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당할 수 없는 시련은 없다

  • 기자명 홍상현
  • 기사승인 2021.07.30 1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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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질 무렵」은 좀 더 자유롭게 다양한 콘텐츠를 만들어 보자는 생각을 가진 크리에이터들이 모인 영화제작 프로덕션, 신세계합동회사의 창립작품이다. (C)2020 Soirée Film Partners
「해질 무렵」은 좀 더 자유롭게 다양한 콘텐츠를 만들어 보자는 생각을 가진 크리에이터들이 모인 영화제작 프로덕션, 신세계합동회사의 창립작품이다. (C)2020 Soirée Film Partners

메트로 12호선 솔페리노 역에 내려 걷기 시작한지 5분이나 되었을까. 둥근 천장에 대형시계가 유럽 어느 도시의 중앙역을 연상시키는 건물과 마주쳤다. 물론 느낌은 달랐다. 만국박람회가 열리던 1900년의 시간 속으로 향하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으니까.

일찍이 신성로마제국 황제도 “도시가 아니라 세계(non urbs, sed orbis)”라 극찬한 파리가 19세기말부터 구가한 황금시대를 더듬어 볼 기회였다. 인쇄된 화집이 아니라 생생하게 보존된 작가의 켈렉션을 통해서.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보폭을 조절하며 너무 일찍 도착하지 않으려고 애썼는데, 마침 전시실도 크게 붐비지 않아 기뻤다.

바로 그곳에 장 베로의 작품이 있었다.

쉬지 않고 차를 몰면 대략 서른 시간쯤 걸리는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조각가의 아들로 태어난 인상주의 화가. 그에게 호감을 느낀 건 몬트리올에서 만난 필립으로부터 아틀리에 이야기를 들은 후부터다. 당대인의 생생한 모습을 화폭에 담기위해 장 베로는 마차를 개조해 천막을 올리고 작은 창을 달았다. 캔버스를 채워간 풍경에는 세련되고 낭만적인 흥취가 넘쳤으나 그게 다는 아니었다. 일용직 노동자와 땟거리를 걱정하는 이들의 한숨 또한 담아냈다.

소토야마 분지 감독은 몬트리올국제영화제 등에서 주목받은 장편영화 데뷔작 「생명의 빛」 이후 7년만의 신작 「해질 무렵」으로 부산국제영화제를 찾았다. (C)2020 Soirée Film Partners
소토야마 분지 감독은 몬트리올국제영화제 등에서 주목받은 장편영화 데뷔작 「생명의 빛」 이후 7년만의 신작 「해질 무렵」으로 부산국제영화제를 찾았다. (C)2020 Soirée Film Partners

특히 필자의 설레게 한 것은 “무도회(야회)”다.

휘황한 샹들리에 아래서 수다를 떠는 하늘색 드레스. 전경 중앙, 황금빛 장식이 돋보이는 흰 드레스 하지만 역시 정작 특별히 필자의 시선을 붙든 건 이 모든 풍경과의 미묘한 불협화음 속에서 불가사의한 매력을 뿜어내는 붉은 장식 드레스의 여성이었다. 부담스런 명랑함과 위선적인 쾌활함의 한복판에서, 막 독백을 시작하려는 밤 공연의 배우처럼.

오늘 인터뷰의 주인공 소토야마 분지 감독의 부산국제영화제 초청작 <해질 무렵>의 원제는 공교롭게도 오르세 미술관에서 필자의 기억에 각인된 이 그림의 그것과 동일하다.

“수아레(Soirée).”

기시감은 스토리에서도 이어진다.

연극배우 쇼타(무라카미 니지로 분)는 노인들에게 연기를 가르치는 봉사활동을 하러 바닷가 요양원에 간다. 옛 동네에서 가까운 그곳에 머물면서 쇼타는 고등학교를 중퇴한 뒤 요양사로 일해 온 타카라(이모 하루카 분)와 가까워진다. 그리고 마을 축제에 가려고 타카라의 집에 들른 어느 날, 갑작스런 사건에 휘말려 두 사람은 도망자 신세가 된다. 어디인지 알 수 없는 출구를 찾아 무작정 달리는 혼란의 시간. 하지만 두 사람은 끝내 그들의 만남이 서로를 구원할 것임을 어렴풋이 깨달아간다.

몬트리올국제영화제 등에서 주목받은 장편영화 데뷔작 <생명의 빛> 이후 7년만의 신작으로 부산국제영화제를 찾은 소토야마 감독을 만났다.

(※ 기사 속의 타이틀 <해질 무렵>을 클릭하면 영화에 접속할 수 있습니다)

「해질 무렵」은 로케지의 에히메 현의 설화, 안진ㆍ키요히메 전설을 모티브로 차용해 재미를 배가시킨다. (C)2020 Soirée Film Partners
「해질 무렵」은 로케지의 에히메 현의 설화, 안진ㆍ키요히메 전설을 모티브로 차용해 재미를 배가시킨다. (C)2020 Soirée Film Partners

홍상현

7년이라는 기다림 끝에 내놓은 새 장편으로 부산국제영화제에 오셨습니다.

소토야마 분지

부산영화제라는 멋진 영화제에 제 작품이 초청되어 진심으로 기쁩니다. 아시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영화제라는 게 잘 알려져 있기 때문에, 이번 초대 사실을 통보받고 제작진이 다 같이 기뻐했어요.

 

홍상현

다음은 “홍상현의 인터뷰”에서 늘 드리는 질문입니다.

평소 좋아하시는 한국영화 작품, 감독, 또는 배우가 있으신지요. 최근의 한국영화에 대해서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소토야마 분지

이창동 감독을 좋아하고, 필모그래피 중에서는 <밀양>과 <오아시스>가 ‘최애작품’입니다. 한국영화의 약진은 우리에게도 큰 자극이 됩니다. 눈부신 발전상이나 제작환경이 무척 부럽기도 하고요.

연기자 가운데서는 전도연 배우, 이영애 배우, 설경구 배우, 이정재 배우, 송강호 배우, 김새벽 배우 등을 좋아해요. 무순으로 언급해봤습니다. (웃음)

두 주인공의 도피를 다룬 작품은 많은 전례를 찾아볼 수 있지만, 「해질 무렵」의 경우, 연애관계에 있는 상대와 도망치는 이야기가 아니라는데 차별점이 있다. ‘도망’이라는 ‘사건’이 일어났는데 우연히 상대가 그 자리에 있었던 것이다. (C)2020 Soirée Film Partners
두 주인공의 도피를 다룬 작품은 많은 전례를 찾아볼 수 있지만, 「해질 무렵」의 경우, 연애관계에 있는 상대와 도망치는 이야기가 아니라는데 차별점이 있다. ‘도망’이라는 ‘사건’이 일어났는데 우연히 상대가 그 자리에 있었던 것이다. (C)2020 Soirée Film Partners

홍상현

영화의 크레디트에서 “신세계합동회사”라는 이름이 눈에 띠던데요.

영화인 외에도 가수, 배우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약하는 분들이 모여 결성한 크리에이터그룹이라고 들었습니다. <해질 무렵>이 창립 작품이기도 한데요. 소개를 좀 부탁드려도 될까요.

소토야마 분지

신세계합동회사는 배우 도요하라 고보와 고이즈미 쿄코를 주축으로 하는 영화제작 프로덕션입니다. 소설ㆍ만화 등의 기존 원작을 영화화하는 쪽으로 획일화되는 경향이 강한 일본의 영화업계에서 좀 더 자유롭게 다양한 콘텐츠를 만들어 보자는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모인 곳인데요. 말씀처럼 창립 작품인 <해질 무렵>이 비교적 높은 관심을 받고 있어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홍상현

가끔 관객에게 효과적으로 어필하는 것은 물론, 작품의 의미를 대단히 효과적으로 함축하는 타이틀에 놀랄 때가 있습니다. <해질 무렵>의 원제인 “수아레(soirée)”도 그랬는데요.

소토야마 분지

이 작품은 스스로의 인생에서 주인공이 되지 못하던 두 젊은이가 만나, 도피하는 과정에서 새로운 가치관을 획득해간다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그런 주인공이 배우를 지망하는 청년이기도 한데다 일상으로부터 빠져나와 달려 나간다는 의미도 담아보고 싶어서 수아레라는 타이틀을 정했어요. ‘밤 공연’이나 ‘야회’ 다 같은 맥락이죠. 한편으로 이 두 사람의 삶에 희망의 막이 오른다는 의미도 있는데요. 여기에 한 가지 더, 수아레가 끝나면 아침이 오니, 새벽을 기다리는 사람들이라는 의미도 있습니다.

고등학교를 중퇴한 뒤 요양사로 일해 온 타카라(이모 하루카 분)는 지난날의 상처로 아파한다. 그러나 소토야마 분지 감독은 이 캐릭터를 ‘피해자의 프레임’에 따른 평면성에 가두지 않았다. (C)2020 Soirée Film Partners
고등학교를 중퇴한 뒤 요양사로 일해 온 타카라(이모 하루카 분)는 지난날의 상처로 아파한다. 그러나 소토야마 분지 감독은 이 캐릭터를 ‘피해자의 프레임’에 따른 평면성에 가두지 않았다. (C)2020 Soirée Film Partners

홍상현

<해질 무렵>은 로케지인 에히메 현의 설화인 안진ㆍ키요히메 전설을 모티브로 차용하면서 재미를 배가시켜주고 있습니다. 다만, 연정을 품었던 승려, 안진에게 배신당한 키요히메가 구렁이가 되어 복수한다는 내용이 크게 변형되어있는 것 같은데요.

소토야마 분지

안진ㆍ키요히메 전설의 경우 전통연희 쪽에서는 높은 인지도를 가지고 있는 반면, 젊은 세대에는 그리 알려져 있지 않다는 특성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이 전설을 굳이 소재로 차용하게 된 건, 일단 와카야마 현으로부터 영화로 만들어 달라는 의뢰가 있었기 때문이에요. 그곳에 말씀하신 전설의 발상지라는 사실은 저도 현지를 방문했을 당시 알게 되었지요.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니까 마침 이 전설이 두 젊은이의 도피행 이야기와 겹치는 점도 가지고 있더라고요. 현대적 서사와 전설을 새로운 스토리텔링으로 결합시켜 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홍상현

<해질 무렵>을 보면 그런 발상이 꽤 성공적인 결과로 이어진 것 같은데요?

소토야마 분지

안진ㆍ키요히메 전설은 한때의 연인(안진)이 했던 지킬 수 없는 약속으로 정념(emotion)에 불타 구렁이가 된 여성(키요히메)이 남성에게 복수하는 ‘한의 노래’입니다. 오늘날의 도량형으로 환산하면 무려 60킬로미터에 달하는 거리를 따라가, 맨발로 강을 건넜다 하죠.

<해질 무렵>에서는 그 내용을 좀 달리 해봤어요.

쇼타가 타카라의 손을 잡고 여행을 떠납니다. 쇼타라는 존재와 그의 말은 타카라에게 자극이 되지요. 이는 쇼타의 충동에 의해 비롯된 일이고, 여정의 중간에 잠시 사라져버렸던 타카라는 맨발이 되어 다시 쇼타를 찾아 헤맵니다. 안진ㆍ키요히메 전설에서 모티브를 따오기는 했지만 원념은 배제하고 애태우는 상대와 조우하는 행복의 감정을 더한 건데요. 안진ㆍ키요히메 전설의 결말에 관련해서도 여러 가지 설이 전해지거든요. 저 나름의 새로운, 미래를 느낄 수 있는 서사를 만들고 싶었습니다.

소토야마 분지 감독은 말한다. “제 연기론은 심플하고, 어려운 메소드(method)에 의존하지 않습니다. 한마디로 표현할 수 있는데요. 연기란, 거짓말을 잘 하는 게 아니라, 거짓말을 진실 되게 하는 겁니다.” (C)2020 Soirée Film Partners
소토야마 분지 감독은 말한다. “제 연기론은 심플하고, 어려운 메소드(method)에 의존하지 않습니다. 한마디로 표현할 수 있는데요. 연기란, 거짓말을 잘 하는 게 아니라, 거짓말을 진실 되게 하는 겁니다.” (C)2020 Soirée Film Partners

홍상현

<해질 무렵>에서 사용되는 중요한 제재가 또 하나 있습니다. 바로 연극인데요. 작품을 초청한 부산영화제 측에서도 배우인 주인공 쇼타의 연기를 ‘수도(ascetic practice)’에 비유했습니다.

소토야마 분지

제 연기론은 심플하고, 어려운 메소드(method)에 의존하지 않습니다. 한마디로 표현할 수 있는데요. 연기란, 거짓말을 잘 하는 게 아니라, 거짓말을 진실 되게 하는 겁니다.

그런 맥락에서 <해질 무렵>에서의 연극은 일상 속에서 또 하나의 세계를 낳는 행위죠. 그래서 현실이 여의치 않았던 쇼타와 타카라에게 희망의 장이 될 수 있었고요. 하지만 이런 일들이 정말 현실도피가 될 수 있을까 생각해보면 또 그렇지 않죠. 결국 현실과 맞닥뜨릴 수밖에 없으니까. 현재 직면에 있는 처지, 감정, 입장에서 도망친다는 건 불가능하잖아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질 무렵>에서는, 배우를 지망하는 남성과 스스로의 마음속에 또 하나의 세계를 만드는 일로써 고통을 견뎌 온 여성이 주인공이라는 특성에 주목하면서 연극이라는 장르, 연기라는 행위가 중심적인 아이템으로 기능하도록 했습니다.

 

홍상현

<해질 무렵>은 일면 대단히 파격적으로 보이지만, 한편으로는 전형적이거나 비현실적으로 느껴질 수도 있는 두 사람의 도피행각을 다루고 있습니다. 극단적인 상황에서 전개되는 러브스토리인데요. 그럼에도 이 작품을 흔한 러브스토리에 머무르지 않게 해주는 측면 또한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소토야마 분지

물론 두 주인공의 도피를 다룬 작품은 많은 전례를 찾아볼 수 있지만, 우선 <해질 무렵>의 경우, 연애관계에 있는 상대와 도망치는 이야기가 아니라는데 차별점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도망’이라는 ‘사건’이 일어났는데 우연히 상대가 그 자리에 있었던 것이죠. 둘 사이에 운명적인 연결고리가 존재하고 있었음을 관객이 알게 되는 건 영화가 결말부에 도달했을 즈음이고요.

이런 전개를 원했습니다. 결국 주인공들은 현실을 외면한 게 아니라 스스로의 인생을 찾기 위해 행동했다는 점을 보여주기 위해서요.

「해질 무렵」의 쇼타는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히어로가 아니다. 오히려 끊임없이 두려워하고 갈등하는 평범한 인간의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관객의 공감대를 이끌어낸다. (C)2020 Soirée Film Partners
「해질 무렵」의 쇼타는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히어로가 아니다. 오히려 끊임없이 두려워하고 갈등하는 평범한 인간의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관객의 공감대를 이끌어낸다. (C)2020 Soirée Film Partners

홍상현

주인공이 <해질 무렵>과 비슷한 스토리. 즉, 난관에 빠진 누군가를 구해 함께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된다는 내용의 작품에 흔히 등장할 만한 캐릭터가 아니라는 점도 눈길을 끕니다. 대단히 복잡하고 입체적이잖아요.

소토야마 분지

방금 말씀하신 부분은 제 필모그래피에서 일관되게 나타나는 특징이기도 한데요. 저는 일단 특수, 혹은 비범한 능력을 가진 캐릭터가 전혀 등장시키지 않습니다. 무슨 마법을 쓸 수 있는 게 아니고, 세상을 바꿀 바이탤리티(vitality)를 가진 사람도 없고요.

<해질 무렵>의 쇼타도 마찬가지에요. 그 어떤 서바이벌 스킬도 갖고 있지 않으니까, 하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관객들은 제 영화의 주인공들에 스스로를 대입시키면서 친근함을 느낄 수 있을 거라 생각했습니다.

 

홍상현

영화감독 이외에 다양한 공연예술분야의 연출가로도 활약하고 계십니다.

소토야마 분지

영화뿐만 아니라 다양한 장르를 다루면 크리에이터로서의 균형이 맞춰지는 것 같습니다. 물론 이와 관련해서도 여러 가지 견해가 존재할 테고, 효율성 면에서도 한마디로 정의하기 힘든 차이가 존재할 테지만.

다만 제 경우에는 일단 영화를 만들 때 제가 직접 만든 (원작이 따로 없는) 오리지널 콘텐츠에 집중하기 때문에 오히려 다른 쪽의 작업을 할 수 있는 여유가 주어지거든요. 그럼에도 특히 영화가 광고와 달리 재미있는 점은 클라이언트가 자기 자신이기 때문이고요.

「해질 무렵」이 두 주인공 사이에 운명적인 연결고리가 존재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은 영화가 결말부에 도달했을 즈음이다. (C)2020 Soirée Film Partners
「해질 무렵」이 두 주인공 사이에 운명적인 연결고리가 존재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은 영화가 결말부에 도달했을 즈음이다. (C)2020 Soirée Film Partners

홍상현

많은 예산이 드는 특수효과를 사용하지 않고도 몽환적인 분위기를 잘 보여주는 미장센이 인상적인데요.

소토야마 분지

CF작업을 할 때는 CG 등을 이용하는 경우가 많지만 <해질 무렵>에서는 아날로그에 집중하는 연출플랜을 세워 실천했습니다. 이건 프로듀서의 생각이기도 했는데요. 이른바 ‘수제(handmade) 판타지’를 지향한 거죠. (웃음)

물론 준비하기가 쉽진 않지만 로케이션과 조명, 편집 등으로 수제 특유의 따듯함을 이끌어낼 수 있었습니다. 아울러 이 ‘따듯함’은 히로인인 타카라의 마음의 세계와도 이어져있었다고 생각합니다.

 

홍상현

주연을 맡은 무라카미 니지로 배우는 한국 관객에게는 로맨스 영화의 주인공으로서의 이미지가 강합니다. 하지만, <해질 무렵>에서는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대단히 입체적인 캐릭터로 연기변신을 보여주고 있는데요.

소토야마 분지

무라카미 배우는 동세대 가운데서도 단연 뛰어난 표현력을 지닌 연기자입니다. 저와는 10대 때 제가 만든 단편영화제 출연해주었던 인연이 있는데요. 당시부터 눈을 뗄 수 없는 존재였어요.

말씀처럼 확실히 로맨스영화의 주인공도 가능하지만 인생의 명암, 미추를 모두 껴안은 역할 또한 어울리는, 말 그대로 ‘우리 시대 젊은이의 초상’이 아닐까 합니다. <해질 무렵>의 촬영에도 이런 느낌을 최대한 살려주었고요.

히로인으로 분한 이모 하루카 배우는 인물을 충분히 이해하는 한편, 시종일관 적절한 거리를 유지하려 노력했다고 한다. 배우로서 주어진 캐릭터인 타카라의 곁에 머물되, 지나치게 다가서지 않는 감정의 선을 지킨 것이다. (C)2020 Soirée Film Partners
히로인으로 분한 이모 하루카 배우는 인물을 충분히 이해하는 한편, 시종일관 적절한 거리를 유지하려 노력했다고 한다. 배우로서 주어진 캐릭터인 타카라의 곁에 머물되, 지나치게 다가서지 않는 감정의 선을 지킨 것이다. (C)2020 Soirée Film Partners

홍상현

히로인으로 분한 이모 하루카 배우야말로 <해질 무렵>의 놀라운 발견이라고 생각합니다. 19세에 데뷔한 이래 약 30편 정도의 영화에 출연하며 활약해왔다고 하는데요. 특히 <해질 무렵>의 경우, 연기 인생에 한 획을 긋는 작품이 되지 않을까 합니다.

소토야마 분지

이모 배우와는 오디션을 통해 만났는데, 저희로서도 크나큰 ‘발견’이었습니다. 타카라라는, 아버지로부터 성적 학대를 받았던 트라우마를 가진 캐릭터를 소화해줄 연기자를 찾는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니었거든요. 아울러 특유의 매력 또한 발산해야한다는 과제도 있었으니까요.

본인의 술회한 내용입니다만, 이 배역으로 분하면서 이모 배우는 “인물을 충분히 이해하는 한편, 시종일관 적절한 거리를 유지하려 노력했다”고 합니다. 배우로서 주어진 캐릭터인 타카라의 곁에 머물되, 지나치게 다가서지 않는 감정의 선을 지킨 거지요.

 

홍상현

놀라운 이야기네요. 그 과정에서 수행하신 연출자로서의 역할이 궁금해집니다.

소토야마 분지

이를테면 촬영을 준비하는 동안, 저는 타카라라는 인물의 성장내력에 대한 디테일을 다 글로 써서 그 내용을 이모 배우와 공유하고 충분히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그러는 사이 서로 간에 신뢰감이 형성되어 막상 촬영이 시작된 후에는 따로 토론을 할 필요조차 없었죠.

제가 원했던 캐릭터의 표현 방향은, 한 여성으로서, 인생의 희망을 표현하도록 하는 거였습니다. ‘피해자의 프레임’에 따른 평면적인 캐릭터를 기계적으로 표현하는 게 아니라요. 이 모든 목적이 이모 배우를 캐스팅하던 단계에서 거의 달성되었다고 봅니다.

「해질 무렵」은 많은 예산이 드는 특수효과보다 아날로그에 집중하는 연출플랜을 세워 차곡차곡 실천해나간 ‘수제(handmade) 판타지’다. (C)2020 Soirée Film Partners
「해질 무렵」은 많은 예산이 드는 특수효과보다 아날로그에 집중하는 연출플랜을 세워 차곡차곡 실천해나간 ‘수제(handmade) 판타지’다. (C)2020 Soirée Film Partners

“<해질 무렵>은 기존의 상업영화들에서 나타나는 전형성을 탈피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인 작품입니다. 이를 통해 영화를 접하는 관객 여러분께도 새로운 정서와 특유의 매력을 만끽하실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게 가장 큰 목표였어요.

저 자신 한국영화를 사랑하는 한사람으로서, <해질 무렵>을 통해서, 혹은 이후의 작품들을 통한 한국영화인ㆍ관객 여러분과의 빈번한 만남을 기대하고 있습니다.”

푸른 팬으로 한자 한자 공들인 문장을 쓰며 백지를 채워나가듯, 조금도 허투루 들을 것이 없는 말들로 모든 답변에 임해주었던 이 성실한 영화작가는, 코로나 19로 네 번째의 긴급사태선언이 이어지고 있는 와중에도 변함없이 분주한 살고 있다.

후배들의 작품 제작을 지원하고, 배우 지망생들을 위한 영상연기 워크숍을 기획하고, 그 틈에 코로나 19 국면을 맞은 인류라면 누구나 자유롭지 못할 ‘가족의 감염에 대한 두려움ㆍ슬픔’을 소재로 다루는 다섯 번째의 단편영화까지 완성했다고 한다. 인터뷰의 마지막에 공언한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였을까. 어쩌면 쫓기듯 지나쳐버린 지난해 부산영화제에서의 안타까운 기억을 상쇄할 수 있는 그와의 재회가 조만간 현실화될 지도 모르겠다는 예감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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