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기'에 남겨지는 사람이 없게 하라

  • 기자명 김만권
  • 기사승인 2020.04.09 0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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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쌍용자동차 공장 굴뚝에서 해고 노동자 2명이 복직을 요구하며 고공농성을 벌이고 있었다. 이들의 농성은 외로웠다. 많은 사람들이 외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와중에 영국에서 아흔 살의 노인이 또박또박 한글로 써내려간 응원을 전했다. “힘내라! 김정욱 이창근.” 솔직하게 이 글을 쓰는 이도 그 당시 농성 중인 노동자의 이름은 물론 쌍용자동차에서 그런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도 모르고 있었다. 그런데 영국에서 날아온 메시지라니. 이 메시지를 보낸 이는 2년 후 세계 곳곳의 많은 사람들의 애도 속에 세상을 떴다. 이 노인이 세계적인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Zygmund Bauman)이다.

 

'액체가 된 근대'를 주장한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 출처: 위키피디아
'액체가 된 근대'를 주장한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 출처: 위키피디아

 

 

지그문트 바우만, 액체가 된 근대를 말하다

바우만이 세상에 알려지게 된 계기는 『현대성과 홀로코스트』라는 놀라운 책 때문이었다. 바우만은 수많은 실증자료를 섭렵하며 쓴 이 책에서 홀로코스트를 ‘순간적인 광기’가 아니라 서구문명의 핵심인 ‘이성, 특히 기술적이고 관료적인 합리성이 만들어낸 사건’으로 규정했다. 효용이 지배하는 세계에서 비용이 덜 든다는 것만큼 도덕적인 것은 없기에, 사악한 일을 행한 자들은 죄책감을 느끼지 않고 통치에 가장 효율적 수단으로서 ‘공포’를 활용한 지배와 유태인 절멸 정책을 행사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바우만은 홀로코스트에서 명백히 볼 수 있는 예외적인 상황을 지배하는 원리들이 우리의 일상에 들어와 있음을 경고하며, 우리가 ‘기술적 합리성’을 경계해야 한다는 메시지를 분명하게 던지고 있다.

바우만은 이런 ‘일상화된 위기’의 메시지를 그의 또 다른 유명한 개념, 영어로는 liquid modernity, 우리말로는 ‘액체근대’ 혹은 ‘유동하는 근대’로 옮겨진 용어에 담아 던지고 있다. 바우만은 우리가 여전히 민주주의, 자본주의, 합리화라고 하는 근대적 삶의 조건에 살고 있지만, 이제 그 삶의 조건의 중심을 지켜주던 단단한 경계, 특히 국민국가 단위로 만들어진 경계가 허물어지고 있음을 이 개념에 담아 전했다. 그렇다면 도대체 액체가 된 경계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바우만이 말하는 ‘액체가 된 경계’는 경계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은 아니다. 경계는 존재하지만 그 경계가 과거보다 훨씬 유연해졌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보자. 2차 대전 이후 만들어진 세계경제체제를 ‘브레튼우즈 체제'라고 부른다. 이 체제를 만드는 데 가장 기여했던 존 메이나드 케인즈의 의도는 세계경제질서를 다자주의로 만드는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이 체제의 속살에 명확히 깔린 의도는 자본에 국적을 붙이는 것이었다. 이 자본에 국적을 붙이는 일이 중요했던 이유는 2차 대전 이후 많은 국가들이 자국민을 보호하는 보편복지 시스템을 건설하고 있었고 이에 필요한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선 세수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자본에 국적이 존재한다면 국가는 자본의 흐름을 정확히 파악할 수 있고 합당한 세금을 부여할 수 있었다. 이 질서가 무너진 뒤 등장한 새로운 체제에서 자본은 이 국적의 꼬리표를 떼는 일이 훨씬 쉬워졌다. 다국적 기업, 초국적 기업, 지구적 기업이란 명칭의 변화는 자본이 이 국적의 꼬리표를 얼마나 빨리, 열심히 떼어내어 왔는지를 명확히 보여준다.

자본이 국적의 꼬리표를 떼어왔다는 말은 역설적으로 노동하는 사람들에겐 자신이 불리한 처지에 놓이게 되었음을 뜻한다. 우리가 흔히 쓰는 ‘아웃소싱’이란 말은, 노동자들에게 세계의 모든 노동자들이 자신의 경쟁자가 되었다는 뜻이나 다름이 없다. 과거 자신의 영토에 갇혀 있던 자본은 경계를 벗어나 더 값싼 노동력을 해외에서 찾는다. 값싼 노동력을 찾아 자국의 자본이 해외로 떠날 때 노동자들은 일자리 부족에 시달리게 된다. 반면 영토의 제약에서 상대적으로 자유로워진 지구적 자본은 큰 혜택을 누린다. 첫째로는 자신이 법인세를 주로 내는 헤드퀘터를 좀더 많은 혜택을 주는 국가로 쉽사리 옮길 수 있다는 이점을 활용해 국가 간 법인세 인하 경쟁을 유도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각종 규제에 대한 완화 압력을 넣을 수 있다. 결과적으로 국가가 이들의 요구를 수용할 때 평범한 사람들은 두 가지 측면에서 피해를 입게 된다. 첫째, 복지가 좋았던 국가라면 국가의 보호 수준이 점점 낮아진다는 것이다. 민영화와 민간위탁이라는 명목 아래 국가가 담당했던 전기, 교통, 의료, 교육과 같은 산업을 민간에게 내주기 때문이다. 이는 정확히 서구 복지에서 일어나고 있는 현상이기도 하다. 둘째, 규제 완화는 대체로 노동자에 대한 보호의 수준을 낮춘다. 비정규직, 파견과 용역 등 과거에는 비정상적이었던 (그래서 예외적이었던) 일자리들이 일상적인 제도로 자리 잡고 노동의 유연화라는 명목 아래 해고는 흔한 일이 되곤 한다.

결과적으로 노마드와 정착민의 삶이 역설적으로 뒤바뀐다. 국가의 경계를 자유로이 뛰어 넘는 노마드로서 자본은 어디를 가나 집이 있는 자들이 되고, 국가의 경계에 갇혀 있는 정착민으로서 노동자들은 안전한 집이 없이 지내는 존재로 전락해 버리는 것이다. 이런 정착민의 운명을 두고 바우만은 이렇게 표현한다. “온갖 어려움에 맞서 자기 수중에 있는 보잘 것 없고 하찮고 일시적인 소유물들이 조금이라도 더 오래 그 역할을 하기를 바라며 필사적으로 억지를 부리는 이들은 저 밑바닥에 있다.”

이 모든 것이 국민국가의 단단했던 경계가 유연해짐으로 인해, 다시 말해 지구화된 자본의 영향력이 강해짐에 따라 자국 시민들에 대한 국가의 보호가 약화되며 일어난 일이다. 이렇듯 노동자의 처지를 가장 잘 이해하고 있었던 바우만이기에, 외로운 상공에 매달려 투쟁하고 있던 타국의 노동자 김정욱과 이창근을 향해 응원의 메시지를 보낸 건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밝혀두자면 이 두 노동자들이 목숨을 걸고 투쟁을 벌였던 쌍용자동차는 인도 마힌드라사가 소유하고 있었고 지금도 그렇다.

  

바우만, 액체 시대의 ‘일상화된 위기’를 말하다

바우만은 이 유연한 경계가 이제 모든 이들의 삶에 스며들어 사실상 ‘경계 없음’으로 작동하고 있다고 말한다. 말랑해진 경계를 따라 안정을 위한 확고한 경계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바우만은 『개인화된 사회』에서 ‘액체경계시대’의 개인들이 갈구하는 안전한 삶에 대한 욕망을 “안전하고 지속적인 여행일정표를 향한 헛된 모색”(the vain search for a steady and continuous itinerary)이라고 표현한다. 우리를 지배하는 것은 ‘경계 없음의 공포’(the terror of boundlessness)다. 경계가 유연해 질대로 유연해진 이 세계에서 내게 현재 주어진 괜찮은 삶(decent life)이 지속된다는 보장은 없다.

예를 들어 2015년 NH투자증권 100세시대연구소가 조사한 바에 따르면 우리나라의 중산층 10명 중 8명은 자기가 빈곤층이라 여기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31평 아파트, 중형급 자가용, 하루 2.1잔의 커피, 6200원 짜리 점심에 8.2시간을 일하며, 우리나라 전체 가구의 65.4%가 속하는 중산층은 더 이상 안정된 삶을 뜻하지 않는다. 중산층은 이제 언제 나락으로 떨어질지 모른다는 의미다. 그래서 오히려 즐길 수 있을 때 즐겨야 한다. ‘위기’가 언제 어떻게 찾아올지 모르기에 지금 아끼는 건 무의미한 일일지도 모른다. 

바우만에 따르면, 위기에서 공포는 그 상황에서 의지할 수 있는 존재가 없을 때 더 깊어진다. 한때 우리에겐 위기에 기댈 수 있는 존재가 있었다. 우리는 그 존재를 ‘국가’라 불렀다. 그러나 지금의 국가는 다르다. 한쪽에서 가해지는 유권자들의 압력과 다른 한쪽에서 가해지는 지구적 세력의 압박 사이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존재로 전락해 버렸다. 과거에 비해 국가는 현저히 그 보호의 기능을 상실한 상태다. 코로나 펜데믹은 ‘비용의 최소화’라는 유연한 경계를 강조하는 시장 논리에 따라 맞추어진 국가의료체계가 어떻게 무너지는지 세계 곳곳에서 여실히 드러내고 있다. 그 시장 논리에 철저했던 국가일수록 보호의 기능은 작동하지 않고 있다.

이렇듯 국가의 보호가 쇠퇴하거나 약한 곳에서 개인은 자신을 지키기 위해 여러 모로 무장해야 한다. 우선 ‘어떤 상황에서도 자신의 삶은 자기가 책임져야 한다’는 윤리를 체득해야 한다. 심지어 좌파들조차 ‘제3의 길’이란 중립적 슬로건을 내걸고 ‘위기 속에서 스스로 돌파할 수 있는 능력을 키워야 한다’는 윤리를 전파했다. 그래서 우리는 게으른 자들을 용납할 수 없다. 국가를 탓하는 것은 게으른 자들이나 하는 짓이다. 이런 자들은 사회나 국가 뿐 아니라 근본적으로 부지런한 ‘나’를 좀 먹는 벌레들이다. 부지런한 ‘우리’와 그렇지 않은 ‘그들’의 경계는 명확해야만 한다. 내가 안전하다는 느낌은 우리와 그들의 경계가 명확할수록 선명해지기 때문이다. 그들이 우리 안에 있다는 것은 불안의 요소다. ‘내가 사는 이 부유한 아파트 단지 안에 임대 사는 저들은 나의 가치를 떨어뜨릴 뿐만 아니라 나의 안전도 갉아 먹는다.’ 이런 개인의 윤리가 고양될수록 ‘일할 수 없음’과 ‘일하지 않음’의 경계도 무너진다. 개인은 스스로 자신이 대접받을 만한 자라는 사실을 증명해야만 하고, 무임승차에 해당하는 그 어떤 이유라도 핑계로 전락하고 만다. 그들에 대한 혐오는 마땅한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열심히 일해도 처지가 더 어려워지는 사람들이 이 세계에 존재한다는 것을. 수많은 사람들이 일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일하지 못하고 있는 것임을.)

안전한 경계의 밖에 있다고 느끼는 사람들에게 안전한 경계에 있는 것처럼 보이는 소수의 사람들은 역설적으로 스스로를 보호할 수 있는 존재가 된다. 그들은 어떤 사회적 도움도 필요치 않는 존재들이다. 그들 스스로도 일상에선 그 어떤 보호도 필요치 않은 것처럼 행동한다. 그런데 그 경계 안에 있는 대다수의 사람들 역시 불안한 것은 마찬가지다. 아무리 벽을 쌓고 경계를 선명히 해도, 그들도 확실히 모른다. ‘내가 오늘 일하는 이 대기업에서 얼마나 더 버틸 수 있을까? 그 다음은 무엇일까?’ 불확실성은 언제나 두려움을 길러낸다. 내가 그렇게 열심히 그어놓은 그들과의 경계 쪽으로 떨어지는 것은 상상만 해도 두려운 일이다. 그럼에도 의연하게 보여야 한다. 그것이 내가 그들과 경계를 그으면서 나 스스로에게 부여한 자격의 증명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위기에서도 ‘하나’일 수는 없다. 안전한 경계 안에 있다고 보이는 자들에게는 자기 스스로를 보호하겠다는 의지가 없는 자들과 삶의 방식을 공유하는 것만큼 위험한 일은 없으며, 그럴 수 없는 자들과 하나가 된다는 것은 내가 증명해온 자격을 상실하는 일이다. 반면 안전한 경계 밖에 있는 이들에게 저 경계 안에 있는 자들에게 어떤 보호라도 제공한다면 그것은 특권에 불과하며 불필요한 혜택에 불과한 것이다. 그런데 정작 알고 보면 대다수에게 그 안전한 경계가 어디인지는 불명확하며 실제로도 지속적인 안전은 보장되지 않는다. 누가 봐도 안전해 보이는 소수의 사람들을 부러워하며, 알게 모르게 그들을 닮고 싶어 하며, 부지런하게 자신을 증명하며 살고 있을 뿐이다. 그것도 아니라면 불확실한 세계에서 작지만 확실한 행복을 찾으며 그저 오늘에 충실하며 내일에 대한 막연한 믿음으로 그 불안을 극복하고 있을 뿐이다.   

 

위기 속에서 ‘모두에게’ ‘동등하게’ 주자는 제안들

‘코로나19’ 펜데믹은 유연한 경계를 창조한 자본주의 세계에게 자연이 내민, 예측하지 못한 위기로 갑작스레 다가왔다. 거대한 자본주의가 ‘일시정지’ 버튼을 누르며 멈추어 서자 세계도 거대한 패닉에 빠졌다. 유연해진 경계를 핑계 삼아 단단한 보호의 기능을 은연중에 은폐하던 국가들 역시 이번에는 어쩔 수 없이 그 기능을 수행해야만 하는 지점에 이르렀다. 그 와중에 ‘소비가 중심이 된’ 자본주의 세계에서, 그 소비의 주된 원동력인 수입을 분배하는 시장이 멈추어서며 세계의 유명 경제학자들이 현금살포만이 해결책이라는 데 놀라운 의견일치를 보이고 있다. 이런 경향을 따라 우리나라 역시 예측하지 못한 거대한 위기로 어려운 처지에 놓은 사람들을 돕기 위해 재난소득이란 명목으로 ‘현금이전’이란 경제구호책을 마련하고 있다.   

'맨큐의 경제학'으로 유명한 그레고리 맨큐 하버드대 교수도 보편적인 재난지원금 지급을 주장했다.
'맨큐의 경제학'으로 유명한 그레고리 맨큐 하버드대 교수도 보편적인 재난지원금 지급을 주장했다.

 

그런데 세계의 유명한 경제학자들이, 그리고 몇몇 국가에서 논의되고 있는 현금이전 방식이 참으로 낯설다. ‘모든 사람에게’ ‘동일한 액수로’ 나눠주자는 것이다. 대표적인 경제학 교과서를 쓴 하버드 대학교의 그레고리 맨큐가, 오바마의 경제고문이자 하버드 공공정책 대학원의 제이슨 퍼먼이,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인 조지프 스티글리츠가, 그 외에서 누리엘 루비니, 다이엘 서스킨드 같은 유명 경제학자들이, 그리고 수많은 경제전문가들이 이 정책을 직간접적으로 지지하고 나섰다. 이런 논의가 지금의 지구적 시장을 만들어내는데 가장 적극적이었던 미국에서, 영국에서 정책적 차원에서 진행되고 있음도 뜻밖이다.

이런 논의는 ‘모두에게’ ‘똑같은 액수’로 지급되는 ‘기본소득’ 방식을 차용하고 있는 것인데, 그 첫 번째 이유는 누가 받을 것인지 가려내는 선별에 드는 비용 특히 시간적 비용을 줄이고 신속하게 줄 수 있기 때문이다. 더하여 시간이 지난 뒤 해당 위기가 있었던 시기의 소득을 기준으로 연말정산 등의 방법으로 그 혜택이 필요치 않았던 사람들에게 다시 걷어 들일 수 있다는, 혜택 배달의 정확성을 기대할 수 있다는 점 때문이다. 위기에서 시간적 비용을 줄이는 일은 위기에 처한 사람에겐 아주 중요한 요소이며, 혜택 배달의 정확성은 공정성 차원에서 중요하다.

이 중 혜택 배달의 정확성 문제를 놓고 누군가는 고개를 갸웃거릴지도 모르겠다. 이미 우리 손에는 수많은 데이터가 있고 그 데이터를 활용해 필요한 사람들을 국가가 미리 가려내어 그 혜택이 필요한 사람에게 더 많이 전달하는 것이 옳은 것이 아니냐고 반문할지도 모를 일이다. 특히 하위 70%에 그 보호를 집중해 전달하겠다는 우리 정부의 결정을 지지하는 사람들이라면 더더욱 그럴지도 모른다.

그런데, 정말 그럴 수 있을까? 이제 다시 바우만을 불러들일 시간이다. 바우만이 말하는 액체화된 경계의 유연성은 경제 상황에 따라 더욱 심화된다. 일상화되어 있는 다양한 고용형태는 물론이고 위기 속에서 생겨나는 해고와 고용의 유연성, 그 상황에서 개인이 얻고 잃는 혜택과 손해의 유연성은 실시간으로 거대하게 일어난다. 예를 들어 미국의 경우엔 2월 3.5%에 불과했던 실업률이 3월이 지나며 17%에 달한 것으로 예측되고 있다. 4월, 5월이 지나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우리나라 역시 이미 고용이 유연해서 정확하게 파악하기 힘든 소규모 관광, 숙박, 음식, 운송업 등에서 그 징조가 드러나고 있다. 항공사는 생존 위기에 몰려 있고, 자동차, 제철, 조선, 디스플레이 대기업까지 넓게 희망퇴직이 잇따르고 있다는 소식이 들린다. 이들 중 상당수는 2019년에 국가의 기준으로는 행복했던 사람들일 수도 있다. 바우만의 유동하는 경계는 2020년의 행복이 2019년에 얼마나 행복했는가로 판별할 수 있는 시대가 아니란 의미를 담고 있다. 그런데 그 2020년이 세계가 예측하지 못한 거대한 위기라면 더 그러하다. 위기에서 유연한 경계는 요동치는 경계가 되어버린다.

바우만의 유동하는 경계의 개념이 알려주는 또 하나의 교훈은 고려해야할 경계가 늘어나면 늘어날수록 더욱 판단하기 어려워진다는 사실이다. 선별의 기준이 많아진다는 것은 그 만큼 경계가 늘어난다는 것이고, 각 경계마다의 유연함으로 인해 선별이 왜곡되는 경우의 수도 늘어나게 되어 있다는 뜻이다. 이 경우엔 경계를 단순화하는 것이 오히려 더 효율적일 뿐만 아니라 정당할 수도 있다는 뜻이다. 그렇기에 우리가 지금 지급되는 지원금을 ‘재난소득’이라 부른다면, 기준을 ‘소득’ 하나로만 설정하고 2020년이 지난 뒤 소득이 많았던 자들로부터 비례적으로 회수하는 것이 오히려 혜택을 더 정확하게 배달하는 방법이 될 수도 있다. 기존의 사회적 보호망이 작동하고 있는 국가라면 거대한 위기로 인해 한 겹 더해진 재난소득이 공정한 분배를 왜곡할 수 있는 가능성은 더 적을 것이다.  

 

위기 속의 위기, 그래서 ‘모두에게’ ‘동등하게’ 

하지만 이 글을 쓰는 이는 조금은 다른 이유로 ‘모두에게’ ‘동일하게’ 주는 보편 정책에 더 관심을 둔다. 정치철학을 공부한 한 사람으로써 글쓴이가 주목하는 것은 ‘위기’에서 ‘정치가 할 수 있는 사회적 가치의 재구성’이다. 바우만으로 시작했으니 마지막으로 바우만을 소환해 보자. 바우만은 카를로 보르도니와 나눈 느슨한 대담집 『위기 상황』에서, 위기란 “환자의 예후가 불확실해서 의사가 치료방향과 치료법을 결정해야 하는 순간을 가리키는 말”이라고 한다. 그런데 위기는 그 자체로 불확실성과 무지를 인정하는 상황이라 어떤 조치들이 원하는 방향으로 가지 못할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 이런 상황이야말로 어떤 판단을 의지롭게 내림으로써 상황을 수습할 주체가 필요한데 그것이 원래 국가의 역할이었다고 바우만은 지적한다. 

다시 말해 위기야 말로 정치의 시간이라는 것이다. 실제 위기(Crisis)라는 말의 어원을 따라가다 보면 그리스어로 krisis, 결정(‘decision’), 특히 불확실성 속의 결정이라는 의미를 볼 수 있다. 위기란 불확실성 속에서 결단해야 하는 상황이란 뜻이다. 우리는 정치가 어떤 활동인지 잘 알고 있다. 정치는 그 자체로 무엇인가에 대해 결정하고 책임지는 일이다. 뭔가가 확실하다면 결정할 일이 없다. 우린 그런 시기를 일상(ordinary time)이라 부른다. 이 시기는 정보의 확실성을 바탕으로 움직이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결정’ 보다는 오히려 관료들이 이끄는 ‘관리’(management)로 움직이는 시기다. 그래서 일상은 질서(order)와 연결되어 있다. 일상이란 용어와 질서는 똑같은 라틴어 어원, “ordinem”에서 온 말로 영어로는 row, line, rank; series, pattern, arrangement, routine”의 의미와 연결되어 있다.

또 다른 위기를 지칭하는 말로는 비상상황(emergency)이 있다. 이 용어는 말 그대로, 무엇인가가 ‘emerge’한다는 것으로, bring to light, 무엇인가가 빛으로 나온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그런데 빛으로 나온다는 말은 이것이 이전에는 어둠 속에 있다는 것으로, 결국 보이지 않던 것이 세계로 나왔다는 뜻이다. 이 말은 우리에게 이를 다룰 확실한 정보가 없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지금 코로나 바이러스가 대표적인 예다.

정치를 이해하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이 차이를 명확히 알아야 한다. 위기는 앞에 어떤 수식어가 붙어 있건, 그것이 집단의 위기라면 결정이 필요하고, 그 시간은 정치의 시간이며 그것이 정치의 시간일 수 있는 이유는 우리가 가진 기존의 패턴, 장치, 루틴으로 다룰 수 없는 문제들을 마주하기 때문이다. 이 양자의 극단적 차이를 무시하는 것은 인간사의 삶에서 본질이 서로 다른 시간의 영역을 무시하는 것이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위기에서 누가 내 곁에 서 있는지 확인하는 성향이 있다. 위기에 나에게 손 내미는 자, 그 손길이 필요한 자는 한 배를 타고 있는 자들이란 의미다. 자본의 세계가 그어놓은 유연한 경계 속에서 자기 보호의 윤리 속에 분열된 사람들에게, 거대한 위기 앞에 국가가 동등하게 내미는 보호의 손은 어떤 의미일까?  그래서 이 글을 쓰는 이에게 ‘모두에게’ 그리고 ‘동등하게’ 주는 보호가 중요했다. 

자원은 아껴야 한다. 하지만 아껴야할 때가 있으면 용기 있게 써야 할 때도 있다. 위기에서 자원 분배는 단지 경제적 문제만이 아니다. 그것은 정치적 메시지고, 사회적 가치를 재구성할 수 있는 방식이기도 하다. 모두가 알다시피 위기는 배제되는 자들이 분출되는 시간이다. 흔히 비상구로 나가는 길에 어떤 이유로든 남겨진 자들은 더 이상 동료시민들에 대한 믿음을 가질 수 없게 된다. 우리가 이 시기를 어떻게 정치적으로 대응하느냐에 따라 불신으로 분열된 사람들 사이에, 동료시민으로서 갖는 사회적 신뢰가 재구성되는 방향이 달라질 것이라 본다.

지그문트 바우만의 저서 '액체 근대'
지그문트 바우만의 저서 '액체 근대'

 

‘위기에 뒤로 남겨지는 자들이 없도록 하라.’

글쓴이는 이런 보호의 메시지를 전하는 일이야 말로 경계의 불확실성을 마주하며 대다수가 불안에 떠는 ‘위기 속의 위기’의 시대에 정치가 할 일이고 내려야할 결정이라 본다. 그리고 보편적인 재난소득이 이런 중요한 메시지를 전달하는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다고 본다. 이런 위기에서조차 (바우만이 그토록 경계했던) 시장에서 배운 ‘효용성’이란 가치에만 집중하는 ‘관료적’ 국가모델로는 결코 설명할 수 없는 것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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