힌두교 페미니즘 신학과 한국의 극단적 페미니즘

  • 기자명 이광수
  • 기사승인 2021.07.09 13:12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세계의 모든 종교 가운데 힌두교만큼 여신을 숭배하는 신앙이 활발하게 전개되는 것은 없을 것이다. 조금은 특수한 경우의 일이지만, 특정 여성이 여신의 현현으로 인식되어 실제로 숭배하는 경우까지도 있다. 그렇지만 실제 힌두 사회에서 여성의 사회적 지위는 매우 낮다.

중세가 시작될 때 즉 기원후 5세기부터 경부터 힌두교에서는 음()의 원리로서의 샥띠(shakti 陰力)가 우주의 최고 원리로 자리 잡았다. 그리고 그것이 신격체로 현현된 존재인 여신은 절대 존재가 되었다. 반면 그 안에서 밀교 이전에 최고 지존으로 군림하던 쉬바(Shiva)나 비슈누(Vishnu)가 각각의 배우자인 깔리(Kali)와 두르가(Durga), 락슈미(Lakshmi)에게 지존의 위치를 내준 신학이 밀교의 경전인 여러 딴뜨라(Tantra·탄트라)에서 생겨났다. 모든 악의 근원과 현상은 남성성으로 비유되었고, 그 남성성은 지존의 여신에게 처절히 응징되었다. 여신은 그야말로 우주의 제왕이었다.

그렇지만 이러한 밀교가 흥성하게 된 중세 시대에 여성의 사회적 위치는 그 이전의 시대와 비교해 볼 때 전혀 다르지 않았다. 저런 신학이 있었음에도, 그것은 신학에서의 일이었고 실제는 그와는 아무 상관이 없었다. 그 어떤 교단에서도 여성 사제는 존재하지 않았고, 사회에서도 여성은 불가촉민과 마찬가지로 가장 낮고 불결한 존재로 천대받았다. 사회적으로 입문 의례를 받을 수도 없었다. 여아 살해는 특수한 경우라고 치더라도, 신부 지참금(dowry), 앙혼(仰婚 hypergamy) 등 결혼 제도와 관계되는 것에서, 여성은 인간으로 대접받지 못했고, 철저히 남성에 종속되고, 남성의 보호를 받아야 할 존재였다. 여성의 가장 큰 종교적 덕목은 남편을 모시는 것이고, 아들을 낳는 것이었다. 전형적인 남존여비다. 어렸을 적에는 아버지, 결혼해서는 남편, 늙어서는 아버지를 따라야 한다는 가르침은 마누법전의 핵심이다. 동아시아의 삼종지도(三從之道)와 똑같다.

인도 탄트라 밀교에서 악을 응징하는 부처의 모습.  출처:위키피디아
인도 탄트라 밀교에서 악을 응징하는 부처의 모습. 출처:위키피디아

 

힌두교라고 하는 종교는 사회 안의 제사를 중심으로 하는 브라만(Brahman) 전통과 그에 대해 반대의 세계관인 딴뜨라(Tantra) 전통이 섞여 있는 종교다. 브라만 전통은 세계의 영적 해석과 그에 대한 언어, 사유 체계, 상징들의 집합으로서 주로 당시 사회의 기득권자들의 세계관이고 그들은 결국 브라만 중심의 세계관으로 대표된다. 이에 대하여 인민들의 세계관은 물질 중심의 기복 신앙과 다산 숭배, 점복과 의례로 대표되는 종교 전통은 브라만 계급에 의해 저급한 것으로 무시되었다. 베다가 우주와 인간의 본질의 이치를 정신적인 면에서 찾은 반면에 딴뜨라는 그것을 물질 세계에서 찾으려 한다. 그래서 딴뜨라 전통은 브라만 전통에 비해 이질적이고, 과학적이고, 기술적이고, 지역적이고, 부족적이고, 대중적이고, 물질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는 것인데, 주류인 브라만에 의해 아주 속된 것으로 취급받았다. 이것 또한 동아시아 사회의 그것과 똑같다.

딴뜨라가 여성성을 중심으로 형성되는 세계관이고 밀교 힌두교가 그를 바탕으로 하는 종교로서 여신을 지존으로 하는 종교인 것은 바로 이 물질주의로 인해서이다. 여신의 최고 위치 등극은 이러한 딴뜨라의 물질적 세계관에서부터였다. 여신인 데위는 중세 이후 5세기경부터 여러 지역에 흩어져 있는 매우 이질적이고 서로 다른 여러 여신들의 음의 원리에 관한 특질들이 궁극의 개념 안에서 한데 묶여 만들어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중세 농경의 확장과 함께 이루어졌다.

그 여성 신학 안에서 여신은 초월자이고 편재자이며 창조의 물질적 근원이고 모든 존재의 궁극적 실체가 되었다. 그 안에서 여신은 원래는 궁극적 실재로서 무형이지만 이제는 우주적 시간 안에서 질서를 어지럽히는 악을 없애는 존재로 현현하면서 유형의 주인공이 된다. 딴뜨라 안에서 여신은 우주의 창조와 보존 그리고 파괴의 역할을 하는 지고의 신이고 그 지고의 샥띠는 모든 여성을 자신의 육화된 존재로 인정하고 있다. 그래서 여성은 딴뜨라를 통해 비로소 여러 가지의 가내 의례나 사원 의례에 참여할 수 있고, 궁극적으로 해탈의 경지까지 이를 수 있게 되며 신화적으로는 죽어서 신의 경지에까지 이를 수 있게 된다.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여성의 종교적 위치 상승이자 종교적 자유일 뿐이다.

왜 이런 현상이 생기게 되는 것일까? 딴뜨라는 결국 기존의 브라만 전통 안으로의 사회 통합의 수단이 되었기 때문이다. 브라만 문화가 전국적으로 확장이 되면서 여성, 슈드라, 불가촉민과 같은 피지배층 인민들이 지배 층에게 착취당하고 지배당하는 현실에서 지배 층이 그들이 찾는 신앙을 허용해 준 것이다. 그 안에서 지고의 여신을 통해 카타르시스와 같은 심리적 안정을 얻고 이것이 결국 가부장 체제 유지를 위한 채널의 역할을 하였다. 동시에 결국 여신의 지고성(至高性)이 주는 카타르시스의 기능은 주변부의 이질적인 문화가 중심부의 정형화된 틀 안으로 들어가 통합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그 사이에서 계급 간의 갈등은 사라지고, 물질적인 충돌은 모두 신앙 세계 안으로 용해되면서 기존 사회의 안정적 유지를 위해 기여하였다. 그래서 딴뜨라는 인도의 중세 이후 현대에 이르기까지 남성 중심의 사회를 보다 안정적으로 구축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하였다.

최근 한국 사회에서 일어나는 극단적 페미니즘 현상에 대해 생각해 보자. 극단적 페미니즘은 사회에서 여성의 위치를 전혀 변화시킬 수 없다. 아니, 차라리 더 악화시킬 가능성이 더 커졌다. 페미니즘이든 양성평등이든 여성우월주의든 간에 그것을 주장하는 관념 혹은 이념은 오로지 당위성만 내보일 뿐이고, 아무런 힘과 조직 없이 배설하다시피 한 그 주장에 사회가 움직일 가능성은 전혀 없다.

관념이 사회 내에서 실제를 변화시키려면 그에 필요한 수준의 물질적 힘을 갖추어야 한다. 그런데 그것을 갖추지 못하고 이분법으로 나누어 모든 남성을 적대시하고 배척하면, 기득권세력은 그 관념이 마음껏 떠들고 발산할 수 있도록 허용하고 때로는 힘까지 보태준다. 실제의 힘이 전혀 없는 그 망상주의자들이 활동하면 할수록 사회 내 기득권이 그 세력을 확고하게 할수록 반동의 힘이 드세지기 때문이다. 결국 급진 페미니스트들은 세 치 혀로 마음껏 떠들고 자위하는 동안 남성들의 반동에 의해 여성들의 사회적 지위는 더 떨어지고, 남성 기득권의 반동은 더욱 야비하게 커져만 간다.

남성이든 여성이든 관계없이 사회의 기득권이 된 사회적 구조는 문화 권력을 취하면서 여성이 남성을 지배한다는, 그러면서 소설 이갈리아의 딸들에서 자신들이 당한 것과 똑같이 남성을 부려먹고, 때리고, 착취한다는 이야기를 통해 카타르시스를 느끼고, 그대로 사회 안에서 실천하려고 한다. 그런데 그들에게는 아무런 힘이 없다. 단지, 욕설의 배설밖에 없다. 그 안에서 인간성과 인격까지 잃어버리면서 사회적으로 지지층을 잃어버리고, 예전의 온건하고 건전한 양성 평등의 주장조차도 심각한 타격을 받는 듯 반동에 시달리고 있다.

여성이 남성에 대해 더 우월한 사회적 위치를 차지하면서 남성에 대해 미러링이라는 수단으로 처절하게 복수해야 한다는 그 방식이 옳고 그르고를 떠나, 그것은 아무런 힘을 불러오지 못하는 담론밖에 되지 못한다. 여성의 사회적 위치 상승은 불평등한 당시의 사회 경제 시스템이나 문화에 대한 구조 개혁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이상주의 이데올로기를 통한 현실 포기와 담론 안에서의 카타르시스는 기존의 사회 계급 체계를 더욱 공고히 의미할 뿐이다. 게다가 섣부른 급진은 반동을 부른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관련기사
오늘의 이슈
모바일버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