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럼프를 '숭배'하는 미국 보수의 미래는?

  • 기자명 박상현
  • 기사승인 2021.01.25 1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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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 무대에서는 신인에 불과했던 버락 오바마가 민주당 경선에서 힐러리 클린턴을 상대로 바람을 일으키며 질주하던 2008년 3월, 미국 언론을 들끓게 한 일이 있었다. 그가 미국 중서부 유권자들에 대해 "그들은 울분에 차있기 때문에 총기와 종교에 매달리고 자신과 다른 인종, 이민자들에 대해 적대적이 된다"는 내용의 발언을 한 것을 참석자 중 한 사람이 녹음을 해서 공개한 것이다. 오바마는 얼마 전에 발행된 자신의 회고록에서 그 발언은 진보적인 캘리포니아주 샌프란시코에서 민주당원들이 모인 사적인 자리에서 한 것이고, 절대 하지 말았어야 할 말을 한 큰 실수라고 고백했다. 전형적인 정치 신인의 실수였고, 오바마는 대가를 톡톡하게 치렀지만 그 말에 분노한 사람들 만큼이나 많은 사람들이 그의 분석에 동의했다.

 

총과 종교

나는 바이든의 취임식을 며칠 앞두고 미국 중서부 지역을 자동차로 다녀올 일이 있었다. 운전하면서 지났던 주들 중에는 지난 2020년 대선에서 트럼프가 승리한 오하이오주와 인디애나주, 그리고 막판까지 접전을 벌이다가 바이든에게 패한 펜실베이니아주가 있었다. 그런데 눈이 살짝 덮인 그곳의 황량한 겨울 벌판을 지나면서 <Trump 2020>이라 적힌 깃발이나 대형 입간판, 빌보드가 집이나 농장 전면에 붙어있는 장면을 자주 목격하게 되었다. 이들은 선거가 끝난 지 두 달이 넘은 지금까지도 이 홍보물을 내리지 않고 있다.

물론 내가 사는 동부에서도 집 앞에 <Trump 2020> 깃발이 걸린 것을 보는 게 아주 드물지는 않고, 지금도 2008년 오바마 선거용 자동차 범퍼스티커를 붙이고 다니는 사람들이 있지만, 펜실베이니아와 오하이오, 인디애나주의 농장에서 보는 트럼프 간판과 깃발들은 그와는 좀 다른 느낌을 갖고 있다.

2020년 미국 대선을 앞두고 트럼프 지지자가 언덕에 새겨놓은 TRUMP 2020 문양. 필자 박상현 제공
2020년 미국 대선을 앞두고 트럼프 지지자가 언덕에 새겨놓은 TRUMP 2020 문양. 필자 박상현 제공

 

미국의 중서부는 정치적으로 동부, 서부의 해안지역과는 문화적, 경제적으로 많은 차이점을 가지고 있지만, 지난 수십 년 동안 그 차이는 점점 더 뚜렷해지고 있음을 느낀다. 가령 중서부 지역에서는 독일 자동차를 보는 일이 아주 드물다. 일본차들은 쉽게 눈에 띄는 것으로 봐서 중서부가 문화적으로 외제차를 피해서라고 보기는 힘들다. 고급 승용차를 탈 수 있는 사람들이 적다고 보는 게 맞다. (나는 처음 미국에 와서 중서부에 살다가 동부로 이사를 한 후에 고급 승용차들이 흔한 걸 보고 깜짝 놀란 기억이 있다).

고속도로 주변의 빌보드(대형 입간판)에 등장하는 광고물의 내용도 동서부와는 크게 다르다. 총기류를 파는 상점의 광고나 눈에 띄게 늘어나고, 해안지역에서는 보기 힘든, 교회에서 세운 전도용 간판도 자주 눈에 띈다. 오바마의 말처럼 이 지역 사람들이 울분에 차서 종교와 총기에 매달리는 건 아니라고 해도, 종교와 총기가 이들에게 중요한 존재임을 무시하기는 힘들다.

차도가에 놓여있는 광고판에 "Anxious? JESUS offers rest"라고 적혀 있다. 종교에서 안식을 찾는 미국인들이 상당히 많다. 필자 박상현 제공.
차도가에 놓여있는 광고판에 "Anxious? JESUS offers rest"라고 적혀 있다. 종교에서 안식을 찾는 미국인들이 상당히 많다. 필자 박상현 제공.

 

트럼프에 매달린 기독교인들

미국의 보수 기독교는 공화당 전반에 걸쳐 영향력을 크게 행사하고 있다. 정통 보수세력의 어젠다에 항상 개신교와 교인들의 요구사항이 들어있을 뿐 아니라, 정통 보수세력이 경계해온 티파티와 같은 비주류(fringe)의 중심에도 교회와 교인들이 큰 입김을 발휘해왔다. 그리고 당연한 이유로 2016년 트럼프의 당선에도 미국의 보수 기독교인들이 큰 역할을 했다.

물론 트럼프의 포르노 배우와 성추문과 성폭력 혐의, 장애인 비하 언행 등이 보수적인 기독교회의 기준과 맞지 않는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의 보수 기독교가 트럼프를 지지한 것은 "그의 언행에 동의할 수는 없어도, 그는 우리의 어젠다를 지지한다"는 이유에서였다. 말하자면 전략적 동맹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어젠다에는 낙태 불법화, 기업의 종교적 발언과 정책의 자유 등이 포함되어 있다.

하지만 모두가 그렇게 전략적인 제휴를 한 것이 아니다. 상당수의 기독교인들은 진정으로 신이 보낸 인물이라고 진지하게 믿는다. 친 트럼프 시위장소에 트럼프 깃발을 몸에 휘감고 커다란 나무 십자가를 들고 나와 무릎을 꿇고 기도회를 사람들의 모습은 "전략적 제휴"와는 거리가 멀다.

트럼프 지지자들이 십자가를 들고 집회를 벌이고 있다. 필자 박상현 제공.
트럼프 지지자들이 십자가를 들고 집회를 벌이고 있다. 필자 박상현 제공.

진보적인 정치인들이 트럼프 지지자들의 행동을 개인숭배(personality cult)라고 부르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 언론을 비롯해 자신들의 생각과 다른 사람들의 말을 일절 듣지 않고, 오로지 트럼프의 입에서 나오는 말만 진리라고 믿기 때문이지만, 그들의 행동방식은 항상 종교적인 언더톤(undertone)을 가지고 있다.

 

큐어넌이 받은 충격

그들이 가진 종교적 태도를 보여주는 일이 지난 취임식 때 일어났다. 트럼프의 핵심 지지층이자 음모론을 믿는 것으로 악명높은 큐어넌(QAnon)들을 취재하던 언론보도에 따르면 그들은 트럼프가 취임식이 전날 백악관을 나와서 그의 거처인 플로리다주 마라 라고로 향했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았다는 것이다.

미국 주류 언론의 보도를 보고 듣는 사람이라면 트럼프가 다음 정부로 정권을 이양하겠다는 뜻을 밝힌 것을 잘 알고 있고, 바이든 취임식 전에 백악관을 떠난다는 이야기를 들었겠지만, 큐어넌 사람들은 트럼프가 워싱턴 DC에 모인 주방위군을 동원해서 바이든을 비롯한 민주당 세력을 체포하고, 다음 번 임기 4년을 시작할 것으로 믿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걸 믿고 마치 수퍼보울 행사를 기다리 듯 지켜보고 있었는데, 그들의 기대와 달리 트럼프가 백악관을 떠났다는 말을 듣고 큰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특히 자신이 황당한 기대를 하고 있다는 주위 사람들과 싸워가면서 까지 바이든의 체포를 기대하고 있던 터라 그들의 실망은 이만저만이 아니었고, 일부는 트럼프에 실망을 했지만 일부는 트럼프가 기회를 노리고 있을 것을 기대하는 쪽으로 마음을 바꿨다. 이들의 행동에서 말세와 신의 재림, 혹은 휴거를 기대하던 신흥종교들을 떠올리게 되는 것은 그다지 억지스러운 일이 아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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