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팩트체크] 외교부·고용노동부 "한국은 노동 선진국이다"?

  • 기자명 이강진 기자
  • 기사승인 2021.10.18 1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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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일, 강경화 전 외교부 장관이 ILO(국제노동기구) 사무총장직에 입후보했습니다. 외교부와 고용노동부는 보도자료를 통해, “우리나라는 올해 4월 ILO 핵심협약 비준(3개 추가)과 함께, 6월에는 대한민국 최초로 문재인 대통령의 ILO 총회 기조연설을 통해 국제사회에서 ‘노동존중사회’ 구현을 위한 노력을 강화해 나가고 있다”며, “강 후보자의 ILO 사무총장 진출시 ‘노동 선진국’으로서 우리의 위상을 더욱 확고히 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고 밝혔습니다. 현재 우리나라는 과학기술, 문화, 의료 등 다양한 분야에서 ‘선진국’으로 발돋움 했습니다. 그런데 ‘노동 분야’에서도 선진국으로서 국제적 위상을 인정받고 있을까요?

강경화 장관 제3차 글로벌지속가능발전포럼(GEEF. 2021.2.5)’ 참석 사진 (이미지 출처: 외교부 보도자료)
강경화 전 장관 제3차 글로벌지속가능발전포럼(GEEF. 2021.2.5)’ 참석 사진 (이미지 출처: 외교부 보도자료)

한국, 190개 ILO 협약 중 32개, 핵심 협약은 8개 중 7개 비준

앞서 언급했듯이, 정부는 ‘노동 선진국으로서 우리 위상’을 뒷받침하는 근거로 ‘ILO 핵심 협약’ 추가 비준을 언급했습니다. 하지만 올해 4월, 3개의 ILO 핵심 협약을 비준한 것이 ‘노동 선진국’의 근거가 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의문이 듭니다.

ILO는 1919년 출범 이후 노사정 3자 합의로 190개의 협약을 채택했습니다. ILO 협약은 ‘핵심 협약 8개’, ‘우선 협약 4개’, ‘기술 협약 178개’로 이뤄져 있습니다. 그 중 ‘핵심 협약’은 노동자의 ‘최소한의 권리를 보장’하기 위한 국제노동기준입니다. 핵심 협약에는 ‘결사의 자유(87호, 98호)’, ‘강제 노동 금지(29호, 105호)’, ‘차별 금지(100호, 111호)’, ‘아동 노동 금지(138호, 182호)’ 조항이 명시되어 있습니다. 즉, 전 세계 어느 노동자라도 기본적인 노동권을 보장받아야 함을 규정한 ‘보편적 국제 규범’입니다.

한국은 1991년 ILO에 가입 후 29년 동안 핵심 협약 8개 중 4개(제100호, 제111호, 제138호, 제182호)만을 비준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2018년에는 유럽연합의 집행위원회가 “한국 정부가 ILO 핵심 협약 비준 노력을 충분히 이행하지 않는다”며, 양측 정부 간 협의를 공식 요청하기도 했습니다. 올해 4월이 되어서야 국내 현실과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비준을 미뤄왔던 3개(제29호, 제87호, 제98)의 협약이 비준됐습니다.

비준되지 않은 1개의 협약(제105호)은 ‘정치적 견해 표명(파업) 등을 이유로 강제 노동을 시키는 것을 제재’하는 내용을 담고 있는데, 우리나라의 분단 상황과 국가보안법 상충 여지 등을 이유로 비준하지 않고 있습니다. 즉, 한국이 현재 비준한 ILO 핵심 협약은 7개입니다.

출처: 대한민국 정책브리핑
출처: 대한민국 정책브리핑

ILO 핵심 협약 8개를 모두 비준한 국가는 ILO의 187개 회원국 중에 146개국이며, OECD의 36개 회원국 중 32개국입니다. 한국은 여전히 ‘보편적 국제 규범 기준’이라 불리는 핵심 협약 8개 전부를 다 비준하지는 않은 국가입니다.

핵심 협약을 포함한 190개 전체 ILO 협약 중 한국은 ‘32개’를 비준했습니다. 이는 노동 선진국으로 분류되는 네덜란드 110개, 스웨덴 94개, 독일 85개, 덴마크 73개에 한참 못 미치는 수준이며, 49개를 비준한 일본보다도 적은 수입니다.

출처: 참여연대
출처: 참여연대
ILO 공식 사이트 자료를 바탕으로 재구성
ILO 공식 사이트 자료를 바탕으로 재구성

 

한국 <글로벌노동권지수>는 '노동자 권리 보장 없는' 5등급

세계 최대의 노동조합인 ‘ITUC(국제노동조합총연맹)’는 매년 ‘글로벌노동권지수’를 발표합니다. 이 지수는 전 세계 국가들을 대상으로 노동자 권리 침해 사례와 인권노조 전문가 설문조사 등을 종합적으로 검토해 등급을 매긴 것입니다. 국제노총이 노동권 지수를 발표한 2014년부터 올해까지 한국은 5등급을 벗어난 적이 없습니다. 5등급은 ‘노동자의 권리가 지켜질 보장이 없는 나라’입니다. 우리나라와 같이 5등급에 이름을 올린 나라는 아프가니스탄, 방글라데시, 캄보디아, 에콰도르 등 35개국입니다. 한국의 경제, 문화 수준과 비교했을 때 노동권지수는 매우 낮은 수준입니다. 5등급 보다 낮은 등급은 5+등급이며, 미얀마, 시리아처럼 내전 등의 이유로 법치가 작동하지 않는 국가들에 부여되는 등급입니다.

출처: ITUC
출처: ITUC

 

국제노동기구 수장으로서 강경화 전 장관은 자격이 없다?

강경화 전 장관의 차기 ILO 사무총장 입후보 소식이 전해지자 여러 곳에서 비판의 목소리가 나왔습니다. 김윤기 전 정의당 부대표는 후보 사퇴를 촉구했고, 중앙일보 남정호 기자는 칼럼을 통해 유감을 표명했습니다. 심지어 민주노총은 논평을 통해 “누울 자리를 보고 다리를 뻗어야 한다”며 강 전 장관의 행보를 강도 높게 비판했습니다. 이러한 주장에는 크게 두 가지 근거가 있습니다.

첫째는 “강경화 전 장관은 노동 분야 관련 전문성이 부족하다”는 것입니다. 이 주장은 타당해 보입니다. 강 전 장관은 관련 경력이 없습니다. 그는 정치외교학과 커뮤니케이션학을 전공한 후로 대부분 외교 관련 분야에 종사했습니다. 남정호 기자는 해당 칼럼에서 “노동 문제는 고도의 전문성을 요하는 분야로, 관련 법규 및 작업 환경 등 통달해야 할 게 한둘이 아니다”라며, “1919년 설립된 ILO의 전·현직 사무총장 10명은 죄다 노동 전문가였거나 풍부한 관련 경험이 있었다”고 언급했습니다. 현재 강 전 장관과 함께 차기 ILO 사무총장 후보에 이름을 올린 다른 후보들도 모두 노동 관련 분야에서 종사한 전문가들입니다.

출처: 외교부·고용노동부 공동보도자료
강경화 전 외교부 장관 이력 (출처: 외교부·고용노동부 공동보도자료)
출처: 외교부·고용노동부 공동보도자료
출처: 외교부·고용노동부 공동보도자료

강 전 장관의 ILO 사무총장 입후보를 반대하는 측의 두 번째 이유는 앞에서 언급했던 '한국의 노동 현실' 때문입니다. 한국의 노동권에 대한 국제적 인식을 고려하면, 여전히 갈 길이 멀어 보입니다. 지난 2일 정의당은 서면 브리핑을 통해 "노동 선진국이라는 명예는 그냥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라며, "국제기구의 리더를 배출하는 국가가 되려거든 국내에서 최소한의 자격을 갖추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렇다면 다른 후보들이 속한 국가들(호주, 남아공, 프랑스, 토고)의 상황은 어떨까요? ITUC 글로벌노동권지수에서 호주, 남아공은 3등급을, 프랑스와 토고는 2등급을 기록했습니다. 한국보다는 확실히 노동권이 보장되는 국가들이라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출처: ITUC
출처: ITUC

강 전 장관이 노동분야에서 두드러진 이력이 없다는 지적에는 대부분 동의하고 있지만, '노동후진국'에서 세계노동기구 사무총장을 배출하는 것이 '모순'이라는 지적에는 반론이 있습니다. 당장 테워드로스 아드하놈 현 WHO사무총장의 국적은 에티오피아인데 보건분야 선진국 출신으로 보기는 어렵다는 것입니다. 

또한 한국이 해당 분야에서 높은 수준을 보이지는 않았지만, 개인의 역량을 발휘해 국제기구 수장으로서 인정받은 한국인이 있습니다. 바로 제6대 WHO(세계보건기구) 사무총장(2003~2006), 이종욱 박사(1945~2006)입니다.

이종욱 박사가 WHO 사무총장으로 취임할 당시, 우리나라 의료수준은 지금처럼 뛰어나지 않았습니다. 6대 WHO 사무총장 선출 한 해 전인 2002년, WHO는 전반적인 ‘국민건강 수준’과 ‘보건 서비스의 계층별 분포도’, ‘보건체계의 비용분담’ 등 5개 항목의 평가 기준으로 각국의 의료 서비스의 질을 조사해 순위를 매긴 연례 보고서를 발표했습니다. 한국은 ‘보건 서비스 수행 평가’에서 58위, ‘건강수준’에서 107위, ‘건강 수명’에서 51위를 차지했습니다. 의료 선진국 반열에 오른 지금과 비교해보면 저조한 성적입니다.

하지만 WHO 사무총장으로서 이종욱 박사는 ‘Man of action(행동하는 사람)’이라 불리며 뛰어난 역량을 보여줬습니다. 그는 조류인플루엔자 확산방지와 소아마비·결핵 퇴치, 흡연규제 등으로 2004년 미국 타임지에서 선정한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100인’에 올랐고, 2005년 12월 ‘에이즈의 날’에는 100만 명분의 에이즈 치료제를 공급했다는 성과를 발표하기도 했습니다. 이는 본인의 출신 국가가 해당 분야에서 좋은 성적을 얻지 못했더라도, 국제기구 수장으로서 우수한 성과를 낼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사례입니다.

물론, 이종욱 전 사무청장은 의료 분야의 지식과 경험이 풍부한 전문가였습니다. 서울대 의과대학을 졸업한 그는 WHO 남태평양지역 사무처 나병퇴치팀장과 질병예방관리국장, 예방백신사업국장, 정보화담당팀장 등을 거쳐 결핵관리국장으로 근무한 이력이 있었습니다. 결국 국제기국 수장으로서의 자격은 '출신국가의 위상'이 아닌 '개인의 역량'으로 평가됩니다.


정리하자면, 외교부와 고용 노동부가 언급한 것처럼 우리나라를 ‘노동 선진국’이라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ILO 국제협약 비준 수도 적고, 글로벌노동권지수에서도 매우 저조한 성적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국내 상황이 강경화 전 장관의 ILO 사무총장 입후보 자격 박탈의 근거가 된다'는 데는 이견도 있습니다.

ILO 사무총장은 28개국 정부 대표와 노동자·사용자 대표 각 14인 등 총 56명이 참여하는 이사회 투표에서 과반수 득표로 결정됩니다. 내년 1월부터 3월까지 후보자 공개·비공개 청문회를 통해 3월 25일 선출되는 일정입니다. 강경화 후보자는 이 청문회에서 자신의 비전과 여지껏 검증된 적 없는 전문성을 드러내야 할 것입니다. 관련 경험이 전무한 아시아계 여성 후보자인 강 전 장관에 대해 ILO 이사회는 어떤 결정을 내릴지 귀추가 주목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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