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전쟁몽유병자들'이 다시 등장하고 있다

  • 기자명 이승윤
  • 기사승인 2022.01.20 15: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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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2021년 세계 안보 상황에 있어 가장 뜨거운 감자 중 하나는 대만 해역 문제였다. 대만 차이잉원 총통의 반중(反中) 정책에 발끈한 중국이 무력 통일도 불사하겠다고 선언하자, 미국 역시 노골적으로 친(親)대만 정책을 추진하며 양안 관계가 급속도록 얼어붙었다. 

한편 미국 워싱턴포스트지(WP)는 2021년 12월 3일(현지시각) 충격적인 기사를 보도했다. 러시아가 2022년 초 병력 17만 5000명을 동원하여 우크라이나를 침략할 계획을 준비하고 있다는 기사였다. 세계는 발칵 뒤집혔다. 그 이후 미국과 나토(NATO)로 대표되는 서방세계는 러시아와 전쟁방지를 위한 여러 루트의 협상을 진행하고 있다. 그러나 협상의 진행 흐름이 희망적이라는 시그널은 2022년 1월 중순 현재 뚜렷하게 나타나고 있지 않다. 

언뜻 보면 그리 연관성이 있어 보이지 않는 두 가지 안보 이슈를 하나로 엮어주는 키워드는 ‘중국’이라 할 수 있다. 러시아 푸틴이 우크라이나 도발을 강행하고자 하는 의도에는 대만을 두고 중국과 긴장 관계에 있는 미국이 과연 전쟁 발발 시 적극적으로 우크라이나 사태에 개입할 수 있겠느냐는 전략적 계산이 숨어 있기 때문이다. 

2022년 현재 중국은 과거 전통적인 외교 노선인 도광양회(韜光養晦) 방침 즉 자신의 의도를 숨기고 때를 기다린다는 소극적 전략을 버리고, 주동작위(主動作爲) 방침 즉 마땅히 해야 할 바를 스스로 주도해 나간다는 국익 우선의 적극적 전략을 새로운 외교 노선으로 추진하고 있다. 향후 세계 질서를, 현재의 미국 주도의 1강 체제에서 미국과 중국이 세계의 지배권을 양분하는 2강 체제로 개편하고자 하는 일환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미국이 자신의 헤게모니를 순순히 내려놓을 리 만무한 상황에서 앞으로 국제사회의 긴장과 갈등은 다방면으로 격화될 것으로 보인다. 

 

2. 지금 현재의 국제 질서가 약 1세기 전 유럽의 상황과 닮아 있다고 말한다면 과도한 해석일까. 그렇지 않다. 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기 전, 유럽에 있어 가장 민감한 군사, 외교적 쟁점은 통일 독일의 발흥이었다. 유럽 대륙에 있어 전통적인 강대국이었던 영국, 프랑스, 러시아, 오스트리아의 헤게모니를 위협하는 통일 독일의 출현은 유럽의 현존 질서를 뿌리 째 흔드는 계기가 되었다. 새로운 강대국의 출현은 언제나 현존 질서를 뒤흔들게 돼 있다. 1세기 전 통일 독일이 담당했던 ‘악역’을 현재 중국이 담당하게 됐다고 보아도 크게 무리한 시각은 아닐 것이다. 

 

3. 케임브리지 대학 크리스토퍼 클라크 역사학 교수의 노작(勞作) <몽유병자들>은 1세기 전 발발했던 세계 제1차 대전의 역사적 배경에 대해 저술하고 있는 책이다. 1차 대전의 역사적 배경과 관련하여 기존의 연구 서적들이 주로 ‘왜’ 발발했는가 라는 관점에서 기술되었다면 <몽유병자들>은 ‘어떻게’ 발발하게 됐는가 라는 관점에서 바라본다. 1차 세계 대전의 역사적 배경을 ‘왜’가 아닌 ‘어떻게’ 라는 관점에서 바라보게 되면 전쟁 발발의 원죄를 통일 독일에게 뒤집어씌웠던 기존의 역사적 시각은 상당한 수정을 요구받게 된다. 실제로 클라크 교수는 <몽유병자들>에서 1차 세계 대전의 책임을 어느 일방적인 한쪽의 국가 혹은 동맹의 탓으로 돌리기보다는 관련 국가 전체로 확대시킨다.  

사라예보 사건 2주 뒤 이탈리아 신문에 실린 삽화. 1914년 6월 28일 오스트리아 황태자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 부부는 세르비아에서 민족주의 조직원에게 암살당한다. 이 사건은 1차 세계대전의 도화선이 됐다.
1914년 6월28일 사라예보에서 발생한 오스트리아 황태자 부부 암살사건을 그린 유럽 신문의 삽화. 사라예보 사건은 1차 세계대전의 결정적인 동기가 됐다. 

4. 1차 세계 대전의 발발 배경을 뒤쫓아 가는 클라크 교수의 시선은 다방면을 훑으면서도 세밀하면서 또한 집요하다. 책의 서두를 장식하는 사건은 ‘사라예보 오스트리아 황태자 암살’이 아닌, 1903년 6월 베오그라드에서 발생했던 세르비아 왕 오브레노비치와 그의 왕비의 암살이었다. 베오그라드 암살 사건을 이끌었던 드라구틴 디미트리예비치는 훗날 세르비아 민족주의 테러단체 흑수단(黑手團)을 조직한다. 그리고 바로 그 흑수단이 10년 후 즉 1914년 6월 사라예보에서 오스트리아 황태자를 암살함으로서 1차 세계 대전 발생을 직접적으로 촉발시키게 된다. 저자가 책의 서두를 장식하는 사건을 베오그라드 암살사건으로 선택한 이유는 명백해 보인다. 1차 대전 발발이 어느 한 나라 혹은 어느 한 시기의 요인으로 인하여 촉발된 것이 아니라 그 원인의 뿌리가 매우 깊고 또한 복잡하게 얽혀 있다는 것을 드러내기 위함인 것이다. 

 

5. 1차 세계 대전의 발발은 과연 막을 수 있었을까. 클라크 교수는 전쟁을 막을 수 있었다고 바라본다. 독일은 전쟁 반발 시 러시아와 프랑스를 동시에 상대해야 하는 양면 전쟁 상황을 두려워하고 있었고, 동맹국이었던 러시아와 영국 사이의 신뢰성은 양국 사이의 전통적인 견제 정책 때문에 매우 의심스러웠다. 또한 프랑스 역시 전쟁 발발 시 영국의 지원 가능성이 영 미덥지 않았다. 요컨대 유럽 주요 각국은 전쟁 참전을 서로 다른 이유로 망설이고 있었다. 그렇지 않다면 1914년 6월 28일 오스트리아 황태자 암살 이후 한 달이 지난 7월 28일이 되어서야 전쟁이 시작된 이유를 설명할 수 없다. 그 한 달 동안 유럽 각국은 화해의 접점을 찾고자 나름 치열하게 노력했던 것이다. 

그러나 노력은 실패로 끝나고 전쟁은 일어났다. 클라크 교수는 책에서 다음과 같이 이야기 한다. 

당시 정치인들은 이해관계에 매몰된 나머지 그들의 행동이 어떤 결과로 이어질지 결코 전망하지 못했다. 1914년의 유럽 정치인들은 몽유병자들이었다. 눈을 부릅뜨고도 보지 못하고 꿈에 사로잡힌 채 자신들이 초래할 공포의 실체를 깨닫지 못했다.

 

1차 대전 당시 유럽 각국의 정책 책임자들은 하나 같이 저마다의 ‘몽유병’에 사로잡혀서 전형적인 ‘아전인수’의 관점에서 상대방을 바라보고 그에 따른 대책을 강구했다.  자신들의 행위는 전적으로 평화를 추구하는 것이고 적은 오직 평화를 깨뜨리기 원한다는 선입관에 사로잡혀 화해로 나아갈 수 있는 또 다른 방법 찾기는 고심하지 않았던 것이다. 

몽유병자들이 저마다의 헛꿈에 사로잡혀 결정한 전쟁의 결과는 참혹했다. 4년 간 지옥 같은 참호전이 벌어졌고 그 결과 군인과 민간인을 포함 약 1500만명이 사망했다. 

 

6. <몽유병자들>은 2017년 12월 제프리 펠트먼 당시 유엔 사무차장이 북한을 방문했을 때 리용호 외무상에게 선물로 건넸던 일화로 인하여 더욱 유명해졌다. 펠트먼 유엔 사무차장은 북한의 위정자들이 상호 이해 그리고 공존의 길을 선택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이 책을 선물했을 것이다. 그러나 현재의 세계는 서두에서 이야기하였듯이 평화와 전쟁의 양 사잇길 위에서 위태로운 외발자전거 타기를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북한은 2022년 1월 17일 새해 들어 4번째 미사일 실험 발사를 강행했다. 불길한 전쟁의 징후는 우크라이나 접경 지역에서, 남중국해에서, 그리고 한반도에서 그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워가고 있다. 

몽유병자들의 세상이 또 다시 다가오려고 하고 있는가. 


<몽유병자들> 크리스토퍼 클라크 지음, 이재만 옮김. 책과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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