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내일’을 꿈꾸게 하는 힘

  • 기자명 홍상현
  • 기사승인 2021.08.18 14: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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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일화교 4세인 하야시 류타 감독이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이야기를 듣게 된 것은 열다섯 살 되던 해 가을 어느 날이었다. (C)2020 LEFT -Where I am- Film Partners
재일화교 4세인 하야시 류타 감독이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이야기를 듣게 된 것은 열다섯 살 되던 해 가을이었다. (C)2020 LEFT -Where I am- Film Partners

1998년 가을, 두 모자가 버라이어티프로를 보고 있다.

수요일 밤 열시부터 한 시간 가까이 방영되는 TV쇼는 여러 가지로 센세이셔널 했다. 우선 진행자가 그랬다. 코미디언으로 정상의 인기를 구가하다 영화감독으로 데뷔, 베니스국제영화제 금사자상을 거머쥔 천재. 못지않게 재미를 더해준 건 세계 각국에서 온 출연자들이다. 유학생, 회사원, 엔지니어, 자영업자 등 다양한 직업에 종사하는 그들은 톡톡 튀는 개성과 재치 있는 언변으로 타향살이의 고충을 토로했다. 이 모습을 넋 놓고 바라보던 중학생 아들이 운을 떼었다.

“외국인이나 혼혈인들은 지내기 참 고생스러울 것 같아.”

여기서 재미있는 건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돌아온 엄마의 반응이다.

“넌 어때?”

“응? 그게 무슨 소리야, 엄마?”

“아빠도 화교잖아.”

엄마의 덤덤한 ‘폭탄발언’으로 아들은 충격에 휩싸인다. 당장 머릿속에 떠오르는 건 주석의 대형 초상화와 인민대회당의 위압적인 풍경, 짝퉁, 불량식품 등 매스컴에서 온갖 부정적 이미지의 조합으로 그려지던 나라. 그런데 중국말을 하기는커녕 중국과 사소한 연관조차 없어 보이던 아버지가? 우리 집이 남들과 다른 게 뭐가 있었지? 돌이켜보니 매년 설날에 먹던 메뉴가 중화요리이기는 했다. 하지만 별 생각이 없었다. 그냥 ‘우리 집 사람들은 취향이 참 유별나구나!’ 했을 뿐.

미국에서 저널리즘을 공부하고 돌아와 영화학교를 졸업한 하야시 류타 감독(오른쪽)은 원래 극영화ㆍ드라마 감독을 지망했다. (C)2020 LEFT -Where I am- Film Partners
미국에서 저널리즘을 공부하고 돌아와 영화학교를 졸업한 하야시 류타 감독(오른쪽)은 원래 극영화ㆍ드라마 감독을 지망했다. (C)2020 LEFT -Where I am- Film Partners

후에 소년은 미국에서 저널리즘을 공부하고 돌아와 영화학교를 졸업한 뒤 다큐멘터리영화 감독이 된다. 오늘 인터뷰의 주인공, ‘중국어를 할 줄 모르는(본인의 강조)’ 재일화교 4세 하야시 류타 감독이다.

본인의 회고를 재구성한 서두의 장면은 전형적인 디아스포라의 경험이다. 바빌론 유수(Babylonian Captivity) 이후 팔레스타인 밖에 흩어져 살던 유대인 거류지, 혹은 이스라엘 밖에 거주하는 유대인을 가리키던 말인 디아스포라는 그 의미가 점차 확장되어 유대인뿐 아니라 국외로 추방된 소수의 집단 공동체나 난민ㆍ이주민 같은 다양한 범주의 사람들까지를 지칭하는 단어가 된다. 다만, 하야시 감독의 가족사는 일 때문에 본토를 떠나 타지에 정착한 ‘교역 디아스포라’에 해당한다는 점에서 유대인이나 아르메니아인의 그것과 구별된다. 실제로 그의 조상은 푸젠 성에서 온 보부상들이었다.

다민족국가에서 보낸 시간을 통해 사춘기의 충격적 경험과 화해한 하야시 감독은 영화학교 졸업 작품과 단편다큐멘터리영화 작업 등으로 11년 동안 매달려온 ‘가족과 디아스포라’라는 화두를 장편다큐멘터리영화 기획으로 정리, 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로부터 제작지원을 받았고, 결과물 <레프트>로 같은 영화제 글로벌비전 부문에 초청되었다.

자신의 장편다큐멘터리영화 감독 데뷔작이기도 한 이 영화에서 그는 평생 일본인의 이름으로 불렸지만 단 한 순간도 일본인으로 살았던 적은 없는 할머니와 “학교사건(화교사회가 대륙파와 타이완파로 대립하면서 요코하마중화학교가 서로 교육이념을 달리하는 요코하마야마테중화학교와 요코하마중화학원으로 분열되었던 사건. ※ 필자 주)” 이후, 요코하마야마테중화학교 학생으로 홍위병 복장을 입고 차이나타운 퍼레이드에 참가했던 아버지, 그리고 오늘날까지도 이런저런 복잡한 문제에서 자유롭지 못한 요코하마 차이나타운 주민 등, 여권상의 두 모국(중화인민공화국ㆍ타이완)과 일본의 정치에 번롱되어온 범인들(ordinary people)의 삶을 담담하고 깊이 있는 시선으로 조명한다.

하야시 류타 감독의 할머니는 평생 ‘아이코’라는 일본인의 이름으로 불렸지만, 단 한 순간도 일본인으로 살았던 적은 없다. (C)2020 LEFT -Where I am- Film Partners
하야시 류타 감독의 할머니는 평생 ‘아이코’라는 일본인의 이름으로 불렸지만, 단 한 순간도 일본인으로 살았던 적은 없다. (C)2020 LEFT -Where I am- Film Partners

홍상현

단편다큐멘터리영화 <클레프트>가 초청된 지 2년 만에 장편다큐멘터리영화 데뷔작 <레프트>로 다시 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에 오셨습니다.

하야시 류타

초청해주셔서 정말 기뻐요. 이번 작품은 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의 경쟁 프레젠테이션을 통해 제작펀드 지원까지 받았거든요.

재일화교를 소재로 한 다큐멘터리 자체가 거의 없고, 가끔 요코하마 차이나타운이 등장하는 방송프로그램이 있더라도 관광지로서만 다뤄집니다. 그들이 걸어온 길에 대해 한 사람이라도 더 많은 분들과 공유하고 싶은 입장에서 뭐라 감사의 말을 드려야 할지 모르겠어요.

 

홍상현

확실히 화교 커뮤니티 문제는 단순한 ‘이민사(immigrant history)’와 차별화되는 지점이 있지요.

하야시 류타

세계 각지에 존재하지만 그 정치ㆍ사회적 배경에 따라 궤적이 달라지는 디아스포라의 한 축이니까요. 특히 근ㆍ현대 재일화교의 행보는 냉전기 모국과 일본 정치에 번롱되어온 역사이기도 했습니다. 예컨대 조슈아 오펜하이머 감독의 <액트 오브 킬링>이 1965년 인도네시아에서 일어난 공산당원 학살을 다루는데요. 이 사건은 냉전기 일본에 거주하던 화교들에게까지 영향을 끼쳤습니다.

세계가 동서로 나뉘어 갈등하던 시절, 재일화교 사회도 대륙파와 타이완파로 나뉘어 분열한다. 이 분열을 상징적으로 보여준 것이 「레프트」에 등장하는 “학교사건”이다. (C)2020 LEFT -Where I am- Film Partners
세계가 동서로 나뉘어 갈등하던 시절, 재일화교 사회도 대륙파와 타이완파로 분열했다. 이를 상징적으로 보여준 것이 「레프트」에서 다뤄지는 “학교사건”이다. (C)2020 LEFT -Where I am- Film Partners

홍상현

냉전기에는 아무래도 이념의 문제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겠죠.

하야시 류타

당시는 일본정부가 지금의 중국정부의 정통성을 인정하지 않고 타이완정부와 수교하고 있던 시기라 재일화교들 사이에서도 혼란과 동요가 있었습니다. 이것이 표면화 한 게 학교사건이었으니 <레프트>는 재일화교들의 생활사를 다룬 영화라고도 할 수 있겠지요.

 

홍상현

감독께서 내내 천착해 오신 이슈라 처음부터 이야기가 대단히 구체적으로 전개되는데요. (웃음) 잠시 숨을 고르는 차원에서 “홍상현의 인터뷰”의 고정 질문부터 드리고 넘어가도록 하죠.

평소 한국영화를 즐겨보시는지요. 좋아하는 작품이나 감독, 배우 등이 있습니까.

하야시 류타

최근 <1987>을 보고 큰 충격과 감동을 받았습니다.

제가 네 살 때 한국에서 그런 일이 있었다는 게 새삼 놀랍더라고요. 일본에는 “냄새 나는 것은 뚜껑을 덮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골치 아픈 문제는 굳이 끄집어내지 말고 덮어 두는 게 좋다는 이야기인데요. 정말 심각한 문제라면 최악의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다고 저는 생각해요. 평소 이런 태도를 가지고 있다 보니 <1987>이 더 강한 울림을 준 거 아닐까 합니다. 시민이, 스스로의 이상이 실현되는 나라를 향해 함께 나가는 모습도 인상 깊었고요.

하야시 류타 감독에게 디아스포라의 경험을 구체화시켜준 매개체는 할머니가 생전에 만들어주시던 푸젠 성의 전통음식들이었다. (C)2020 LEFT -Where I am- Film Partners
하야시 류타 감독에게 디아스포라의 경험을 구체화시켜준 매개체는 할머니가 생전에 만들어주시던 푸젠 성의 전통음식들이었다. (사진 오른쪽이 하야시 류타 감독) (C)2020 LEFT -Where I am- Film Partners

홍상현

미국에서 저널리즘을 전공하시고 칸영화제 황금종려상 2회 수상에 빛나는 거장, 이마무라 쇼헤이 감독이 설립한 일본영화대학을 나오셨는데요. 극영화가 아닌 다큐멘터리로 감독으로 데뷔를 하시게 된 이유가 궁금합니다.

하야시 류타

원래는 저도 극영화ㆍ드라마 감독이 되고 싶었습니다.

일본영화대학에서는 입학 직후에는 일단 종합적인 영상제작을 실습위주로 배우고, 2학년이 되면서부터 연출ㆍ촬영ㆍ각본, 다큐멘터리 등 다양한 분야 가운데 하나를 선택해 졸업할 때까지 심화교육을 받는데요. 극영화ㆍ드라마 감독이 되기 위해 어떤 공부를 해야 할까 고민하는데 ‘사회와 인간에 대해 더 알지 못하면 따듯한 피가 흐르는 이야기를 만들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이를 위한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 다큐멘터리를 전공하는 거라 생각했습니다.

 

홍상현

그런데, 막상 해 보니 그게 극영화ㆍ드라마보다 더 재미있더라? (웃음)

하야시 류타

스펙트럼이 워낙 넓으니까요. (웃음)

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종합제작사에 취업이 되기도 했고요. 시사ㆍ교양ㆍ버라이어티ㆍ보도 같은 다양한 방송프로그램은 물론 TV광고까지 섭렵했습니다. 그런데 이런 일들을 하며 분주한 일상을 살다 보니 언제부터인가 이상과 현실이 충돌하는 경험을 하게 되고, 끝내 ‘애초에 내가 왜 영상연출을 업으로 삼는 인생을 선택했던 걸까’하는 회의감이 들더라고요. 그러던 어느 날 영화학교 동기가 연락해서는 묻는 거예요. ‘이제 화교 관련 기획은 더 하지 않을 거냐’고. 제 졸업 작품이 <레드플라워>라고 제 큰아버지와 중국에서 일본으로 일하러 온 먼 친척 여자아이를 소재로 한 다큐멘터리였거든요. 그걸 기억하고 있었던 거죠.

하야시 류타 감독이 막상 다큐멘터리를 찍기 시작했을 무렵, 할머니는 이미 알츠하이머가 발병한 상태라 살아온 이야기를 들을 수 없었다. 하지만 이 일은 오히려 그가 더 열심히 다큐멘터리 취재에 임하는 계기로 작용해주었다. (C)2020 LEFT -Where I am- Film Partners
하야시 류타 감독이 막상 다큐멘터리를 찍기 시작했을 무렵, 할머니는 이미 알츠하이머가 발병한 상태라 살아온 이야기를 들을 수 없었다. 하지만 이 일은 오히려 그가 더 열심히 다큐멘터리 취재에 임하는 계기가 되었다. (C)2020 LEFT -Where I am- Film Partners

홍상현

당연한 이야기지만 본인으로서도 절실함이 있었겠고.

하야시 류타

제 가족과 화교에 대해 좀 더 알고 싶고, 관련된 작품을 만들어 보고 싶다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었으니까요. 단순한 호기심을 넘어 저 자신의 정체성과 마주하고 싶은 욕구가 있었습니다. 물론 졸업 작품을 기억해주고, 후에 <레프트>에서 촬영ㆍ편집ㆍ프로듀서를 맡아준 동기, 나오이 유키가 제 안의 열정을 되살리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지만요. (웃음)

 

홍상현

귀화한 재일코리언 3세인 제 친구는 조모의 음식을 통해 자신의 뿌리를 느꼈다고 하던데, 감독께서는 어떤가요.

하야시 류타

그런 메뉴라면 제게는 할머니가 만들어주시던 해물볶음쌀국수굴탕이 있습니다. 바다에 면해있는 푸젠 성의 전통음식이죠. 매년 설날이나 집안행사 때 먹었는데요. 재미있는 건, 제가 이 음식을 접하면서도 어떤 정체성을 느낀 게 아니라, 그냥 할머니가 중화요리를 좋아해서 만들어주시는 줄 알았다는 거예요. 너무 자연스러운 느낌이라 특별하게 인식하지 못했던 거죠.

홍위병 복장을 입고 차이나타운 퍼레이드에 참가했던 사진을 바라보는 하야시 류타 감독의 부친. 요코하마야마테중화학교를 나온 그는, 현재, 당연하지만 ‘열렬한 공산당원’과 전혀 무관한 삶을 살고 있다. (C)2020 LEFT -Where I am- Film Partners
홍위병 복장을 입고 차이나타운 퍼레이드에 참가했던 소년시절 사진을 바라보는 하야시 류타 감독의 부친. 요코하마야마테중화학교를 나온 그는, 현재, 당연하지만 ‘열렬한 공산당원’과 전혀 무관한 삶을 살고 있다. (C)2020 LEFT -Where I am- Film Partners

홍상현

<레프트>는 최소 10년 이상의 긴 준비기간을 거친 작품입니다. 그래서 막연하게 상영시간이 길 걸로 예상했는데 1시간 36분이라는 시간을 아주 효율적으로 활용하시더라고요.

하야시 류타

보통은 다큐멘터리영화 감독이 편집까지 모두 담당하게 되는 경우가 많은데 <레프트>에서는 일부러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자기반영적 성격이 강한 내용이라 객관성을 잃어버리면 어쩌나 하는 걱정이 있었거든요. 관객과의 접점도 신경이 쓰였고. 그래서 편집을 프로듀서에게 맡겼죠. 또 전체적인 러닝 타임이 두 시간을 넘지 않도록 일부러 콤팩트하게 정리했습니다. 과거의 사건에 관한 내용은 물론 정보량이 워낙 많기 때문에 자칫 느슨해질 수 있으니까요.

 

홍상현

바람직한 시도 아니었나 싶습니다. 대부분 관람 전에 심호흡이 필요한 기존의 장편다큐멘터리영화들과 몰입도 면에서 차이가 나더라고요. (웃음)

하야시 류타

관객에게 전하려는 정보량이 너무 많다 보면 내러티브를 따라가지 못하는 경우가 있죠. 그래서 불필요한 해설 등은 생략하고 각각의 정보를 최대한 간단하면서도 알기 쉽게 정리했습니다. 다만, 노년을 맞아 젊은이들에게 미래를 맡기는 앞 세대 화교들의 모습을 표현할 때는 ‘만년의 시간’이라는 느낌을 연출하기 위해 컷에 살짝 여유를 주었고.

요코하마 차이나타운은 150년 넘는 역사를 가지고 있으나 현지 방송매체에서는 그저 ‘특별할 것 없는 수많은 관광 명소 중 하나’로만 다뤄져 왔다. (C)2020 LEFT -Where I am- Film Partners
요코하마 차이나타운은 150년 넘는 역사를 가지고 있으나 현지 방송매체에서는 그저 ‘특별할 것 없는 수많은 관광 명소 중 하나’로만 다뤄져 왔다. (C)2020 LEFT -Where I am- Film Partners

홍상현

슬슬 좀 더 깊이 들어가 볼까요.

감독의 필모그래피를 보면 정체성에 대한 고민과 동포의 사상적 분단이라는 역사적 사실 사이의 접점을 찾아보려는 노력이 일관되게 나타납니다. 그런데 저는 여기 한 가지 동인이 더 있다고 생각해요. 열다섯 살이 될 때까지 그저 평범한 일본인이라고 생각하던 본인이, 외국, 심지어 그리 좋은 이미지를 갖고 있지 않았던 중국과의 혈통적 연결고리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는 거.

하야시 류타

10대 시절에는 때는 정말 중국이나 중국인에 대해 좋지 않은 인상을 많이 가지고 있었어요. 그도 그럴 것이, 언론보도가 비쳐주는 중국은 항상 가난하고 폐쇄적인 나라였고, 중국인과 관련해서도 범죄라든가 부정적인 정보ㆍ이미지가 많았거든요. 영향을 무시할 수 없었지요. ‘무서움’과 ‘더러움’이 핵심을 차지하는 편견. 그러다 제가 혼혈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니 어땠겠어요. (웃음) 인정하고 안하고를 떠나 그냥 믿기가 힘들더라고요. 당장 아버지가 중국말을 하는 모습 한 번 본 적이 없는데. 일부러 ‘아빠, 화교였어요?’라고 묻지도 않았습니다. 두려웠으니까.

그러던 어느 날 중학교 동창에게 제 부친이 귀화한 재일화교 3세라는 걸 털어놨습니다. 일단 던져놓고 반응을 살피려는 의도였는데 ‘야, 뻥 치지 마!’ 하면서 자르더라고요. 역으로 안심이 되었습니다. 주변 친구들이 저를 그냥 일본인으로 봐줬으면 했거든요. 그러다 고등학교에 들어가면서 조금씩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홍상현

구체적으로 어떤?

하야시 류타

한 친구가 아버지 이야기를 하면서 놀리는데 속으로 ‘아무것도 모르는 주제에 편견만으로 멋대로 말하지 마’하면서 맞받아치고 있더라고요. 어쩌면 과거의 제 자신에게 하는 말이었는지도 모르죠. 아무튼 ‘중국인’이라는, 언론매체에서 거의 부정적인 의미로 등장하는 ‘일반명사’와 거리를 두기 시작한 겁니다. 적어도 제 일상에서, 제 곁을 지키는 아버지와 큰아버지, 그리고 친척들은 다른 모습이었으니까.

대륙파인 요코하마야마테중화학교 교원을 지낸 페이롱루 씨가 타이완파 요코하마중화학원 앞에서 학교사건에 대해 증언하고 있다. (C)2020 LEFT -Where I am- Film Partners
대륙파인 요코하마야마테중화학교 교원을 지낸 페이롱루 씨가 타이완파 요코하마중화학원 앞에서 학교사건에 대해 증언하고 있다. (C)2020 LEFT -Where I am- Film Partners

홍상현

거기에 결정적인 계기 하나가 또 더해지죠?

하야시 류타

고등학교를 마치고 미국으로 유학을 가게 되었습니다.

나라 자체가 이민으로 이루어진 곳이다 보니 저도 자연스레 자신을 중국계 혼혈인으로 소개하게 되더라고요. 다양한 마이너리티 친구들에게 특별한 유대감도 느꼈습니다. 그러면서 당시까지 저를 억눌러왔던 어떤 것들로부터 해방되어 마음이 편안해지더라고요. 어떤 인종의 사람이든 자신의 출신에 대해 자신 있게 말하는 걸 자연스럽게 받아들인 거죠. 한편으로 제 가족사에 대해서도 정확하게 알고 싶어졌습니다.

 

홍상현

어머님을 통해 가족사에 대해 알게 되셨던 당시 상황을 좀 더 듣고 싶습니다.

하야시 류타

그날 기억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기타노 다케시가 진행하는 TV프로가 “일본의 외국인, 혼혈은 이런 게 힘들어”라는 부제로 방송되고 있었어요. 그걸 보다가 같이 있던 어머니한테 무심코 “외국인이나 혼혈인들은 여기서 지내기 참 힘들 것 같아”라고 했더니, 바로 “넌 어때?”라는 말이 돌아오는 거예요. 처음 듣고 무슨 이야기인지 전혀 이해할 수 없어서 다시 물었더니 아버지가 화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맙소사. 중국과 연관된 모습은 손톱만큼도 찾을 수 없었던 아버지가! (웃음)

타이완파 원로로 등장하는 요코하마 푸젠동향회의 웨이룽친 씨. 얼핏 생각하면 한국의 “태극기 할아버지”가 연상될 수도 있지만 실은 결코 그렇지 않다. (C)2020 LEFT -Where I am- Film Partners
타이완파 원로인 요코하마푸젠동향회의 웨이룽친 씨. ‘국기를 흔드는 할아버지’에 대한 선입견이 있을지 모르나, 그런 예상을 뛰어넘는 인물이다. (C)2020 LEFT -Where I am- Film Partners

홍상현

그리고 보니 <레프트>의 ‘대표이미지’라고 할 수 있는 홍위병 사진의 주인공도 아버님이시잖아요.

하야시 류타

차이나타운 퍼레이드 사진 말씀이시군요. (웃음) 그걸 발견한 건 제가 아니라 프로듀서 나오이였는데요. 촬영을 준비하면서 차이나타운 관련 신문기사를 리서치 하는데 아버지를 닮은 사람의 사진이 있다더라고요. 확인해봤더니 게재시기도 딱 부친의 학창시절과 겹치고 있었습니다. (웃음)

 

홍상현

그 밖에도 부친과 관련해서 몇 가지 ‘반전 포인트’가 등장하지 않나요? (웃음)

하야시 류타

홍위병 복장을 한 차이나타운 퍼레이드나 요코하마야마테중화학교 시절 사진, 그리고 부친께서 “당시 마오쩌둥은 이를테면 (학생들 입장에서는) 아버지 같은 존재였다”고 말하는 장면 등인데, 오랜 기간 제게 ‘좋지 않은 이미지였던 중국’을 구현하기 위해 사용했습니다. 아무것도 속이신 건 없지만 왠지 모르게 느꼈던 이상한 ‘배신감’도 표현하고 싶었고요.

<레프트>에서 아버지는 재일화교 사회가 대륙파와 타이완파로 나뉘어 대립하던 시대를 상징합니다. 사상의 다양성을 보여주는 인물인 거죠. 당시의 선택이 단순한 좋고 싫음, 즉, 기호의 문제가 아니라, 좀 더 복잡한 양상을 띠고 있었다는 걸 관객들에게 보여드리고 싶었어요. 개중에는 제 할머니처럼 평범한 존재로서 특정한 정치적 입장을 노골적으로 표현하지 않으면서 대립을 피하려 했던 분들도 계셨겠지만.

1986년 정월. 요코하마 차이나타운의 상징적 장소인 관제묘에서 일어난 화재는 오랜 기간 냉랭하게 지내던 대륙파와 타이완파 화교들이 복구를 위해 힘을 모으는 전기가 되었다. (C)2020 LEFT -Where I am- Film Partners
1986년 정월. 요코하마 차이나타운의 상징적 장소인 관제묘에서 일어난 화재는 오랜 기간 냉랭하게 지내던 대륙파와 타이완파 화교들이 서로에게 손을 내미는 계기가 되어주었다. (C)2020 LEFT -Where I am- Film Partners

홍상현

칼로 무 자르듯 할 수 없는 정체성의 문제. 사실 아시아, 특히 극동지역의 역사에서 ‘어느 쪽인지에 대한 물음’은 대개 폭력적인 의미를 담고 있었죠. 앞서 말씀하신 <액트 오브 킬링>의 경우처럼.

하야시 류타

제 부모님이 함께 등장하는 결말부의 연출이 바로 그런 한계를 뛰어넘어 보려는 의도에 근거한 겁니다.

이 부분에서 화자인 저는 초반부에 보통의 일본인과 조금도 다르지 않게 그려지던 아버지에게서 화교로서의 정체성을 발견합니다. 살아가는 환경에 뿌리내리고 조화를 이루며 지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예컨대 대륙의 장강을 그리며 자신의 헤리티지(heritage)에 자부심을 갖는 존재. 환경에 적응하고 변화하는 모습과 일관되게 유지되는 또 다른 모습을 모두 가지고 있는 ‘인간’을 보여주려고 한 거죠.

 

홍상현

개인적으로 중국이라는 나라와 직접적인 접점을 가진 인물인 할머님에 대한 이야기도 계속 나오잖아요.

하야시 류타

할머니는 이 작품에서 화교 가정인 우리 집을 상징하는 동시에 ‘수수께끼’로서의 의미를 갖는 인물입니다. 어느 가족에나 존재하는 평범한 조모의 모습이지만, 다른 한편으로 저와 달리 내내 ‘화교’로서의 정체성을 간직하고 사셨던 분이거든요. 귀화도 하지 않으셨고요. 하지만 할머니는 저 앞에서 당신의 삶에 대해 특별히 언급하신 적이 없었을 뿐더러 부친과 그 형제들을 늘 일본 이름으로 부르셨어요. 당신 자신 ‘아이유(愛玉)’라는 본명 대신 ‘아이코(愛子)’라는 일본식 이름을 쓰셨고.

그런데 막상 제가 다큐멘터리를 찍기 시작했을 때는 이미 알츠하이머가 발병한 상태라 살아온 이야기를 들을 수 없었어요. 그때 느낀 회한 때문인지 취재를 더 열심히 할 수 있었지만요.

젊은 시절 대륙파 청년들의 중심에 있었던 페이롱루 씨. 하지만 문화대혁명 당시 통역자로 방문한 중국에서 그를 기다리던 것은 외국인과 같은 낯설음뿐이었다. (C)2020 LEFT -Where I am- Film Partners
젊은 시절 대륙파 청년들의 중심에 있었던 페이롱루 씨. 하지만 문화대혁명 당시 통역자로 방문한 중국에서 그를 기다리던 것은 타국과 다름없는 낯설음이었다. (C)2020 LEFT -Where I am- Film Partners

홍상현

<클레프트>도 그렇지만 <레프트>도 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 상영 당시 관객 반응이 좋았습니다. 학교사건으로 표면화된 재일화교 사회의 사상적 갈등이 예컨대 “재일동포 북송사업” 당시 니가타항으로 향하는 기차의 운행 저지 시도 같은 사건으로 표면화되었던 재일코리언의 역사를 떠올리게 했기 때문 아닐까 하는데요.

하야시 류타

대륙파 화교 중에도 일본과 중국 간 국교가 없던 시절 ‘신중국’에 희망을 품고 ‘사회주의 조국 건설에 협력하겠다’며 떠나간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밖에 일본에 남아서 타이완으로 강제 송환될까 두려움에 떨던 사람들도 있었죠. 하지만 그 반대편에 있던 이들은 중일국교가 정상화되면서 다시 불안감을 느꼈다고 해요. 이 모두가 말씀하신 내용과 맞물리는 이야기 아닐까요.

전후 냉전기에 타이완파는 대륙파의 신중국 귀국 사업 저지를 바랐고, 대륙파는 무척 오랫동안 ‘타이완해방’을 슬로건으로 내세웠습니다. 사상적 분단과 함께 서로 다른 입장에 서서 고뇌와 갈등을 경험한 점은 누구든 다르지 않을 거라 생각해요. 아울러 ‘이주민’이라는 사회ㆍ경제적으로 불안정한 입장에서 말 그대로 ‘엉거주춤’하게 지내온 것이 소위 ‘재일’이라 불리는 사람들이었음을 이제는 실감합니다.

 

홍상현

말씀하신 부분과 관련해서 대륙파인 요코하마야마테중화학교 교원 페이롱루(費龍禄) 씨와 타이완파인 요코하마푸젠동향회의 웨이룽친(魏倫慶) 씨의 모습을 대비시켜 보여주신 게 인상적이었습니다.

하야시 류타

‘학교사건’에 있어 대륙파와 타이완파가 갖는 입장은 제가 취재를 진행하던 과정에도 내내 평행선을 달렸습니다. 양쪽 다 ‘학교에서 쫓겨났다’와 ‘원해서 나갔다’라는 입장에서 한걸음도 물러서지 않았으니까요.

그런데, 정작 저 자신 양쪽의 주장과 자료를 검토해볼수록 무엇이 진실인지 헷갈리더라고요. 그래서 내리게 된 결정이 ‘어느 쪽의 주장이 더 사실에 가까운지 검증하기보다, 쌍방이 각자 경험한 사실을 관객에게 가감없이 전하자’는 거였습니다. 각기 다른 주장이야말로 사상적 분단이 일어난 커뮤니티의 복잡성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일 테니까요.

“근ㆍ현대 재일화교의 행보는 냉전기 모국과 일본 정치에 번롱되어온 역사이기도 했습니다.” 하야시 류타 감독의 말이다. (C)2020 LEFT -Where I am- Film Partners
“근ㆍ현대 재일화교의 행보는 냉전기 모국과 일본 정치에 번롱되어온 역사이기도 했습니다.” 하야시 류타 감독의 말이다. (C)2020 LEFT -Where I am- Film Partners

홍상현

그러면서도 증언에 임하는 두 분의 모습이 무척 담담해보여서 좋았는데요.

하야시 류타

두 분이 살아온 시대는 재일화교 사회의 비극 그 자체였다고 할 만큼 고난과 갈등으로 점철되어 있었습니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두 분을 취재하면서 제가 깊은 인상을 받은 건, 마치 젊은 날의 추억담을 들려주시는 것 같은 두 분의 표정 때문이었어요. 서로의 입장은 다를망정 각자 희망을 품고 살았던 시절의 느낌을 전해주셨다고 할까요.

 

홍상현

마치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 감독의 <1900년>을 연상시키는 대목이죠.

특히 저는 페이 씨의 회고가 무척 인상적이더라고요.

문화대혁명 당시 통역자로서 모국을 방문한 페이 씨는 사상적 이상향이던 조국에서 도리어 큰 이질감을 느낍니다. 이 부분이야말로 <레프트>가 재일화교 문제를 디아스포라라는 보다 보편적인 문제로써 다루는 작품임을 드러내준다고 생각하는데요.

하야시 류타

‘상생’은 <레프트>가 담고 있는 큰 테마의 하나입니다.

오늘날 수적으로 압도적인 재일코리언이나 재일화교 말고도 베트남, 필리핀, 브라질 등 무척 다양한 곳에서 유학이나 취업, 결혼, 더러는 분쟁으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한 목적으로 일본에 건너옵니다. 이주민 문제는 21세기의 세계에서 보편적인 이슈가 되어있고요. 이주민 1세대는 저마다 ‘모국’이라는 개념을 가지고 있았습니다. 하지만 2세, 3세로 이어질수록 그 개념은 옅어져 갔죠. 그저 ‘조부모의 고향’ 정도의 위상이랄까요.

제게 중국이라는 나라가 주는 느낌도 그렇습니다. 먼 친척들이 살고 있긴 하지만 냉정하게 말해서 그냥 ‘외국’일 뿐이거든요. 그러니 ‘네 나라로 돌아가라’ 따위의 인신공격은 받아들이기 어렵습니다. 지금 발 딛고 서있는 이 땅이 제가 태어나 자란 곳이니까. 세상 누구도 태어날 나라를 선택할 수 없잖아요. 다만, 이후에 필요나 상황에 따라 거처를 옮겨갈 수는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 모든 일들이 자연스러워지기 위해서는 이주민을 받아들일 수 있는 시스템과 환경이 뒷받침해줘야 되겠고요.

개인의 호불호를 떠나, 산업구조에서 일어나는 변화만 보더라도 사회구성원의 다변화는 거스르기 힘든 현실입니다. 다소 선언적인 이야기가 될 지도 모르겠습니다만, 결국 우리가 다 같은 지구인으로서 살아가고 있음을 인정해야 하지 않을까 싶어요. 어느 나라, 어느 민족의 성원을 떠나, 다 같은 지구인으로서.

재일화교 5세인 손자를 안고 대륙파의 국경절 퍼레이드를 구경하는 타이완파 단체 화교총회 회장 뤼리펑(旅利鵬) 씨. 그는 말한다. “같이 동네에 사는데, 다들 친구잖아. 사이좋게 지내야지.”(C)2020 LEFT -Where I am- Film Partners
재일화교 5세인 손자를 안고 대륙파의 국경절 퍼레이드를 구경하는 화교총회(타이완파) 회장 뤼리펑(旅利鵬) 씨. 그는 말한다. “같이 동네에 사는 이웃이잖아. 사이좋게 지내야지.” (C)2020 LEFT -Where I am- Film Partners

“<레프트>와 관련해서 제가 특히 강조하고 싶은 점은, 이 작품을 어떻게 봐달라는 말씀을 일체 드리고 싶지 않다는 겁니다. 저 자신의 관점에 기초해 써놓은 체험기 같은 작품이니까요. 다만 그 주관적 시점이 전혀 예상치 못했던 현상과 만나 변화돼가는 과정을 보여드리고 싶습니다. 그렇게 때로는 대립하고 때로는 함께 했던 ‘우리’의 모습이 하나의 자양분이 되어, 평화로운 미래를 만들어가는 데 작은 보탬이나마 되었으면 좋겠어요.”

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에 다녀간 지 벌써 만 1년이 되어가는 요즘, 하야시 감독은 무척 바쁜 나날을 보내는 중이다. 오랜 시간 공을 들여 극장상영버전으로 ‘업그레이드’한 <레프트>가 작품의 무대인 요코하마를 시작(8월 21일)으로 전국 순차 개봉을 앞두고 있어서다. 아시아 최대 다큐멘터리영화제의 제작지원작ㆍ초청작으로 이미 국제무대에서 검증까지 받은 덕분일까. 공개 이야기가 나오던 단계부터 언론의 관심이 몰리더니 걸출한 선배 감독들이 너도나도 GV 참여를 자청하고 있다.

순항이다.

이는 분명 ‘개항장의 역사를 가진 인천과 고향 요코하마의 차이나타운을 연결하는 이야기를 해보고 싶다’던 하야시 감독의 차기작 기획에도 청신호가 되어 주리라. 코로나 19가 잦아들면 선린동 어딘가의 식당에 앉아 삼선자장면의 맛을 음미하는 그를 보게 될 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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