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인선 개통, 경향신문 폐간, 조봉암 사형, 그리고 태풍 사라의 기해년

  • 기자명 김형민
  • 기사승인 2019.01.14 04: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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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8년 무술년은 이른바 ‘결정적인’ 한 해였다. 외국인들도 한국인들을 다시 보았다 할 만큼 만민공동회의 열기는 뜨거웠고, 개화와 입헌(立憲)을 향한 민의 역시 장엄하게 끓어올랐다. 황제가 이를 수용하고 정치의 중심을 잡으면서 유능한 관료를 등용해 개혁 정책을 펴 나갔다면 한국의 운명은 어떻게 바뀌었을지 모른다. 오늘날 경복궁에는 고종 황제의 고손자쯤 되는 ‘황제 폐하’가 거하고 계실 수도 있고, 황태자 전하의 결혼 뉴스가 신문을 장식하고 공주님의 연애 소식에 키득거리고 있었을지 뉘 알겠는가.

그러나 그러기엔 고종은 너무나 자신의 권력에 집착했다. 한 나라의 집권자가 돼서 ‘권력 의지’를 지닌 것이야 누가 뭐러고 할까마는, 그 권력을 감당할 능력이 없으면 권력은 불의 관(冠)처럼 그 스스로를 홀랑 태우기도 하는 것이다. 매천 황현은 고종을 이렇게 평가하고 있다. “스스로 자신의 웅략을 자부하면서 불세출의 자질을 가지고 있다고 판단하고 위로 열성조와 비교될 뿐 아니라 동방에서 처음 있는 군왕이 되려고 정권을 거머쥐고 세상일에 분주한” 군주라고. 그런데 황현도 여기에 결정타를 날린다. “군주가 갖춰야 할 미덕을 하나도 갖추지 못했다.” 그러니까 한 마디로 요약하자면 “깜도 안 되는 인간이 착각은 야무지게 하고 앉은‘ 상황이겠다. 이 고종과 그 친위 세력이 주도한 게 ’광무개혁(光武改革)이었다.

광무개혁은 “‘구본신참(舊本新參)’ 즉, 구식을 근본으로 삼고 신식을 참고한다는 정책이념을 추구한 데에서 나타나듯이 복고주의적인 인상을 풍기고 있었”(민족문화대백과)는데 개혁의 핵심과 방점은 기본적으로 군주의 권한 강화에 찍혀 있었다. 고종은 1899년 기해년 6월, 황제 직속으로 ‘법규교정소’를 만든다. 1년 전 한양을 달궜던 만민공동회의 요구가 ‘아래로부터의 헌법’이었다면 이를 짓밟은 뒤 자신의 입맛에 맞는 헌법을 ‘위로부터’ 내리겠다는 것이었다. 이 결과 등장한 것이 ‘대한국 국제’(大韓國 國制)였다.

1899년 고종이 제정한 대한국 국제.

그런데 이 대한국 국제 전문을 읽다 보면 정말 ‘가관이다’ 싶다. 고종이 만민공동회에서 터져 나왔던 뜨거운 자주와 입헌(立憲)의 요구를 어떻게 귓등으로 흘렸는지를 대번에 짐작하게 되는 것이다. ‘대한국은 세계 만국에 공인되온 바 자주 독립해 온 제국’임을 선포하는 것으로 시작하는 9조의 전문은 말 그대로 ‘황제 뜻대로’를 법제화한 수준이었다. 2조에서는 “대한제국의 정치는 이전부터 오백년간 전래하시고 이후부터는 항만세(恒萬歲) 불변하오실 전제 정치”임을 밝히고 대한국 대황제께옵서는 무한한 군권(君權)을 향유하옵시며(3조) 대한국 신민이 대황제의 향유하옵시는 군권을 침손할 행위가 있으면 그 행위의 사전과 사후를 막론하고 신민의 도리를 잃어버린 자로 인정하며 (4조) 대한국 대황제께옵서는 국내 육해군을 통솔하셔서 편제(編制)를 정하옵시고 계엄 ·해엄을 명령하시며 (5조) 대한국 대황제께옵서는 법률을 제정하옵셔서 그 반포와 집행을 명령하옵시고 대한국 대황제께옵서는 행정 각 부부(府部)의 관제와 문무관의 봉급을 제정 혹은 개정하옵시고 행정상 필요한 칙령을 발하시고 (7조) 대한국 대황제께옵서는 문무관의 출척(黜陟) ·임면을 행하옵시고 작위 ·훈장 및 기타 영전(榮典)을 수여 혹은 체탈(遞奪)하옵시며(8조) 대한국 대황제께옵서는 각 국가에 사신을 파송 주찰(駐紮)케 하옵시고 선전 ·강화 및 제반 약조를 체결하오시니 (9조) 가히 한 나라의 법률 제정권과 외교권과 군 통수권과 인사권을 황제가 다 차지하고 그걸 ‘만세토록’ 유지하겠다는 ‘법’이었다.

고종 황제의 정부는 군대를 증강하고 양전(量田) 사업을 벌여 근대적 토지 소유제도를 도입하며 상공업을 진흥시키는 등 이런 저런 개혁을 추진하지만 국민들의 열의와 에너지를 근간으로 한 것이 아니라 ‘무한한 군권(君權)’을 항구히 누리겠다는 군주의 욕심을 배경으로 했던 만큼, 결코 싹수가 푸르를 수 없는 개혁이었다.

1899년 대한국국제 발표, 최초 철도 경인선 개통

근대화의 상징과 같은 철도가 처음 한반도에 모습을 드러낸 것은 1899년 기해년 9월 18일(경인선)이었다. 우리 손으로 놓은 철도가 아니라 일본의 자본과 기술에 의한 철도였으나 화려한 개통식이 열리고 대한제국의 고관대작들도 총출동했다. 그 가운데 학부대신 신기선이 있었다. 구한말의 어지러운 조정에서 그나마 괜찮았던 신하로서 벼슬 팔아 돈벌이하는 데에 혈안이 돼 있던 고종에게 “만약 뇌물을 근절하지 못하실 경우, 간신히 붙어 있는 나라의 명맥은 당장 끊기고 말 것입니다”라고 눈물로 호소한 적이 있는 관료였다. 그런데 경인선 개통식의 귀빈으로 초대된 이 신기선이 기차의 발차를 앞두고 갑자기 사라졌다. 기차는 경적을 울리기 시작했고 출발 직전 신기선의 부하는 화장실에서 겨우 신기선을 찾는다. “아이고 어서 나오십시오. 대감마님.” 그러자 신기선은 호통을 쳤다. “내가 아직 다 일을 안 보았으니 기다리라고 일러라.” 부하는 안절부절하며 호소했다. “대감마님. 화통(기차)이란 시간을 늦출 수가 없다고 합니다.” “잔말 말고 기다리라고 해라.” 이러는 사이 기차는 떠났고 대한제국 학부대신은 역사적 현장을 놓치고 말았다(<경향신문> 1973년 9월19일 여적).

경인선 개통 당시의 객차. ⓒwikimedia

이 에피소드에서 우리는 근대화를 꿈꾸었지만 근대화의 주체를 키워내지 못했고 근대의 외양은 동경했으나 근대의 진정한 의미를 깨닫지 못했던 대한제국의 모순을 읽어낼 수 있지 않을까? 120년 전의 기해년에 등장했던 대한국제, 황제의 무한한 군권을 규정하고 전제 왕권의 영원함을 못박았던 대한국제는 6년 뒤 을사늑약 때에는 고종 황제의 목을 죄는 올가미가 된다.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는 을사늑약을 강요하던 이토 히로부미 앞에서 고종은 꽤 거센 저항을 보인다. “대한제국의 외교 사무에 대해 일본의 감독을 받겠지만 외교권을 행사하는 독립국이라는 형식을 존치해 줄 것을 청했다.” (<못난 조선>, 문소영) 당연히 이토 히로부미는 이를 거부했지만 고종은 끈질기게 버텼다. 그러면서 그가 끌어들인 것은 ‘백성’이었다. “너무 중요한 사안이니 정부신료와 자문하고 일반 백성의 의향도 살펴 봐야겠다.”고 했다. (위의 책) 그런데 여기에 대하여 내지른 이토의 일갈은 참으로 뼈아프다. “대한제국은 전제국가라면서요? 전제국가의 왕이 백성의 뜻을 살핀다는 것이 말이 됩니까? 대신들의 의견이나 물어 보십시오.”

자기 나라 백성이 분출하는 새로운 세상을 바라는 열기에 찬물을 끼얹었고, 전 세계 군주 국가들이 입헌군주제로 돌던 시절, ‘무한한 군권’을 향유하는 데에 집착했던 황제의 존재는 가히 국가적인 비극의 단초라 할만 했다. 바로 전 해 한양을 달군 만민공동회의 함성도 정부의 폭력과 일반 백성들의 피로감 속에 시들어 버렸고 밑과 끝이 없는 개혁들은 오히려 열강의 간섭과 집권자의 탐욕 속에 스러져 버렸다. 1899년 기해년은 그렇게 암담하게 찾아왔다.

1959년 경향신문 사옥 앞의 신문 폐간 공고를 보는 시민들. 출처: 우리역사넷
조봉암은 1959년 7월 31일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52년만인 2011년 조봉암은 재심에서 무죄판결을 받았다. 출처:우리역사넷

1959년 경향신문 강제 폐간, 조봉암 사형

한국사상 특기할만한 사변과는 별 인연이 없지만 한국 역사의 분수령이 되는 사건들의 전조를 드러내거나 그 막후의 변화를 경험하는 것이 기해년의 '팔자‘일까. 대한국제 60년 후에 찾아온 1959년의 기해년도 그랬다. 1959년은 당시 집권 중이던 이승만 대통령과 여당 자유당이 막장으로 치닫던 때였다. 그 해 4월, 정권의 눈에 가시 같던 야당지 경향신문은 정부로부터 폐간 명령을 받았고 7월 31일에는 사회주의 운동의 맹장이었으나 해방 후 박헌영과 불화하면서 전향, 대한민국 초대 농림부 장관으로서 성공적인 토지 개혁을 실시, 6.25 당시 북한이 기대했던 ‘남조선의 농민봉기’를 빈말로 만들어 버렸던 조봉암이 교수대의 이슬로 사라진다. “나에게 죄가 있다면 많은 사람이 고루 잘 살 수 있는 정치운동을 한 것밖에 없다. 나는 이 박사와 싸우다 졌으니 승자로부터 패자가 이렇게 죽음을 당하는 것은 흔히 있을 수 있는 일이다. 다만 내 죽음이 헛되지 않고 이 나라의 민주발전에 도움이 되기 바랄 뿐이다.” 조봉암의 유언이었다. 1년 뒤 거대하게 폭발할 4.19 혁명을 앞둔 1959년의 기해년은 그렇게 스산하고 살벌했다.

그런데 1959년 기해년이 역사에 남긴 상흔 하나가 더 있다. 바로 1959년 9월 추석 즈음 한반도 남부를 만신창이로 만들었던 태풍 ‘사라’호였다. 그 해 9월 17일은 추석이었다. 고단하고 팍팍했던 시절의 명절일망정, 가족들은 모여들고 없는 돈 추렴해서 제상을 차릴 채비들로 바빴다. 9월 11일 발생한 사라 호 태풍은 북상하면서 많은 양의 비를 뿌렸지만 중앙관상대는 사라 호 태풍이 한반도로 접근하면서 세력이 약화된 것으로 관측했다. 그러나 사라 호는 약화는 고사하고 되레 905헥토파스칼의 초대형 태풍으로 명절 맞은 한반도를 강타했다. 그 첫 제물은 제주도였다. 16일 심야에 제주도에 상륙한 사라는 동틀 무렵에는 초속 39.2미터의 돌바람으로 제주도를 난타했다. 행정 기능은 마비됐고, 바람에 익숙한 섬 사람들조차 그저 집이 날아가지 않기를 바라며 부들부들 떠는 수 밖에 없었다. 40만 인구의 섬에 이재민 6만 명이 발생했고 당장 먹을 밥이 없고 잠잘 집이 없는 긴박한 처지의 사람들만 1만명이 넘었다. 그러나 육지에 도움을 처할 수도 없었다. 육지에서는 더 난리가 난 것이다.

태풍은 제주도를 때린 다음 통영 앞바다로 상륙해서 영일만으로 빠져나갔다. 거제도 앞바다의 절경이었던 한 쌍의 촛대바위 중 신부 촛대바위가 사라호 태풍의 칼바람에 동강이 난 것을 시작으로, 부산 산복도로의 판자집들 태반이 바람에 날아가 버렸다. "오륙도가 파도 때문에 보이지 않았다."고 하니 그 피해가 오죽했으랴. 괴멸적인 타격을 입은 건 경북이었다. 홍수 때문에 마을이 송두리째 없어진 곳도 즐비했고 가옥이 부서진 정도는 피해 축에 끼지도 못했다. 전국적으로 900여명이 죽었고 이재민은 100만 명 규모로 발생했다.

1959년 태풍 사라가 전국을 강타해 100만명의 이재민이 발생했다. 사진은 초토화된 부산 지역.

경북 울진 성류굴 앞을 흐르는 왕피천도 사라의 엄습에 범람했고 인근 마을을 휩쓸어 버렸다. 가장 큰 피해를 입은 것이 근남면이었다. 논이고 밭이고 모든 것이 흙탕물로 뒤덮였고 물이 빠진 뒤는 황무지로 변해 버렸다. 망연자실한 근남면 사람들에게 강원도지사가 "철원으로 오라"는 제의를 해 왔다. 민통선 관할을 미군으로부터 넘겨받은 정부가 정처 없던 남쪽 주민들을 이주시켜 민통선 지역을 활용하려 했던 것이다. 일종의 현대판 사민정책이었다. 여기에 응한 66가구의 울진 사람들이 전쟁 이전에는 북한 땅이었던 DMZ 근방 버려진 땅 철원군 마현리로 군용트럭에 실려간다.

태풍 사라 때문에 경북 울진에서 강원 철원으로 이주한 사람들

그런데 천리타향 낯선 땅에 똑 떨어진 지 12일만에 4.19가 발발했다. 자유당 출신이었던 강원도지사는 급박한 상황 전개에 겁을 먹고 도피했는데 이 와중에 울진에서 엑소더스해 온 66가구에 대한 행정 서류 등이 없어지고 말았다. 오늘날 강남구 포이동 구룡마을 사람들이 행정 기관의 권유에 따라 그 지역에 이주해 왔음에도 서류가 없다는 이유로 일체의 권리를 부정당하는 상황이 똑같이 벌어졌다. 새로 들어선 민주당 정부는 왜 울진 사람들이 강원도에 들어와 있는지 갈피조차 잡지 못했던 것이다.

천막 하나로 바람을 가리고 생활하던 시절, 이들의 처지를 보다못한 장교 한 명이 쌀 한 가마를 주면서 밀주라도 만들어 군인들에게 팔아 보라고 제안했고, 이주민들은 야밤에 술을 '추진'하러 온 군인들에게 막걸리를 팔면서, 또 한켠으로 메마른 땅에 괭이질을 하면서 팍팍한 삶의 기지개를 펴기 시작했다.

DMZ 지역의 치안은 경찰이 맡지 않고 방첩대 즉 요즘의 기무대가 맡았다. 성에 안차거나 속이 뒤틀리는 일이 있으면 툭하면 마을 사람들을 집합시켜 놓고 조인트를 까고 빳다를 쳤다. 땅을 개간하다가, 아이들끼리 뛰놀다가 툭하면 펑펑 소리가 났고 그때마다 갈갈이 찢긴 육신들이 철원 평야에 내동댕이쳐졌다. 그곳은 지뢰 반 흙 반의 지뢰밭이었다.

그 모든 시련을 딛고 울진군 근남면 사람들은 지뢰밭투성이의 황무지를 강원도 최대의 옥토로 만들었고 그 행정구역 이름을 '근남면 마현리'로 명명한다. 사라 호 태풍은 경북 울진군 근남면을 폐허로 만들었지만 그 태풍에 휘말려 내동댕이쳐진 사람들은 한국 전쟁 이후 버려졌던 땅을 강원도 철원군 근남면으로 부활시켜 제2의 고향으로 만든 것이다.

마현리 마을 입구에 세워진 이주 기념비.

사라 호는 자연의 위력을 여지없이 보여주었지만, 더불어 사람의 의지도 그만큼이나 위대함을 보여 주는 계기이기도 했다. 철원군 근남면 마현리에 선 비문이 뚝뚝하기 이를데없지만 뭔가 스멀거리는 느꺼움으로 속을 달구는 것은 그 때문이리라. 기념비를 들여다보노라면 수천년 동안 수도 없는 외침과 자연재해, 환난과 시련을 겪고 살아온 한국인들의 역사가 그 위에 겹쳐지기도 한다. 거대한 대제국을 세우지도 않았고, 세계를 뒤흔들고 이름을 남긴 역사도 없으나 그 모진 세월을 견디고 이 터를 지켜온 사람들의 몸부림과 발 구름이 눈가를 스치고 귓전을 때리는 것이다.

2019년 기해년도 결코 만만치 않은 세월로 우리 일상을 덮을 기세다. 경제가 어떻게 돼 갈지, 남북 관계는 어떤 경로를 밟을 것이며 미국과 일본, 중국과 러시아는 우리와 어떻게 어우러질 것인지 투명한 것은 하나도 없다. 1899년의 기해년처럼 비운의 씨앗이 심어지는 해가 될 수도 있고 경인선 철도가 기적을 처음 울린 것처럼 본격적이고도 근본적인 변화가 1959년 기해년의 사라호 태풍처럼 들이닥칠 수도 있다. 그러나 기원해 본다. 1959년 사라호 태풍을 맞아 고향을 잃었던 경북 울진군 근남면 사람들이 새롭게 강원도 철원군 근남면을 창조했듯 오늘을 사는 한국인들이 시련을 이겨낼 수 있기를, 우리 모두가 보다 잘 사는 길을 찾아낼 수 있기를. 7천만 한국인과 조선인과 고려인들이 모두 황금돼지꿈을 꾸고 그 꿈에 걸맞게 평화롭고 번영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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