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호 6주기, 진실 없는 애도의 허망함

  • 기자명 김만권
  • 기사승인 2020.04.16 12: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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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년 전 이 글을 쓰는 이는 한 대학교의 지방캠퍼스에서 강의를 하고 있다. 이른 새벽에 통근버스를 타고 도착해서 오전과 오후 3시간씩 이어지는 수업을 해야 하는 빡빡한 일정이었다. 오전 수업이 끝나고 곧 이어질 오후 수업을 준비하는 사이 아주 잠깐 스마트폰에 위에 떠 있는 세월호에 대한 기사를 보았다. 어떤 일이 일어난 건지 정확히 파악할 수는 없었지만 그 기사가 전원구조라는 좋은 소식을 알리고 있었기에 안심하고 나머지 수업을 할 수 있었다. 수업이 끝나고 학생들과 저녁 요기를 한답시고 들렀던 치킨집. 그런데 그곳 TV에서 흘러나오는 뉴스에 한동안 혼란스러웠다. 모두가 구조된 것이 아니었다. 이미 침몰한 배에는 아직 300명이 넘는 승객들이 갇혀있었다.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그 시간부터였다. 내게 세월호가 엉켜버린 실타래처럼 남게 된 순간은. 그 실타래를 풀 수 있는 유일한 손, 진실을 아직도 찾지 못했기 때문이다.

 

공적 영역이 진실을 외면할 때 오는 시간, 어둠의 시대

4.16이 다가온다. 또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른 채 망설이다 책상머리 위 선반에 꽂혀 있는 한나 아렌트의 어두운 시대의 사람들(Men in Dark Times)을 꺼내본다.

 

“‘신뢰성의 간극’(credibility gap), ‘공적으로 보이지 않는 자들이 통치하는 체제’(invisible government), 있는 그대로를 드러내지 않고 은폐하려는 말들 그리고 오래된 진실을 유지한다는 변명 아래 모든 진실을 의미 없는 사소한 것들로 폄하하는 도덕적 혹은 다른 형식을 띤 강력한 행동들이 공적영역의 불빛을 꺼뜨리자, 어둠의 시대가 찾아왔다.”

 

아렌트가 이 책의 서문에 써 놓은 한 대목이다. 돌이켜보면, 평범한 사람들에게 어둠의 시대는 그렇게 온다. 그 빛이 꺼질 때마다 어둠이 우리를 덮친다.

6년 전, 세월호도 그랬다. ‘세월호는 위기 앞에 유연하게 대응하지 못하는, 관리에만 집중된 공권력이 빚어낸 비극이었다. 무엇보다 공권력은 공개적으로 무슨 일이 있었는지밝혀내겠다고 했지만 정작 그 진실을 찾는데 가장 적극적으로 방해한 자들이 그 공권력이었다. 아렌트는 이처럼 행위자들이 약속한 것과 그들이 실제 생각하는 것 사이에 존재하는 기만적인 차이를 신뢰성의 간극’(credibility gap)이라고 불렀다. 이런 신뢰성의 간극 앞에 좌절한 뒤 얼마 되지 않아 우리가 목격한 것은, 놀랍게도 (아렌트가 ‘invisible government’라 쓴) ‘최순실이란 낯선 이름과 연계된, 공적으로 선출되거나 임명되지 않는 자들이 행한 부당한 통치의 일상화였다. 이에 더하여 이 부당한 통치의 지지자들이, ‘단순한 또 하나의 교통사고에 불과하다는 주장을 앞세우며 세월호와 관련해 진실을 밝히고자 하는 모든 노력을 의미 없는 사소한 것들로 폄하하는 시도들을 곳곳에서 목격할 수 있었다. 이 부당한 2차 가해에는 오래되어 낡아버린개발독재를 진리 마냥 떠받는 사람들이 함께 하고 있었다.

그렇게 한동안 꺼져 있던 공적영역의 불빛을, 4년 전 평범한 우리가 다시 살려냈다. 고대로부터 공개적 논의가 이뤄지던 그 장소, 바로 광장에서 우리는 각자의 목소리로, 기본적으로 행해야 할 의무를 외면한 공권력을 하나의 마음이 되어 심판했다. 이제 빛의 시대가 도래 했으니, 마침내 진실은 찾고 있는 사람들의 손에 주어지리라 믿었다. 그런데 믿음’(belief)이란 증거 없이 갖는 막연한 신뢰에 불과하다는 철학적 정의가 진정 옳은 것일까? 6년이 지난 지금도 세월호의 유가족들은 가족들에게 일어난, 자식들에게 일어난 진실을 요구하고 있다.

 

진실 없는 애도의 허망함

소설가 한강은 소년이 온다에서 당신이 죽은 뒤 장례식을 치르지 못해, 내 삶이 장례식이 되었습니다.”라고 쓴다. 그렇다. 사랑하는 사람들을 잃은 사람들, 결코 그들을 떠나보내지 못한 사람들에게 삶은 그들 자신의 장례식이다. 우리는 흔히 말한다. 이제 놓아주라고. 산 사람은 살아야 한다고. 하지만 어느 부모가, 어느 형제자매가, 어느 자식이 어떻게 나의 부모가, 나의 형제자매가, 나의 자식이 이 세상을 떠야만 했는지그 사실 자체를 알지도 못한 채 보낼 수 있을까? 무엇인가를 이해하지 못한다고 했을 때, 이해하지 못함은 알지 못함에서 나온다는 것을 우리 모두는 알고 있다.

그래서 진실의 밝힘 없이사랑하는 사람을 떠나보내는 애도는 있을 수 없다. 사랑하는 사람들이 부당하게 세상을 떠났다면 더더욱 그러하다. 그 부당함과 관련된 진실을 외면한 채 그들을 애도한다는 것은 가능한 일이 아니다. 그런 일이 가능하다면 그것은 애도가 아니라 망각이며, ‘사랑을 주고받은 지난 시간에 대한 부정이나 다름이 없다. 그런 일은, 인간이 기억하는 존재인 한, 그래서 서로가 사랑했던 시간을 추억할 수 있는 존재인 한 가능하지 않다. 그래서 공권력으로 인해 희생당한 사람들이, 그 희생당한 사람들을 가슴에 묻은 사람들이 그 일을 자행한 공권력을 향해 진실을 요구하는 건 당연한 일이다.

한편에서 어떤 이들은 공권력이 폭력을 가한 것도 아니고 불운한 사고였을 뿐인데 너무 과도한 요구를 하는 것이 아니냐고 불평한다. 하지만 우리는 명확히 인식해야 한다. 보호의 임무를 수행하는 자가, 그 보호에 무능하고 스스로의 무능함조차 인식하지 못하거나 외면한다면 그것 역시 폭력일 수 있음을. 불운이란 말에는 보호의 임무를 지닌 자에게 책임을 면제해주는 논리가 공공연히 숨어 있음을. 이 공공연히 숨은 논리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이 바로 책임이라는 사실을. 그것이 공권력이 진실을 유가족들에게 내보이지 못하는 이유의 실체임을.

이런 이유로 공권력은 희생자들에 이어, 그들을 떠나보내지 못하는 사람들을 기만하기 시작한다. 공공연하게 사건의 진실을 밝혀내겠다고 표면적으로는 약속하면서도, 뒤에서는 그 약속과 달리 진실을 찾는 일을 방해하는 것이다. 사고 이후 박근혜 정부는 세월호 특별조사위원회를 만들었지만 새누리당과 더불어 조직적으로 특조위 조사활동을 방해했을 뿐만 아니라 마침내 위법하게 강제해산 시켜버렸다. 글을 쓰는 이가 주장하는 내용이 아니라 새누리당이 임명해 특별조사위원으로 참여했던 황전원의 증언이다. 그는 세월호 진상규명이 엄청난 예산낭비라고 주장했고 뒤에서는 박근혜 전 대통령의 세월호 7시간 의혹조사를 막으려 했다. 그는 문재인 정부 아래 만들어진 사회적 참사특별조사위원회에 자유한국당 임명으로 뻔뻔하게 또 참여하며 이 사실을 밝히고 사과했다. 그들이 진실을 회피했던 이유는 당연히 책임 때문이었고 지금도 그러하다.

니체는 니힐’, 절망을 이렇게 말한다. ‘절망이란 우리가 믿고 있는 세계와 세계가 실제 작동하고 있는 방식, 이 둘 사이의 간극이 넓어질 때 생겨나며, 그 간격이 점점 더 넓어질 때 더욱 넓고 깊어진다.’ 진실을 마주할 때 감당해야 할 책임이 두려워 약속과 실천을 달리하는 공권력의 이중적 행위는, 사랑하는 사람들을 잃은 이들이 제대로 애도할 기회를 앗아갈 뿐 아니라 이들을 더 깊은 절망에 빠뜨린다. 그 진실이야 말로 가족의, 친구의, 내 이웃의 장례식에 줄 수 있는 제일 큰 마지막 선물이기 때문이다. 진실을 밝히지 않은 채 부당하게 희생된 자들을 애도하는 것만큼 허망한 일은 없다.

 

진실, 가혹한 과거로부터 벗어나는 첫 걸음

떠나보냄에 필요한 애도를 넘어 진실이 규명되어야 할 또 다른 이유가 있다. 우리 모두는 상처받은 사람들이 가혹한 과거에서 벗어나 새롭게 시작할 수 있길 바란다. 아렌트는 인간의 조건에서 어두운 기억에 갇힌 사람들이 그 사슬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하는 두 가지 도적적인 행위가 용서약속이라고 말한다. 이 용서와 약속을 통해서만 사랑하는 사람들을 잃은 뒤 겪어야 했던 비참하고 혹독한 기억에서 풀려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중 용서의 행위에는 가혹한 아이러니가 있다. 용서는 언제나 가해자들이 자신의 행위에 대해 책임을 지고 용서를 구할 때야만 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이런 전제 없이 이루어지는 용서의 행위는 용서가 아니라 망각일 뿐이다.

만약 국가라는 공권력이 애도조차 못하고 있는 이들에게 진심으로 용서를 구할 준비가 되어 있다면 가장 먼저 마련해야 할 것은 있었던 일’, 바로 이들이 사랑했던 사람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에 대한 진실 규명이다. 자신이 저지른 잘못에 대한 규명과 책임 없이 구하는 용서에는 그 어떤 진실도 찾아볼 수 없으며, 똑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겠다는 약속은 자기기만적일 뿐만 아니라 상처받은 이들을 다시 기만하는 행위다. 우리 사회 곳곳에는 진실의 부재로 인해 고난과 슬픔을 정리할 닫힘의 시간 없이, 살아남았다는 이유로 고통 받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다. 강제적으로 동원된 위안부 할머니들과 징용공들, 4.35.18의 유족들, 그리고 세월호의 유가족까지 모두가 그러하다.

공권력의 부재, 무능, 혹은 폭력으로 인해 삶을 박탈당한 사람들에게, 그 희생자들을 가슴에 품고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에게 우리가 할 수 있는 위로와 애도는 진실을 밝히는 데서부터 시작된다는 것을 기억했으면 한다.

우리는 막연히 믿곤 한다. 진실이 그 자체로 모습을 드러낼 것이라고. 애석하게도 진실이란 우리가 노력하지 않으면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는 것을 이제 우리는 경험을 통해 알고 있다. 그것이 공권력이 가려놓은 진실이라면 더욱 그러하다.

 

우리가 새로운 권력에 기대하는 것, 그 묻혀 있는 진실

6년 전 우리는 진실은 침몰하지 않는다고 외쳤다. 하지만 세월호의 선체를 끌어올린 지금도 진실은 좀처럼 바다 깊은 곳에서 올라오지 않고 있다. 2016년 우리가 공적영역의 빛을 다시 밝혔을 때 이를 통해 권력을 잡은 이들은 가려진 진실의 규명을 약속했다. 시간이 지나며 불행히도 이 글을 쓰는 이는, 권력을 잡은 자들이 이 약속을 망각한 것은 아닌지 의심하게 되었다. 세월호 특조위 2기가 어렵게 다시 구성되었지만 특조위 1기에서도 문제로 지적되었던 수사 및 기소권은 여전히 부여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책임자에 대한 공소시효가 1년 밖에 남지 않은 지금에도 뚜렷한 규명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2019년 말에야 어렵게 꾸려진 특별수사단은 관련자들의 바람과는 달리 지금까지 진실규명에 비협조적 자세로 일관했던 대검찰청 산하에 마련됐다. 만약 코로나19라는 전염병을 다루는 가운데 보여준 투명성과 헌신이 아니었더라면 진실을 약속했던 자들에 대한 신뢰를 상실했을지도 모른다.

정치는 그 자체가 진실을 찾는 행위는 아니지만, 정치는 그 진실에 대한 약속으로 이루어진다. 이 약속들이 만드는 제약이 정치의 신뢰성을 만들어낸다. 때로 그 약속이 위선에서 나왔다 할지라도 정치는 그 약속을 지키는 자에 의해 실현되고 구현된다. 21대 총선이 끝났다. 우리에게 조금만 더 권력을 준다면 억울한 사람들에게 가려진 진실을 규명해 줄 수 있다고 약속한 사람들이 있었다. 이제 그들이 이 약속을 지킬 차례다.

아렌트는 어두운 시대의 사람들서문을 맺으며 이렇게 말한다.

 

가장 어두운 시대에도 인간은 밝은 빛을 기대할 권리가 있다.”

 

가장 어두운 시대에도 그러할 진데, 공적영역의 빛이 밝혀진 지금 진실을 요구하는 것은 당연한 우리들의 권리다. 6년이란 세월이 흐르는 동안 애도조차 못한 채 여전히 어둠의 시간에 갇혀 고통 받는 사람들이 있다. 이들에게 ’, 아니 생명을 돌려주는 것은 우리의 의무다. 이는 오로지 진실을 밝히고 기억하는 자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권력이 자신이 한 약속과 함께 하길, 간절히, 아주 간절히 바란다. 그 약속 옆에 나도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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