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팩트체크] 정부는 타미플루를 북한에 '조공'하지 않았다

  • 기자명 박한슬
  • 기사승인 2019.01.22 02: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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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월 8일, 정부는 제301차 남북교류협력추진협의회를 개최하여 「인플루엔자 관련 대북물자 지원에 대한 남북협력기금 지원(안)」을 의결했습니다. 이는 2018년 11월 7일에 열린 「남북보건의료 분과회담」에서 남과 북이 전염병 유입 및 확산 방지를 위해 협력하기로 했기 때문인데, 대표적인 전염병 중 하나인 인플루엔자에 대해서도 협력을 시행하기로 한 것입니다. 이날 의결이 이루어지며 북한에 약 20만 명이 사용할 수 있는 인플루엔자 치료제 ‘타미플루’를 지원하게 되었는데, 코메디닷컴이란 의료전문 매체에서 관련 보도를 내놓으며 여론이 급격히 악화되기 시작했습니다. 북한이 여러 인플루엔자 치료제 중 스위스 제약사 로슈의 ‘타미플루’를 콕 집어서 요구했고, 정부에서는 이를 수용하여 국내 제약사가 생산하는 상대적으로 저렴한 타미플루 복제약들 대신 비싼 오리지널 ‘타미플루’를 제공하기로 했다는 것입니다.

 

바른미래당 이언주 의원은 같은 달 11일 본인의 페이스북에 해당 언론사의 기사를 공유하며 이에 대해 강력한 비판을 가했습니다. 이언주 의원은 “일방적으로 도와주는 게 아니라 거기 요구하는대로 넙죽 갖다 바치는 건 지원이 아니라 ‘조공’이라 부른다”며 “우리나라 약도 아니고 스위스제를 사서 달라”는 요구를 수용한 것은 잘못이라는 겁니다. 해당 게시물의 댓글에는 북한이 오리지널 타미플루를 요구하는 이유가 이를 해외 시장에 되팔아서 현금화 하려는 것이라는 식의 주장도 많은 동조를 얻고 있었습니다.

보도된 기사의 내용으로만 보면 마치 한국 정부가 북한의 일견 부당한 요구에 굴복해서 35억 원 규모의 조공(?)을 바친 것으로 보이기도 하는데, 실상은 좀 다릅니다. 애초에 정부가 북한에 지원하겠다는 타미플루는 새로 구매하여 제공하는 것이 아니거든요. 이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2009년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합니다.

 

신종플루의 공포로 시작된 타미플루 비축

2009년 멕시코에서는 갑자기 급격한 인플루엔자 확산이 관찰됐습니다. 환절기에 인플루엔자(Influenza), 흔히들 ‘독감’이라고 하는 질병이 퍼지는 것이 그리 특이한 일은 아니지만 당시 멕시코를 덮친 인플루엔자는 좀 달랐습니다. 통상적인 인플루엔자와는 달리 증상이 발현된 지 3-5일 사이에 환자가 사망하는 경우가 확연하게 증가한 것입니다. 뒤늦게 사태를 인지한 멕시코 정부는 추가적인 인플루엔자 감염을 막기 위해서 수도인 멕시코시티의 모든 건물들을 폐쇄하는 강력한 조치를 취했지만 역부족이었고, 해당 바이러스는 멕시코를 넘어 전 세계로 확대되기 시작했습니다. 소위 ‘신종플루’라 불리는 인플루엔자 창궐사태가 발생한 것입니다.

다행히도 1년 정도의 기간 안에 신종플루의 유행은 멈췄고, 전 세계적으로도 1만 5천 명 정도의 환자가 사망하는 선에서 사태는 마무리가 됐습니다. 그렇지만 각국 보건당국은 이를 가볍게 여기지 않았습니다. 최대 1억 명 정도의 사망자를 냈던 1900년대 초반의 스페인독감 사태가 오버랩되며, 여행제한 같은 조치 외에 더 근본적인 대책을 마련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결론이 나왔거든요. 각국 보건당국의 방역망에 구멍이 뚫려 신종플루가 전 세계로 확산된 것을 고려하면, 만약 더 독한 인플루엔자 바이러스가 출현했을 시에는 더 끔찍한 일이 발생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런 인플루엔자 대유행 사태의 해결책으로 등장한 것이 바로 ‘타미플루’입니다. 인플루엔자를 치료할 수 있는 약을 각국이 넉넉히 비축해두자는 것이죠.

사실 미국이나 영국을 비롯한 주요 선진국들은 2004년의 조류독감 사태를 계기로 전 국민의 20-30%가 복용할 수준의 타미플루를 비축하고 있었습니다. 국내에서도 관련 논의가 있었지만 대략 1000만 명 분의 타미플루를 약의 유통기한이 만료되는 4년 마다 재구매하는 것을 고려하면(현재는 특수한 보관 조건에서 10년으로 연장되었습니다), 위험에 비해 비용이 너무 과다하다고 판단하여 비축을 하지 않고 있다가 2009년의 신종플루 사태를 계기로 비축을 하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2019년인 올해, 대량 비축해둔 타미플루의 최대 유효기간인 10년이 만료가 되어가는 것입니다.

독감치료제 타미플루. 연합뉴스TV 화면 캡처.

북한에 제공하는 타미플루는 ‘비축분’

쿠키뉴스의 보도에 따르면, 남북 보건의료 추진단 박민수 총괄반장(복지부 정책기획관)은 "인플루엔자가 겨울철 유행하는 병이기 때문에 우리 정부 비축분을 보내기로 결정한 것“이라며 새로 타미플루를 구매하여 보내는 것이 아님을 분명히 했습니다. 이언주 의원의 주장과 달리 북한의 요구에 맞춰서 새로이 의약품을 구매하여 보내는 것이 아닌 셈입니다. 그런데 굳이 북한에 정부 비축분을 보내려는 이유는 뭘까요?

정부가 1억 원 이상의 물품을 조달하려면, 국가계약법 제4조와 그에 따른 시행령에 따라 조달청을 통해 조달계약을 체결해야 합니다. 천재지변으로 인해 긴급하게 조달할 필요가 있거나, 독점 생산하는 물품이 아닌 경우에는 경쟁계약을 체결해야 하므로 공고 등의 절차를 거쳐 최종적으로 물품을 인도받는 데에 1-2개월 이상이 소요되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그러므로 1월에 저런 납품 절차를 시작하면, 실제로 정부가 이를 북한에 보내는 것은 거의 3월이 넘어서겠죠. 그런데 그 시기는 이미 인플루엔자 유행 기간이 지난 후입니다. 그렇기에 입찰 등을 통해 새로이 구매하는 것이 아니라, 기존에 구매해뒀던 비축분을 보낸다는 것입니다.

게다가 정부 비축분을 보내는 것은 또 다른 장점도 있습니다. 앞서 설명 드렸던 것처럼 올해는 2009년부터 비축하기 시작한 타미플루의 유효기간이 거의 만료되어 가는 시점입니다. 복지부에서 유효기간을 10년 보다 더 연장하지 않겠다고 밝힌 만큼, 그걸 모두 폐기하느니 긴급한 수요가 있는 북한에 지원함으로써 재고도 덜어내고 북한에도 실질적인 도움을 줄 수도 있는 것입니다. 여기는 또 다른 부가적인 효과도 있습니다. 정부에서 비축 중인 타미플루는 특수 조건에서 보관하여 이용에는 문제가 없지만, 통상적인 유효기간인 2년을 무려 8년 가까이 넘긴 상태입니다. 일부의 주장처럼 해외에 재판매하여 현금화하기도 무척 힘들다는 것입니다.

 

인도적 지원과 이념적 비판은 분리해야

북한에 대한 태도는 국내에서도 무척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습니다. 최근의 화해 무드를 비핵화와 통일을 향해 나아가는 희망의 길로 보는 이들이 있는 반면, 이를 ‘평화 쇼’라고 비난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이런 정파적 관점에 따라서 해석하면 ‘타미플루 지원’도 제각기 다른 의미로 다가올 수 있겠지만, 정부가 북한의 요구에 따라 비싼 해외 의약품을 사다 바쳤다는 주장은 사실이 아닙니다. 통상적인 유효기간이 훌쩍 넘었기에 인도적 목적 외에는 다른 용처를 찾아보기도 힘든 의약품을 지원하는 것을 두고도 사실관계를 왜곡하는 이들이 있다는 것이 무척 안타까울 뿐입니다. 감귤박스에 이어 타미플루 약통에도 다른 무언가가 들어있다고 믿는 것일까요? 통일부는 21일 타미플루 북송 일정을 최종 조율중이라고 밝혔습니다. 일정 조율이 끝나면 이르면 이번주중 타미플루를 육로로 운송해 개성에서 북측에 넘겨줄 계획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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