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이상 '정의'만으론 '잔혹함'을 마주할 수 없다

  • 기자명 김만권
  • 기사승인 2020.05.22 1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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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민 소녀, 철학자들의 철학자가 되다

2차 대전이 발발하고 라트비아에 살던 10살이 갓 넘은 한 독일계 유태인 소녀가 가족과 함께 길을 나섰다. 유럽 전역으로 확산되고 있던 전쟁을 피해, 나치의 억압을 피해 목숨을 걸고 떠난 길이었다. 피난길은 소녀의 가족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험난했다. 라트비아를 떠나 가까스로 도착한 스웨덴은 독일이 노르웨이를 침공하며 더 이상 안전한 곳이 아니었다. 더 벗어날 길을 찾지 못한 소녀의 가족은 왔던 길을 돌아가는 또 다른 험난한 길을 택할 수밖에 없었다. 시베리아 횡단 열차를 타고 그 가족이 도착한 곳은 일본이었다. 그곳에서 소녀의 가족은 미국으로 가기 위해 캐나다 행 선박에 몸을 실었다. 얼마 있지 않아 일본이 진주만 공습을 가했기에 소녀의 가족 입장에서 보면 그 배에 오를 수 있었던 건 엄청난 행운이었다. 하지만 소녀의 가족에게 불운은 끝난 게 아니었다. 가까스로 도착한 시애틀에서 가족을 기다린 건 불법 이민자 색출이었다. 다행히도 가족은 몇 주 만에 감옥에서 풀려나 자유의 땅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할 수 있었다. 이토록 수많은 난관을 넘어선 소녀는 훌륭하게 성장해 수많은 위대한 철학자들의 철학자가 되었다. 그녀가 바로 주디스 슈클라’(Judith Shklar).

슈클라는 한나 아렌트와 여러 모로 유사한 경험을 지녔다. 전쟁을 피해 유럽을 떠난 난민이었고, 아렌트는 수용소에서 탈출했고, 슈클라는 시베리아를 횡단해 일본을 거쳐 미국에 도착한, 험난한 난민의 경험도 공유하고 있었다. 아렌트는 프린스턴에서 여성으로선 최초의 교수가 되었고 슈클라는 하버드 정치학과 최초의 여성교수로 임명되었다. 하지만 두 사람의 삶의 방식은 상당히 달랐다. 여러 학교를 옮겨 다니며 외부활동과 시대적 사건에 적극적이었던 아렌트에 비해, 슈클라는 하버드에서 일생을 보내며 상대적으로 조용히 학문의 세계에 남았다. 이곳에서 슈클라는 존 롤스, 마이클 왈저, 리처드 로티 같은 이름만 들어도 다 아는 동시대의 대학자들의 이론에 깊은 영향을 미쳤다. 슈클라를 철학자들의 철학자로 표현한 이유다.

'철학자들의 철학자' 주디스 슈클라
'철학자들의 철학자' 주디스 슈클라

 

 

정의의 원칙 대신 잔혹함불의의 얼굴을 들여다보라

1970년대 이후, 영미 철학은 존 롤스의 시대였다. 1971년 롤스가 정의론을 출간한 이후 정의가 자유주의 정치철학의 중심주제가 되었다. 정의는 공리주의와 공동체주의의 넘쳐나는 관심을 받았고 심지어 공화주의까지 거의 30년 이상을 정치철학의 주요주제로서 그 위상을 누렸다. 롤스를 통해 정의를 실천하는 주체를 인간에서 제도로 전환시킨 자유주의는, ‘권리개념에서도 의미 있는 전환을 이뤘다. 권리가 개인 차원에서 독립적으로 갖는 수단적 의미에 불과했던 자유주의는, 롤스를 통해 권리를 적극적으로 지켜내는 체제로 전환될 수 있었다.

하지만 이 자유주의 시대에, 자유주의를 그 어떤 환상도 없이 바라보는 자유주의자가 있었다. 그가 바로 슈클라였다. 슈클라는 자유주의의 전면에 정의가 방어해야할 대상으로 권리를 내세우지 않았다. 슈클라가 자유주의의 최전선에 배치한 대상은 뜻밖에도 잔혹함’(cruelty)이었다. 그녀는 10대의 나이에 난민으로서 겪어야만 했던 야만의 기억을 잊지 않고 있었다. 그 야만의 실체는 이데올로기로는 밝혀낼 수 없는 것들이었다. 경험에 근거를 두지 않는 이데올로기를 경멸했던 아렌트처럼, 슈클라 역시 이데올로기를 추종하는 모든 정치이론을 경멸했다. 그녀가 지나온 경험은 권리라는 추상적 개념이나 원리가 개인들을 보호할 수 없다는 적나라한 현실이었다.

이런 이유로 슈클라는 일상의 악덕들에서 단호히 말한다. 이제 우리가 고려해야할 것들은 권리가 아니라 잔혹함이라고 말이다. 슈클라는 이 잔인함의 실체가 의도된 고통이라고 말한다. “강한 사람 혹은 강한 집단이 유무형의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약한 사람 혹은 약한 집단에 육체적으로 그리고 감정적으로 의도된 고통을 가하는 것이야말로 인간이 일상에서 겪게 되는 잔인함의 실체라고 말이다.

이런 이유로 슈클라는 자유주의자들에게 전혀 새로운 메시지를 던진다. ‘개인의 권리를 방어하라는 추상적인 관념의 세계로부터 빠져나오라고 말이다. , 빛나는 권리를 방어해야 한다며 구름 위에 올라 추상적 개념의 성을 쌓는 대신, 현실의 시궁창에 발을 담그고 잔혹함부터 제거해가라고 자유주의자들에게 일갈한 것이다. 모호한 을 빚어가는 것보다 당면한 을 제거하라고, 그것이 자유주의자들이 해야 할 가장 시급한 과제라고 말이다. 이런 이유로 슈클라는 자유주의자들을 이렇게 정의한다. ‘자유주의자들은 잔혹함이야말로 인간이 인간에게 할 수 있는 가장 나쁜 짓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다.’ 슈클라에게 자유주의자들이란 현실 세계에서 자신의 목적을 위해 타인에게 계산된 고통을 가하는 행위를 경멸하는 사람들이었다. 그 행위를 경멸한다면 누구나 자유주의자이고 자유주의자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결국 그녀에게 자유주의란, 의도적으로 가해지는 폭력이란 잔혹함의 공포로부터 해방되는 것이었다.

이에 더해 슈클라는 강조한다. 만약 우리가 현실에서 일어나고 있는 이 잔인함의 실체를 파악하고 싶다면 우리가 들여다봐야할 것은 정의가 아니라 불의의 얼굴들이라고 말이다. 역사적으로 돌아보면 정의를 표현하는 수많은 그림들이 존재했고, 이 세상에 존재하는 도덕철학책들에 정의를 다루는 장들이 포함되어 있고, 수많은 책들이 정의에 헌정되었다. 철학과 예술에 불의의 자리는 거의 없었다. 불의는 오히려 문학작품이나 드라마들에서 사소하게 다루어져 왔을 뿐이다. 슈클라는 거침없이 철학이 불의의 얼굴들을 정면에서 마주하지 않았음을 지적한다. 철학은 단순히 불의를 정의의 부재로 취급해 왔다. 우리는 늘 이건 공평하지 않아’, ‘이건 정의롭지 못해라고 말하면서도 왜 불의를 정면에서 바라보지 못했던 것일까? 철학은 불의를 정면에서 마주하지 않는 대신 정의를 채택함으로써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 대신 원칙과 형이상학의 세계로 나갈 수 있었다. 슈클라의 눈에 당대 정의론의 현실도 마찬가지였다. 이런 이유로 그는 말한다. 이제 불의의 얼굴들을 정면에서 마주해야 할 시간이라고. 그래야만 우리가, 나의 이웃이 겪고 있는 야만의 현실을, 잔혹함의 얼굴들을 직면할 수 있다고 말이다. 더불어 그래야만 피해자들의 겪고 있는 고통이 비로소 보인다고 말이다.

 

 

일상의 곳곳, 사회적 약자들이 마주하는 잔혹함을 직시하라

지난 달 29, 이천에서 짓고 있던 물류센터 신축공사 현장에서 화재가 발생했다. 순식간에 사망자 38명을 비롯해 50여명의 사상자를 낸 참사였다. 희생자의 대부분은 일당 10만 원 정도를 받는 일용직 노동자들이었다. 20대 사회초년생부터, 태어날 아이를 기다리던 아버지, 생계를 위해 온 60대 노동자들, 해외에서 온 이주노동자들도 있었다. 희생자 모두 하나같이 사회적 약자였다. 언뜻 보면 하나의 불행처럼 보이지만 왜 하나 같이 사회적 약자들이 희생자들일까란 곳에 방점을 두고 보면 사회가 의도적으로 구축한, 고통의 전가라는 계산된 잔혹함의 실체를 고스란히 볼 수 있다.

산업현장에서 위험이 사회적 약자들에게 전가되는 현실. 이 현실을 두고 우리는 위험의 외주화라 부른다. 위험의 외주화의 사슬에는 사회가 의도적으로 구축해 놓은, 사회적 약자들에게 비용을 전가하는 방식이 고스란히 내재해 있다. 이를 들여다보기 위해선 이 질문에서 출발해야 한다. ‘왜 자본은 산업현장에서 사고를 예방할 수 있는 안전장치를 구축하길 망설이는 걸까?’ 그 이유는 간단하다. 그 안전망을 구축하는 것보다 노동자들이 재해를 입었을 때 지불하는 비용이 더 싸기 때문이다. 체계적 안전망의 구축비용이 더 싸다면 이윤을 목적으로 움직이는 자본이 망설일 이유가 없다.

더 나아가 관련 제도는 이런 자본의 비용 계산에 한몫을 한다. 예를 들어 201812월 비정규직 노동자 김용균 씨가 사망한 뒤 재발방지를 위해 만들어진 특별노동안전조사위원회의 보고서를 들여다보자. 이 보고서에 따르면 중부발전의 내부 평가지표에는 원청노동자가 사망할 경우 12, 하청 노동자가 사망할 경우 4점의 감점이 이루어진다. 이 지표에 따르면 하청노동자의 목숨 값은 정확히 원청 노동자의 3분의 1이다. 김용균 씨가 사망한 서부발전에선 원청일 경우 1.5, 하청 1, 발전시설 건설 노동자는 0.2점이 배정되어 있었다. 발전시설 건설 노동자의 목숨 값은 원청 노동자의 7분의 1도 되지 않는다. 이런 상황에서 지난 10년 동안 산재사망이 일어난 기업에 대한 처벌 수위는 평균 432만원이었다. 산업재해에 관한 처벌 법률은 몇 년 이상이라는 하한선 대신 몇 년 이하라는 상한선만 있을 뿐이다. 결국 목숨 값에 차별을 두는 기업의 규정과 국가의 제도는 당연히 위험한 산업현장에서 위험을 밖으로, 밖으로 내보내도록 만든다. 사회적 약자가 사망할수록 기업이 지는 비용의 부담은 안팎으로 적기 때문이다.

이런 생명 값에 대한 차별이 물리적으로 위험한 산업현장에만 있는 것도 아니다. 2014416, 김초원 단원고 교사는 학생들과 수학여행 길에 올랐다. 416일이 생일이었던 김초원 교사는 자신이 태어난 날, 세월호 참사로 세상을 떴다. 학생들의 곁에 마지막까지 남아 구명조끼를 입히고 탈출을 돕다 목숨을 잃었다. 하지만 김교사는 세상을 떠난 뒤 보상에 있어 표현 못할 차별을 겪어야 했다. 그가 기간제 교사였기 때문이다. 단원고는, 그가 기간제 교사라는 이유로 사고에 대비한 생명보험을 들어주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여행자 보험조차 가입해주지 않았다. 김교사가 2학년 3반의 담임으로 수학여행에 참가했는데도 말이다. 대한민국 법원은 1심과 2심에서 김교사가 기간제 교사이므로 이런 차별은 허용된다는 판결을 내렸다. 더불어 학교가 보험을 들어주지 않은 것엔 고의성이 없다고 판결했다. 하지만 2012년 이미 국가인권위원회는 기간제 교사들에게 보험을 들어주지 않는 것에 대한 시정을 권고하고 있었던 터였다. 교육 현장은 이미 이런 차별이 잘못된 일인지 알고 있었다. 이런 판결은 단지 김초원 교사에 한정된 것이 아니었다. 안타깝게도 세월호에 또 다른 기간제 교사인 이지혜 교사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제 다시 생각해 보자. 이렇게 우리 일상 산업현장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는 사고와 차별을 두고 단지 불운이라고만 말할 수 있을까? 이제는 정직하게 이런 야만의 원인이 비용의 최소화와 그 최소화에 최적의 대상인 사회적 약자들을 향한 비용의 전가라는 의도적 계산에, 잔혹함에 있다고 해야 하지 않을까?

 

불의’, 정의가 설명할 수 없는 것들

그렇다면 왜, 우리는 일상의 곳곳에 널려 있는 잔혹함을 직면하지 못하는 것일까? 슈클라는 우리가 정상적인 정의의 모델에 집착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우리는 정의의 원칙을 세우고, 그 원칙에 부합하는 희생자들을 찾아내고, 그들의 절규만을 고통으로 간주한다. 그 정의 원칙 밖에 있는 모든 절규는 희생자들의 주관적인 목소리일 뿐 불의한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그것이 불의한 것이 아니라면 희생자들의 절규는 하나의 불운일 뿐이다.

특히 지금처럼 메리토크라시라는 능력주의가 정의의 원칙 마냥 작동하는 세상이라면 더욱 그렇다. 정규직과 비정규직은 능력의 차이이고, 노력의 차이다. ‘노력이 재능을 이기지 못한다는 식의 표현에서 알 수 있듯이 양자는 전혀 다른 것임에도 능력주의자들은 자신이 얻어낸 것을 노력의 결과로 탈바꿈시키며, 이런 차별들이 정의의 차원에서도 정당하다고 말한다. 그런 원칙 하에서라면, 서부발전의 김용균도, 세월호의 김초원과 이지혜도, 물류센터화재 현장의 38명의 노동자도 불의가 아니라 불운에 희생당한 사람들이다. 그들이 맞닥뜨린 불의가 불운으로 여겨질 때 우리에게 이 세상을 바꿀 의무 같은 것은 부여되지 않는다. 불의는 사회가 다루어야할 몫이지만 불운은 개인의 몫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그들의 죽음은 수많은 불운의 하나로 외면해도 되는 것들이다. 결코 우리들은 이 불의의 일부가 아니다. 우리들의 침묵과 외면은, 우리가 그들의 죽음을 불운으로 여기고 있는 명백한 증거다.

이런 우리들을 향해 슈클라가 주저함 없이 던지는 말로 이 글을 맺는다.

부정의는 단지 부정의한 사람들이 적극적으로 일상에서 저지르는 불법행위들에 의해서만 창궐하는 것이 아니다. 실제적이거나 잠재적인 희생자들로부터 등을 돌리는 수동적인 시민들(passive citizen)도 전체적인 부당함의 원인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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