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미래를 예측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래학자가 되고 싶다면...

  • 기자명 더사실포럼
  • 기사승인 2020.10.05 14: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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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사실포럼 칼럼] 아무 것도 모를 때 합리적으로 미래를 예측하는 법 ①

“올해는 과학계에 당장 혁명을 일으킬 수 있는 눈에 띄는 놀라운 발견이 없었습니다.”

– 토마스 벨

 

필립 테틀록과 토머스 홉스: 미래는 예측할 수 없다

위의 인용문은 찰스 다윈과 알프레드 러셀 월레스가 런던 린넨 학회에서 ‘자연 선택에 따른 진화 이론’을 공동 발표했던 1858년 7월 1일에 동물학자이자 당시 학회 회장이었던 토마스 벨이 했던 말이다. 스마트폰을 대중화시킨 애플이 2007년 최초로 아이폰을 출시하기 직전까지도 많은 기술 전문가들이 애플이 셀폰을 절대로 만들어 내놓지 않을꺼라고 호언장담들을 하고 있었다. 아이폰이 막상 나왔을 당시에도 마이크로소프트 CEO였던 스티브 발머는 “아이폰이 상당한 시장 점유율을 차지할 가능성이 없다. 그럴 일은 절대 없다.”고 말했다. 13년이 지난 지금, 전세계 인구의 약 35억명이 스마트폰을 소유하고 있고 애플 아이폰은 엄청난 시장 점유율을 보여왔다. 특정 분야에 오랜 경험을 가진 전문가들이, 역설적으로 곧 일어날 미래에 대한 예측에 있어 적중률이 끔찍할 정도로 나쁘다는 현상은 1984년부터 2003년까지 진행된 정치 심리학자 필립 테틀록의 연구(1)를 통해 잘 알려져 있다. 게다가 토마스 벨의 경우처럼 혁명적인 변화가 이미 일어났어도 알아보지도 못하는 사례들은 차고 넘친다

 

그림 1. 필립 테틀록의 20년에 걸친 연구에 따르면 기밀 정보에까지도 접근 권한이 있는 각 분야의 전문가들의 예측의 정확도는 침팬지가 다트를 던져 찍어 답을 맞추는 정확도보다도 낮다는 것을 보였다. 뉴욕타임스 화면 캡처.
그림 1. 필립 테틀록의 20년에 걸친 연구에 따르면 기밀 정보에까지도 접근 권한이 있는 각 분야의 전문가들의 예측의 정확도는 침팬지가 다트를 던져 찍어 답을 맞추는 정확도보다도 낮다는 것을 보였다. 뉴욕타임스 화면 캡처. https://www.nytimes.com/2012/06/24/opinion/sunday/political-scientists-are-lousy-forecasters.html

 

단기간의 미래 예측이 이렇다면, 장기적인 미래 예측(2)은 어떨까? 1954년, 미국 원자력 위원회 의장이었던 루이스 스트라우스는 전미과학기자협회에서 앞으로 원자력은 계량기로 재도 너무나 싼 에너지를 공급하게 될 것이고, 관련된 과학기술의 발전으로 인해 우리는 기근을 역사 속에서나 보게 것이며, 원자력이 인간 수명을 연장시키고, 평화를 가져올 것이라고 말했다. 1971년에는 전미 원자력 위원회 의장을 하고 있던 노벨 화학상 수상자인 글렌 시보그가 2000년까지 원자로가 전세계 거의 모든 전기를 생산할 것이고, 해수를 담수로 만드는 거대한 해안 핵구조물, 소형 원자로로 만든 TV 방송용 정지 위성 그리고 인간을 화성으로 보내줄 핵추진 장치들에 대한 예상을 발표했다. 전세계적으로 코로나19가 창궐한 이후, 요즘 툭 하면 나오는 미래 사회 관련 뉴스들과 비슷하지 않은가?

최근 토마스 프레이라는 미래학자가 코로나19 이후로 기존 삶과 경제 구조를 바꾸게 되고 유전자가위 기술을 적용한 바이오 공학 발달이 질병 극복과 인간 기대 수명을 이끌 것이라고 말했다. 얼마 전에는 과학기술정보통신부에서 2019년에 만든 각 분야의 전문가 144명으로 구성된 ‘2045 미래 전략위원회’에서 ‘과학기술 미래 전략 2045’를 발표하였는데, 큰 줄기의 내용은 토마스 프레이의 예측이나 루이스 스트라우스의 예측과 별반 다르지 않다. 각 시대마다 쏟아져 나오는 수많은 미래 예측들은 예측에 사용된 당대 유행하는 기술의 종류에 차이를 보일 뿐, 눈부신 기술 진보가 일어날 것이라는 낙관적인 기대 위에, 자신들의 우려와 바램이 섞인 추측들이기 때문이다. 아마 그래서 한 사람이 예측한 내용이 각 분야 100명 이상의 전문가들이 모여 내놓은 미래 예측 내용과 대동소이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근대 철학자 토마스 홉스도 그의 책 <레비아탄>에서 현재는 자연 속에 실재하는 것, 지나간 일은 기억 속에만 존재하는 것, 그리고 앞으로 닥쳐 올 일은 전혀 실재하지 않는 것이라고 말하면서, 미래는 일련의 과거 행동을 현재에 적용하여 만들어 낸 인간 정신의 조작에 지나지 않는다고 일갈했다. 홉스에 따르면, 미래에 대한 추측은 모든 상황을 두루 살펴보기 어렵기 때문에 빗나가기 십상이다. 무엇보다 닥쳐올 일에 대한 선견지명은 그 닥쳐올 일들을 만들어내는 자만이 가질 수 있는 섭리이기 때문에, 홉스는 예언이 오직 신으로부터 초자연적으로 진행되는 것이라고 말했다. 즉 최고의 예언가는 너무나 당연하게, 예측할 일에 대한 모든 징후들을 다 갖고 있는 자가 최고의 추측가, 즉 신일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인간 수준에서 미래에 대한 예상은 이전 경험이 가장 많은 사람(전문가)이 가장 확실하게 할 수 있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예측이 충분한 확실성을 갖는 것은 아니라는 뜻이다. 결국 홉스의 말을 따라 필립 테틀록의 연구를 통해 다시 생각해보면, 우리에겐 결코 미래를 예측할 깜냥이 없다는 뜻이 된다. 

 

알파고와 코로나19 - 빅데이터와 스몰데이터의 차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미래에 대해 절박하게 알고 싶어한다. 사실 조선시대 영국에 살던 철학자가 뭐라 한들 알고 싶은건 알고 싶은거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 우선 인간은 불확실성 속에서 사는데 특화되어 있지 않다. 우리는 불확실성을 싫어하도록 진화했다. 특히 코로나19 사태처럼 즉각적인 위험이 다가오면, 인간은 권위있는 사람들로부터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이고, 뭘 준비해야 하고, 무엇보다 모든게 다 잘 될것이라는 말을 통해 안심하고 싶어한다. 인간은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 싶은 일 앞에서는 아무 것도 안 믿는 것보다 틀리더라도 무엇인가를 믿고 싶어하는 동물이다. 인간이라는 종이 가지고 있는 더 심각한 문제는, 미래에 대해 알고 싶어 너무 조바심을 내는 나머지, 우리가 원하는 때에 맞춰 미래에 대해 알기를 바라는 습성이다. 바로 그런 이유로, 사람들은 호우예보나 태풍 경로 예측이 틀리면 엄청나게 화를 내는 것인지 모른다.

이런 점을 잘 아는 각 분야 전문가, 교수, 관료 및 정치가 집단들은 코로나 이후 미래 한국에 대한 시나리오들을 창작해내면서, 코로나 사태 이후 우리가 결코 알기 어려운 불확실한 먼 미래의 일을 부각시키면서 각종 언론에 등장하고 있다. 하지만 언론이 코로나 이후의 세계에 대한 부정확할 수 밖에 없는 전문가들의 의견으로 지면을 채우는 것에는 타당한 이유가 있어 보인다. 왜냐하면 코로나 이후 대면접촉이 줄어들면서 지면을 채울 사건사고가 줄어들어, 결국 다른 무언가로 지면을 채워야만 하기 때문이다. 어쩌면 코로나 이후의 세계라는 주제는, 그 줄어든 사건사고 지면을 채우기 위한 언론의 꼼수인지도 모를 일이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보자. 코로나 이후의 미래는 현재 존재하지 않는다. 즉 우리가 그 미래를 만든 후에야만 존재할 것이기 때문에, 아무도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 지 모른다. 앞으로의 경제, 사회, 정치, 교육, 및 기술 분야에 무슨 일이 일어날 지 제대로 알 수 있는 위치에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리고 우리가 코로나바이러스라는 종의 생물학적 기능과 구조에 대해 이제 막 이해해가고 있는 중이라는 사실 외에는, 우리에겐 아무 것도 정해진 것이 없다. 지난 광복절에 벌어진 광화문 모임 그리고 발생 초기 급속한 확산을 일으킨 신천지 모임처럼, 우리가 어떻게 행동하고, 검사하고, 치료하고, 그리고 백신 개발 여부 등의 요소들에 의해 얼마나 더 많은 사람들이 코로나바이러스에 걸릴지 아닐지가 결정될 것이다.

이렇게 생각해보면 현재 뉴스에 나와 미래를 예측하는 미래학자나 전문가의 모습은 고대의 점성가나 예언가의 모습을 닮았다. 그들이 예측에 사용했던 거북이 등껍질, 사주, 주사위, 카드 읽기, 별자리 위치 읽기, 촛불 모양 해석, 손금 해석, 또는 아폴로 신의 말을 직접 전해주는 환각 상태에 있는 델피 신전의 신녀 (우리로 치면 무당)와 같은 방법들이 현대의 미래학자들한테서는 “무수히 많은 가정들에 기반한” 빅 데이터와 통계적인 모델링으로 바뀌었을 뿐이다. 고대에나 현재에나 추측은 추측일 뿐이다. 

물론 어떻게 미래학자들의 정밀한 예측을 고대의 점성가나 예언가들의 예측이랑 비교할 수 있느냐고 반문할 수 있다. 미래학은 엄청나게 발전한 학문이고, 여러 대학에 실제로 미래학 전문가 양성과정이 만들어져 있다는 반박도 가능하다. 정부가 미래학자를 공식 행사의 기조연설자로 쓰고, 대한민국 첨단기업들도 미래학자의 말을 경청하는 마당에, 도대체 미래학에 대한 이런 비판에 권위가 실리기 힘들다는 점은 잘 알고 있다. 물론 현재의 미래학이 타로카드보다 더 합리적이고 과학적인 방법론을 사용할 수는 있다. 하지만 정확도의 측면에서 이야기하자면, 위에서도 인용한 필립 테틀록의 연구를 다시 인용해야만 한다. 그 예측이란 것의 정확도 수준은 침팬지가 다트를 던져 답을 찍는 것보다 나을게 없다.

그래도 어떤 특정 분야는 매우 정확한 예측이 가능하지 않냐고, 그러니까 알파고처럼 이제는 인간의 바둑 능력을 뛰어넘는 능력을 보여주는 인공지능이 존재하는 시대가 아니냐고 반박할 수 있다. 맞는 말이다. 하지만 알파고가 이세돌을 이길 수 있었던 이유에 대해 제대로 알아야만 이런 말을 할 수 있다. 즉, 알파고는 이전 경험, 즉 역사적으로 알려진 모든 바둑기보에 대한 지식, 또는 통계 용어로 사전 기대 확률 (어떤 대상이나 사건이 아직 일어나지 않았지만 그 동안의 경험을 통해 어느 정도 일어날지 미리 기대할 수 있는 확률)이 매우 정확한 경우에 해당하는 게임을 다루는 인공지능이다. 즉, 알파고는 이렇게 정확한 사전 지식을 바둑이 진행될 때마다 매 순간 적용해서, 미래에 승리할 확률을 예측할 수 있는 유리한 위치에 놓여 있었다. 즉 대상에 대한 사전 지식이 정확하면 정확할수록 대상의 미래 상태에 대한 예측은 정확해질 수 있다. 즉, 알파고가 이세돌을 이긴 방식은 너무나도 상식적이라는 뜻이다.

 

그림 2. 고대 그리스 델피 신전의 신녀의 예측. 출처: Heinrich Leutemann's The Oracle of Delphi Entranced, 1800's
그림 2. 고대 그리스 델피 신전의 신녀의 예측. 출처: Heinrich Leutemann's The Oracle of Delphi Entranced, 1800's

 

김정은 사망설 - 이미 존재하는 정보를 제대로 사용해야 하는 이유

하지만 코로나 사태를 겪고 있는 한국 사회는 현대화된 이후로 한번도 경험한 적이 없는, 말 그대로 전례가 없는 상황을 경험하고 있고, 이런 경우 정확한 사전 기대 확률을 형성한다는 건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사람의 평균 수명은 몇 살이다’ 같은 기대 수명에 대한 사전 지식을 역사를 통해 형성할 수 있는 상황과 현재처럼 이전 사례가 전혀 존재하지 않는 상황은 다르다는 뜻이다. 언론에서는 우리가 ‘4차산업혁명시대’, ‘인공지능시대’, 즉 컴퓨터가 머신러닝 알고리즘을 이용해 수십억 개의 데이터 포인트들로부터 맨눈으로 볼 수 없는 패턴을 찾아내는 ‘빅데이터의 시대’를 살고 있다고 끊임없이 떠들어대지만, 현재 코로나를 겪는 한국 사회는 이전 경험에 대한 데이터가 전무하기 때문에, ‘빅 데이터’가 아니라 ‘스몰 데이터’만을 쥐고 있는 상황인 셈이다.

복잡해지고 불확실성이 커진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개개인이 매일매일의 일상에서 맞닥뜨리게 되는 문제들은 빅데이터가 아니라 ‘작은 데이터’들로 가득한 세상이다. 우리는 이렇게 작은 데이터들, 심지어는 딱 한번만 본 최소한의 데이터로부터 자신의 미래에 영향을 끼치게 될 사건을 예측하고, 중요한 판단을 내리기 위해 추론을 해내야만 한다. 작은 데이터만 존재하는 세상에서는, 대상에 대한 사전 지식이 매우 불확실하기 때문에, 이런 데이터로 내놓는 예측은 델피 신전의 신녀가 환각 상태에서 내뱉는 수수께끼를 해석해서 내놓는 예측의 정확도와 별반 차이가 없게 된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미래를 불확실성의 영역으로 남겨두려 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이런 경우에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합리적인 예측의 방법은 무엇일까?

그림 3. 코로나19 최고치를 억제하기 위해 수년 동안 간헐적으로 사회적 거리두기를 해야할 것이다. 미국 샌프란시스코 돌로레스 공원의 사회적 거리두기 모습.
그림 3. 코로나19 최고치를 억제하기 위해 수년 동안 간헐적으로 사회적 거리두기를 해야할 것이다. 미국 샌프란시스코 돌로레스 공원의 사회적 거리두기 모습.

 

충분한 사전 데이터가 존재하지 않는 경우에 가장 합리적인 예측을 하는법을 알아보기 전에, 인간 기대 수명과 같은 사전 지식이 이미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이를 사용하지 않을 경우,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예측들이 쏟아져 나오는지부터 살펴보는게 도움이 될 것이다. 지난 4월말과 5월초에 탈북민 출신의 지성호 의원과 태구민 의원은 수술 쇼크로 김정은의 사망을 99% 확신한다면서, 김정은이 스스로 일어서거나 제대로 걷지 못하는 상태라는 관측을 각각 내놓았다. 그 이후 김정은 위원장이 시찰하는 모습이 공개되면서 이런 분석들은 한바탕 떠들썩한 해프닝으로 일단락된다. 하지만 코로나 사태 이후 김정은 위원장이 공식석상에 한동안 나타나지 않는 시점과 맞물려, 며칠 전 국정원에서 북한이 위임통치를 하고 있다는 속보가 뜨자마자, 또 다시 김정은은 4월 이후 여전히 코마상태이며 여태까지 나온 김정은 사진은 모두 조작된 것이고 권력이 넘어간 상태라는 분석을 내놓았다. 하지만 대부분의 언론들은 오히려 김정은이 김여정에 대한 믿음이 생긴 이후 자신감의 표현으로 일정 부분의 권력을 위임한 것일뿐, 실제로는 통치권을 장악한 것이라는 분석을 내놓고 있다.

여기서 아주 상식적으로 김정은의 생명 지속기간을 예측해 보자. 김정은의 생명 지속 기간이 알려져 있는 데이터, 즉 일반 북한 남자의 평균 수명 (66.9세)과 달리 특별히 짧아야 할 이유가 있을까? 물론 우리는 김정은이라는 북한 체제의 최고지도자를, 평균적인 북한 사람이라고 생각할 수 없다. 우리는 김정은과 북한체제가 전 세계에서도 아주 독특한 지형에 속한다고 생각한다. 즉, 우리에겐 김정은과 북한체제에 대한 엄청난 정도의 편향이 존재한다. 태구민 의원과 극우 언론이 김정은의 사망에 대한 음모론을 펼치는 것도, 바로 이런 우리의 편향을 보여주는 현상이다. 하지만 그런 정치적 편향을 제거하고, 데이터의 관점에서만 인간 김정은을 생각해보면, 그는 북한 남자라는 모집단에 속한 인물이고, 북한 남자의 평균 수명을 감안한다면 김정은이 그렇게 젊은 나이에 벌써 죽었다는 예측에는 그다지 신빙성이 없다. 언론이 김정은과 북한에 대해 내놓는 예측성 기사들을 볼 때면, 마치 김정은과 북한은 멸종 위기종이라도 되는 것처럼 느낄 정도다. 하지만 그 또한 우리의 편견의 반영일 뿐이다.

한 국가의 지속 기간에 대한 문제는 하늘로 던진 공이 얼마 동안 공중에 떠 있다가 떨어질지 하는 문제와는 다르게 매우 많은 원인들과 조건들이 상호 작용하는 매우 복잡한 시스템의 미래에 대한 문제가 된다. 게다가 북한처럼 현상에 대해 접근 가능한 정보가 매우 희박한 경우에, 이런 문제는 더욱 어려워진다. 이럴 경우 어떻게 그 미래에 대한 예측을 합리적으로 할 수 있을까? 이렇게 사전 정보가 거의 없는 경우, 프린스턴 대학 존 리처드 고트 (J. Richard Gott) 교수가 1993년에 발표(3)한 코페르니쿠스 원리(4)를 이용해 합리적으로 미래를 예측할 수 있다.

이어지는 하편에서는 이 코페르니쿠스 원리를 이용해 북한 내부 사정에 대해 우리에게 주어진 지식이 거의 없는 상태에서, 북한 정권의 수명을 예측해보도록 하겠다.


  1.  Philip E. Tetlock. Expert political judgement: How good is it? How can we know? (2006). Princeton University Press
  2.  Eric Siu. 31 of the worst predictions. https://www.singlegrain.com/blog-posts/31-of-the-worst-predictions/
  3.  J. Richard Gott III. Implications of the Copernican principle for our future prospects. (1993). Nature 363:315-319.
  4. Copernican Principle: 우리를 포함하여 어떤 특정 대상도 우주에서 특별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지 않다는 공간적으로 적용되는 원리. 리처드 고트 교수는 이 공간적 원리를 시간으로 확장하여, 지금 현재 어떤 대상을 보고 있는 우리가 우주의 역사 속에서 특별한 시점을 점하고 있는 관찰자가 아니라는 원리. 즉 우리는 특별한 장소나 특별한 시점에 있는 특별한 관찰자가 아니라는 원리.

*필자 김이준은 물리학과에 입학했는데 인간의 심리현상에 매력을 느껴 인지신경과학으로 대학원을 졸업했다. 지금은 생각하는 것에 대해 생각하며 지내는 인지 전기생리학자로 살아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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