)이었다. 메이저리그 스타 출신인 스폴딩은 은퇴 뒤 시카고 화이트스타킹스 구단주를 지냈고 자신의 이름을 딴 스폴딩사를 설립했다. 사업가로서 스폴딩은 스포츠용품과 자전거 시장에서 독점적인 지위를 누렸다. 그럼에도 프로야구에선 반독점 입장에 섰다. 보고서는 스폴딩의 입장을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야구가 진정성 있게 팬들에게 받아들여지기 위해서는 구단들이 진짜 경쟁을 해야 한다. 필드 안에서 뿐 아니라 재정 면에서도 마찬가지다. 그래야지 재정적인 성공도 거둘 수 있다.”

 

한국 정치에서도 언제부터인가 ‘진정성’이라는 단어가 널리 쓰였다. 아마 인터넷을 통한 소통이 발달하고 정치인과 지지자들 사이 관계가 밀접해진 2000년대 초반 이후의 일일 것이다. 지금 위성정당을 주도하거나 지지하는 이들 가운데 여럿은 이에 영향을 받았다. 그런데 지금의 ‘위성정당’에서 찾을 수 있는 ‘진정성’이란 과연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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