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스트-코로나 시대의 대안] ① 전국민 일자리 보장제란 무엇인가

  • 기자명 박가분
  • 기사승인 2020.06.24 11:12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코로나19 사태 이후 포스트코로나 시대를 대비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사회경제시스템을 새롭게 구축해야 한다는 목소리에 힘입어 기본소득제, 전국민고용보험제 등이 정치권에서 제기되었고 대안적 재정정책의 이론적 근거로서 현대화폐이론(MMT) 역시 검토되고 있다. 뉴스톱은 해외에서 검토되고 있는 또 하나의 유력한 사회경제시스템적 대안인 '전국민 일자리 보장제'의 의미와 취지, 그리고 과제를 3회에 걸쳐서 짚어보고자 한다.

[전국민 일자리 보장제] 시리즈

전국민 일자리 보장제란 무엇인가

② 위기일수록 시민권을 강화하는 일자리 보장제

③ 일자리 보장제는 기본소득보다 더 설득력 있는 대안이다

 

1. '기본소득'과 '전국민 고용보험' 둘 다 놓치는 것

최근 여권 일각의 복지정책 프레임 경쟁이 개막됐다. 포문을 연 측은 박원순 서울 시장이다. 박 시장은 지난 67전국민 기본소득보다 전국민 고용보험이 더 정의롭다고 주장하며 기본소득론의 대표주자로 알려진 이재명 경기도 지사와 정책적 차별화를 시도했다. ‘24조원으로 실직자와 대기업 정규직에게 똑같이 월 5만원씩을 지급하는 것보다, 전국민 고용보험처럼 실직자에게 월 100만원씩 지급하는 것이 더 정의롭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이재명 지사의 반격도 만만치 않다. 이재명 지사는 자신의 페이스북에 기본소득은 4차산업혁명시대에 경제선순환을 만드는 피할 수 없는 경제정책이라며 맞불을 놨다. 기본소득은 2000년대 김종철 녹색평론 발행인이 처음 소개한 이후 진보진영 일각의 주요의제로 떠올랐으며 최근 재난소득지원으로 인해 전국민적 화두가 되기도 했다.

최근 복지담론 경쟁 배후에는 코로나19 사태의 장기화가 놓여 있다. 위기의 조기종식이 전세계적으로 요원해지자 코로나발() 장기 경기침체 우려가 대두하고 있다. 이제 관건은 장기침체에 맞서 어떻게 더 촘촘한 사회적 안전망을 만들 것인가이다. 진보성향의 기본소득 옹호자들은 무조건적이고, 정기적이며, 정액으로 지급되는 화폐급여로 선별적 복지와 경제적 지원의 사각지대를 없앨 수 있다고 믿으며, 박원순 시장이 제기했던 것과 같은 형평성 문제도 부자증세 및 자산과세를 통해 해소할 수 있다고 믿는다. 이들은 자동화 시대에 기본소득은 선택이 아닌 필수라고 말한다. 한편 전국민 고용보험을 화두로 꺼낸 측도 언택트 사회과 플랫폼 노동의 확산이라는 일상의 변화를 염두에 두고 있다. 고용형태와 고용주 존재여부와 관계없이 일하는 사람 누구나 일정 소득 이하로 떨어지면 안전망이 작동해야 한다는 것이 핵심이다. 결국 두 정책 다 나름대로 포스트-코로나 시대를 겨냥한 보편적 사회안전망 구상인 셈이다.

그런데 과연 그 둘만으로 충분할까? 우선 기본소득부터 보자. 실업과 일자리 불안정이 기술발전의 필연인 것처럼 묘사하는 오랜 주장에 정밀한 근거가 있는지는 차치하더라도, 기본소득이 실직상태에 있는 사람에게 충분한 사회적 안전망이 될 수 있는지를 의문시할 수 있다. 기본소득 진영 내에서 이원재 등이 제안한 가장 급진적 대안(국민소득제: 2021년부터 재정적으로 실현 가능한 모델 제안)도 월 30~65만원 대로 생활임금 수준에 한참 못 미친다. 그리고 나중에 보겠지만, 일정한 화폐소득만 보장한다고 인간다운 삶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각종 사회적 서비스와 돌봄이 시장에서 충분히 제공되는지에 대해 의문을 제기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전국민 고용보험 역시 실업상태를 전제로 일부 소득만 보전해주는 사후약방문성격이라는 지적이 제기될 수 있다. 많은 학자들은 빈곤의 근원에 일자리 불안정과 실업이 있다고 지적한다. 그렇다면 그 원인 격인 일자리 문제를 직접 해결하면 안 될까? 현대화폐이론으로 전세계적 유명세를 얻은 경제학자 랜덜 래이(L. R. Wray)의 수사학을 빌리자면 이렇다. 시장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아 의료와 주거 그리고 먹거리가 부족할 때 정부가 이를 제공하는 것이 당연시된다. 그렇다면 일자리가 부족할 때 필요한 일자리를 정부가 직접 제공하면 왜 안 되는가?

 

2. 기후위기와 코로나19 위기에서 주목받는 일자리 보장제

앞서 언급한 문제의식은 해외에서 이미 잘 알려져 있다. 이런 문제의식을 공유하는 사람들의 강조점은 조금씩 달라도 공통적으로 전국민 일자리 보장제(Universal Job Guarantee)라는 대안으로 수렴된다. 이번 글에서는 일자리 보장제의 골자와 그 배경을 살펴보고, 이어지는 회차에서 보다 세부적인 내용을 다루겠다.

일자리 보장제란 한 마디로 정부가 일할 의사와 능력이 있는 모든 사람을 어떠한 유보조건도 없이 생활임금 수준으로 고용하도록 책임지는 제도이다. 공공근로사업 같은 것을 떠올리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일자리 보장제는 그보다 훨씬 외연이 넓을 뿐만 아니라, 일자리를 사회적 권리로 보장한다는 점에서 이전의 정책과 차원을 달리한다. 일자리 보장제에는 정부가 실업자를 직접 고용하는 방안도 있지만, 지자체와 시회적 경제부문에 고용을 위임하되 정부가 재원을 책임지는 방안도 있다. 어느 쪽이든 정부가 최종고용자(ELR: Employer of the Last Resort)로서 일자리를 책임진다는 것이 핵심이다. 최종고용자란 금융시장에 대한 최종대부자 역할을 하는 통화당국에 빗대어, 정부에 보다 적극적인 고용정책을 요구한 경제학자 하이먼 민스키(금융불안정 가설로도 유명하다)의 용어이기도 하다. 정부는 금융안정뿐만 아니라 노동시장 부문에서의 완전고용을 유지할 사회적 책무를 다해야 한다는 인식이 담겨 있다.

일자리 보장제 지지자들은 이러한 정책이 고용 불안정과 경기침체가 일상화된 뉴노멀 시대를 타개할 유일무이한 수단임을 강조한다. 나아가 일자리 보장제는 복지의 사각지대를 메우고 지역 공동체와 사회적 연대망을 활성화하는 효과적인 방안이 될 수 있다. 지역사회의 복지서비스와 돌봄 수요는 경기에 따라 진폭을 거듭하는데 기존의 관료기구와 이에 부속된 각종 외주화된 민간기관만으로는 여기에 탄력적으로 대응하는 데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전국민 일자리 보장제는 아직 한국에서 생소한 개념이다. 그러나 미국 유력대선 주자였던 버니 샌더스는 “Jobs for all”이라는 구호를 앞세우며 연방정부 일자리 보장 정책을 대선 간판공약으로 내놓았다. 이처럼 전국민 일자리 보장제는 미국 내에서 기본소득론과 더불어 사회경제적 대안에 대한 논의를 떠받치는 유력한 한 축이 되었다. 미국의 진보정치 싱크탱크 “Data for Progress”에서도 2018년에 일자리 보장제에 대한 여론조사를 실시했는데, 지지도가 가장 낮은 유타주()에서도 과반(57%)이 지지하는 등 다수의 미국민 여론이 우호적인 것으로 나타났다. 일자리 보장제가 일부 식자들의 공상에 그치는 게 아니라 대중의제로 자리잡은 것이다.

일자리 보장제에 대한 미 국민 지지도. 자료: www.dataforprogress.org
일자리 보장제에 대한 미 국민 지지도. 자료: www.dataforprogress.org

 

일자리 보장제는 그린뉴딜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 미국의 청년 하원의원 알렉산더 오카시오-코르테스(AOC)는 미국의 전기에너지원 대부분을 10년 내 재생가능에너지로 전환하겠다는 골자의 그린뉴딜(Green New Deal) 결의안을 작년에 주도적으로 발의해 화제가 됐다. 그린뉴딜과 일자리 보장제는 언뜻 성격이 다른 환경정책과 경제정책의 조합처럼 보이지만 AOC 이전에도 있었던 그린뉴딜과 AOC판 그린뉴딜의 결정적 차이점이 정의로운 이행(just transition)에 있다는 점에 주목하면, 둘의 관계가 뚜렷이 보인다. 정의로운 이행이란 간단히 말해 환경개선과 에너지 전환의 부담·비용을 특권층에 물리고 중산층 이하 서민에게는 혜택을 집중시키자는 발상이다. 기후변화 정책이 대중의 무관심 속에 끝난 것 이면에는 해당 정책이 일부 기업의 이윤에 복무하거나 서민들에게만 각종 불편과 비용을 전가하는 등 사회경제적 정의를 담보하지 못했다는 반성이 담겨 있다.

기후변화 시대 속 정의로운 이행의 핵심에는 일자리가 있다. 그린뉴딜 정책을 전폭적으로 지지하는 버니 샌더스 역시 대선 레이스 국면 당시 친환경 에너지에 대한 대규모 정부투자와 (에너지 효율개선 명목의) 빈곤층 주거 인프라 개선사업 등을 일자리 보장제 실현의 주요 수단으로 구상했다. 지금도 미국의 많은 환경단체에서는 일자리 보장제를 환경정책에 대한 국민적 지지를 확보하고 대규모 사회적 투자와 인프라 개선을 견인할 수 있는 유력한 방안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이처럼 그린뉴딜을 그린뉴딜답게 만드는 것은 일자리 보장제이다.

전국민 일자리 보장제는 미국 대선 국면과 기후변화 담론에 큰 영향을 미쳤을 뿐만 아니라 최근의 코로나19 경제위기 속에서 다시 한번 주목받고 있다. 지난 3월에서 5월까지 미국에서 무려 4천만명 가량의 노동자들이 실업급여를 신청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일자리 보장제가 위기극복의 유력한 처방전으로 급부상한 것이다. 나중에 보겠지만, 일자리 보장제는 경기역행적 재정정책의 성격을 갖는다. 일자리 보장제를 시행한다면 지금과 같은 심각한 경제위기와 마주할 때 별도의 법안이나 행정명령 없이 정부가 자동으로 위기의 수준에 맞춰 개입의 강도와 범위를 탄력적으로 늘릴 수 있다. 일자리 보장제가 최근 경제학계의 화두가 된 자동안정화 장치(automatic stabilizer)의 유력 후보로 주목받는 이유이다.

.미국 내 실업급여 신청자 동향. 자료 : US Department of Labor (Vox에서 재인용)
.미국 내 실업급여 신청자 동향. 자료 : US Department of Labor (Vox에서 재인용)

 

전국민 일자리 보장제는 미국 바깥에서도 진지하게 논의되고 있다. 최근 오스트레일리아 녹색당은 만 30세 이하 청년들에 대한 일자리 보장제를 실시하자고 요구하고 나섰다. 코로나19 위기 사태를 맞아 청년 실업이 급격히 늘자 녹색당 당수인 아담 밴트는 지난 5월에 청년 일자리 보장 정책을 공식적으로 제안했으며, 일자리 창출 방안으로는 재생가능에너지에 대한 정부투자 등을 언급했다. 한국에서도 김용기 일자리위원회 부위원장이 지난 4월에 한국판 뉴딜 및 포스트 코로나 대책에 청년 일자리 보장제를 포함하자고 제안한 것이 언론에 의해 알려졌다. 35세 이하의 청년 모두를 대상으로 과감한 일자리, 교육훈련, 실습 보장 패키지를 실시하자는 것이다. 이 역시 청년 대상 정책이긴 하지만 이후 그 외연을 넓힐 수 있다는 점에서 전국민 일자리 보장제의 변형으로 간주할 수 있다.

 

3. 전통적 경제정책의 한계와 현대화폐이론(MMT)의 처방

이제 일자리 보장제의 이론적, 학문적 배경과 최근의 논의양상을 살펴보도록 하자.

현대화폐이론(MMT: Modern Monetary Theory)은 일자리 보장제의 주요 이론적 논거 중 하나이다. MMT는 정부의 재정활동이 독점적 발권력을 가진 중앙은행을 중심으로 한 은행 결제시스템을 경유해서 작동한다는 점에 착안해, 재정정책과 통화정책은 분리 불가능하며 특히 정부는 발권력에 기초해 재정지출을 수행한다고 주장한다. 예컨대 정부의 재정지출은 거의 자동적으로 은행시스템상의 은행예금과 지준금 증가라는 통화창출과정을 동반한다. 한편 그동안 정부재정의 재원으로 인식됐던 세금수입과 채권판매는 MMT의 관점에서 재원조달 수단이 아니라 정부지출로 창출한 통화를 이자율 관리를 위해 사후적으로 회수하는 수단에 불과하다.

위와 같은 인식에 기초해 MMT 이론가들은 재정지출이 세입에 선행하며, 특히 정부의 지출능력이 이론상 무한하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정부가 발권력과 재정지출을 남발해도 된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MMT론자들은 정부는 경기에 따라 재정운용을 탄력적으로 할 수 있다는 2차대전 전후 활약한 경제학자 러너(A. P. Lerner)기능적 재정론을 계승한다. 이에 따라 균형재정이나 인플레이션 타게팅이 아닌 완전고용을 정부의 정책목표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경기침체가 장기간 지속되자 주권통화를 발행하는 정부는 재정 건전성에 구애받지 않고서도 완전고용을 달성할 수 있다MMT의 이러한 주장이 세간의 눈길을 끌었다

이러한 현대화폐이론의 세부사항에 대한 설명은 이미 전용복 교수가 뉴스톱 기고를 통해 제시해 놓았으므로 여기서는 그 정책적 함의만 언급해둘까 한다. 많은 사람들은 여전히 현대화폐이론을 단순히 정부지출 확대와 과감한 적재재정 편성을 강조하는 이론으로만 받아들이곤 한다. 그러나 MMT 진영이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정책 강령은 일자리 보장제이다. 예를 들어 대표적인 MMT 경제학자이자 버니 샌더스 등의 정책 자문 역할을 한 스테파니 켈튼 교수는 일자리 보장제야말로 MMT의 해법이라고 단언한 적이 있다.

 

스테파니 켈튼의 일자리 보장제 언급.
스테파니 켈튼의 일자리 보장제 언급.

 

그렇다면 왜 이들은 (흔히 케인스의 아이디어로 알려진) 통상적인 총수요 부양정책에 그치지 않고 정부의 직접적 일자리 창출을 통한 고용보장을 대안으로 내세우는 것인가. 이들의 주장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전통적 거시경제이론에 입각한 경제정책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던 그간의 사정을 살펴봐야 한다. MMT는 불완전고용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던 기존 재정·통화정책의 한계에 대한 성찰에서 출발하기 때문이다.

잘 알려졌다시피 전통적 통화정책과 양적완화(QE) 정책 모두 금융위기 이후의 대침체(Great Recession)를 막지 못했다. 특히 양적완화 이후 은행시스템 내 준비금이 천문학적 규모로 증가했지만, 주류 통화이론의 예측과 달리 대부분은 은행의 대차대조표상에 머무를 뿐 생산적인 활용처를 찾지 못했다. 그간의 통화정책은 경제회복을 자극하는 데 한계가 있었던 것이다. 아울러 MMT 옹호론자들은 전통적인 경기부양 재정정책도 고용 창출에 한계가 있었다는 점에 주목한다. 그에 따라 직접고용에 의한 일자리 보장책을 더 강조하는 것이다.

한국의 경우에도 금융위기 이후 2018년까지 경제의 고용창출 여력의 지표인 고용탄력성이 하락추세를 보여 논란이 되었다. 다만 2019년에는 경기후퇴기임에도 불구하고 이 지표가 반등했는데, 정부의 노인 일자리 창출 정책으로 인한 고용지표 개선 덕으로 풀이된다. 오직 민간부문만 의미 있는 고용을 창출한다고 믿는 보수언론은 노인 일자리 지표개선에 대해 맹비난했지만, MMT의 관점에서는 이 정책의 효과를 정반대로 해석할 수 있다. 즉 경기가 어려울수록 정부는 노인계층만이 아니라 전국민에 대한 최종고용자(ELR)’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는 것.

 

한국의 고용탄력성. *고용탄력성=(취업자증가율/경제성장률)×100.  자료: 통계청
한국의 고용탄력성. *고용탄력성=(취업자증가율/경제성장률)×100. 자료: 통계청

 

또한 같은 관점에서 지난날의 재정정책 논란을 복기할 수 있다. 작년 문재인 정부가 불황기에 과도한 초과세수를 거뒀다는 논란이 진보진영을 중심으로 제기됐다. 반대로 올해에는 코로나19 추경예산을 계기로 재정적자가 과도하다는 논란이 보수언론을 통해 제기되고 있다. 하지만 MMT의 관점에서 두 논란 모두 요점을 빗나가 있다. 그 관점에 따르면 우선 재정적자는 그 자체로 나쁜 것이 아니므로 재정적자 논란은 간단히 일축할 수 있다.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적자를 통해 완전고용을 달성할 수 있느냐 여부이다. 아무리 지출을 늘리고 적자를 쌓아도 완전고용에 도달하지 못하면 경기회복은 어렵다는 것이 대다수 MMT론자의 시각이다.

 

4. 세상에 좋은 실업은 없다

그렇다면 이들은 왜 이토록 실업을 경계하는가. 저명한 경제학자 앨런 블라인더는 일할 의욕과 능력이 있는 모든 이들에게 생산적 일자리를 제공하지 못하는 것은 자본주의의 주요 맹점 중 하나라고 지적한 바 있다. 시장 시스템에만 맡기면 양질의 일자리를 지속적으로 보장할 수 없다는 의미다. 실업은 분배 문제도 초래하지만 효율성의 측면에서도 유휴노동이라는 심각한 자원의 낭비를 낳는다. 그런데 여기에 대한 지금까지의 주류 거시경제학의 입장은 사뭇 달랐다. ‘경기적 실업과 별개로 기술변화에 의한 구조적 실업과 일자리 탐색에 의한 마찰적 실업의 일부는 항구적으로 존재할 수밖에 없다는 것. 이들은 이를 자연실업률 혹은 인플레이션을 가속하지 않는 실업률(NAIRU; non-accelerating inflation rate of unemployment)이라는 개념으로 풀이했다. 특히 통화주의 도그마가 확산되자 인플레이션을 방지하기 위해서라면 일정한 실업이 존재하는 것은 바람직할 수 있다고 말하는 사람들마저 생겼다.

반면 실업과 시장실패에 주목하는 연구자·활동가의 입장에서 볼 때 자연실업률 개념은 그야말로 외설적이다. 여기에 대해 일자리 보장제의 대표적 논객인 체르네바(P.R. Tcherneva)누구도 자연 빈곤율이나 자연 노숙자 비율을 운운하지 않는다고 일갈한 바 있다. 이처럼 실업은 불가피하거나 자연스러운 현상이라는 관념에 대한 비판은 크게 세 측면으로 나눠 볼 수 있다. 공식적 실업지표로 파악되지 않는 장기적 실업 문제가 만연하다 이러한 실업의 사회적 비용은 인플레이션보다 더 크다 실업문제가 장기화되면 무엇이 경기적·일시적 실업이고 구조적 실업인지 구분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우선 공식적 지표로 잡아내지 못하는 불완전고용의 문제를 보자. 통계상의 공식 실업자는 최근 구직활동을 한 사람 중에서 일자리를 구하지 못한 사람을 의미한다. 그러나 여기에 포착되지 않는 사람도 존재한다. 예컨대 장기간 취업 실패로 구직을 단념한 사람들은 비경제활동인구로 분류돼 실업자로 집계되지 않지만 사실상 ‘숨어 있는 실업자’이다. 여기에 더해 단시간 임시직을 전전하지만 기회가 되면 추가적인 취업을 희망하는 노동자까지 고려하면 금융위기 이후 표면적 경기회복에도 불구하고 주요 선진국에서 일자리 문제가 지속되고 있다는 점을 볼 수 있다. 예컨대 금융위기 이후 실업률이 획기적으로 개선된 미국의 경우 고용회복의 상당 부분이 저임금 불안정 일자리에 집중됐다. 즉 많은 시민들이 장기간 실업을 견디지 못하고 질 낮은 일자리를 감내한 것이다. 이에 따라 가계소득이 개선되지 못하고 소득 격차가 확대된 점이 금융위기 이후 느리게나마 진행되었던 경기회복의 한계로 지적되고 있다. 이러한 위장된 불완전고용 문제 때문에 MMT와 일자리 보장제 지지자들은 실업률 지표의 관리를 넘어서 보다 적극적인 완전고용 정책을 지향하는 것이다. (참고: 아주경제,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미국·독일 등 주요국 가계상황 악화", 2017.05.21.)

한국에서도 다른 주요 선진국과 마찬가지로 청년실업 문제가 가장 심각하다. 공식 실업자에 더해 ‘시간 관련 추가취업 가능자’와 ‘잠재구직자’ 등을 반영해 산정한 고용보조지표를 보면 문제는 더 심각해진다. 2003년부터 청년고용보조지표를 추산한 한국은행 경기본부에 따르면 이는 공식 청년실업률보다 더 높을 뿐만 아니라 청년실업률보다 더 뚜렷한 증가추세를 보였다. 청년들은 기술변화에 가장 빠르게 적응하는 계층이며 구직활동에 제일 의욕적이다. 따라서 마찰적 실업이나 기술변화만으로 만성화된 청년 일자리 문제를 설명할 수 없다. 혹자는 노동시장의 경직성을 운운하며 기성세대의 해고를 쉽게 하면 된다고 말하지만, 정작 그렇게 고용조건이 불안정한 일자리를 (안정적 일자리를 얻기 위해 장기간의 수험생활을 불사하는청년 자신부터 선호하지 않는다. 기성세대의 쉬운 해고는 청년들을 더욱 불안정한 일자리로 내몰고 가난을 대물림하는 문제를 낳는다. 결국 청년 등의 실업 문제가 악화되는 것 이면에는 경기침체가 일상화된 시대적 상황(=뉴노멀) 속 정부의 책임방기가 가장 큰 몫을 차지한다는 게 일자리 보장제를 옹호하는 MMT 진영의 시각이다.

미국 내 실업자 및 불완전고용 추이. 자료 : Tcherneva(2014)
미국 내 실업자 및 불완전고용 추이. 자료 : Tcherneva(2014)

 

한국 내 청년실업률 및 고용보조지표 추이. 자료 : 한국은행 경기본부
한국 내 청년실업률 및 고용보조지표 추이. 자료 : 한국은행 경기본부

 

이처럼 실업 문제를 가벼이 보면 안 되는 이유는 명확하다. 그 문제가 주로 빈곤층에 집중돼 소득·주거·건강·교육·안전 등 사회적 불평등 문제로 직결될 뿐만 아니라(다수의 연구자들이 지적하듯) 강력범죄와 혐오문제 등 각종 사회해체 현상을 초래하기 때문이다. 이 문제는 인플레이션에 대한 막연한 공포보다 더 실제적이고 위협적이다. 게다가 완전고용을 추구한다고 해서 반드시 인플레이션이 발생하는 것도 아니다. 그 점에 대해서는 다음 회차에 다루겠다.

마지막으로 MMT와 일자리 보장제 지지자들은 실업이 장기화될 때 그것이 마치 정상적인 상태처럼 비춰지는 현상을 극도로 경계한다. 많은 포스트케인지언 경제학자들이 지적하듯 실업에는 이력효과(hysteresis effect)와 경로의존성(path dependence)이 존재한다. 예를 들어 실업상태가 장기화되면 노동숙련도가 유실될 뿐만 아니라 미취업 이력 자체도 노동시장에서 낙인으로 남는다. 따라서 실업과 불완전고용 상태를 오랜 기간 방치하면 개인뿐만 아니라 사회 전체의 잠재적 생산과 고용여력도 하락한다. 이 때문에 비판적 연구자들은 실제의 실업률과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자연실업률 개념은 허구적일 뿐만 아니라 해롭다고 본다. 사회적 책임방기로 지속된 일자리 문제를 사후적으로 정당화하고 문제를 고착화시키기 때문이다.

 

5. 나가며 왜 일자리 보장제에 주목하는가

과거에 가난은 나랏님도 구제할 수 없는 불행이라 봤다. 하지만 최근 사회적 기본권 개념이 확산되자 그러한 관념은 점점 설 자리를 잃고 있다. 하지만 이 낡은 관념의 잔재는 현대사회에서도 실업만큼은 정부와 사회도 어쩔 수 없다는 형태로 재생되고 있다. 특히 현실 사회주의 붕괴 이후 사회경제적 대안에 대한 논의가 철저히 소득과 일부 한정된 자원의 사후적 재분배에 국한되면서 실업문제에 대한 패배주의적 관점이 진보진영 내에서도 소박한 기술결정론의 외양을 취한 채 확산되고 있다. 반면 전국민 일자리 보장제는 일자리 문제를 빈곤과 소외의 근원으로 지목하며 이것 또한 다른 사회문제와 마찬가지로 정책과 집합적 의지를 통해 해소해야 할 문제라는 시각을 견지한다. 이뿐만 아니라 소박한 기술결정론과 성급한 탈노동 선언에 맞서 현대사회에서 노동이 의미 있게 발현될 수 있는 조건과 사회적 관계에 대한 고민을 현실의 정책 공간에서 전개한다는 점도 의미 있다. 진보적 대안에 대한 그간의 논의에서 빠져 있던 잃어버린 고리의 하나로 전국민 일자리 보장제 논의에 주목해야 하는 이유이다.

필자 박가분은 '공정하지 않다'(2019), '혐오의 미러링'(2016), '가라타니 고진이라는 고유명'(2014), '일베의 사상'(2013), '(공저)무엇이 정의인가(2011)' 등 단행본과 '암호화폐, 지급 수단인가 투기적 자산인가?(2019)' 등 논문을 출간했다. 제1회 창작과 비평 사회인문평론상을 수상('변신하는 리바이어던과 감정의 정치', 2014)했고 현재 청년단체 진보너머 운영위원으로 활동 중이다.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관련기사
오늘의 이슈
모바일버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