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임플레이를 유튜브에 공개하면 '사회적 발언'이다

  • 기자명 이경혁
  • 기사승인 2018.11.20 08: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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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전 유튜브에서 한 게임의 플레이 스트리밍이 이슈로 떠올랐다. 서부개척시대를 다룬 플레이스테이션의 인기 신작 ‘레드 데드 리뎀션 2’의 한 장면이었다. 어느 마을에서 플레이어 캐릭터는 여성 참정권 홍보 캠페인을 벌이는 여성운동가를 만나고, 그를 살해하는 내용이 게임 플레이 영상에 담겨 있었다. 적지 않은 조회수를 기록한 이 영상은 숱한 논란을 불러일으킨 끝에 유튜브에서 내려졌고, 유튜브 관계자는 선을 넘은 콘텐츠라고 이를 판단하고 조치했음을 밝혔다. 하지만 여전히 유튜브에는 이 여성을 폭행ㆍ살해하는 영상이 올라와 있다. (아래는 참정권을 주장하는 여성을 폭행하는 영상. 시청 주의!) 

레거시 미디어에 집중되어 있던 공적 발화력이 온 대중에게 확산된 시기니만큼 당대의 주요 미디어 이슈 중 하나는 표현의 자유가 어디까지 어떻게 허용되어야 하는가에 대한 논의다. 섣부르게 특정 이슈 하나를 가지고 거대담론의 방향을 이야기하는 것은 어렵겠지만, 이번 이슈는 디지털게임과 그 스트리밍 영상이라는 측면에서라면 여러 모로 다양한 논의를 촉발시킬 수 있는 단초가 될 수 있어 보인다.

 

게임 내적 맥락: 1899년, 서부개척시대의 여성참정권

우선 사건의 배경이 된 게임의 내적 맥락들을 짚어 보자. ‘레드 데드 리뎀션 2’의 시대적 배경은 1899년의 미국이다. 남북전쟁이 끝난 후유증이 완전히 사라지지 않은 시점의 서부개척시대 무렵 언저리가 게임의 배경으로 명시된다. 미국에서 전면적으로 여성 참정권이 도입된 시기는 1920년의 수정헌법 19조 채택 시점으로, 게임이 다루는 시기보다 20여 년 뒤의 일이다.

그러나 대개 이러한 법률이 그렇듯이 어느 날 갑자기 딱 하고 참정권이 주어지지 않았다. 미국에서의 여성 참정권 운동은 19세기 초부터 그 활동이 나타나는데, 대표적으로 1848년 뉴욕 세네카 폴스에서의 선언을 들 수 있다. 이러한 흐름은 특히 남북전쟁 이후 노예제 폐지와 흑인 참정권 확보와 같은 흐름을 타고 더욱 강하게 나타날 수 있었다. 1899년이라는 게임의 배경은 따라서 여성 참정권이라는 이슈가 아직 제도적으로 확립되기 이전의 지난한 투쟁사의 한 자리를 차지하는 지점이 된다.

‘레드 데드 리뎀션 2’의 주인공인 아서 모건은 갱단 소속의 무법자outlaw로 등장한다. 무법자는 말그대로 아직 공권력이 제 힘을 발휘하지 못하던 개척지 언저리에서 법의 보호와 통제 바깥에서 살아가는 이들을 가리킨다. 살인이나 강도, 사기와 도둑질로 먹고 사는 이들은 게임 안에서 서서히 강력해지는 정부의 힘을 실감하며, 스스로 자신들, 즉 무법자의 시대가 이제 얼마 남지 않은 저물어가는 시기임을 직감한다. 몰락해 가는 갱스터 무법자가 어느 날 여성참정권 운동가를 마주친 장면이 유튜브에서 문제가 된 그 장면이다.

아서 모건이 운동가를 만나 던지는 대사는 법의 바깥에 사는 이에게 참정권이 어떤 의미인지를 간략하게나마 드러낸다. 굳이 바보 같은 투표를 하겠다는데 말릴 건 뭐냐? 정도의 괴팍한 입장은 애초에 제도 바깥에 사는 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대답일 것이다. 게임은 여기까지를 기본적인 전제로 제시하고, 그 뒤의 행동을 플레이어에게 맡긴다.

게임 '레드 데드 뎀프션 2'에서 한 여성이 거리에서 참정권을 외치는 장면.

게임 외적 맥락: 스트리밍을 통해 현재의 맥락과 얽히는 흐름

‘레드 데드 리뎀션 2’는 어느 정도 중심적인 흐름은 잡아 주지만 세세한 행동들은 플레이어의 자율에 맡기는 방식을 취한다. 앞서 언급한 대로 무법자 플레이어가 참정권 운동가를 어떻게 생각하는지의 기본 패턴만을 제시한 뒤 플레이어의 행동을 요구하는데, 게임 규칙 상 뭘 해도 일단 할 수 있는 것들이 제공된다. 무법자답게 총을 꺼내 쏠 수도 있고, 주먹으로 상대를 때릴 수도 있다. 후원금 기부에 응해 줄 수도 있고 그냥 무시하고 지나갈 수도 있다. 물론 백주대낮에 민간인을 쏘거나 했다간 당연히 신고가 들어가고 현상금이 걸리는 시스템은 갖춰져 있다.

설계된 규칙 안에서 허용된 행위를 하는 것이 문제가 될 것은 아니다. 굳이 따지고 든다면 애초에 사람을 죽이는 일 자체도 현실에서는 문제가 되지만 가상공간인 게임 안에서는 허용된다. 문제는 게임 플레이 자체가 가상의 영역 밖을 벗어나기 시작할 때 나타난다. 집안에서 혼자 게임 속 캐릭터를 쏴 죽이는 것과 이를 공적인 영역에 스트리밍하는 것은 조금 다른 맥락이기 때문이다.

21세기 대중문화콘텐츠 전반에서 페미니즘 이슈가 상당히 무겁고 또 날카롭게 다뤄지고 있다는 점을 고려할 때, 게임공간 안에서 그려진 여성참정권 이슈에 관한 플레이 행위를 스트리밍하는 것은 당대의 이슈에 명백하게 발을 걸치는 행위가 된다. 플레이 행위는 여기서 플레이어만의 감상이 아니라 맥락 속에서 특정한 방향으로의 주장 혹은 의사표현으로 거듭난다. 스트리밍된 영상은 더 이상 가상 공간에서 과거에 대한 픽션으로서의 행위가 아니라 동시대의 맥락에 대한 주장과 표현으로 자리잡는다.

 

창조적 수용으로서의 플레이가 가질 가능성과 문제점들

디지털게임은 단지 게임제작사가 만들어 둔 콘텐츠로만 그 성분이 결정되는 매체가 아니다. 게임은 설계만 해 둘 뿐, 이 콘텐츠가 최종적으로 완성되는 지점은 플레이 행위를 통해서다. 플레이는 그 자체로 텍스트를 읽는 행위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창조적 수용이라는 독특함으로 말미암아 플레이의 결과물로 새로운 맥락이나 이야기를 만들어내기도 한다. 트위치나 유튜브 등을 통해 타인의 플레이를 즐겁게 감상할 수 있다는 것은 게임 플레이가 단순한 콘텐츠 수용이 아니라 일종의 창조를 품고 있다는 사실을 드러낸다.

이러한 플레이는 제작사가 막을 수 있다거나 특정한 플랫폼이나 정부의 규제로 쉽게 막아낼 수 있는 영역도 아니다. 비슷한 사례로 과거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 에서 벌어진 성희롱 매크로 사건 등이 있다. 게임 안에서 특정 감정표현을 위해 제공되는 문구들을 조합해 상대 캐릭터에게 성희롱을 시전한 이 사건 이후 제작사는 각종 감정표현들이 악용될 가능성을 막기 위해 문구를 수정했지만, 여전히 제작사의 의도를 벗어난 플레이로 상대를 공격하는 일은 비일비재하게 나타난다.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 에서 감정표현 명령어를 이용해 강간을 연상케 하는 행위를 상대방에게 시전하는 사례들이 적지 않았다. 제작사는 가능한 경우들을 계속 수정하지만, 완전히 막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앞서도 언급했지만 주장이나 표현으로서의 게임 플레이는 창조적 수용이라는 새로운 가능성과 함께 나타난 게임의 어두운 일면 중 하나이며, 이는 단지 제작사의 규제로 막을 수 있는 성질의 것도 아니다. 지금 당장 어떤 방안이 옳다를 이야기할 수 있는 수준은 아니지만, 적어도 첫 번째 접근의 단초로서 필요한 것은 디지털게임과 그 게임의 중심을 이루는 게임 플레이라는 과정이자 결과물 또한 매체의 일종으로 생각해야 한다는 전제이다.

나의 플레이가 방구석에서 혼자 즐기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온라인 상대이든, 스트리밍을 통한 공적 릴리즈이든간에 이것이 매체라는 점을 상기하는 것은 곧 플레이가 타인을 향한 발화이자 표현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플레이를 통해 나타난 결과물을 향한 가치판단에는 따라서 플레이도 매체라는 생각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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