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살당한 한국의 라이노타이프 발명가 '심현'을 아십니까

  • 기자명 김현경
  • 기사승인 2021.06.11 0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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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학자 김성칠(1913~1951)은 광복 직후부터 사망 전까지 일기를 썼다. 이 일기는 김성칠의 부인인 이남덕과 아들 김기협에 의해 역사 앞에서라는 제목으로 출간되었는데, 7차 교육과정 고등학교 국어교과서에도 일부 내용이 수록되어 있어 친숙하게 느껴지는 사람도 많이 있을 것이다. 한국전쟁이 발발했을 당시 김성칠은 경기도 고양군 숭인면 정릉리(지금의 서울특별시 성북구 정릉동)에 거주하고 있었는데, 1950924일자 일기에 정릉리에서 일어난 사건 하나를 기술하고 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1950924

지서 옆에서 유치원을 경영하던 심현(沈顯) 씨가 총살되었다는 소문이다. 청수장(淸水莊)에서도 한 사람 죽었다는 이야기고.

심씨는 집에 있다 끌려나와서 개울가 방적(紡績)하는 집 앞에서 맞아 죽었다는데 그 부인이 따라와서 이를 막으려다가 역시 총을 맞아서 한쪽 볼이 꿰어지고, 아이들은 모두 어리고 마을 사람들은 모두 겁을 집어먹어서 내다보려고도 하지 아니하고…… 거적때기를 덮어서 그 자리에 내버려둔 채 하룻밤을 지났다는 것이다. 가엾은 일이다.

심씨는 들리는 소문에 빨치산이 내려와서 유치원을 비워 달라는 걸 얼핏 이에 응하지 않은 것이 그 죄목이라 하나 딱히 알 수 없는 일이다. 그는 일본서 무슨 고등공업을 나왔다던가 하는 분으로 심현 모노타이프 연구소라는 간판을 붙이고 있으나 무슨 내용인지는 잘 알 수 없고 언제나 보면 정원에서 채소와 과일나무를 손질하고 계시었다. 나이 지긋하고 도무지 말수가 없는 분이며 통히 밖에 나다니는 것을 보지 못하였으니 무슨 반동으로 놀기나 한 일도 없었을 것이다.

(김성칠, 역사 앞에서, 창비, 1993, 227~228)

 

김성칠은 심현의 비극적인 최후를 전하고 있지만 그가 어떤 인물이고 무슨 일을 하는 사람이었는지 자세히 알고 있지는 못한 듯하다. 인터넷 검색창이나 사전 등에서 심현의 이름을 검색해 보아도 관련된 인물의 정보는 좀처럼 보이지 않는다. 과연 심현이란 어떤 사람이었을까? 김성칠의 일기에서는 세 가지의 힌트를 얻을 수 있다. 심현이 살던 곳이 김성칠과 같은 정릉리라는 점, 일본의 고등공업학교를 나왔다고 알려진 점, 모노타이프 등의 인쇄와 관련된 일을 하였다는 점이다.

자유신문1946822<문선(文選), 식자(植字) 무용 특수활판 고안> 기사에 따르면, 고양군 숭인면 정릉리 464번지에 사는 심현 씨가 새 활판 제법을 고안했다고 한다. 원고를 보면서 직접 타이프(타자)를 하며 지형(紙型)을 구성하는 제법으로, 이렇게 되면 활자를 뽑고 식자하여 판을 짜는 복잡한 작업을 단축할 수 있으며, 외국에서는 라이노타이프라고 불리는 기계인데 한국에서 사용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라고 한다. 이 기사 속에 등장하는 정릉리 거주 활판 인쇄 고안자 심현은 바로 김성칠의 일기 속 심현과 동일인물이다.

그림1.  『자유신문』 1946년 8월 22일자 '문선(文選), 식자(植字) 무용 특수활판 고안' 기사
그림1. 『자유신문』 1946년 8월 22일자 '문선(文選), 식자(植字) 무용 특수활판 고안' 기사

 

조선일보, 동아일보등의 신문 기사를 통하여 심현이 어떤 인물이었는지 보다 구체적인 정보를 확인할 수 있다. 심현의 나이에 대해서는 1932년에 28세로 소개된 기사가 있고, 1938년에 36세로 소개된 기사 두 종류가 있으며, 각각의 나이를 바탕으로 역산하면 생년은 1905년 또는 1903년이 된다. 본적이 평안북도 선천군이라고 하며, 용천군에서 태어났다는 기록도 보인다. 조선일보1928322일자 기사에 따르면 1922년에 도쿄로 건너가서 고등공업학교에 입학하였다가 여러 가지 사정으로 퇴학하였다고 한다. 이후의 기사에서는 도쿄고등공업학교 내지 도쿄공업대학을 졸업하였다고 기재되기도 하는데 김성칠이 심현을 일본서 무슨 고등공업을 나왔다던가라고 기억하고 있는 것도 이러한 이력과 연결될 것이다.

그는 5~6년에 걸쳐 자동식 이본 활자주조기라는 것을 발명하였고, 1928년에는 특허국에 제출하고 허가가 나기를 기다리고 있다고 한다. 한 번에 두 개 씩 활자를 빼어낼 수 있고 글자 종류도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세계적 발명품이라고 하지만 기계를 제조할 만한 공장을 일으킬 재력이 없어, 현식고 즉 심현식 다리미라는 것을 또 발명하여 활자주조기의 시험비를 장만하려고 한다는 것이다. 1932년에는 고무제 조선 신발 증숙 가공기를 발명하여 특허 출원을 하기도 했다. 이 기계로 만든 고무신은 외관으로 보아도 균형미가 있고 제조 공정도 반으로 줄어 생산량이 배가될 것이라고 기사에서는 소개하고 있다.

그리고 19388, 심현은 활판인쇄용 고속도 인쇄법이라는 것을 발명하여 특허원을 제출하였다고 한다. 그 내용을 살펴보면 식자, 문선 등의 과정을 생략하고 타이프라이터로 지형을 만드는 방식으로 1946자유신문기사에 소개되었던 활판 제법과 크게 다르지 않은 것으로 보아 이미 8년 전에 인쇄법을 완성해낸 것이라 볼 수 있으며, 그 시작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1925년부터 십여 년에 걸쳐 연구한 것이었다. ‘과학조선을 위하여 기염을 토하는 공학도의 새 발명품인쇄계의 혁명적 발명에 해당하였다. 그리고 193810월에는 이 발명을 통하여 제국발명협회 조선지부에서 주관하고 조선총독부가 교부하는 제1회 발명장려금을 받기에 이르렀다.

이처럼 청년 공업가이자 발명가로 이름을 알렸던 심현은 1948년에는 경기도 고양갑구 국회의원에 입후보하였지만 결국 낙선하고 말았다. ‘통히 밖에 나다니는 것을 보지 못하였으니 무슨 반동으로 놀기나 한 일도 없었을 것이라고 김성칠은 일기에 적었으나, 어느 정도 정치적인 활동을 한 인물이었으리라 추정해 볼 수 있다. 정치적 성향이 어떠했는지는 자세히 알 수 없지만 그러한 활동이 북한의 침공 후 총살당하게 되는 빌미를 제공하였을 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림2.  『조선일보』 1928년 3월 22일자에 실린 심현의 사진
그림2. 『조선일보』 1928년 3월 22일자에 실린 심현의 사진

 

근대 인쇄술과 활자, 타자기의 역사에 대하여 서술하는 글들이 많이 있지만 그 글 속에서 심현이라는 이름 두 글자를 발견하기는 어려웠다. ‘심현 모노타이프 연구소나 그가 발명한 고속도 활판인쇄 특허 이야기도 좀처럼 보이지 않는다. 인쇄업계에 있어 뛰어난 발명을 했다고는 하나 기계의 제작과 실용화로 이어지지 못하면서 사람들의 기억 속에 남지 못하게 된 것일까? 인쇄 기술에 관련해서는 문외한인 탓에 심현의 활동이 어떤 의의를 지니는지 잘 알지는 못하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에 흩어져 있는 역사의 퍼즐 조각들을 조금씩 모아 보았다. 한 인물의 비극적인 최후는 역사학자의 증언 속에 선명하게 남았고, 그 증언 덕분에 그의 삶을 어렴풋하게나마 조명해 볼 수 있었다. 이것이 당시의 시대상과 공업 기술의 역사를 밝혀내는 좋은 재료가 될 수 있기를 희망한다.

* 신문 기사 열람에는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국립중앙도서관 대한민국 신문 아카이브 등을 활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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