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팩트체크 AS] '발명가 심현' 도쿄고등공업학교 자퇴 혹은 졸업?

  • 기자명 김현경
  • 기사승인 2021.07.23 0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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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611일에 '총살당한 한국의 라이노타이프 발명가 '심현'을 아십니까' 기사를 통해 한국의 발명가 심현을 소개하였는데, 심현의 학력에 대해서는 고등공업학교에 입학하였다가 여러 가지 사정으로 퇴학하였다는 기사 문장을 인용한 바 있다. 그런데 어떤 기사에서는 그가 고등공업학교를 졸업하였다고도 되어 있다. 과연 어느 쪽이 진실에 가까운 것일까? 이번 기사에서는 심현이 받은 공업 교육에 대하여 좀더 자세히 살펴봄으로써 지난 기사에 살을 덧붙이고자 한다.

발명가 심현의 사진.
발명가 심현의 사진.

 

우선 심현과 관련된 기사들 중에서 학력에 관한 정보가 들어 있는 부분을 인용하고자 한다.

 

1) 조선일보 1928322<유례 없는 신안 활자주조기>

... 심현(沈顯)군은 대정 십일년에 동경(東京)으로 건너가서 고등공업학교(高等工業學校)에 입학하였다가 여러 가지 사정으로 퇴학하고 그 후부터 발명고안(發明考案)에 노력하기 시작하여 ...

 

2) 조선일보 19321224<발명계의 현상 고무화 제조 증숙기 발명>

... 평안북도 용천군 출생으로 수년 전에 도쿄고등공업학교 기계과를 졸업한 심현(28)씨는 ...

 

3) 조선일보 1938818<고속도 활판인쇄>

... 심현(沈顯) 씨는 소화 삼년 동경공대를 졸업하고 이래 발명품 연구에 몰두하야 ...

 

위의 세 기사 속 문장들을 통해서 다음의 세 가지 가능성을 정리해 볼 수 있다.

a) 심현은 다이쇼 11(1922)에 도쿄로 건너가 고등공업학교에 입학했으나 퇴학했다.

b) 심현은 도쿄고등공업학교 기계과를 졸업했다.

c) 심현은 쇼와 3(1928)에 도쿄공대를 졸업했다.

 

도쿄고등공업학교는 1881년에 설립된 도쿄직공학교를 전신(前身)으로 하며, 도쿄고등공업학교로 이름이 바뀐 것은 1901년의 일이다. 그리고 1929년에는 도교공업대학으로 승격되어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따라서 b도쿄고등공업학교c도쿄공대(도쿄공업대학)’는 같은 학교라고 할 수 있으며, c에서 1928년인데도 도쿄공대라는 명칭을 사용한 것은 기사 작성 시기가 1938년이었기 때문으로 여겨진다. 또한 1920년대 당시 도쿄에 위치한 고등공업학교는 도쿄고등공업학교가 유일한 것으로 보이므로 심현이 다녔다는 것으로 알려진 고등공업학교는 역시 도쿄고등공업학교로 보아도 무방할 듯하다.

 

도쿄고등공업학교에서는 1881년 개교 이래로 거의 매년 일람(一覽)을 발간하였으며, 여기에는 당시 재학 중인 학생들 명단과 졸업생들의 명단이 수록되어 있다. 일본 국립국회도서관의 디지털 컬렉션에서 도쿄고공 일람을 열람할 수 있다. 하지만 실제 일람의 졸업자 명단을 살펴보면 심현의 이름을 찾아볼 수 없다. 최근에 공개된 <한국 근대 학력 엘리트 DB>에서도 심현의 이름은 검색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도쿄고공 혹은 도쿄공대를 졸업했다(b, c)는 것은 사실이 아니라고 여겨진다.

 

그렇다면 도쿄고공에 입학했으나 중도 퇴학했을 가능성(a)이 남아 있는데, 이 역시 도쿄고공 일람에 수록된 재학 중인 학생 명단을 통하여 사실을 확인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우선 심현이 도쿄에 건너간 해로 알려진 1922년을 전후하여 일람에서 확인되는 조선인 유학생은 다음과 같다.

 

1920~21년도판 일람

(192061일 현재)

1921~22년도판 일람

(192161일 현재)

1922~23년도판 일람

(192261일 현재)

구명회(具明會)

방직과 3학년

노창성(盧昌成)

전기화학과 1학년

노창성(盧昌成)

전기화학과 2학년

배희경(裵凞慶)

응용화학과 3학년

강영직(姜永稷)

기계과 2학년

강영직(姜永稷)

기계과 3학년

노창성(盧昌成)

전기화학화 특별예과

양재의(楊在義)

전기과 특별예과

이인욱(李寅郁)

기계과 특별예과

강영직(姜永稷)

기계과 1학년

 

 

양재의(楊在義)

전기과 1학년

 

 

 

 

이정기(李廷紀)

전기과 특별예과

 

도쿄고공 일람에 의하면 192241일에 제1학기가 시작되었다고 하므로, 만약 심현이 도일 직후 도쿄고공에 입학했다면 1922~23년도판 일람에 재학생으로 기재되어 있어야 한다. 하지만 당시 조선인 학생 5명 중에 심현은 포함되어 있지 않다. 혹은 1922년에 도쿄로 건너간 뒤 입학시험을 거쳐 1923년에 입학하였을 수도 있으나, 공교롭게도 1923~24년도 도쿄고공 일람은 전해지지 않으며 발행 여부도 확인되지 않는다. 1924~25년도 일람에 나오는 조선인 재학생은 다음과 같다.

김한근(金翰根) 색염과 1학년

최천렬(崔千烈) 색염과 특별예과

노봉종(盧鳳鍾) 방직과 1학년

조한종(趙漢鐘) 방직과 특별예과

박양근(朴亮根) 요업과 특별예과

차광은(車廣恩) 응용화학과 1학년

박임련(朴林鍊) 응용화학과 특별예과

주리회(周利會) 전기화학과 1학년

이인욱(李寅郁) 기계과 2학년

강윤모(姜潤模) 기계과 1학년

장명규(張明奎) 기계과 특별예과

고병칠(高柄七) 기계과 특별예과

김원교(金洹敎) 기계과 특별예과

양재의(楊在義) 전기과 3학년

이정기(李廷紀) 전기과 1학년

김병룡(金炳龍) 전기과 특별예과

이용재(李龍在) 건축과 1학년

김종량(金宗亮) 건축과 특별예과

 

위의 명단은 192461일을 기점으로 조사된 학생들의 이름이다. 이상의 명단들을 바탕으로 하여 1923년 당시의 조선인 유학생 명단은 아래와 같이 추정이 가능하다. 만약 심현이 1923년에 입학하였다면 어쩌면 아래 명단에 이름이 포함되어 있었을 것이며, 기계과가 맞다면 강윤모와 동기가 된다. 그렇기는 하지만 1924년 학생 명단에 심현의 이름이 보이지 않는 것을 보면, 결국 길어야 1년 정도밖에 재학하지 않았으리라 짐작된다. 19239월에 일어난 간토 대지진(관동대지진)으로 인해 도쿄고공 캠퍼스가 잿더미가 되고, 조선인 학살 사건이 일어나는 분위기 속에서 학업을 단념했을 가능성도 충분히 있어 보인다.

 

노창성(盧昌成) 전기화학과 3학년

김한근(金翰根) 색염과 특별예과

노봉종(盧鳳鍾) 방직과 특별예과

차광은(車廣恩) 응용화학과 특별예과

주리회(周利會) 전기화학과 특별예과

이인욱(李寅郁) 기계과 1학년

강윤모(姜潤模) 기계과 특별예과

양재의(楊在義) 전기과 2학년

이정기(李廷紀) 전기과 특별예과

이용재(李龍在) 건축과 특별예과

 

그런데 여기서 특별예과라는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도쿄고등공업학교의 특별생 규정에 따르면, 외국인으로 도쿄고공에 다니려고 하는 사람은 신체검사와 학과시험을 거쳐 특별생으로 입학을 허가받게 되는데, 이들은 우선 특별예과에 편입되어 예비 과정을 이수한 다음에 특별본과로 진학할 수 있었다. 1920년대 당시 한국은 이미 병합되어 외국이 아니게 되었지만, 도쿄고공에서는 여전히 조선 출신 학생들을 특별예과에 편입시키고 연도말 시험에 합격한 이들을 본과에 편입시키고 있었다. 그렇다면 심현 역시 1923년에 입학하였다고 보았을 경우, 처음에는 특별예과로 편입되었으며 늦어도 1924년 봄 이전에는 퇴학하였다고 추정해 볼 수 있다.

 

특별생 규정 제7조에는 특별예과생의 학과 과정 및 매주 수업 시수를 다음과 같이 정하고 있다.

수신(修身) 1교시, 수학(數學) 8교시, 물리학 3교시, 화학 4교시, 일본어 4교시, 영어 4교시, 도화(圖畵) 자재화(自在畵) 2교시, 용기화(用器畵) 6교시, 체조 4교시

매주 수업 시수 합계 36교시

이처럼 특별예과에서는 본과에 들어가기 전에 기본적인 교육 내용을 가르치고 있었기 때문에, 심현이 설령 도쿄고공에 재학한 적이 있었다고 하더라도 기계과의 전문적인 교육을 받았다고 보기는 어렵다.

정리하자면 일반에 공개된 자료 상으로는 심현이 도쿄고등공업학교에 재학한 사실이 확인되지 않는다. 도쿄고공에 재학한 적이 없을 수도 있고, 재학했다고 하더라도 1923년에 특별예과 과정을 다닌 데 지나지 않을 것이다. 이처럼 고등공업학교에서의 전문적인 공업 훈련을 거의 받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여러 가지 발명을 거듭하며 뛰어난 성과를 낸 점이 오히려 심현의 대단한 능력을 보여주는 것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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