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과 부천에 왔던 '배우 에라이자', 감독으로 전주에 오다

  • 기자명 홍상현
  • 기사승인 2020.11.27 15: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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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물 위의 아지랑이들이 내 앞에서 군무를 추면서 서로 들락날락하는 동안, 내 인생의 패턴이 그 강의 패턴과 합류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이곳에서 동생을 기다리는 동안 이 스토리가 시작되었다. 그 당시에는 인생의 스토리가 종종 책보다는 강과 더 비슷하다는 것을 뚜렷하게 알지 못했다. 하지만 스토리가 이미 시작되었다는 것을 알았다. 어쩌면 그보다 더 오래전에 강물 소리에서 이 스토리가 시작되었는지 모른다.”

노먼 매클린, 『흐르는 강물처럼

「바다가 없는 마을」의 이케다 에라이자 감독. 패션모델로 쇼 비즈니스 업계에 입문한 그는 데뷔 당시부터 이런저런 오디션에 응시하며 연기에 대한 의욕을 내비쳤고, 지난해 5월에는 작품집을 출간, 사진작가로도 데뷔했다. 게다가 분야를 가리지 않는 왕성한 독서력은 누구라도 인정할만한 수준이다. ©Ever Green Entertaiment
「바다가 없는 마을」의 이케다 에라이자 감독. 패션모델로 쇼 비즈니스 업계에 입문한 그는 데뷔 당시부터 이런저런 오디션에 응시하며 연기에 대한 의욕을 내비쳤고, 사진작가로도 데뷔했다. 게다가 분야를 가리지 않는 왕성한 독서력은 누구라도 인정할만한 수준이다. ©Ever Green Entertainment

시카고대학에서 평생 교편을 잡았던 노먼 매클린(영문학)이 퇴임후 발표한 소설 『흐르는 강물처럼』을 20대 시절에 읽고, 한동안 번역ㆍ출판해보고 싶다는 욕망에 사로잡혔다. 이제는 세 권의 책을 낸 에세이스트가 된 필립 코너스는 《네이션》지 시절 쓴 서평에서 이 책의 “낚시 기술에 대한 최고의 정보”를 극찬했지만 매클린이 영면한지 2년 2개월 뒤 로버트 레드포드에 의해 영화화되기도 했던 이 작품에서 필자가 열광한 지점은 좀 다르다. 바로 위에서 인용한, 실로 마법의 주문 같은 세 문장 때문이었다. (원문이 아니라 번역가 이종인의 문장을 인용한 건, 당시 필자를 매혹시킨 문장의 느낌을 한국어로 고스란히 옮겨놓아서다)

고향. 노을빛에 금사(gold thread)처럼 반짝이는 시냇물이나 전설을 품은 지신(the god of the earth) 같은 산맥, 오랜 기억이 옥연(玉硯)처럼 누워있는 들판은 아름답지만, 단지 이런 서정을 묘사하는데 그치는 서사라면 결코 특별하게 기억되지는 않았으리라. 그도 그럴 것이 아무리 아름다운 고장일지라도 풍광을 노래하는 정령이 아닌 사람이 살고 있을 테니까. <흐르는 강물처럼>의 몬태나 주 미줄라 카운티도 마찬가지다. 부친으로부터 낚시를 배우는 형제는 우애가 깊지만 대조적인 캐릭터의 미묘한 경쟁관계를 통해 작품의 플롯에 매력을 더한다. “그리고 그들은 행복하게 살았답니다. (And they lived happily forever after.)”의 무한반복과는 거리다 멀다.

감정의 흐름을 원활하게 잡아낼 수는 없을 때마다 이케다 에라이자 감독은 각자 맡은 배역과 관련해서 뭐가 힘들거나 내키지 않는지 캐스트들에게 자세하게 물어보며 문제를 해결했다고 한다. ©2020 Town without Sea Film Partners
감정의 흐름을 원활하게 잡아낼 수는 없을 때마다 이케다 에라이자 감독은 각자 맡은 배역과 관련해서 뭐가 힘들거나 내키지 않는지 캐스트들에게 자세하게 물어보며 문제를 해결했다고 한다. ©2020 Town without Sea Film Partners

산봉우리에 둘러싸인 인구 몇 만의 소도시라는 공간적 배경이 똑 닮은 전주국제영화제 초청작 <바다가 없는 마을>도 마찬가지다. 오다기리 죠키키 키린의 케미스트리가 요즘도 회자되는 <도쿄 타워>와 일곱 권이나 되는 방대한 분량에도 적잖은 독자에게 사랑받았던 소설 『청춘의 문』의 무대, 다가와 시에 사는 주인공 ‘쇼(쿠라 유우키 분)’와 ‘타이가(이시우치 로이 분)’는 고교 졸업반의 여름, 좀 더 넓은 세계로 나아가느냐 정든 가족ㆍ친지의 곁을 지키느냐로 입장이 나뉜다. 그렇게 <바다가 없는 마을>의 깊고 섬세한 시선은 ‘이전과 다른 느낌으로 마을축제의 큰북 공연을 준비하는’ 둘을 따라간다.

헌데, 감독 프로필을 확인해보면 부지불식간에 ‘아!’하는 탄성이 나온다. 올해 스물네 살의 이케다 에라이자. 넷플릭스 드라마 <팔로워들>의 주연배우. 부산국제영화제 초청작 <모두가 초등력자>와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초청작 <사다코>(<> 20주년 기념작)의 히로인이다. ‘이색 이력’이 필요했을까. 아니, 그보다는 어떤 ‘장기플랜’이 차곡차곡 단계를 밟아온 느낌이다. 패션모델로 쇼 비즈니스 업계에 입문한 그는 데뷔 당시부터 이런저런 오디션에 응시하며 연기에 대한 의욕을 내비쳤고, 사진작가로도 데뷔했다. 게다가 분야를 가리지 않는 왕성한 독서력은 누구라도 인정할만한 수준이다.

10대 시절 후쿠오카에서 상경했던 자전적 경험이 원안인 감독 데뷔작으로 전주국제영화제를 찾은 그를 만났다.

‘쇼’로 분한 쿠라 유우키 배우. 이케다 에라이자 감독은 그에게 느긋하게 자신이 맡은 배역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을만한 환경을 조성해주었다고 한다. ©2020 Town without Sea Film Partners
‘쇼’로 분한 쿠라 유우키 배우. 이케다 에라이자 감독은 그에게 느긋하게 자신이 맡은 배역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을만한 환경을 조성해주었다고 한다. ©2020 Town without Sea Film Partners

홍상현

부산국제영화제,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출품작에서는 캐스트셨는데, 전주국제영화제에는 감독으로 오셨습니다. 평소 한국영화는 즐겨 보시나요.

이케다 에라이자

데뷔작을 초청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대단한 영광이에요.

한국영화야 당연히 좋아하죠. 누구나 마찬가지일지도 모르지만 이창동 감독님의 <오아시스>에 몇 번이나 감동을 받았어요. 배우나 감독끼리도 <오아시스>에 대한 이야기를 자주한답니다.

 

홍상현

첫 키워드는 유니버셜(universial)입니다. 이케다 감독의 경우 평소 국경을 넘은 국제적 감각을 가지고 있는 이미지가 강한데요. 역시 스페인계 필리핀인과 일본인 부모님 슬하에서 자란 개인적 배경과도 관계가 있는 걸까요.

이케다 에라이자

딱히 제가 국제적이라는 자각을 해 본 적은 없어요. 그보다, 그냥 있는 그대로 살아가자는 느낌이 더 강하다고 할까요. 물론 말씀하신 개인적 배경으로 인해 형성된 사고가 사물에 대해 좀 더 다각적으로 판단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고, 또한 힘든 순간에 제 마음을 다잡는데 도움을 준 것도 사실입니다. 객관을 버리고 스스로를 폐쇄적인 환경에 밀어 넣다 보면 어느 틈엔가 소중한 이들에게 상처를 주게 될 수 있으니까요. 이런 경계심이 저를 더 넓은 세상으로 이끌어주고 있습니다.

입시 준비를 위해 돌연 큰북 공연 준비를 그만두겠다고 말해 ‘쇼’에게 동요를 일으키는 ‘타이가’ 역의 이시우치 로이 배우. ©2020 Town without Sea Film Partners
입시 준비를 위해 돌연 큰북 공연 준비를 그만두겠다고 말해 ‘쇼’에게 동요를 일으키는 ‘타이가’ 역의 이시우치 로이 배우. ©2020 Town without Sea Film Partners

홍상현

다음은 데뷔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13세 되던 해 패션잡지 《니콜라》의 모델오디션 그랑프리를 획득하면서 연예계에 데뷔하셨습니다. 하지만 이 일은 단순히 연예인이 되고 싶다기보다 ‘영화’라는 큰 목표에 다가가려는 위한 일환 아니었나 하는 생각도 드는데요.

이케다 에라이자

그런 것까지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웃음) 책 읽기랑 글 쓰는 걸 좋아했어요. 우리말에도 ‘책벌레’라는 표현이 있는데요. 그랬던 소녀가 어느 날 갑자기 연예계에 들어간 거죠. 하지만 그 과정에서 영화를 만나고, 어떤 형태로든 관여하게 된 건 정말 행복한 일이었습니다.

무대 앞에서보다 무대 뒤에서 많은 이들을 돕고 싶어 하는 건 오래전부터 변하지 않는 제 ‘기질’이고요.

 

홍상현

한국 관객에게 넷플릭스드라마 <팔로워들>로 유명하고 소속사조차 SNS의 중요성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을 때 트위터를 시작, 동세대의 트렌드를 리드하며 ‘셀피(Selfie)의 신’으로까지 불렸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그치지 않고 사진작가 데뷔를 하는가 하면, 얼마 전엔 오히려 트위터 계정을 없애버리셨는데요.

이케다 에라이자

정리해보면 ‘편견에 기대어 판단하지 않고, 시대를 관찰하며, 스스로 부딪혀 본다. 그 과정에서 느낀 것을 소중히 한다.’ 정도가 SNS를 대하는 제 생각입니다. 그런 맥락에서 셀피도 결국 우리가 경험할 수 있는 리얼리티 중의 하나라고 생각했어요. 낯설게 느껴질 수 있겠지만 무턱대고 부정하기만 한다면 도리어 부끄러운 일 아닐까 싶었고요. 말씀대로 결국 트위터를 그만두었는데요. 그냥 트위터를 통해 보고 싶었던 것을 보았으니 더 이상 접하고 싶지 않은 것으로부터 멀어지자는 마음에서였습니다.

이케다 에라이자 감독은 말한다. “영화를 만든다는 게 정말 대단한 일이더라고요. 수많은 스태프들이 서로의 지혜와 경험을 짜내서, 말 그대로, 목숨 걸고 작품을 만들어 가잖아요. 이 모든 것들이 너무도 사랑스럽고 눈물이 날 만큼 멋지다는 생각이 듭니다.” ©Ever Green Entertaiment
이케다 에라이자 감독은 말한다. “영화를 만든다는 게 정말 대단한 일이더라고요. 수많은 스태프들이 서로의 지혜와 경험을 짜내서, 말 그대로, 목숨 걸고 작품을 만들어 가잖아요. 이 모든 것들이 너무도 사랑스럽고 눈물이 날 만큼 멋지다는 생각이 듭니다.” ©Ever Green Entertainment

홍상현

여기서 ‘자기표현’이라는 주제는 무척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유명한 독서애호가인 감독이 작가의 꿈을 가지고 있다는 것과도 연관되니까요. 특히 『책을 버리고 거리로 나가자』라는 저서가 한국에서 출판되기도 했던 테라야마 슈지를 좋아하신다고 들었는데요. 모델 데뷔 등과 반복되는 실패에도 굴하지 않고 오디션에 응시한 것 등도 결국 영화작가로서, 스스로 세상에 전하고 싶은 이야기를 만드는 길을 지향해서 아니었을까 싶습니다만.

이케다 에라이자

그보다 좀 더 유연한 대답일 수 있겠는데, 정말 영화감독이 목표인지 아닌지는 아직 제 스스로도 알 수 없습니다. 1ㆍ2년 뒤에 다른 장르에서 창작을 이어가고 있을지도 모르니까요. 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영화를 만든다는 게 정말 대단한 일이더라고요. 수많은 스태프들이 서로의 지혜와 경험을 짜내서, 말 그대로, 목숨 걸고 작품을 만들어 가잖아요. 이 모든 것들이 너무도 사랑스럽고 눈물이 날 만큼 멋지다는 생각이 듭니다.

 

홍상현

물론 많은 준비를 해왔다고 생각합니다만 특별히 데뷔 10주년을 맞는 해 메가폰을 쥐게 된 계기가 있습니까.

이케다 에라이자

어떤 인터뷰에서 감독을 하고 싶다는 뜻을 밝힌 적이 있는데, 마침 그걸 보신 제작사 관계자분이 제안을 해오셨어요. 시나리오 습작을 자주 하는 편이라 마침 단편영화를 준비하던 중이기는 했는데, 장편 프로젝트라는 이야기를 듣고는 일생일대의 각오로 매달렸죠. (웃음)

 

홍상현

원안을 구상하신 것도 감독이라고 들었습니다. 배경이 고향인 후쿠오카이기도 한데요. 아무래도 자기반영적인 작품이라고 할 수 있겠죠?

이케다 에라이자

일단 <바다가 없는 마을>에 등장하는 모든 캐릭터에는 제가 전하고 싶은 이야기가 담겨있습니다. 다만, 시나리오를 쓰다 보니 어느새 그 안에서 자유롭게 살아 숨쉬는 인물들에 매료되어 제가 그 뒤를 좇는 신비로운 순간도 경험하게 되더라고요.

「바다가 없는 마을」의 원안이 된 것은 10대 시절 후쿠오카에서 상경했던 이케다 에라이자 감독의 경험이다. 갑작스레 장편 프로젝트의 기회를 얻게 된 이케다 감독은 “일생일대의 각오로 매달렸다”고 한다. ©2020 Town without Sea Film Partners
「바다가 없는 마을」의 원안이 된 것은 10대 시절 후쿠오카에서 상경했던 이케다 에라이자 감독의 경험이다. 갑작스레 장편 프로젝트의 기회를 얻게 된 이케다 감독은 “일생일대의 각오로 매달렸다”고 한다. ©2020 Town without Sea Film Partners

홍상현

<바다가 없는 마을>에서는 엑스트라의 캐스팅까지 직접 관여하고 후쿠오카 사투리 대사를 훈련하셨던 감독님의 열정이 고스란히 배어나옵니다.

이케다 에라이자

저 자신 연기를 하면서 마음속에 그렸던 ‘최고의 현장’을 만들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한 순간도 놓칠 수 없는 섬세한 연기를 이끌어낼 수 있다면 얼마나 행복할까, 다행히 캐스트 여러분도 이 부분을 우선적으로 고려해주셨던 것 같아요.

마음으로 소통하면서 열정적으로 연기에 대한 의견을 나눴습니다. 그 과정에서 저뿐만 아니라 모든 스태프, 그리고 캐스트 각자의 해석을 공유하면서 유연하게 이야기를 개발해갔어요.

 

홍상현

연기자로서 영화의 제작에 참여할 때와 감독으로서 영화의 제작에 참여할 때의 가장 큰 차이는 무엇이던가요.

이케다 에라이자

무척 어려운 질문인데요. (웃음) 최종적인 판단을 제가 해야 한다는 점입니다.

다만, 당연히 저 또한 부족할 수 있기 때문에 섣불리 뭔가를 말하기보다 최대한 동료들이 생각을 들어보려고 노력했어요. 모두가 저를 따라올 수 있게 가장 열심히 작품에 몰두하는 모습을 보이기가 쉽지 않은 일이었지만, 감독이라는 자리는 저를 크게 성장시켜주었습니다.

「바다가 없는 마을」는 깊고 섬세한 감독의 시선이 돋보이는 한편, “요란하지 않아도 매순간 깜짝 놀랄만한 순간들로 가득 차 있는 영화를 만들고 싶었다”는 바람 또한 순간순간 엿보이는 작품이다. ©2020 Town without Sea Film Partners
「바다가 없는 마을」는 깊고 섬세한 감독의 시선이 돋보이는 한편, “요란하지 않아도 매순간 깜짝 놀랄만한 순간들로 가득 차 있는 영화를 만들고 싶었다”는 바람 또한 순간순간 엿보이는 작품이다. ©2020 Town without Sea Film Partners

홍상현

<바다가 없는 마을>은 익숙한 곳에 머물러 있으려 하는 타이가와 더 넓은 세상으로 나아가고 싶어 하는 쇼, 두 친구의 이야기인데요. 감독님 본인은 어느 쪽과 더 닮았다고 생각하시나요.

이케다 에라이자

음... 둘 다인 것 같은데요. (웃음)

 

홍상현

한 명의 여성과 두 명의 남성, 세 연기자의 케미스트리가 무척 훌륭합니다.

이케다 에라이자

촬영을 하면서 세 사람에게 각기 다른 연출의 방식을 적용했습니다.

쇼로 분한 쿠라 유우키 배우에게는 좀 느긋하게 자신이 맡은 배역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을만한 환경을 조성해주었고, 타이가 역의 이시우치 로이 배우는 최대한 연기에 몰입할 수 있도록 좀 타이트하게 몰아갔어요. 또, 미야코를 연기한 사이토 나리 배우에게는 모성을 자극할 수 있는 세련된 코멘트를 많이 해주었습니다.

아무래도 데뷔작이다 보니까 더러 헤매는 순간도 있었는데요. 그럼에도 캐스트들이 주체적으로 연기에 몰입할 수 있는 여건이 만들어졌던 것 같아 기뻐요.

「바다가 없는 마을」에 등장하는 모든 캐릭터에는 이케다 에라이자 감독이 전하고 싶은 이야기가 담겨있다. ©2020 Town without Sea Film Partners
「바다가 없는 마을」에 등장하는 모든 캐릭터에는 이케다 에라이자 감독이 전하고 싶은 이야기가 담겨있다. ©2020 Town without Sea Film Partners

홍상현

특히 미세한 감정의 흐름을 보여주는 묘사가 돋보입니다.

이케다 에라이자

멋진 장면에서는 저까지 함께 울어 버릴 때도 있었습니다. 촬영에 들어갈 때 소속사 사장님이 ‘감독이니까 감정이 격해지더라도 동료들 앞에서 막 울고 그러면 안 돼’ 하며 신신당부를 하셨지만. (웃음)

물론 그렇다고 모든 감정의 흐름을 원활하게 잡아낼 수는 없었는데요. 그럴 때면 배역과 관련해서 뭐가 힘들거나 내키지 않는지 캐스트들에게 자세하게 물어보면서 문제를 해결했습니다.

 

홍상현

인구 4만 6천 명의 작은 도시인 다가와 시에서 모든 촬영이 이루어졌는데요.

이케다 에라이자

다가와 시는 후쿠오카에서도 특히 재능 있는 분들을 많이 배출한 곳으로 유명합니다. 저도 그게 늘 신기했는데 막상 가보니 이해가 되더라고요. 워낙 독특한 분들이 많은 데다, 그런 분들이 이런저런 구상이나 사색 등을 하는데 좋은, 아름다운 환경이 펼쳐져있었어요. 붉은 석양과 짙은 녹음, 솟아올라있는 산, 실로 ‘이모셔널(emotional)’한 환경이었죠.

「바다가 없는 마을」은 12월 4일 일반상영관에서 관객과 만난다. 이케다 에라이자 감독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아무쪼록 지난 몇 달 동안의 혼란보다는 멋진 데뷔작을 준비하던 시간의 설렘을 떠올리기를. ©Ever Green Entertaiment
「바다가 없는 마을」은 12월 4일 일반상영관에서 관객과 만난다. 이케다 에라이자 감독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아무쪼록 지난 몇 달 동안의 혼란보다는 멋진 데뷔작을 준비하던 시간의 설렘을 떠올리기를. ©Ever Green Entertainment

“정보가 흘러넘치는 세상. 이런 세상에서 꿈을 안고 살아가기란 쉽지 않죠.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누구나 꿈을 가져야만 한다는 것도 어딘가 쓸쓸한 느낌이 들지 않나요. <바다가 없는 마을>은 바로 이 지점에서 탄생한 작품입니다. 그냥 ‘이렇게 오늘을 살아가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말이 절로 입가에 흘러나올 만한 아름다운 순간을, 후쿠오카의 작은 도시, 다가와에서 카메라에 담았어요. 요란하지 않아도 매순간 깜짝 놀랄만한 순간들로 가득 차 있는 영화를 만들고 싶었습니다.

우리는 ‘세계’라는 것에 대해 저마다의 생각을 가지고 살아가죠. 각자 사랑해야 할 대상을 가지고. 그런 한 사람 한 사람이 모여 새로운 작품을 만드는 일은 늘 저를 풍요롭게 만들어준답니다. 이런 제가 영화를 통해 누군가의 마음을 풍요롭게 해 줄 수만 있다면, 앞으로도 멈추지 않고 작업을 이어나갈 겁니다.”

(이 또한 어떤 종류의 선입견일지도 모르겠지만) SNS계정에 넘치는 트렌드세터로서의 활약상과 대조적인 무게감으로 가득한 인터뷰 원고를 정리하고 있을 즈음 <바다가 없는 마을>의 현지 개봉일자 확정 소식이 들려왔다. 정말 눈이 올지는 모르겠으나 절기상 한해 눈이 가장 많이 내린다는 대설을 사흘 앞둔 날. 전주국제영화제 이후 상하이국제영화제 초청을 거쳐 일반상영관에서 관객을 만나게 되기까지, 원제가 “여름이 올 무렵”인 이 작품은 어느새 겨울의 한복판으로 걸어 들어와 있었다.

지금 이케다 감독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두꺼운 외투를 걸친 관객의 행렬을 기대하거나, 혹은 우리 모두의 의지와 무관한 혼란 속에 사라져버린 지난 몇 달을 곱씹고 있을 지도. 부디 슬픔이나 아쉬움보다 <바다가 없는 마을>을 준비하던 시간의 설렘을 떠올리기를. 유리병 속에 잠들어 있다가 테이블에 꺼내놓는 순간, 톡 쏘는 항기로 싱그러운 계절의 기억을 소환하는 파프리카피클 같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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