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들만의 정의로 가득찬 그들의 거짓말

  • 기자명 홍상현
  • 기사승인 2020.12.31 13: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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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모토 유지로 감독의 두 번째 작품 「유코의 평형추」는 ‘개인의 내면을 주시하는 섬세함과 사회적 문제의식을 포착하는 예리함이 돋보인 수작’이라는 평가와 함께 올해 부산국제영화제 뉴 커런츠상을 수상했다. (C)2020 A Balance Film Partners
하루모토 유지로 감독의 두 번째 작품 「유코의 평형추」는 ‘개인의 내면을 주시하는 섬세함과 사회적 문제의식을 포착하는 예리함이 돋보인 수작’이라는 평가와 함께 올해 부산국제영화제 뉴 커런츠상을 수상했다. (C)2020 A Balance Film Partners

파리경제대의 토마 피케티와 공동프로젝트를 하는 연구실에 있었다. 경제성장과 부의 분배가 어떤 상관관계를 갖고 있는지 수리경제학의 방법론으로 분석하던 작업에서 중요한 것은 수식(fomula)을 정확하게 기억하는 일. 바로 이 대목에서 시시때때로 청년기에 큰 영향을 미친 또 한 사람의 프랑스 지식인을 떠올리며 실없이 웃곤 했었다.

미셸 푸코. 사르트르와 함께 현대프랑스철학을 대표하는 사상가로 회자되는 그의 캐릭터는 매력적이다. 한때 수장으로 재직하던 웁살라 프랑스문화원 강좌는 연일 성황이었으며 그 밖의 운영에 있어서도 높이 평가받았다. 재규어를 몰았고 어떤 자리에 나타나든 모두에게 환영받는‘인싸’였다. 하지만 더욱 흥미로운 것은 이 무렵 그가 남긴 지적 성과다. 『광기의 역사』. 지금 이 순간에도 지구 어디선가 팔리고 있을 이 세계문화사의 마스터피스를 박사논문으로 내놓으면서, 푸코는 소위 ‘명석ㆍ판명한 진리의 규준’을 흔들었다. ‘광기’라는 소재를 통해 당대의 사유구조가 갖는 한계를 규명한 것이다. 서구인들이 아무런 의심 없이 받아들이던 모든 가치를 쉼 없이 부정하는 ‘지적 모험(intellectual adventure)’의 서막. 기본적으로 강한 정치적 신념에 근거해 논지를 펴는 피케티를 보며, 필자는 종종 상상했다. ‘만약 지금 이 장면에서 푸코가 등장한다면 어떨까?’하고.

2004년 니혼대학교 예술학부 영화학과 졸업 이후 12년의 세월동안 메이저스튜디오의 연출부로 커리어를 쌓던 하루모토 유지로 감독은 끝내 독립영화의 길을 택했다. 이유는 단 하나, ‘진정 원하는 작품’을 만들기 위해서다. (C)2020 BIFF
2004년 니혼대학교 예술학부 영화학과 졸업 이후 12년의 세월동안 메이저스튜디오의 연출부로 커리어를 쌓던 하루모토 유지로 감독은 끝내 독립영화의 길을 택했다. 이유는 단 하나, ‘진정 원하는 작품’을 만들기 위해서다. (C)2020 BIFF

그로부터 4년이 지난 올해, 부산국제영화제 뉴 커런츠 부문에 초청된 하루모토 유지로 감독의 <유코의 평형추>는, 필자로 하여금 실로 오랜만에 푸코를 떠올리게 만들어주었다. 심은경 배우가 올 들어 두 번째 여우주연상을 수상한 다카사키영화제에서 <가족에게>로 신인감독상을 거머쥐며 화려하게 데뷔한 하루모토 감독은 푸코가 지적한 교육에 언론을 더하고, 이에 대한 현대인의 굳은 믿음에 균열을 가함으로써 ‘정의’를 이야기한다.

다큐멘터리 감독 유코(타키우치 쿠미 분)는 3년 전 있었던 학교폭력과 그로 인한 연쇄 자살을 취재중이다. 동네 보습학원 원장인 아버지(미츠이시 켄 분)는 그의 가장 믿음직스러운 친구이자 학생들에게 사랑받는 선생님.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드러나는 등장인물들의 모습은 지극히 자연스러웠던 도입부와 영판 다르다. 외주제작을 맡긴 방송국은 ‘팩트’보다 ‘논조’를 내세우고, 취재원들은 뜻밖의 진실을 털어놓음에 따라 관찰자의 위치를 벗어나 취재원들의 일상에 휘말려 들어가던 유코의 삶은 급기야 감춰져있던 아버지의 치명적인 잘못이 드러나면서 송두리째 흔들린다.

‘개인의 내면을 주시하는 섬세함과 사회적 문제의식을 포착하는 예리함이 돋보인 수작’ <유코의 평형추>로 부산국제영화제에서 뉴 커런츠상을 거머쥔 중량급 신인, 하루모토 감독을 만났다.

장편데뷔작 「가족에게」는 도쿄국제영화제에 초청되는가하면, 한국 관객들에게는 심은경 배우에게 올 들어 두 번째의 여우주연상을 수상해 알려진 다카사키영화제에서 하루모토 유지로 감독에게 신인감독상을 안겨주었다. (C)2016 Going the Distance Film Partners
장편데뷔작 「가족에게」는 도쿄국제영화제에 초청되는가하면, 한국 관객들에게는 심은경 배우에게 올 들어 두 번째의 여우주연상을 수상해 알려진 다카사키영화제에서 하루모토 유지로 감독에게 신인감독상을 안겨주었다. (C)2016 Going the Distance Film Partners

홍상현

두 번째 장편영화 <유코의 평형추>로 부산국제영화제에 오셔서 뉴커런츠상까지 수상하셨습니다. 겹경사네요.

하루모토 유지로

감사합니다. <유코의 평형추>라는 영화, 그리고 하루모토 유지로라는 감독에게 최고의 출발이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홍상현

인터뷰 초반에 늘 드리는 질문인데요. 좋아하는 한국영화나 감독, 또는 배우가 있으시면 소개 부탁드립니다. 또, 최근의 한국영화 대해서도 한 말씀 해주시면 감사하겠고요.

하루모토 유지로

기쁘게 답할 수 있는 질문이네요. (웃음)

우선, 감독으로는 이창동, 봉준호, 박찬욱 감독님을 좋아해요. 작품으로는 <버닝>, <마더>, <붉은 가족>, <도희야>, <여행자> 등을, 좋아하는 배우로는 송강호, 배두나, 김새론, 김새벽 배우님 들을 꼽습니다.

최근에 본 한국영화로는 <벌새>가 좋았는데요. 방금 말씀드린 김새벽 씨가 너무 매력적이어서 인상에 남더라고요. 이후 도쿄필름엑스영화제에서 홍상수 감독님의 <도망친 여자>를 봤는데 거기서도 아주 좋은 연기를 보여주셨죠. 최근 가장 주목하고 있는 배우입니다. 김보라 감독님의 차기작도 기대하고 있고요. 언제 기회가 주어진다면 이 두 분과 꼭 한 번 대화를 나눠보고 싶어요.

「유코의 평형추」의 로케지는 군마 현 다카사키 시. 「가족에게」로 인연을 맺은 하루모토 유지로 감독의 요청에 응한 다카사키영화제 사무국이 다카시키 필름커미션을 통해 전폭적인 지원을 제공했다.  (C)2020 A Balance Film Partners
「유코의 평형추」의 로케지는 군마 현 다카사키 시. 「가족에게」로 인연을 맺은 하루모토 유지로 감독의 요청에 응한 다카사키영화제 사무국이 다카시키 필름커미션을 통해 전폭적인 지원을 제공했다. (C)2020 A Balance Film Partners

홍상현

대학에서 영화를 전공하시고 졸업 후에는 메이저스튜디오의 연출부로 경험을 쌓으셨습니다. 무려 10년이 넘는 관록을 고려하면 충분히 메인스트림에서 상업영화 감독으로 데뷔하실 수도 있었을 것 같은데, 크라우드 펀딩으로 제작비를 조달, 독립영화를 찍는 가시밭길을 택하셨어요. 자신이 원하는 작품을 만들기 위한 ‘작가적 고집’이었나요?

하루모토 유지로

일본 영화작가의 가장 큰 난제는 작가적 정체성을 유지하면서 계속 작품을 만들어가는 일입니다. 일본에는 작품성 있는 영화가 상업적으로도 성과를 낸 비즈니스모델이 없어요. 따라서 초기에는 작품성이 있는 영화를 만들던 감독들도 시간이 갈수록 상업적인, 소위 ‘CF 영화’를 만드는 쪽으로 기울어질 수밖에 없죠. 먹고살기 위해서.

상업영화 조감독으로 생활하면서 감독들이 작가적 독창성을 잠식당하는 수많은 사례를 목도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자신의 작가세계를 담은 영화 만든다는 게 얼마나 어려운지 실감했고요. 저는 그저 ‘감독’이라는 ‘타이틀’을 원하는 게 아니라 제가 보고 느낀 세계를 표현하고 싶은 욕망을 가지고 있었거든요. 그런 이유로 일단 조감독으로서 영화제작 현장에서 제작기술과 인맥을 축적하고, 이후 독립영화로 제가 진정 원하는 작품을 만드는 길을 선택한 겁니다.

지속적으로 독립영화를 만들려면 국내가 아닌 세계무대에서의 평가가 필수적입니다. 국내시장에서 제작비를 회수할 수 없으니까요. 그러려면 세계시장에서 자신의 작품이 팔려야하는데, 여기 결정적인 요인으로 작용하는 게 바로 해외영화제에서의 수상이에요. 해서, 제 두 번째 장편영화 <유코의 평형추>에 세계적 권위를 자랑하는 부산국제영화제의 뉴커런츠상이 주어진 건 무척 의미심장한 일입니다.

동네 보습학원 원장인 유코의 아버지(오른쪽)는 그의 가장 믿음직스러운 친구이자 학생들에게 사랑받는 선생님. 그러나 감춰져있던 아버지의 치명적인 잘못이 드러나면서 유코의 삶은 송두리째 흔들린다.  (C)2020 A Balance Film Partners
동네 보습학원 원장인 유코의 아버지(오른쪽)는 그의 가장 믿음직스러운 친구이자 학생들에게 사랑받는 선생님. 그러나 감춰져있던 아버지의 치명적인 잘못이 드러나면서 유코의 삶은 송두리째 흔들린다. (C)2020 A Balance Film Partners

홍상현

현재 크리에이터 그룹인 ‘하루구미’의 대표이기도 하십니다. 그런데 그 하루구미는 그저 영화제작만을 위해 조직된 집단이라기보다 일종의 시네마테크운동을 하는 단체 같다는 느낌이 있더군요.

하루모토 유지로

영화공방 하루구미는 저 하루모토 유지로가 만드는 영화를 보고 싶어 하시는 시민 여러분과 같이 운영하고 있는 단체입니다. 이를 위해서는 우선 제가 어떤 생각을 가지고 영화를 만들고 있는지부터 밝혀야겠지요. 저는 영화가 오락이며 문화인 동시에 사회의 창이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결코 어떤 한 가지 요소를 부정하는 게 아니에요. 도리어 한 가지라도 제대로 만족시키면 충분히 괜찮은 영화가 될 수 있겠지요. 다만 하루구미에서 만드는 영화는 문화, 예술과 더불어 사회적인 요소를 무척 중요시한다는 특징이 있습니다. 아울러 이런 영화가 존속할 수 있는 가능성을 일본에서 만들어나가고자 하죠. 말씀하신 것처럼 “시네마테크운동”이라고 콕 짚어 규정하는 것은 아니지만요.

다큐멘터리 감독 유코는 3년 전 있었던 학교폭력과 그로 인한 연쇄 자살을 취재중이다. 도입부에서는 지극히 자연스러웠던 등장인물들의 모습은 스토리가 전개될수록 점점 변모해간다. (C)2020 A Balance Film Partners
다큐멘터리 감독 유코는 3년 전 있었던 학교폭력과 그로 인한 연쇄 자살을 취재중이다. 도입부에서는 지극히 자연스러웠던 등장인물들의 모습은 스토리가 전개될수록 점점 변모해간다. (C)2020 A Balance Film Partners

홍상현

장편 데뷔작 <가족에게>를 봤는데 뛰어난 리얼리즘적 터치로 청춘의 고뇌를 그려낸 수작이었습니다. 이 작품은 실제로 도쿄국제영화제에 초청되는가하면 심은경 배우에게 여우주연상(<블루 아워>)을 안긴 걸로 유명한 다카사키영화제에서 신인감독상을 받으셨습니다. 혹시 완벽주의자이신가요? (웃음)

하루모토 유지로

첫 연출작인 <가족에게>가 도쿄국제영화제와 다카사키영화제에서 높이 평가받은 것은 매우 기쁜 일입니다. 하지만 정작 저는 <가족에게>를 만들 당시 ‘영화제’를 전혀 의식하지 않았어요. 대학을 졸업하고 10년 만에 찍는 작품이었거든요. 저 자신의 표현력에 대해, 그야말로 불안과 싸워가면서 일단 ‘감정의 표현’에 주안점을 맞춰 완성한다는 것만 생각했습니다. 촬영이 끝나갈 무렵 ‘이 작품을 영화제에 내 볼 것’이라고 스태프들에게 말은 했지만 응모를 어떻게 해야 하는 지조차 몰랐죠. (웃음) 이제 와 생각해면 공부가 부족했던 건데요. 이런 내용들을 통해서도 예상하실 수 있겠지만 저는 완벽주의자와 거리가 먼 사람입니다. (웃음)

 

홍상현

그렇군요. (웃음)

한편, 다카사키영화제와 감독님과의 인연은 중요합니다. 부산국제영화제에 오시기 전, 이미 아트필름의 경연장으로 알려진 도쿄필름엑스영화에서 신인감독상 파이널리스트까지 오른 <유코의 평형추>를, 바로 다카사키영화제의 주최지인 군마 현 다카사키 시에서 촬영했다고 들었기 때문입니다.

하루모토 유지로

사실 <유코의 평형추>의 기획은 <가족에게> 이전부터 이미 짜여있었습니다. 하지만 주제의 복잡성 때문에 데뷔작으로 제작하기에는 불안하더라고요. 그래서 일단 2015년 <가족에게>를 만들면서 제 표현력을 검증해 보고, 2019년 <유코의 평형추>의 제작에 착수한 겁니다. 도쿄필름엑스영화제 신인감독상에 응모했던 건 부상인 영화제작비 때문이었는데 원하는 결과를 얻을 수 없었죠. (웃음) 이곳저곳에서 겨우 대출을 받아 천오백만 엔을 모았는데 결코 충분한 제작비는 아니었고요.

로케이션, 숙박, 교통, 그리고 엑스트라 등에 들어갈 비용을 어찌해야 하나 고민에 빠져있던 와중에 <가족에게>에 신인감독상을 안겨준 다카사키영화제가 도움을 주었습니다. 다카사키영화제는 필름커미션(film commission)도 운영하고 있어 다카사키 시로부터의 행정적 협조를 얻어낼 수 있음은 물론, 시민여러분들과 오랜 세월에 걸쳐 쌓아올려진 신뢰관계가 훌륭하거든요. 필름메이커에게 영화제작에 협조적인 곳에서 촬영을 진행할 수 있는 것만큼 큰 행운이 없어요. 더욱이 다카사키영화제는 하루모토 유지로라는 신인감독에게 기대를 걸고 큰 상까지 주셨기에 분명히 협력해 주실 거라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다카사키영화제 프로듀서인 시오 무츠코 씨에게 연락는데 흔쾌히 허락해주시더군요. 기대 이상의 협력을 제공해주셨습니다. 이 지원이 없었다면 <유코의 평형추>는 결코 세상에 나오지 못했을 거예요.

정의에 대해 이야기하기 위해 「유코의 평형추」는 사회의 급속한 정보화가 우리에게서 빼앗은 것이 무엇인지, 그래서 우리가 언제부터 더 대담하고 교묘하게 거짓말을 하게 되었는지를 다룬다. (C)2020 A Balance Film Partners
정의에 대해 이야기하기 위해 「유코의 평형추」는 사회의 급속한 정보화가 우리에게서 빼앗은 것이 무엇인지, 그래서 우리가 언제부터 더 대담하고 교묘하게 거짓말을 하게 되었는지를 다룬다. (C)2020 A Balance Film Partners

홍상현

<유코의 평형추>의 주제에 관한 질문입니다. <가족에게>를 만드시기 이전부터 정의(justice)의 문제에 주목하고 계셨다고 들었는데요. 특별한 계기가 있었나요?

하루모토 유지로

2014년 <유코의 평형추>의 구상작업을 진행하다 인터넷에서 초등학생 자살 사건에 대해 보도한 기사를 접했습니다. 자살한 소년의 경우는 물론, 가해 소년의 아버지와 동명이인일 뿐인 전혀 다른 사람이 온라인상에서 린치를 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보도했는데요. 목숨을 잃은 소년이나 가해 소년의 아버지보다 린치를 가한 이들에게 흥미가 느껴졌습니다.

특히 의구심이 든 것은 “사건의 당사자도 아닌 그들이 대체 무슨 근거로 자신들만의 ‘정의’를 휘두르느냐”는 점이었습니다. 우리는 자칫 타자를 너무도 쉽게 공격하는 사람이 될 수도, 혹은 그 반대의 경우에 해당하는 사람이 될 수도 있겠지요. 바로 이 두 부류를 가르는 차이가 무엇이며, 그 앞에 어떤 것들이 놓여있는지 파헤쳐보고 싶었습니다.

 

홍상현

정의에 대해 이야기하기 위해 <유코의 평형추>는 사회의 급속한 정보화가 우리에게서 빼앗은 것이 무엇인지, 그래서 우리가 언제부터 더 대담하고 교묘하게 거짓말을 하게 되었는지를 다룹니다. 이러한 문제의식을 구체적으로 투영하는 대상으로써 교육과 언론을 선택하셨는데요.

하루모토 유지로

교육도 언론도 그 자체로 이미 ‘옳은 것’이라고 모두들 굳게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발화자도 수용자도 정보의 소스(source)를 의심하지 않아요. 그도 그럴 것이, 사회가 급속도로 정보화됨에 따라 우리는 말 그대로 ‘정보의 바다에 내던져져’ 있는 상황이니까요. 언론과 교육은 사람들을 바른 길로 인도해주는 등대의 역할을 하고, 믿고 나아가지 않을 경우, 사람들은 불안감에 빠져버립니다. 그 ‘바다’에서, 스스로의 힘으로 섬을 찾아낼 수 있는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해요. 등대가 자리 잡고 있는 섬에 도달한 사람들은 분명 이렇게 생각하지 않을까요? ‘다른 방향으로 간 녀석들은 분명히 죽었을 거야’라고.

또 다른 섬이 존재하며, 그곳에서 살아남은 사람도 있을지 모른다는 데에까지 생각이 미치지 않는 겁니다. 단순히 등대만 목표로 한다는 건 무척 편할 수도 있죠. 아무 생각 없이 그저 그곳에 가기만 하면 되는 거니까요. 하지만 안타까운 것은 이 과정에서 자신의 사고는 물론 다른 상상력과 가능성조차 포기하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이를 자각하지 못하죠. 저는 이와 같은 내용들이 <유코의 평형추>의 주제를 표현하는데 있어 더할 나위 없이 중요한 모티브라고 생각한 겁니다.

하루모토 유지로 감독은 말한다. “영화를 만들고 싶다는 충동자체가 사람들의 일상적 삶을 다른 각도에서 바라보며 어떤 새로운 발견을 하게 되는 순간 고개를 쳐들거든요. 저는 그저 이것이 과도한 멜로드라마가 되어버리지 않고, 나름의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도록 하는 최적의 ‘연출 온도’를 선택하기 위해 노력할 뿐입니다.” (C)2020 A Balance Film Partners
하루모토 유지로 감독은 말한다. “영화를 만들고 싶다는 충동자체가 사람들의 일상적 삶을 다른 각도에서 바라보며 어떤 새로운 발견을 하게 되는 순간 고개를 쳐들거든요. 저는 그저 이것이 과도한 멜로드라마가 되어버리지 않고, 나름의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도록 하는 최적의 ‘연출 온도’를 선택하기 위해 노력할 뿐입니다.” (C)2020 A Balance Film Partners

홍상현

주인공을 다큐멘터리 감독으로 설정한 이유가 궁금합니다.

하루모토 유지로

사회, 다시 말해 다양한 사람들의 생활을 조명해야 할 인간이 자신의 올바름과 대치하는 순간, 그 스스로 피사체가 되어버리고 마는 과정을 보여주고 싶어서였습니다. 이토록 복잡하고, 아이러니한 동시에, 인간의 실체 향해 다가가는 상황은 없다고 생각해서였어요.

 

홍상현

주연을 맡은 타키우치 쿠미 배우는 많은 국제영화제 초청작에서 주연을 맡은 우수한 배우인데요. <유코의 평형추>의 타이틀 롤로 캐스팅하게 된 배경이 궁금합니다.

하루모토 유지로

아, 무척 간단합니다. 타키우치 배우가 제 전작인 <가족에게>를 보고, 차기작 출연의사를 직접 밝히셨어요. (웃음)

 

홍상현

대단하군요! (웃음) 그래서 타키우치 배우는 진실에 다가가는 한편으로 선악의 이분법으로 규정할 수 없는 입체적인 캐릭터를 훌륭하게 소화해주셨습니다. 감독님께서 어떤 디렉션을 하셨는지 궁금해지네요.

하루모토 유지로

한정된 예산과 일정 속에서 촬영이 진행되었던 까닭에 크랭크 인 전에 며칠이나 리허설을 거치면서 연기를 거의 완성해 놓은 뒤 모든 일을 진행했습니다. 그렇다 보니 촬영이 아니라 리허설 중에 캐릭터를 조형해 나가는 비율이 상대적으로 높았지요. 또, 제가 직접 시나리오를 쓰기 때문에 움직임이나 상황을 확실히 알 수 있도록 기술해 놓았습니다. 대본에 이미 연출의 대부분이 녹아있었던 겁니다. 하지만 이 경우, 배우에게도 높은 시나리오 독해력이 요구되죠. 제가 보고 있는 풍경과 같은 풍경을 상상할 수 있어야 하니까요. 물론 똑같아야 할 필요까지는 없겠지만, 적어도 방향 정도는 같아야지 않을까요. 특히 <유코의 평형추>에서는 주인공이 자신의 가치관을 의심해야 하는 복잡한 심리상황이 전개되어 고생이 많았을 겁니다. (웃음)

한정된 예산과 일정 속에서 촬영이 진행된 까닭에 「유코의 평형추」의 촬영일정은 크랭크 인 전에 며칠이나 리허설을 거쳐 연기를 거의 완성해 놓은 뒤 진행되었다. (C)2020 A Balance Film Partners
한정된 예산과 일정 속에서 촬영이 진행된 까닭에 「유코의 평형추」의 촬영일정은 크랭크 인 전에 며칠이나 리허설을 거쳐 연기를 거의 완성해 놓은 뒤 진행되었다. (C)2020 A Balance Film Partners

홍상현

유코의 액션에서 무척 인상적인 것 하나가 있었습니다. 다큐멘터리 제작을 하고 있는 것도 아닌데 ‘진실을 말해달라’고 하면서 상대방을 촬영하는 것이었는데요. 의미가 궁금합니다.

하루모토 유지로

나름의 의미를 담은 제스처였습니다. 카메라는 진실을 빛내는 든든한 무기가 될 수도 있고, 약자를 잔혹하게 몰아세워 그 모습을 기록하는 흉기가 될 수도 있다는.

 

홍상현

<유코의 평형추>는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을 담아내는 리얼리스틱한 작품이지만, 궁극적으로는 마지막까지 그 어떤 히어로도 등장하지 않는 필름 누아르의 특성 또한 갖고 있는 작품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하루모토 유지로

영화를 만드는 데 있어 특별히 어떤 장르를 의식하지는 않습니다. 제 경우, 영화를 만들고 싶다는 충동자체가 사람들의 일상적 삶을 다른 각도에서 바라보며 어떤 새로운 발견을 하게 되는 순간 고개를 쳐들거든요. 저는 그저 이것이 과도한 멜로드라마가 되어버리지 않고, 나름의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도록 하는 최적의 ‘연출 온도’를 선택하기 위해 노력할 뿐입니다.

 

홍상현

뛰어난 데뷔작을 만든 감독이 이른바 ‘차기작 징크스’ 때문에 고생하는 경우를 종종 봅니다. ‘두 번째 작품이 데뷔작만큼 뛰어나지 않으면 어쩌나’하는 걱정 때문인데요. 심할 경우 창작의지를 상실하는 경우마저 생지죠. 하지만 감독님께서는 <유코의 평형추>를 통해 이를 완벽하게 극복하고 계신 걸로 보입니다.

하루모토 유지로

주위의 평가에 연연하지 않습니다. 제가 뛰어나서가 아니라 대저 평가란 게 하나의 결과에 뒤따라오는 ‘덤’에 불과하다고 생각해서지요. 제가 영화를 만들 때 가장 중시하는 건 ‘이 작품을 내 스스로도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지’의 여부거든요. 전작과 차기작을 비교하는 것 자체도 난센스라고 봅니다. 담고 있는 메시지가 매번 바뀌니까요. 현재 이미 다음 작품의 준비를 끝내놓은 상황인데요. 어서 촬영에 들어가고 싶네요.

전주국제영화제 초청작으로 올해 한국에서 공개된 「분화구의 두 사람」에서도 열연을 보여주었던 타키우치 쿠미 배우는「유코의 평형추」에서 선악의 이분법으로 규정할 수 없는 입체적인 캐릭터를 훌륭하게 소화한다. (C)2020 A Balance Film Partners
전주국제영화제 초청작으로 올해 한국에서 공개된 「분화구의 두 사람」에서도 열연을 보여주었던 타키우치 쿠미 배우는「유코의 평형추」에서 선악의 이분법으로 규정할 수 없는 입체적인 캐릭터를 훌륭하게 소화한다. (C)2020 A Balance Film Partners

“<유코의 평형추>는 부산국제영화제 초청작이지만 코로나의 19 사태 때문에 정작 작품을 보신 관객은 극소수에 불과한 것으로 압니다. 그러니 아무쪼록 반드시 일반상영관에서 관객 여러분을 만날 기회가 주어졌으면 좋겠어요.

이 작품의 테마가 워낙 현대사회를 살아가는 우리가 직시해야 할 문제이기도 할뿐더러, 일본 이상으로 IT기술이 진보해 인터넷이 발달해있는 한국 관객 여러분께도 반드시 피부에 와닿는 문제로 다가갈 수 있을 거라 믿고 있거든요. 부디 여러분과 영화를 같이 보고 함께 이야기를 나눠 보고, 그 결과를 궁극적으로는 사회적 현실과 연결할 수 있는 기회가 오기를 바랍니다.”

무척이나 신기한 일.

한 마디 한 마디를 몽당연필로 꾹꾹 눌러쓴 느낌의 답변이 이어진 인터뷰였건만 마무리 발언이 끝난 뒤에도 왠지 아쉬움이 남았다. 그럴 리가, 한정된 예산과 일정을 최대한 활용하기 위해 며칠이나 리허설을 거쳤다던 <유코의 평형추> 제작기처럼 사전에 건네진 답변을 위해 바쁜 일정을 쪼개가며 하루모토 감독 특유의 성실성을 발휘되었을 테다.

그러다 지난 12월 3일 마흔 두 번째 생일을 맡은 그가 니혼대학 예술학부 영화학과를 졸업한 2004년 이후, 데뷔작 <가족에게>를 제작하게 되기까지 걸린 세월에, 차기작 <유코의 평형추>를 내놓은 올해까지의 기간을 더해보니 의문이 풀렸다. 스무 살 무렵부터 오로지 영화만을 생각해온 청년이 중년의 감독이 되는데 걸린 16년 세월. 꼭 작품내적인 것들이 아니더라도 하고 싶은 이야기가 얼마나 많았을까.

하지만 굳이 몇 개의 질문을 더하기보다 여백을 남기는 기분으로 대화를 마무리했다. 부산국제영화제 개막을 대략 10일 남짓 남겨두고 있던 10월 초, 부지런한 그가 이미 세 번째 작품의 제작준비를 선언했던 일을 기억하고 있어서였다. 거침없이 이어질 그의 새로운 이야기를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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