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괜찮아, 괜찮아" 선한 그들이 전하는 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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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괜찮아, 괜찮아" 선한 그들이 전하는 위로
  • 홍상현
  • 승인 2021.01.15 14:2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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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상현의 인터뷰] 전주국제영화제 초청작 <바람의 목소리> 스와 노부히로 감독
「바람의 목소리」는 프랑스를 거점으로 활동하던 스와 노부히로 감독이 장 피에르 레오를 캐스팅해 화제가 되었던 「오늘밤 사자는 잠든다」 이후 3년 만에 내놓은 신작이다. 사진은 주인공 ‘하루’로 분한 모토라 세리나 배우. (C)2020 Voices in the Wind Film Partners
「바람의 목소리」는 프랑스를 거점으로 활동하던 스와 노부히로 감독이 장 피에르 레오를 캐스팅해 화제가 되었던 「오늘밤 사자는 잠든다」 이후 3년 만에 내놓은 신작이다. 사진은 주인공 ‘하루’로 분한 모토라 세리나 배우. (C)2020 Voices in the Wind Film Partners

해변이 보이는 언덕 위에 전화 부스 하나가 서 있다.

스마트폰만 있으면 어디서든 상대방과 화상통화까지 가능한 최근의 세태를 생각하면 뭔가 이질적인 느낌마저 드는 풍경. 안에는 오래된 다이얼식 전화와 이곳을 찾은 이들이 사연을 적는 노트 한 권이 놓여있다. 전화선은 연결되어 있지 않다. 종이 위에 인쇄된 안내문구가 눈에 들어온다.

“가만히 눈을 감고 귀를 기울여보세요. 바람소리나 파도소리, 혹은 새의 지저귐이 들린다면 당신의 마음을 전해주세요.”

짐작할 수 있듯 전화 부스는 편의시설이 아니다. 아름다운 바닷가마을의 풍경에 이끌려 이주한 정원사가 고인이 된 종형에게 가슴 속 이야기를 전하려는 마음으로 앞뜰에 가져다두었던 소품. 하지만 2011년 3월 11일 지진해일이 마을을 덮치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한명이라도 많은 주민들을 대피시키려던 읍장과 주민 센터 직원들을 포함, 이 마을에서만 800명 가까운 희생자가 나온 후, 그들에게 못 다한 말을 전하려는 이들이 생겨났고, 정원사는 전화 부스가 더 이상 자신의 전유물에 머물러 있을 수 없음을 깨달았다. 앞뜰은 일흔 살 장인의 손길을 거쳐 메모리얼가든으로 정비되었다. 이와테 현 오쓰치마을의 명물 “바람의 전화”의 탄생이었다. 동일본대지진 발생 후 3개월만의 일이다.

스와 노부히로 전주국제영화제의 인연은 각별하다. 「바람의 목소리」로 초청되기 이전에도 제1회 우석상(「마더」) 수상자였고, 3회 때 디지털 삼인삼색 프로젝트에서 「히로시마에서 온 편지」를 연출했으며, 7회 때는 프랑스에서 제작한 「퍼펙트 커플」이 초청되었다. (C)2018 Nobuhiro Suwa
스와 노부히로 전주국제영화제의 인연은 각별하다. 「바람의 목소리」로 초청되기 이전에도 제1회 우석상(「마더」) 수상자였고, 3회 때 디지털 삼인삼색 프로젝트에서 「히로시마에서 온 편지」를 연출했으며, 7회 때는 프랑스에서 제작한 「퍼펙트 커플」이 초청되었다. (C)2018 Nobuhiro Suwa

그리고 9년의 세월이 흐른 뒤. 바람의 전화를 소재로 한 영화 <바람의 목소리>기 유럽에서 사랑받는 거장, 스와 노부히로 감독에 의해 만들어졌다. 정해진 시나리오 없이 즉흥적으로 펼쳐지는 상황을 카메라에 담는 연출스타일로 데뷔당시부터 주목받았으며(<듀오>, 로테르담국제영화제 넷팩상 수상), <마더>로 칸영화제 국제비평가연맹상을 거머쥔 뒤에는 알랭 레네의 대표작(<히로시마 내 사랑>)을 리메이크하는가 하면(<H 스토리>), 전설적인 배우 장 피에르 레오를 주연으로 캐스팅한 작품(<오늘밤 사자는 잠든다>)으로 낭뜨3대륙영화제의 레드카펫을 밟는 등 명성을 쌓았다.

스와 감독의 최신작 <바람의 목소리>는 흡사 고향을 향한 여정을 그린 판타지 로드무비 <오즈의 마법사>의 리얼리즘버전 같은 느낌이다. 동일본대지진에서 홀로 살아남아 힘겹게 마음을 추스리던 17세 소녀 하루(모토라 세리나 분)의 일상은 상냥하고 따듯한 고모, 히로코(와타나베 마키코 분)가 쓰러지면서 다시 혼란에 휩싸인다. 이내 재해 이후 한 번도 돌아가지 않았던 고향, 오쓰치마을로의 여정이 시작되었다. 하루는 길에 쓰려져 있던 자신을 구해준 사내(미우라 토모카즈 분), 동일본대지진 당시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노인(니시다 토시유키 분) 등과 조우하며 여정을 이어가다 후쿠시마원전에서 일하던 모리오(니시지마 히데토시 분)와 함께 바람의 전화로 향한다. 꿈에도 잊지 못하던 가족들에게 그는 어떤 메시지를 전하게 될까.

베를린국제영화제 제너레이션 14플러스 부문 심사위원 특별언급에 빛나는 신작 <바람의 목소리>로 전주국제영화제를 찾은 스와 감독을 만났다.

이와테 현 오쓰치마을에 있는 바람의 전화에는 선이 연결되어 있지 않다. 그리고 옆에는 노트 한 권이 놓여있는데, 이곳을 찾은 이들이 사연을 적어놓기 위한 것이다. (C)2021 Garden eL Roi
이와테 현 오쓰치마을에 있는 바람의 전화에는 선이 연결되어 있지 않다. 그리고 옆에는 노트 한 권이 놓여있는데, 이곳을 찾은 이들이 사연을 적어놓기 위한 것이다. (C)2021 Garden eL Roi

홍상현

전주국제영화제와의 가장 인연이 깊은 해외감독 중 한 분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 같습니다. 제1회 우석상(<마더>) 수상자이셨고, 3회(<히로시마에서 온 편지>, 디지털 삼인삼색)와 7회(<퍼펙트 커플>) 때에도 참가하셨습니다. 그리고 21회를 맞는 올해 베를린국제영화제 심사위원상에 빛나는 <바람의 목소리>로 돌아오셨는데요.

스와 노부히로

제게 전주국제영화제는 세계의 영화제 가운데서도 특별히 소중하고 추억이 깊은 영화제입니다. 막 영화를 찍기 시작한 젊은 영화작가였을 무렵 두 번째 작품 <마더>를 높게 평가해 큰 용기를 주셨지요. 아울러 “디지털 삼인삼색” 프로젝트에서 김호정 배우와의 콜래보레이션도 대단히 소중한 경험이었습니다. 짧은 기간이었지만 히로시마에서 함께하며 서로의 신뢰에 근거해 작업을 진행했던 일은 이후 저의 영화작업을 지탱하는 중요한 사건이 되어주었어요.

코로나 19 사태로 인해 영화의 제작ㆍ공개가 쉽지 않은 상황이지만 이런 때일수록 사람과 사람 사이의 신뢰에 근거한 연계가 보다 소중하다는 것을 실감합니다. 이런 마음가짐으로 전주국제영화제에 참가했습니다.

 

홍상현

<바람의 목소리>는 전주국제영화제 외에도 올해 2회째를 맞는 평창국제평화영화제에 초청되어 화제가 되었습니다. 현시점에 한국의 국제영화제에서 <바람의 목소리>가 이토록 사랑받는 이유는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스와 노부히로

영화제에 즈음해 하늘길이 막힌 탓에 안타깝게도 한국 관객 여러분의 반응을 피부로 느낄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지요. 그래서 더더욱 제 작품을 어떻게 봐주셨는지 저도 궁금합니다.

베를린국제영화제의 첫 상영 때는 주연을 맡은 모토라 세리나 배우와 참석했는데 관객 여러분이 무척 따듯한 반응을 보여주셨어요. 가족적인 친밀감으로 가득한 분위기였습니다. 당시의 반응을 돌이켜 짐작컨대 대지진 이후를 다룬 특정한 나라의 이야기가 아니라, 세계 어디든 있을법한 어려움 속에서 살아가는 소녀의 이야기로 받아들여지는 가운데 주인공 ‘하루’를 가족처럼 맞아주셨던 것 아닐까 합니다. 우리 제작진과 모토라 배우에 의해 태어난 하루가 베를린 관객 여러분 안에서 설 곳을 찾았던 것처럼 한국 관객 여러분께도 가족으로 받아들여지기를 바랐습니다.

칸영화제 국제비평가연맹상에 빛나는 1999년 작, 「마더」 이후, 20년 만에 스와 노부히로 감독의 영화에 출연한 미우라 토모카즈 배우(왼쪽). 스와 감독은 그와 함께 작업했던 배우들을 “‘가족’과 같은 존재들”이라 표현한다. (C)2020 Voices in the Wind Film Partners
칸영화제 국제비평가연맹상에 빛나는 1999년 작, 「마더」 이후, 20년 만에 스와 노부히로 감독의 영화에 출연한 미우라 토모카즈 배우(왼쪽). 스와 감독은 그와 함께 작업했던 배우들을 “‘가족’과 같은 존재들”이라 표현한다. (C)2020 Voices in the Wind Film Partners

홍상현

조금 전에도 언급하셨지만 2002년 제3회 전주국제영화제에서 문승욱 감독과 함께 “디지털 삼인삼색”프로젝트를 진행하신 적이 있고, 2015년 부산국제영화제 심사위원까지 맡으시는 등 한국영화와 인연이 남다르십니다.

스와 노부히로

어림잡아 최근 20년 정도의 기간 동안, 한국 영화계는 커다란 변화를 겪었습니다. 일본 영화계의 그것을 넘어설 정도로 말이지요. 기술혁신 면에서도 일본을 능가하고, 영화인들도 국제적인 시야를 갖고 계세요. 일본 영화계에 부족한 부분이지요. 작품의 오락적인 퀄리티도 높을뿐더러, 국제적으로 평가받는 예술적인 작품을 지지하고 만들어가는 분들의 정열 또한 넘칩니다. 그밖에 일본에서는 영화를 사랑하는 관객이 점차 고령화되고 있지만 한국에서는 젊은 영화팬의 열기가 느껴집니다.

 

홍상현

누벨바그의 영향으로 시나리오 없이, 때로는 프로의 배우를 캐스팅하지 않고 즉흥적이며 예측할 수 없는 상황에 주목하는 영화를 만들어 세계적으로 인정받으셨는데요. 필자의 사견입니다만, 때로는 바로 그 점 때문에 감독님의 영화가 다소 불친절하다고 느낀 적도 있습니다. (웃음)

하지만 <바람의 목소리>는 달랐습니다. 예고편을 보는데 “아, 드디어 올해의 히트작에 도전하시는가”하는 느낌이 들었거든요. (웃음) 보고 나서도 대단히 폭넓은 관객에게 어필할 수 있는 작품이라는 확신이 들었습니다.

스와 노부히로

확실히 <바람의 목소리>는 멀티플렉스를 통한, 저로서는 처음으로 상업적 공개를 전제로 한 프로젝트였습니다. 하지만 지금껏 작품을 만들어온 저만의 방식을 바꾼 건 아니었어요. 도리어 프랑스에서 만들어온 작품들과 비교해보더라도 훨씬 저예산으로 겨우 3주 동안 촬영이 이루어졌고, 스태프도 최소규모로 꾸리는 등 독립영화 스타일로 제작이 진행되었습니다.

다만 <오늘밤 사자는 잠든다>까지의 제 작품이 ‘영화란 무엇인가’라는 사적인 물음을 담고 있었다면, <바람의 전화>에는 오늘날 제가 발 딛고 서있는 땅, 혹은 세계를 탐구해보고자 하는 문제의식이 담겨있습니다. ‘하루’라는 상처받은 소녀의 여행을 통해 그의 눈에 비친 풍경과 귓가에 들려오는 목소리를 영화 속에 정착시켜보려 한 가지요. ‘... 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더러 파괴적인 표현으로 귀결되자만 <바람의 목소리>는 폐허 속에서 어떤 희망을 찾아내고 싶다는 욕망이 작용한 작품이었다고 할까요.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초청작 「켄과 카즈」로 한국 관객들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겼던 카토 신스케 배우(오른쪽). 독립영화계의 신스틸러인 그는 「바람의 목소리」에서 가슴 따듯한 선인의 모습으로 등장한다. (C)2020 Voices in the Wind Film Partners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초청작 「켄과 카즈」로 한국 관객들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겼던 카토 신스케 배우(오른쪽). 독립영화계의 신스틸러인 그는 「바람의 목소리」에서 가슴 따듯한 선인의 모습으로 등장한다. (C)2020 Voices in the Wind Film Partners

홍상현

<바람의 목소리>는 지진해일로 가족을 잃고 고향을 떠나, 고모와 함께 살던 주인공 하루가 고향인 오쓰치로 돌아가는 여정을 그립니다. 그런데 저는 이 여정이 두 가지 느낌으로 구분된다는 생각이 들었는데요.

우선 첫 번째는 ‘따듯함’입니다. 마치 “이런 사람을 만나고 싶었다”는 소망이 반영된 듯 시퀀스마다 가슴을 뭉클하게 하는 선인들(virtuous people)이 등장합니다. 현실이 아니라 좀 동화 같다는 느낌마저 들었는데요.

스와 노부히로

말씀대로 하루는 여행을 하다 세 명의 젊은이들에게 습격을 당하는 수난을 겪기도 하지만 대부분 착한 사람들을 만나고, 모두들 그의 여정을 돕습니다.

왜 그런지 모르겠지만 저는 애초부터 <바람의 목소리>에 ‘악인’을 등장시킬 생각이 없었어요. 이 여행을 소녀의 성장스토리로서 통상적인 트라마투르기에 준거해 영화로 만든다면 여러 가지 곤란이 끼어들어 온갖 위험한 일들에 조우하는 가운데 이를 넘어서는 갈등이 묘사되었겠지요. 하지만 이는 현실적이라기보다 오히려 이야기의 드라마틱한 요청에 따르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미 극한의 상처를 받은 존재인 하루에게 저는 작가의 권한으로 더한 상처를 줄 생각이 없었습니다. 그녀의 처지를 알면서도 그녀를 속여서 또 다른 상처를 주는 악인을 등장시키고 싶지 않았던 거지요.

이게 비현실적일까요? 저는 도리어 그런 현실 속의 악인을 알지 못합니다. 영화에서만 봤지요. 모든 사람에게는 선한 측면과 악한 측면이 있잖아요. 물론 이 두 가지 측면 가운데 하나만 가진 사람은 없지만, <바람의 목소리>에서는 특히 사람의 선한 측면에 초점을 맞췄습니다. 여기 등장하는 사람들이 하루를 제외하면 모두다 제가 잘 알고 있는 사람들이기도 하고요.

 

홍상현

확실히 영화는 작가의 창작을 통해 세상에 태어나지만, 이후에는 나름의 생명력을 갖게 되니까요.

스와 노부히로

다만, 하루가 현실적이라기보다 상징적인 존재일 수는 있습니다.

다들 실제로 일본에도 그와 같은 처지의 아이들이 있지만, <바람의 목소리>에서처럼 죽은 듯이 감정을 억누르며 살고 있지는 않겠지요. 다른 한편으로, 친구들과 어울리고 아무렇지 않게 웃는 등 일상과 타협해서 살아가더라도 마음속에는 하루와 다르지 않은 ‘빈사의 영혼’이 존재할 수도 있을 겁니다.

3ㆍ11 피해지역에 2천 명 이상 거주하고 있는 터키계 쿠르드 난민들을 등장시킨 것은 스와 노부히로 감독과 같이 시나리오를 쓴 이누카이 쿄코 작가의 아이디어다. (C)2020 Voices in the Wind Film Partners
3ㆍ11 피해지역에 2천 명 이상 거주하고 있는 터키계 쿠르드 난민들을 등장시킨 것은 스와 노부히로 감독과 같이 시나리오를 쓴 이누카이 쿄코 작가의 아이디어다. (C)2020 Voices in the Wind Film Partners

홍상현

(웃음) 실로 절묘한 창작의 포인트입니다.

계속 해서 <바람의 목소리>의 다른 느낌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이른바 ‘냉철함’인데요. <바람의 목소리>는 고령화의 문제와 사회적 다양성(이민ㆍ난민)문제, 후쿠시마 제1원전사고가 지역사회에 미친 최대피해인 공동체와 가족의 붕괴, 그리고 타 지역으로 이주한 후쿠시마 지역민의 차별 문제 등에 대해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보여줍니다. 특히 감독께서 늘 가장 적극적으로 목소리를 높이시는 사회적 다양성에 대한 내용이 아주 인상적이었는데요.

스와 노부히로

그간 프랑스를 거점으로 활동해온 까닭에 일본에서의 영화제작은 대략 20년 만이었습니다. 올림픽을 목전에 둔 일본에서는 집권여당이나 미디어에 의해 대지진이나 원전사고 등이 마치 일어난 적조차 없었던 양 밝은 분위기만 강조되고 있었는데요. 막상 로케이션헌팅을 위해 국내를 여행하면서 온 나라가 상처투성이라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고향이 사라지고 공동체가 무너진 땅 위에서 외로운 사람들이 어깨를 맞대며 살아가고 있었지요. 이런 현실을 하루의 시선을 통해 그려보고 싶었어요. 로버트 크레이머가 <루트 원 유에스에이(Route One USA)>에서 미국의 또 다른 얼굴을 그려냈듯이 말이죠.

쿠르드 난민들을 등장시킨 건 같이 시나리오를 쓴 이누카이 쿄코 작가의 아이디어였습니다. 그가 “상처 입은 대지는 전 세계에 퍼져 있다”면서 <바람의 목소리>에서 난민 문제를 다뤄보자고 제안했습니다. 잘 보도되지 않지만 3ㆍ11 피해지역에는 실제로 2천 명 이상의 터키계 쿠르드인들이 살고 있습니다. 일본 정부가 이미 난민의 지위에 관한 협약에 비준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 중 대부분이 난민으로 인정받지 못한 채 불안정한 신분으로 살아갑니다. 확실히 비정상적인 사태지요, <바람의 목소리>는 이를 정치적으로 비판하기보다 알려지지 않은 일상의 이웃으로 쿠르드인들을 등장시키는 방법을 택했습니다. 아울러 오쓰치 등 피해지역의 실상 또한 보여주었습니다. 언론에서 다루지 않을 뿐 현지 분들의 고뇌는 여전히 계속되고 있거든요. 저는 <바람의 목소리>를 통해 이렇듯 ‘눈에 보이지 않지만 현실 속에 엄연히 존재하고 있는 것들’을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홍상현

마지막 여정을 함께하는 모리오 역으로 한국에도 팬이 많은 니시지마 히데토시 배우가 캐스팅되어 반가웠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또 인상적인 것이, 그가 동일본대지진으로 가족을 잃은 피해자인 동시에, 어떤 의미에서는 가해자 편에 서 있는 사람으로 보일 수도 있는 후쿠시마 제1원전의 직원으로 등장한다는 겁니다. 이른바 “입체적인 인물”이죠.

스와 노부히로

후쿠시마는 원래 원전에 의해 지역경제가 유지되었던 까닭에 요즘도 지역 주민의 대략 70퍼센트 정도가 어떤 형태로든 원전과 관련된 일을 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모리오처럼 그 자신 원전사고의 피해자이기도 한 노동자는 특별한 존재가 아니에요. 아울러 가해자인 동시에 피해자이기도 한 모리오는 어떤 의미에서 오늘의 일본을 상징하는 캐릭터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니시지마 배우로서는 대사를 따로 정해놓지 않은 상태에서 즉흥 연기만으로 복잡한 배경을 가진 인물을 연기해내기가 쉽지 않았을 거예요. 실제로 그 자신, 촬영기간 내내 무척 고민이 많았고요. 하지만 이 모든 과정에서 고뇌하고, 흔들리는 배우로서의 성실함이 모리오의 존재에게 설득력을 더해주었습니다.

실제 후쿠시마 출신으로 평소 고향의 현실에 대해 깊은 생각을 가지고 있던 대배우 니시다 토시유키. 고향 오쓰치마을로 향하는 하루를 만나 동일본대지진 당시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C)2020 Voices in the Wind Film Partners
실제 후쿠시마 출신으로 평소 고향의 현실에 대해 깊은 생각을 가지고 있던 대배우 니시다 토시유키. 고향 오쓰치마을로 향하는 하루를 만나 동일본대지진 당시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C)2020 Voices in the Wind Film Partners

홍상현

<바람의 목소리>는 ‘프로’의 연기를 좋아하지 않는 감독님의 지금까지의 작품과 다르게, 대단히 호화스러운 캐스트가 등장하고 있습니다. 니시지마 배우라든가 영화계에서 개성파 신인으로 주목받고 있는 모토라 세리나 배우,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에 초청된 주연 작품(<켄과 카즈>)으로 주목받았던 카토 신스케, “명배우” 니시다 토시유키 배우 등이 그 예인데요.

스와 노부히로

배우의 인지도가 프로듀서에게는 중요할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제게 중요한 건 그 사람을 찍고 싶은지 여부에요. 아시다시피 니시지마 히데토시나 미우라 토모카즈, 와타나베 마키코 등은 현재 일선에서 활약하고 있지만 예전에 제 영화에서 주연을 맡았던, 말하자면 제 영화의 ‘가족’과 같은 존재들입니다. 20년 만에 일본영화를 촬영하면서 제 영화의 고향ㆍ가족과 재회하고 싶었습니다. 아울러 그들이 새로운 가족인 하루, 즉, 모토라 배우를 지켜봐줬으면 했습니다.

가토 신스케 배우와 영화를 통해 함께한 것은 처음이지만, 그는 제 데뷔작인 <듀오>에 깊은 관심을 보여준 오래된 동료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니시다 토시유키 배우는 말할 것도 없이 일본 영화계의 중진이시지만, 후쿠시마 출신으로 고향의 현실에 깊은 생각을 갖고 계시다는 걸 전부터 알고 있었고요. <바람의 목소리>에서 부디 그 마음을 자유롭게 표현해주시면 좋겠다는 생각에 출연을 부탁드렸습니다.

 

홍상현

네. 말씀처럼 특히 히로인의 모토라 세리나 배우는 다섯 번째 출연작인 <바람의 목소리>에서 발군의 연기력을 보여주었습니다. 동일본대지진의 생존자아면서 희생자와 살아남은 사람들을 이어주는 역할을 하는 주인공으로 그를 캐스팅하신 이유가 궁금합니다.

스와 노부히로

모토라 배우와는 오디션에서 처음 만났습니다. 그가 주연했던 <소녀가 소녀에게>를 보진 못했지만 처음 마주치는 순간 직감적으로 ‘이 사람을 찍고 싶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는 연기에 임할 때마다 충분한 시간을 들이는 까닭에 종종 촬영장에 긴 침묵이 흐르고는 하는데, 무엇보다 대사가 없는 연기에서 이러한 특징이 빛을 발합니다. 도저히 눈을 뗄 수 없을 정도예요. 그저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한 편의 영화가 만들어지지요. 모토라 세리나가 아닌 배우가 연기하는 하루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습니다.

스와 노부히로 감독은 오디션장에서 모토라 세리나 배우를 만나던 순간, 직감적으로 ‘이 사람을 찍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C)2020 Voices in the Wind Film Partners
스와 노부히로 감독은 오디션장에서 모토라 세리나 배우를 만나던 순간, 직감적으로 ‘이 사람을 찍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C)2020 Voices in the Wind Film Partners

홍상현

그밖에 어느 순간 이제는 이 세상에 없는 사람들이 등장해서 하루와 대화하는 등의 장면이 있습니다. 이 부분에 딱히 판타지적인 연출이 더해지지는 않았다는 게 오히려 강렬했는데요.

스와 노부히로

예컨대 꿈을 꾸고 있을 때, 우리는 아무리 부자연스러운 일이 일어나더라도 이를 현실로 받아들입니다. 꿈속에서 망자를 만나는 경우도 있고요. 혹시 ‘뭐야, 살아있었잖아?’하며 태연하게 받아들이는 경험을 하게 되지 않던가요? 그러다가 깨어났을 때 비로소 ‘아, 꿈이었구나’하는. 영화에서는 상투적으로, 꿈과 환상을 현실속의 어떤 지표를 통해 구분하지만, 결국 환상이라는 것도 내적인 현실이다. 이런 생각으로 환상과 현실이 매끄럽게 이어지도록 연출했습니다.

 

홍상현

발군의 연기력을 보여준 데에는 거장을 만났다는 점도 작용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웃음)

특히 이제는 세상에 없는 엄마와 아빠, 그리고 남동생과 통화를 할 때 카메라가 무려 9분 35초 동안 움직이지 않고 그녀의 모습에 고정되었던 시퀀스는 그야말로 압권이었습니다.

스와 노부히로

모토라 배우는 즉흥 연기가 처음이었다는데 ‘즉흥’이라는 방법이 그의 표현자로서의 감성에 딱 맞아 떨어졌습니다. 그의 연기는 머리로 생각해서 구성되는 게 아니라, 상대역의 존재나, 현장의 공기, 물건, 소리, 냄새 등 환경 그 자체를 피부로 느끼면서, 신체적으로 반응해 가는 스타일이었어요. 대사도 정해놓은 게 아니었으니 모두 그녀의 감각에 맡긴 겁니다.

말씀하신 라스트의 ‘바람의 전화’ 장면 또한 따로 정해진 대사가 없었기 때문에, 거기서 하루가 무엇을 말할 것인지가 촬영 기간 내내 모토라 배우에게 큰 부담이었을 거예요. 본인의 술회에 따르면 촬영에 들어가기 전에 숙소에서 이런저런 요소들을 고려하면서 연습도 해보았는데 ‘역시 이건 거짓말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만두었다더군요. 결국 촬영 날 아무런 준비 없이, 그날 처음으로 전화박스에 들어가 쏟아져 나오는 말에 몸을 맡긴다는 용기 있는 결정을 해주었습니다. 저도 모토라 배우도 하루가 그 장면에서 무슨 말을 할지 몰랐어요.

하지만 막상 카메라가 돌아가고 그가 통화를 시작하는 순간, 내면의 감정이 솟아오르는 걸 알 수 있었습니다. 하루, 즉 모토라 배우는 그 자리에서 말을 꺼냄으로써 ‘산다’는 의지를 표현해주었던 겁니다. 또한 이것이 ‘바람의 전화’라는 장치가 가진 힘이기도 하고요. 바람의 전화는 일종의 무대장치였어요. 사람들은 그곳에서 망자에게 말을 거는 ‘연기’를 함으로써 이미 곁에 없는 이들에 대한 새로운 감정을 발견합니다.

덧붙여서 이 장면은 두 번의 테이크를 촬영했는데 OK인지 NG인지는 모토라 배우가 결정하도록 했습니다.

「바람의 목소리」의 등장인물은 대부분 하루에게 뭔가를 주고, 그를 지원한다. 그러나 니시지마 히데토시 배우가 분한 ‘모리오’는 하루와 대등한 ‘방황하는 영혼’으로 유일하게 상호작용을 보여준다. (C)2020 Voices in the Wind Film Partners
「바람의 목소리」의 등장인물은 대부분 하루에게 뭔가를 주고, 그를 지원한다. 그러나 니시지마 히데토시 배우가 분한 ‘모리오’는 하루와 대등한 ‘방황하는 영혼’으로 유일하게 상호작용을 보여준다. (C)2020 Voices in the Wind Film Partners

홍상현

니시지마 배우와의 케미스트리도 정말 훌륭했습니다.

스와 노부히로

니시지마 배우는 모토라 배우의 연기를 ‘거짓 없는 연기’라고 평했습니다. 모토라 배우의 진실한 연기가 모리오라는 캐릭터의 불확실함을 걷어내 준 거지요. 실제로 촬영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모리오의 이야기도 미묘한 변화를 거듭했습니다. 정신적 망향의 상태에서 방황하던 모리오의 영혼은 하루를 만나 재생을 경험합니다. 극중에서 모리오가 방랑생활을 접고 귀향을 결심하는 내용이 나오는데 이건 애초의 시나리오에서는 없었던 거거든요. 하루와의 만남으로 니시지마 배우의 연기 플랜에도 변화가 생긴 겁니다. 촬영이 진행되던 중에 니시지마 배우가 ‘역시 모리오는 고향으로 돌아가 지내기로 결심할 것’이라면서 결단을 내린 거였지요.

<바람의 목소리>의 등장인물들은 대부분 하루에게 뭔가를 주고, 그를 지원합니다. 하지만 모리오와 하루는 대등한, 다시 말해 두 사람 모두 ‘방황하는 영혼들’로서 서로 뭔가를 주고받는 존재였습니다.

 

홍상현

성찬이라도 대접받은 느낌이 들 정도로 풍성한 이야기에 감사드립니다. 마지막으로 <바람의 목소리>에 대한 감독님의 소개를 부탁드리고 싶은데요.

스와 노부히로

동일본대지진 발생 이후 8년이 지나면서 피해지역도 다시 태어나고 있습니다. 새집이 들어서고, 철도가 개통되면서 사람들의 새로운 삶이 시작되고 있지요. 이에 따라 그 깊은 상처도 좀처럼 눈에 띄지 않게 되었고요. 하지만 마음의 상처마저 새 건물이 들어서듯 복구된 건 아닙니다. 일견 일상적인 풍경이 펼쳐지는 것 같은 그 땅에는, 보이지 않는 슬픔이 지층처럼 겹쳐져 묻혀 있었어요.

얼어붙은 것 같은 하루의 표정 저편에서 우리는 어떤 풍경을 찾아낼 수 있을까요? 누군가 말했습니다. 진실을 보는 데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고. 하나는 눈을 뜨고 주시하는 것, 다른 하나는 눈 감아버리는 것이라고.

영화란 뭔가를 보여 주는 동시에 보이지 않는 것을 상상하게 하는 것이기도 하다고 생각합니다. 부디 <바람의 목소리>가 그 ‘상상의 힘’을 회복할 수 있는 여행으로 이어지는 작품이었으면 좋겠습니다.

“영화란 뭔가를 보여 주는 동시에 보이지 않는 것을 상상하게 하는 것이기도 하다고 생각합니다. 부디 「바람의 목소리」가 그 ‘상상의 힘’을 회복할 수 있는 여행으로 이어지는 작품이었으면 좋겠습니다.” 스와 노부히로 감독의 말이다. (C)2020 Voices in the Wind Film Partners
“영화란 뭔가를 보여 주는 동시에 보이지 않는 것을 상상하게 하는 것이기도 하다고 생각합니다. 부디 「바람의 목소리」가 그 ‘상상의 힘’을 회복할 수 있는 여행으로 이어지는 작품이었으면 좋겠습니다.” 스와 노부히로 감독의 말이다. (C)2020 Voices in the Wind Film Partners

“영화를 완성시키는 것은 관객이죠. 저는 늘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또한 영화는 관객 속에 수태되고, 영화를 본 사람의 인생 경험이나 감정을 모체로 만들어지는 거지요. <바람의 목소리>는 일본의 이야기지만, 이웃나라인 한국의 관객 여러분들을 거치면서 어떻게 변화해갈지 무척 궁금해요. 우리가 살고 있는 나라, 사회를 넘어, 하루라는 소녀는 분명 당신의 가족이 또한 되어줄 것이라 믿습니다.

코로나 19 사태로 인해 우리는 이동하는 일, 사람과 만나는 일을 제한받으며 고립된 세계에서 살고 있습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이토록 세계인과 연결되어 있음을 실감했던 적도 없어요. 바로 이 순간 영화가 물리적으로는 멀리 떨어져있는 우리를 다시금 이어주는 다리가 되지 않을까요. <바람의 목소리>가 무언가를 목청껏 주장하는 영화는 아니지만, 부디 ‘괜찮아, 괜찮아’하며 상처받은 이들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는 작품이 되었으면 합니다.”

독립된 프로그램으로 운영되는 예술거점이자, 독립영화인과 관객을 이어주는 장소인 미니시어터를 구하자는 취지에서 스와 노부히로 감독이 주도한 캠페인, “세이브 더 시네마(Save the Cinema)”는 순식간에 9만 명이 넘는 서명을 모았고, 비슷한 위기를 맞은 소규모 공연장 등과 연대하면서 5백억 엔의 문화 지원 예산을 확보하는 성과를 올렸다. (C)2018 Nobuhiro Suwa
독립된 프로그램으로 운영되는 예술거점이자, 독립영화인과 관객을 이어주는 장소인 미니시어터를 구하자는 취지에서 스와 노부히로 감독이 주도한 캠페인, “세이브 더 시네마(Save the Cinema)”는 순식간에 9만 명이 넘는 서명을 모았고, 비슷한 위기를 맞은 소규모 공연장 등과 연대하면서 5백억 엔의 문화 지원 예산을 확보하는 성과를 올렸다. (C)2018 Nobuhiro Suwa

마지막 메시지에서 “영화를 완성시키는 관객”의 역할을 강조한 스와 감독은 코로나19 사태를 맞아 이런 자신의 신념을 또 다른 방식으로 실천했다. 독립된 프로그램으로 운영되는 예술거점이자, 독립영화인과 관객을 이어주는 장소인 미니시어터를 구하자는 캠페인, 세이브 더 시네마(Save the Cinema)를 주도한 것이다. 캠페인은 순식간에 9만 명이 넘는 서명을 모았고, 비슷한 위기를 맞은 소규모 공연장 등과 연대하면서 5백억 엔의 문화 지원 예산을 확보하는 성과를 올렸다. 같은 시기 청년감독 하마구치 류스케후카다 코지가 연동해 진행한 크라우드 펀딩, 미니시어터 에이드(Mini-Theater AID)도 영화팬들로부터 4억 엔 이상을 모금하는데 성공했다. 크리에이터와 관객의 연대로 팬데믹의 궤멸적 타격에 맞선 기념비적 사건이었다.

최근 스와 감독은 한국의 영화진흥위원회를 참고해 독립영화를 위한 상시적 지원 시스템 구축을 추진 중이다. 자신의 창작활동 뿐만 아니라 차세대를 위한 기반 조성까지를 생각하는 ‘영화계의 어른’다운 행보. 부디 그의 활동이 결실을 맺어<바람의 목소리>의 하루처럼 오늘의 슬픔을 털어내고 새로운 희망을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영화 밖 현실에서도 많아지기를. 그렇게 예순 살 대가의 명작은 지금 이 순간에도 계속되고 있다.

홍상현 팩트체커  contact@newstof.com  최근글보기
정치학과 영상예술학 두 분야의 학위를 소지. 사회과학과 영화이론을 넘나드는 전문적 식견으로 한ㆍ일 양국 매체에 분석 기사를 쓴다. 파리경제대 토마 피케티와 『21세기 자본』 프로젝트를 진행한 도쿄대 시미즈 연구실 출신. 같은 학교 이미지인류학랩(IAL)의 네트워크 멤버였다.
2013년부터 월간 《게이자이》에서 담당하는 경제평론 지면은 에히메대 와다 제미나르의 교재로 쓰인다. 『마르크스는 처음입니다만』, 『어쨌거나 괜찮아』 등 다수의 스테디셀러를 국내에 소개해 온 번역가.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전주국제영화제 비상근 어드바이저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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