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유립은 왜 편찬자로 계연수를 내세웠을까

  • 기자명 이문영
  • 기사승인 2020.07.29 1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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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3월에 유사역사학 분야에서 주목할 만한 논문이 나왔다. 장신 박사의 <이유립의 계연수 날조기>(역사와 현실 115)이다. 아래 내용의 대부분은 장신 박사의 논문을 참조하여 정리한 것이다.

계연수는 <환단고기>를 편찬했다고 이유립이 주장하는 인물이다. 그동안 계연수의 실존성에 대한 의문은 있었는데 이유립이 왜 계연수라는 인물을 내세웠는지에 대한 연구는 존재하지 않았다.

이유립은 <환단고기>를 통해서 고성 이씨가문을 내세웠다. <환단고기> 각 편의 지은이인 이암, 이맥과 감수자 이기 등이 모두 고성 이씨이다. 그런데 제일 중요한 <환단고기>의 편찬자로는 그의 아버지 이관집 등이 아니라 계연수를 내세웠던 것이다. 그 이유는 과연 무엇일까?

 

유사역사학에서 계연수의 역할은 어떻게 변해왔나 

계연수라는 이름이 처음 나온 것은 19202월 베이징에서 출판된 전병훈의 <정신철학통편>이다. 단군교 간부였던 윤효정이 전병훈을 찾아와서 <천부경>을 전달해주었는데 <천부경>은 도인 계연수가 발견했다는 내용이 이 책에 들어있다.

192111월 단군교 기관지 <단탁> 창간호에 계연수가 보냈다는 편지가 실렸다. 여기서 계연수는 자신을 향산유객(香山遊客)이라고 소개하고 있다. 그는 묘향산에 약초를 캐러 갔다가 석벽에서 천부경을 발견했다고 말했다. 계연수가 보냈다고 주장은 하지만 원본은 존재하지 않는다.

일제강점기 때 계연수 기록은 1924년의 김택영 <단씨조선기>, 1937년 단군교 정진홍이 간행한 <단군교부흥경략 전>에도 나오는데 내용은 <단탁> 창간호에 실린 것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계연수는 이후 잊힌 상태였다가 이유립에 의해서 다시 등장한다. 이유립은 19653월에 단단학회 기관지인 <커발한>을 발행했는데 이 신문에 실린 <천부경에 대한 나의 관견>이라는 글에 계연수가 나타난다.

 

이 천부경은 고운 최치원 선생이 일즉 태백산 석굴에 각치(刻置)하였던 것이나 세인(世人)이 오랫동안 구지부득(求之不得)이라가 단기 4250년에 와서 운초거사(雲樵居士) 계연수(桂延壽)와 국은(菊隱) 이태집(李泰楫) 두 분이 영변 묘향산에 들어가 영약을 캐려다니다가 우연히 심학절벽(深壑絶壁)에 유각(留刻)되어 있는 것을 발견하고 이 천부경 81자를 각기 사출(寫出)하여 운초는 단군교 본부로 보내고 국은은 단학회로 보내여 비로소 세상에 다시 전파되었다는 것이다.

 

단기 4250년은 1917년이다. <단탁> 창간호에 계연수가 보낸 편지를 보면 묘향산에서 <천부경>을 발견한 해는 1916년이다. 이때 이 사람들은 그 사실을 잘 몰랐던 것이다. 그리고 <천부경> 발견의 공을 고성 이씨 가문에게 나눠주기 위해서 이태집(이유립의 숙부)이라는 인물을 끼워넣었다. 이때까지는 계연수는 그저 운초거사에 지나지 않았다.

계연수는 19689월 발간된 <커발한> 14호에서 단학회 지도자로 업그레이드 되었다. 1909년 단학회 설립에 계연수, 이관집(이유립의 아버지) 등이 관여했고 대종사 이기가 죽은 뒤에도 계연수가 주요 간부로 활약한 것으로 나온다. 1914년에는 계연수 등 12명의 주요 간부가 평안북도 천마산 성인당에서 단학회의 기본 대책을 토의하고 본부를 남만주 관전현 홍석랍자에 두고 <단학회보> 발간 등을 결정한 것으로 나온다.

19703월에 나온 <커발한> 17호에서는 단학회 2대 회장으로 또 한 번 지위가 업그레이드 된다.

이에 앞서 1969년에 <커발한> 이외의 책에서 계연수가 등장했다. 성창호가 편찬한 <해동인물지>에 실린 것이다. 여기서 계연수의 자가 인경, 호가 운초라고 나온다. 1898년에 <단군세기><태백유사>를 간행했다고 적혀있기도 했다. 아직 <환단고기>가 등장 전이어서 그 이름은 나오지 않았다. <단군세기><환단고기> 안에 들어있는 편명이지만 <태백유사>라는 책은 존재하지 않는다. <환단고기> 안에는 <태백일사>가 들어있다. 이유립이 나중에 이름을 고친 것이다.

1971년에 이유립은 <환단휘기>라는 것을 간행했는데 여기에 계연수가 쓴 발문이 실려있다. 이 발문에서 계연수는 1898년에 <태백일사>를 간행한 것으로 적었다.

1973년에 이유립이 낸 <광개토성릉비문역주>에서 또 새로운 계연수의 행적이 추가되었다. 계연수가 1898년에 이유립의 아버지 이관집과 함께 광개토왕비를 답사하고 탁본을 떴다는 내용이었다.

19755월에 발행된 <커발한> 47호에는 커발한 중요소록이라는 기사가 실려있다. 여기서 계연수는 운초대승정으로 또 한 번 업그레이드 되었다. 그리고 <천부경> 유래가 <환단고기> 내용과 충돌하는 점을 해결하기 위해 계연수가 1916년에 묘향산에서 <천부경>을 발견한 것이 아니라 묘향산에 석각을 한 것이라는 기상천외한 이야기를 꺼냈다.

<환단고기>1911년에 나왔는데 이미 <천부경>이 실려있었다. 그런데 1916년에 <천부경>을 처음 발견한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이 때문에 계연수가 이미 알고 있던 것으로 날조했던 것이다. 이것은 1965년에 나온 <커발한>과도 충돌하는데, 이유립은 이런 것을 후대에 꼼꼼히 대조 확인할 줄은 꿈에도 몰랐을 것이다. 이후에도 <천부경> 계연수 각서설은 이유립이 여러차례 강조한 바 있다.

여기서 짚고 가야할 부분이 있다. 이유립은 계연수가 1898년에 <단군세기><태백일사>(또는 <태백유사>를 간행했다고 이야기한 바 있다. 이 책들은 <환단고기>를 구성하는 주요한 책이다. 이 때문에 <환단고기>1898년에 편찬되었다는 주장이 단단학회 내부에서 나오게 된다. 1976년에 나온 <커발한문화사상사> 1권에는 단단학회 간부 조영주의 환웅천왕 소상의 유래라는 글이 실려있는데, 여기에 이덕수의 회고록에 나온다고 하면서 1898년에 계연수 대승정이 <단군세기>, <태백일사>를 포함한 <환단고기>를 간행했다고 주장한 것이다.

그러나 잘 알려진 것과 같이 1979년에 <환단고기>가 광오이해사에서 출판되면서 이 책의 간행일은 1911년으로 정정되었다.

19793월에 나온 월간 <자유>에 계연수가 감연극(일명 감영극)이 보낸 밀정에 의해 암살되었다는 내용이 처음 등장했다. 이 감연극에 대해서도 장신 박사는 <유교청년 이유립과 환단고기>(역사문제연구 39)에서 잘 분석한 바 있다.

감연극은 이유립의 고향인 평안북도 삭주에서 악명이 높았던 아마도 헌병보조원이었던 인물로 독립운동가를 체포 사살 등을 했다. 그러면 이런 악질 친일파에게 계연수가 정말 죽었을 수도 있는 것 아닌가 싶겠지만, 그럴 수가 없다. 이유립의 주장에 따르면 계연수는 상당한 거물 독립운동가인데 당시 기록들에는 감연극의 악행이 소상히 전하고 있다. 계연수가 정말 거물 독립운동가였다면 감연극의 혁혁한 전공에 그 이름을 올리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이유립 아버지 이관집은 왜 환단고기 편찬 관련 뒷선으로 물러났나

이관집의 일생은 1962년에 나온 <철성이씨백세이감>에 행장으로 실려있다. 이 책의 편찬에는 이유립이 참여해서 자기 아버지 일생을 기록했다. 이 기록 역시 전적으로 믿을 수는 없는 이야기들이다.

행장에 따르면 이관집은 1905년 을사늑약 체결에 분개해서 자강회를 설립했다. 행장이 실린 때는 계연수 날조극이 시작되기 전이어서 1898년에 광개토대왕비를 답사했다든가 하는 이야기는 실려있지 않다. 1909년에는 일진회의 합방청원에 분개해서 동지를 규합하기도 했다. 부황보국론(扶皇保國論) 즉 황제를 모시고 나라를 보존한다는 이론에 따른 유교주의자로서 행동한 것이다. 1910년 일제가 대한제국을 강점하자 이관집은 백두산에 들어갔다. 1912년 나온 대종교의 <삼일신고>를 연구해서 나철의 잘못을 수정하고자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191811월 이후에 헤이그 밀사로 유명한 이상설을 만나 고종의 복위를 의논했다. 이상설은 1917년에 러시아에서 죽었으므로 그는 유령을 만났던 모양이다. 이관집은 1926년 순종이 죽은 후로는 후진 양성에 뜻을 두고 살아갔다.

이관집은 왕정복고를 하고 싶었던 1947년 유언을 남기길 일본에 있는 영왕을 옹립하여 대한제국을 다시 세우라고 했다. 이유립은 이에 따라 왕정복고를 계획하다가 19526월에 체포되기도 했다.

이관집의 행장을 살펴보면 계연수는 물론 단학회도 등장하지 않는다. 이유립이 1965년 단단학회 즉 태백교를 만들던 때까지는 계연수나 단학회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유립은 1960년대 단단학회(태백교)를 만들면서 교리와 역사를 창조해냈다. 단단학회의 전신으로 단학회를 설정했다. 종교에서 자신의 가문을 신성시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 하겠다. 이에 따라 이암, 이맥, 이기로 신성 혈통을 설정했는데 문제는 아버지였다. 이기를 단학회 초대회장으로 한 이상 그 적통은 아버지 이관집에서 자신으로 이어가는 것이 좋았겠지만 이관집은 세상이 다 아는 부황보국론자에 유교도였다는 점이 마음에 걸렸다.

특히 아버지의 유언에 따라 왕정복고를 꾀하다 옥고를 치르고 나오자 왕정을 다시 세운다는 복벽론의 허망함을 뼈저리게 느꼈다. 이에 따라 천부경의 발견자로 알려졌지만 세부 사항은 하나도 알 수 없는 계연수를 내세우게 되었다. 아버지 대신이었던 것이다. 계연수는 아무 세부사항이 알려지지 않았기 때문에 아버지 같은 약점도 없었다.

이런 이유로 이유립은 1965년 계연수를 꺼내들었는데 1969년까지는 그저 독립운동가이자 단학회 지도자로만 설정되었다. 1970년대에 들어와서 민족사학의 계승자이자 <환단고기>의 편찬자로 포장되고 일제에 의해 살해된 비극적 생애까지 만들어내게 되었던 것이다.

 

홍범도 오동진 등 독립운동가도 환단고기에 이용한 이유립

이유립은 <환단고기>를 위해서 계연수만 이용한 것이 아니었다. 독립운동가 오동진이나 홍범도 등도 이용했다. 오동진의 경우 1898년 광개토왕비 답사 때 50금을 지원했다고 나오는데, 이때 오동진의 나이는 열 살이었다. 오동진은 1889년생인데 1865년생인 줄 알고 있었다. 오동진의 고향도 잘못 쓰고 있다. 오동진에 대해서 기초적인 사실 관계도 제대로 몰랐던 것이다. 그리고 오동진은 독실한 기독교인이었다. 그가 단군 신앙을 섬기는 단학회 회원이 될 까닭이 없다. 단단학회 측은 오동진이 이관집과 의논해서 3.1운동에 참가했다고 말하지만 이것도 사실이 아니다. 오동진은 민족대표 33인 중 한 명인 의주서교회 담임목사 유여대의 전갈로 3.1운동에 참여했다.

홍범도 관련도 전혀 믿을 수 없는 이야기이다. 홍범도가 19115월에 <환단고기>를 간행하는데도 자금을 지원했으며 1918년에 단학회 고문이 되었다고 한다. 홍범도는 국내에서 의병 활동을 하다가 19105월 연해주로 이동했다. 19113월에는 함경북도 경원의 일본군 수비대를 공격하는 등 무장투쟁을 이어갔다. 191111월에는 블라디보스토크에서 21의형제동맹을 결성했다. 이후에도 연해주를 중심으로 활동을 이어가다가 19199월에서야 북간도로 무장병력과 함께 이동했다. 그가 이렇게 두만강 쪽에서 활동하고 있었는데 어떻게 압록강 쪽의 삭주나 관전현 쪽의 일에 관여할 수 있었겠는가. 홍범도의 숱한 기록들에 단학회가 등장하는 일도 없다.

이외에도 그야말로 유명하다싶으면 독립운동가들과 인연이 닿은 것으로 마구잡이로 주장하는데 사실은 하나하나 검증할 필요도 없다. <환단고기>의 허구성은 이미 수없이 많은 논문이 증명한 바 있으며 그에 수반되어 나온 이야기들도 살펴본 바와 같이 사실 관계가 죄다 틀렸다.

이런 날조극에 휘둘리는 일은 이제 그만 두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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