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팩트체크] 중앙일보가 그린 겨울전쟁의 모습, 사실일까? ①

  • 기자명 우보형
  • 기사승인 2022.05.07 16: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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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4월 2일 중앙일보는 "뉴스 ONESHOT 러시아 '역사의 수렁'에 빠지다…80여년前 '겨울전쟁' 평행이론"이라는 제목의 기사를 냈다.

그림 1. 중앙일보 기사 도입부 캡처
그림 1. 중앙일보 기사 도입부 캡처

러시아의 침공에 맞서 버티는 우크라이나의 모습에서 1939~40년 겨울과 봄에 걸쳐 소련의 침공에 맞선 핀란드의 모습을 봤다는 기사다. 필자의 감상까지는 이해할 수 있다. 사실 개전 초에 러시아군이 헤매는 모습을 보고 겨울전쟁이 생각난다는 서방 언론들의 기사 또한 제법 많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감상과는 별개로 중앙일보 기사는 과연 겨울전쟁의 모습을 올바로 서술하고 있을까? 중앙일보 기사의 겨울전쟁, 나아가 핀란드-소련 전쟁의 모습은 역사적 사실과 얼마나 합치할까? 쟁점이 될 만한 부분을 아래 그림 2로 나타냈다.

그림 2. 겨울전쟁에 대한 중앙일보 기사 서술 가운데 쟁점이 될, 검증할 항목들 A항의 문장은 사실관계를 명확히 하기 위해 문장의 위치를 바꿔 봤다
그림 2. 겨울전쟁에 대한 중앙일보 기사 서술 가운데 쟁점이 될, 검증할 항목들 A항의 문장은 사실관계를 명확히 하기 위해 문장의 위치를 바꿔 봤다

그리고 그림 2의 서술된 중앙일보 기사의 테제들은 아래의 질문으로 치환할 수 있다.

1. 핀란드군이 소련군의 공세를 정지시킨 이유는 그림 2의 A항에서 보듯 스키와 사격이 능한 핀란드군이 소련군 부대를 분리한 뒤 각개격파 하는 전술을 썼기 때문일까?

2. 만일 그렇다면 2월 1일 이후로는 어째서 그 이유가 작동하지 않았을까?

3. 그림 2 B항의 중앙일보 분석은 사실일까?

4. 그림 2 C항의 중앙일보 기사 서술은 사실일까?

5. 그림 2 D항의 전후 핀란드의 정치적 선택에 대한 중앙일보의 서술은 사실일까?

따라서 이번 글은 1~5항의 질문에 대한 답을 통해 중앙일보가 겨울전쟁, 나아가 핀란드-소련 전쟁이 역사적으로 올바르게 서술되었는지의 여부를 확인해보고자 한다. 그런데 이번 글에도 문제가 하나 있었다. 기사의 겨울전쟁에 대한 서술이 워낙 날림이다 보니, 그리고 겨울전쟁은 1939년의 양상, 1940년의 양상이 완전히 다름에도 불구하고 하나로 뭉뚱그리다보니 심지어 핀란드-소련 전쟁 종전 이후까지 다루시는 4번항 5번항까지 걸치다 보니 검증에 분량이 너무 많이 나온다는 것이다. 따라서 도저히 한 편으론 뭉뚱그릴 방법이 없었다. 때문에 이번 글도 부득이하게 2편으로 나눠 검증하기로 한다.

 

1. 핀란드군이 소련군의 공세를 정지시킨 이유는 그림 2의 A항에서 보듯 스키와 사격이 능한 핀란드군이 소련군 부대를 분리한 뒤 각개 격파하는 전술을 썼기 때문일까?

중앙일보 기사를 본 소감은 겨울전쟁, 나아가 핀란드-소련 전쟁에 대해 절반의 진실만을 서술했다는 것이다. 물론 두 가지 전제가 허용되는 한 해당 서술도 사실이라 말할 수 있기는 하다. 우선 겨울전쟁이 1939년 11월 30일에 시작해서 12월 20일에 끝났다면, 그리고 소련군의 공세가 아래 그림 3의 겨울전쟁 전황도에서 9로 표기한 중부 핀란드의 카이누 (Kainuu)와 8로 표기한 얘르비수오미(Järvi-Suomi)–일로만치(Ilomantsi) 구역에서만 이뤄졌다면 말이다.

그림 3. 겨울 전쟁 초기 소련군의 공세상황도
그림 3. 겨울 전쟁 초기 소련군의 공세상황도

하지만 현실세계 역사속의 겨울전쟁은 1939년 11월 30일에 시작해서 동년 12월 20일에 끝난 것이 아니라 그 이듬해인 1940년 3월 13일에야 비로소 끝났다. 또한 소련군의 침공은 그림 3에서 9로 표기한 구역, 카이누와 8로 표기한 얘르비수오미-일로만치 구역에서만 이뤄진 것이 아니라 7로 표기한 카렐리야 지협에서도 이뤄졌다.

심지어 각 구역마다 투입된 전력도 달랐다. 카이누 지역에 전개한 소련 제9군은 소총병연대 3개와 포병연대 1개, 탱크대대 하나로 구성된 제122소총병사단, 제163소총병사단으로 구성된 제47군단과 제54소총병사단과 제44소총병사단이 본토에서 오는 중이던 특수군단으로 구성되었다.

한편 라도가 호 북쪽, 얘르비수오미-일로만치 지역에 전개한 제8군은 제139소총병사단, 제155소총병사단으로 구성된 제1군단과 제18소총병사단과 제56소총병사단, 그리고 제168소총병사단으로 구성된 제56군단, 그리고 제75소총병사단과 탱크여단 하나를 군 예비로 두고 있었다.

그런데 마지막 7로 표기된 카렐리야 지협의 제7군은 제24소총병사단, 제43소총병사단, 제70소총병사단, 제123소총병사단과 제40탱크연대로 구성된 제19소총병군단과 제49소총병사단, 제90소총병사단, 제142소총병사단과 제35전차연대를 휘하에 둔 제50소총병군단, 그리고 탱크대대 3개를 휘하에 둔 제1탱크연대와 제13탱크연대로 구성된 제10탱크군단이 주력이었고 군 예비로 제138소총병사단과 제20탱크연대, 그리고 제301장갑차대대로 구성되어 있었다. 방어하던 핀란드군도 당연히 이 구역에 가장 강력한 전력을 두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핀란드군은 카렐리야 지협에서는 12월 16일까지는 소련군의 공세를 사실상 막아 세우지 못했다.

그림 4. 중앙일보 기사가 일체 언급하지 않던, 7번 구역 카렐리야 지협 전황도, 왼쪽은 11월 30일부터 12월 15일까지의 소련군 공세를, 오른쪽은 숨마, 키비니에미, 켈리아, 타이팔레에서 소련군의 돌파시도를 나타낸다
그림 4. 중앙일보 기사가 일체 언급하지 않던, 7번 구역 카렐리야 지협 전황도, 왼쪽은 11월 30일부터 12월 15일까지의 소련군 공세를, 오른쪽은 숨마, 키비니에미, 켈리아, 타이팔레에서 소련군의 돌파시도를 나타낸다

그러던 카렐리야 지협의 핀란드군이 12월 16일이 되면 소련군의 공세를 멈춰 세우고 일주일을 버틴다. 그리고 사기가 떨어진 소련군은 대규모 공세를 중지하기에 이른다. 대체 왜?

 

겨울전쟁 혹은 핀란드 – 소련 전쟁의 향방을 가른 진짜 원인들

맹자에 天時不如地利 地利不如人和(천시불여지리, 지리불여인화)라는 구절이 나온다. 하늘의 때는 땅의 이점만 못하고 땅의 이점은 사람의 단결만 못하다는 이야긴데 천시, 지리, 인화 가운데 어느 것이 더 나은가를 말할 생각은 없지만 겨울 전쟁, 나아가 핀란드-소련 전쟁의 향방을 설명함에 있어 천시, 지리, 인화를 빼놓고 설명하기란 그리 쉽지 않다.

A. 지리(地利)

지리를 가장 먼저 꼽은 이유는 설령 전시라 하더라도 국토의 조건이 전황을 결정하는 가장 큰 요소이기 때문이다. 아래 그림 5를 보자.

그림 5. 2018년 당시 핀란드 인구분포도(좌)와 지형도(중앙) 겨울전쟁의 소련군 공세 상황도(우)
그림 5. 2018년 당시 핀란드 인구분포도(좌)와 지형도(중앙) 겨울전쟁의 소련군 공세 상황도(우)

그림 설명에서 언급했듯 좌측은 2018년 당시 핀란드 인구분포도, 중앙은 지형도 우측은 1939년 11월 30일 당시 소련군의 공세 상황도다.

먼저 봐야 하는 것은 중앙의 지형도다. 핀란드는 노르웨이, 스웨덴과 함께 스칸디나비아 3국으로 불리지만 지리적으로는 스칸디나비아 반도와는 다소 거리가 있다. 다른 무엇보다도 핀란드에는 특별히 높은 산이 존재하지 않는다. 핀란드 최고봉이라는 해발 1,328미터의 할티툰트리(Haltitunturi) 산이 존재하긴 하지만 무슨 국경선의 장난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스웨덴 북쪽에서 노르웨이 쪽으로 쑥 들어간, 스칸디나비아 산맥에 포함되는 산이다. 이를 제외하면 핀란드의 지형은 상대적으로 낮고 평탄하다.

다음으로 좌측 지도는 2018년 기준 핀란드의 지역별 인구밀도를 보여준다. 이에 따르면 핀란드인들은 스웨덴과의 사이에 있는 보트니아 해 연안지역을 중심으로 하는 국토 서부와 핀란드만 연안지대를 중심으로 하는 국토 남서부에 집중적으로 모여 살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물론 2018년의 인구 밀도는 제2차 세계대전 시기와 완전히 같진 않겠지만 사람이란 살기에 좋은 자연적, 사회적 조건을 가진 지역으로 모여들게 된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큰 편차가 없다고 봐도 좋을 것이다.

그런데 이 두 지도를 합쳐놓고 보면 우리의 상식과는 조금은 다른 흥미로운 현상을 찾을 수 있다. 한국, 아니 대부분의 국가들에선 대부분의 인구가 경작 가능한 평지에 집중되는 경향이 있고 도시 또한 해발 100미터를 넘지 않는 평지에 자리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하지만 핀란드에선 국토의 서부와 남부를 포함, 인구밀도가 평방킬로미터 당 10~50인이 넘는 지역들은 거의 대부분 예외 없이 평지가 아닌, 고지대에 위치한다. 그럼 핀란드의 저지대엔 무엇이 있을까?

그림 6. 핀란드의 평지를 차지하고 있는 냉대수림 타이가
그림 6. 핀란드의 평지를 차지하고 있는 냉대수림 타이가

바로 위 그림 6처럼 냉대수림, 타이가의 수목들이 있다. 핀란드 국토 면적의 75% 이상이 숲이고 그림 6의 맨 위 사진처럼 나무들이 빽빽이 들어차 자라고 있다. 15~20미터는 족히 넘을 키 큰 수목들이 빽빽이 들어찬 숲속에 들어서면 시야가 극히 제약되기에 주변 상황을 인식하기가 어렵다. 지도가 있다 한들 현재 위치를 인식하고 지형을 대조할 수 있을 때나 의미가 있지, GPS가 일상화된 21세기인 지금까지도 종종 조난 사고가 발생하는 이 수림지대에선 딱히 큰 의미가 없다. 운이 좋아 중간 사진처럼 공터를 찾는다 해도 저 멀리 나무들 너머로 보이는 공터는 맨 아래 사진 중앙처럼 하천이거나 호소일 확률이 높다. 그리고 숲 내부에 뭔가가 있다 해도 수목에 가려져 그 존재를 인지하기도 힘들고, 인지해도 상황정보로 전달하기란 더더욱 어렵다.

만일 이 곳이 전장이라면 수목 사이로 난 통로들로 공자의 접근로가 제약된다는 문제도 크지만 그 곳에 대대로 살았을 방자들이 통로의 구조를 더 잘 알고 있기에 그것이 종종 화력투사지대로 설정되어 포격, 폭격을 받을 가능성이 높다. 군인이라면 당연히 나무를 베어서라도 우회로를 만들어 안전을 확보하고 싶어 할 것이다. 그런데 그 조차 쉬운 일이 아니다. 아래 그림 7처럼 핀란드 국토 중동부는 얘르비수오미(Järvi-Suomi) 지형이기 때문이다.

그림 7. 핀란드 중동부 어딘가와 서남부 포리 인근의 얘르비수오미(Järvi-Suomi)
그림 7. 핀란드 중동부 어딘가와 서남부 포리 인근의 얘르비수오미(Järvi-Suomi)

한국, 아니 대부분의 국가들은 평지라 하더라도 땅을 파고 내려가면 얼마 지나지 않아 암반층과 만날 수 있기에 도시나 SOC 인프라스트럭처의 입지를 선정할 때 굳이 지반의 부양력을 따로 고려하지 않아도 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하지만 그림 7에서 보듯 핀란드는 웬만한 고지대가 아닌 이상 기존의 도시나 SOC 인프라스트럭처가 존재하는 곳을 제외한 저지대는 호수와 삼림이 혼재하는 얘르비수오미(Järvi-Suomi) 지형이다. 그리고 이 지형은 지반의 부양력이 부족하거나 지반이 될 기반암 자체가 아예 존재하지 않는 유사 늪지 같은 상태일 가능성이 꽤나 높다는 이야기다.

그림 7 맨 아래 사진은 핀란드 중동부가 아니라 핀란드 서쪽의 고도, 포리 인근의 모습인데 포리에서 북쪽으로 50킬로미터 이내의 구역은 얘르비수오미 부럽지 않을 수준으로 숲과 호수로 뒤덮여 있다. 이 부근은 기후 조건이 상대적으로 좋은 동네임에도 불구하고 지반이 빈약하여 도시의 하중을 버텨낼 수 없었기 때문에 도시가 들어서지 못했다. 정리하면 핀란드의 평지는 숲으로 뒤덮인 습지일 확률이 매우 높아 나무를 베어내어 통로를 만든다 한들 그 통로 위로 무거운 군용장비들이 통과할 수 있다는 보장이 없다는 이야기다. 소련군이 가진 최대 장점, 장비와 화력의 이점이 사라지는 것이다. 거기에 더해 보다 큰 문제가 남아있다. 바로 바로 천시다.

B. 천시(天時)

겨울전쟁, 아니 소련군의 공세는 1939년 11월 30일에 시작해서 동년 12월 20일에 끝난 것이 아니라 그 이듬해인 1940년 3월 13일에야 비로소 끝났다. 그런데 아래 표 1을 보자.

표 1. 모스크바와 헬싱키의 월별 평균 일조 시간 비교
표 1. 모스크바와 헬싱키의 월별 평균 일조 시간 비교

표 1은 모스크바와 헬싱키의 월별 평균 일조 시간을 비교한 것이다. 헬싱키 기준 핀란드의 12월 1월의 일조시간은 모스크바에 비해 1시간 이상 짧다. 이는 단순히 밤이 길다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아래 그림 8에서 보듯 낮에도 절대 광량까지 부족하다는 이야기다.

그림 8. 핀란드의 또 다른 장애. 겨울의 긴 밤 시간과 낮 시간의 광량부족
그림 8. 핀란드의 또 다른 장애. 겨울의 긴 밤 시간과 낮 시간의 광량부족

21세기인 지금이야 인공조명에 여러 가지 방식의 야간 투시장비들을 갖추고 있어서 밤이라는 제약은 상대적으로 크지 않지만 1939년 정도면 후일 "FG125X 시리즈가 될 야간 투시장비의 근간 브라운쉐로레(Braunscherohre·음극선관)"를 개발해둔 독일을 제외하면, 아니 그 독일조차도 밤에 군대를 움직여 공세에 나선다는 것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지 못하던 시절이다. 그리고 밤이 엄청나게 길다는 것은 공자에게는 치명적인 문제가 된다. 심지어 사방팔방이 사람 키 몇 배씩 되는 나무들로 둘러싸여 있다면 없던 공포심도 생겨나는 법이다.

더하여 각국의 군대는 대체로 자국 표준시간대 자연 환경에 맞춰 세워진 운용계획에 따라 훈련되고 운용된다. 그런데 자국에선 상상도 할 수 없던 새로운 환경을 가진 지역에 들어가면서 상응하는 준비가 되지 않은 군대가 정상적인 전투력을 기반으로 제대로 된 작전행동을 벌일 것이라 기대하는 게 더 이상한 일 아닐까? 하물며 거기 살던 현지인들의 군대와 싸워 이기라고 하면...

C. 인화(人和), 아니 인사(人事)

얘르비수오미–일로만치와 자연조건이 딱히 다르지도 않을 카렐리야에선 어째서 핀란드의 장점을 살리지 못했을까?

가장 큰 이유는 카렐리야가 원래 러시아 영토였으며 핀란드 동부의 도시들은 서부의 도시들과 달리 러시아인들에 의해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심지어 핀란드 동부 최대 도시이자 핀란드인들이 모여 사는 핀란드 남부 지방 동쪽 끝에 위치한 비푸리(지금은 소련에 넘어가 비보르크Вы́борг로 불린다.)를 건설한 것도 러시아인들이란 이야기가 있다. 그리고 비푸리는 소련 – 러시아 제2의 도시. 레닌그라드/상트 페테르부르크와 교류가 가능할 정도로 충분히 가까웠기에 그 사이의 SOC 인프라스트럭처들 또한 러시아인들에 의해 개척되었다는 이유도 있다.

용도를 막론하고 지상의 교통수단들은 산아나 바다, 하천, 호수 같은 통과가 어려운 자연 장애물들에 의해 필연적으로 통행에 제약을 받는다. 때문에 지방 또는 국가의 결정권자들은 제약을 경감시켜줄 수단인 (철도를 포함한) 도로, 교량 등의 건설에 힘써왔다. 이러한 SOC 인프라스트럭처들이 건설되는 근본적인 이유는 그 양 끝에 사람이 모여들어 그로 인해 만들어질 재화들의 교통이 필요한 경우에 한한다.

물론 비푸리와 레닌그라드/상트 페테르부르크는 해로나 수로를 통한 교통이 가능하지만 길고긴 겨울에 수로는 얼어버릴 것이고, 해로도 항행이 불가능한 것은 아니지만 거친 겨울 바다의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 때문에 철도 기구가 만들어지자 카렐리야, 보다 정확히 말해 비푸리와 레닌그라드/상트 페테르부르크 사이에도 철도가 건설되는 것은 당연한 선택이었다.

정리하면 카렐리야는 라플란드나 카이누, 얘르비수오미-일로만치와 달리 소련도 충분한 지리적 지식을 갖고 있는 땅이고 철도나 도로는 소련제 탱크들이나 중장비가 충분히 통과할 수 있을 정도의 지반부양력을 갖고 있었기에 핀란드 측의 지리적 우위가 희석되었다. 그리고 맹자는 천시보다 지리, 지리보다 인화가 중요하다고 했지만 2400년 전 맹자의 시대에서야 국력이 크지 않은 나라들이 대부분이었으니 인화를 가장 중요한 요소로 꼽아도 되겠지만 2300여년의 시간 동안 축적된 시간, 특히 19세기말 동력기구의 출현은 인화만으로는 극복이 어려운 국력의 차이를 낳는데 중대한 역할을 했다. 즉 20세기의 사회에선 인화가 아니라 사람들이 무엇을 했는가. 다시 말해 인사에 의해 만사가 정의되는 시기가 되었다는 이야기고 이는 핀란드-소련의 전쟁에서도 그대로 적용된다.

카렐리야 주방어선에 대한 핀란드의 대비는 만네르헤임 라인과 VT 라인이었다. 원래 이 방어선은 신생국 핀란드가 소련의 침공을 막기 위해 구상한 것으로 독일에서 파견된 오토 폰 브란덴슈타인)Otto von Brandenstein) 대령이 현지 실사를 통해 쿠오레마얘르비(Kuolemajärvi)-무올라얘르비(Muolaajärvi)-아이라판얘르비(Äyräpäänjärvi)-부옥시예르비(Vuoksijärvi)-수반토얘르비(Suvantojärvi)로 이어지는 내륙 호수들과 타이팔레엔요키(Taipaleenjoki)강을 잇는 선을 이용하면 더 적은 노력으로도 카렐리야에 방어선을 구축할 수 있음을 보고했고 이에 30만 마르크의 예산으로 건설이 시작되었으나 예산, 인력, 자재의 부족으로 건설이 지연되다 독일의 제1차세계대전 패전으로 무산될 위기에 처했다.

무산될 뻔한 계획은 핀란드군 참모장 오스카 엥켈(Oscar Enckell) 소장에게 이어졌다. 1920~24년 사이 핀란드 건설회사, 아베 그라닛 오이(Ab Granit Oy)가 축조했는데 비용 상의 이유 때문에 이 시기의 벙커들은 철근이나 철골없이, 강화되지 않은 콘크리트로 만들어졌기에 중구경 이상의 포격은 견딜 수 없는 제한적인 방호만을 제공할 수 있었다. 하지만 1930년대 들어 방어선을 보다 강화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 핀란드는 아래 그림 9처럼 철근 콘크리트제 벙커들을 축조하기 시작했다.

그림 9. 만네르헤임 라인의 신규 건설 콘크리트 벙커 위치도. 검은 테두리에 회색으로 표시된 것은 1930년대에 만들어진 철근 콘크리트제 벙커들이 위치한 곳. 갈색으로 표시된 것은 1920년대에 만들어진 콘크리트제 벙커들이 위치한 곳이다. 1920년대에 만들어진 벙커들은 1930년대의 현대화 개수로 방어력이 개선됐다.
그림 9. 만네르헤임 라인의 신규 건설 콘크리트 벙커 위치도. 검은 테두리에 회색으로 표시된 것은 1930년대에 만들어진 철근 콘크리트제 벙커들이 위치한 곳. 갈색으로 표시된 것은 1920년대에 만들어진 콘크리트제 벙커들이 위치한 곳이다. 1920년대에 만들어진 벙커들은 1930년대의 현대화 개수로 방어력이 개선됐다.

1935년부터 전쟁성 요새건설국의 수장이 된 요한 크리스티안 세르게이 파브리티우스(Johan Christian Sergei Fabritius)는 길이 15-20m, 폭 5-6미터 크기에 철근콘크리트로 만들어진 강화 벙커 '잉크 1'과 '잉크 2'를 설계, 이 벙커 7개를 쿠오레마얘르비 남쪽 끝에서 남남서쪽으로 핀란드만으로 이어지는 잉키아(Inkilä) 구역에 건설했다. 이들은 소련 해군 함선이 비푸리 만에 진입하는 것을 막기 위해 건설된 코이비스톤사리(Koivistonsaari) 남서쪽 끝에 위치한 사렌파(Saarenpää) 요새에 배비된 254mm 해안포 6문, 152mm 해안포 2문과 그 인근 후말리요키(Humaljoki) 연안요새에 배비된 152mm 해안포 6문에 상당한 화력 지원을 받을 수 있었다. 1920년대에 축조된 벙커들도 현대화되었는데 동쪽 라도가 연안의 타이팔레요키 강 만곡부. 타이펠레 주변에도 강화된 기관총 진지 8개소가 위치해 있었다. 이들도, 120mm 포 1문과 87mm포 2문이 배비된 야리세바(Järisevä) 연안 요새와 152mm 포 4문이 배비된 카르나요키(Kaarnajoki) 요새의 화력지원을 받을 수 있었다.

한편 가장 취약할 것으로 예상된 숨마(Summa) 인근은 1930년대 후반기 동안 새로운 벙커들이 집중적으로 건설되었다. 숨마요키(Summajoki) 강 만곡부에서 숨마얘르비(Summajärvi)까지의 4km 구역에는 벙커 13개소와 포곽 4개소가, 숨마얘르비와 무나수오(Munasuon) 마을 사이의 라흐데(Lähde) 무나수오 구역, 2km 사이에는 벙커 3개소와 포곽 6개소가, 레이파수오(Leipäsuo) 구역에는 벙커 2개소와 포곽 5개가, 무올라야르비(Muolaanjärvi)에는 벙커 5개가 건설되었다. (그림 10)

그림 10. 만네르헤임 요새선의 신규 축조 벙커들. 철근 콘크리트 구조물을 기반으로 종종 내외부에 철제 장갑재나 장갑판까지 설치되거나 추가되었다.
그림 10. 만네르헤임 요새선의 신규 축조 벙커들. 철근 콘크리트 구조물을 기반으로 종종 내외부에 철제 장갑재나 장갑판까지 설치되거나 추가되었다.

이 벙커들은 상당한 두께의 철근 콘크리트로 축조되어 있으며 그 외부로 다시 석축과 경우에 따라선 철제 장갑판을 덮었음을 볼 수 있다.

그림 11. 살파 라인의 벙커들. 위는 대전차포, 아래는 기관총 벙커다.
그림 11. 살파 라인의 벙커들. 위는 대전차포, 아래는 기관총 벙커다.

한편 위 그림 11은 겨울 전쟁 직후부터 건설된 살파(Salpa) 라인의 강화벙커들로 만네르헤임 라인의 벙커들이 모두 파괴된 지금, 그 내부의 모습을 짐작해 볼 수 있게 한다. 이렇게 만네르헤임 라인에 새 벙커를 축조하고 기존 벙커를 강화하기 위해 콘크리트 14,520 입방미터가 사용되었다. 또한 이 라인이 돌파될 경우를 상정하여 비푸리-탈리 사이와 비푸리 시가 주변에도 이러한 철근 콘크리트제 벙커들도 현대화 개수를 통해 강화되었다.

이에 맞서 소련이 내세운 것은 아래 그림 12에서 보듯 도합 2,500대가 넘는 탱크였다. 2,500여대의 탱크라 하니 엄청난 전력 같지만 그 실상은 딱히 그렇지도 않았다.

그림 12. 겨울전쟁 당시 소련군의 쾌속전차 BT
그림 12. 겨울전쟁 당시 소련군의 쾌속전차 BT

그림 12의 BT(Быстроходный танк : 브스트라호드니(쾌속) 탱크)는 미국의 발명가 크리스티의 영향을 크게 받아 만들어진 탱크다. 15톤이 채 안되는 중량에 500마력 가솔린 엔진을 바탕으로 도로상 최대 70km/h라는 웬만한 장갑차쯤은 찜쪄먹을 엄청난 속도를 자랑했고 궤도가 벗겨지더라도 주행이 가능하다는 장점도 있어 기동전에 적합할 것으로 평가되었다.

그림 13. 겨울전쟁 당시 소련군 탱크의 주역 T-26
그림 13. 겨울전쟁 당시 소련군 탱크의 주역 T-26

이 시기 소련군 탱크 부대의 주력인 T-26은 영국 빅커스 6t 탱크를 소련식으로 카피한 탱크다. 하지만 오리지널인 빅커스 6t 탱크에 비해 커지면서 중량이 12톤까지 늘어나 90마력 엔진으로는 도로상 최고속도 31km/h로 느렸고 기동성도 좀 난감했지만 보병을 상대로 할 때는 큰 문제가 없는 것 같았다. 실제로 에스파냐 내전에 공화파 장비로 참가했고 내전에 참가했던 이탈리아의 CV-33 계열, 독일의 1호전차 같은 기관총으로 무장한 탕케테 수준의 전차들과 상대했기에 당시 최강이라 평가되었다.

그런데 양자 공히 문제가 있었다. 우선 양자 모두 45mm 20K를 주포로 사용하는데 45mm라는 구경에도 불구하고 타국의 37~40mm급 전차포/대전차포 수준의 능력을 갖고 있었고, 장갑차량이 아니라 벙커같은 목표와 교전하는데 필요한 관통력과 폭렬파편탄의 위력이 크게 부족했다. 더 큰 문제는 최대 15mm에 불과한 장갑이다. 즉 핀란드군 벙커에 37mm 대전차포만 달려 있어도 양자 모두 생존을 보장할 수 없었다. 즉 1939년에 투입된 소련 탱크들은 탱크와의 교전이라면 몰라도 대요새전에 쓰기엔 부적합했다.

심지어 T-26의 경우에는 에스파냐 내전을 통해서 효과적인 교전법까지 확립되어 있었다. T-26 탱크는 시야가 안 좋기 때문에 외부에 기관총을 쏘아 승무원이 밖을 보기 위해 몸을 내밀 수 없게 한 뒤. 미리 준비한 (1~2kg 용량의 잼 병에 휘발유를 채운 뒤에 담요 반 장 사이즈의 두터운 직조물(담요나 커튼)을 넣고 입구를 막은) 대형화염병의 심지 역할을 휘발유로 흠뻑 젖은 담요에 불을 붙인 뒤 탱크, 정확히는 궤도에 감길 만한 곳에 던지면 병은 깨지지만 불붙은 휘발유로 흠뻑 젖은 담요가 궤도를 휘감고 남은 휘발유가 탱크에 불을 붙이거나 최소한 궤도를 절단시킬 수 있으며, 탱크가 이렇게 움직이지 못하게 되면 다른 수단으로 파괴하거나 격파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림 14에 보듯 핀란드군은 그러한 수단을 갖고 있었다.

그림 14. 겨울전쟁 당시 핀란드군 대전차화기.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사용된 집속수류탄, 록은 수류탄의 신관에 폭약을 결합한 것(왼쪽)과 몰로토프 칼테일(오른쪽)
그림 14. 겨울전쟁 당시 핀란드군 대전차화기.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사용된 집속수류탄, 록은 수류탄의 신관에 폭약을 결합한 것(왼쪽)과 몰로토프 칼테일(오른쪽)

정리하면 겨울전쟁 당시 카이누 구역의 수오무살미 전투(Suomussalmen taistelu)와 라테 도로 전투(Raatteen tien taistelu)나 얘르비수오미-일로만치 구역인 톨바얘르비–애흘라얘르비 전투(Tolvajärven–Ägläjärven taistelu)에서 빛나는 승리를 거둘 수 있었던 이유는 단순히 "소총으로 간신히 무장한 30만명이 전부였지만 스키와 사격에 능하고 전의가 높았기 때문"이 아니라 소련군이 이전엔 결코 경험하지 못한 핀란드의 가혹한 자연환경(얘르비수오미 특유의 평지를 뒤덮는 키 큰 나무들에 하천과 늪지가 결합한 기동로의 제한, 한겨울 핀란드의 매서운 추위, 키 큰 나무들로 뒤덮인 수림환경에 긴 밤시간에 낮시간의 부족한 광량 등이 결합하면서 생기는 상황정보의 제한 등)이 현대화된 무기와 편제에 기반한 소련군의 전투력을 제한했다는 점이 보다 크게 작용했다.

만일 그게 없었다면 주전장이던 카렐리야에서 그러했듯 핀란드의 빛나는 승리는 없었을 것이다. 심지어 주전장이던 카렐리야에서는 카이누, 얘르비수오미-일로만치의 조건들에 더해 소련군이 이 시점에 투입한 탱크들의 주포 사격쯤은 거뜬히 버틸 수 있는 만네르헤임 라인의 강화된 요새들이 더해졌다. 개별적으론 크지 않을 것처럼 보였던 요인들이 결합하니 소련군의 준비를 한참 넘어선 것이다.

만일 소련군의 공세정지가 "스키와 사격이 능한 핀란드군이 소련군 부대를 분리한 뒤 각개격파하는 전술을 썼기 때문"이라면, 그리고 그것이 전황의 향방을 좌우하는 결정적인 요소였다면 카렐리야는 그렇다 쳐도 카이누나 얘르비수오미-일로만치 구역에서는 전과확대가 이뤄졌어야 하고 나아가 전쟁의 결과까지도 달라졌어야 했다. 물론 현실 세계의 역사에선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고, 소련군 제8군이나 제9군은 상당한 피해를 입었을지언정 겨울전쟁이 끝날 때까지 전선을 유지했다. 때문에 해당 주장은 절반의 사실이라 판단하겠다.

그러나 진짜 문제는 앞서 말했듯 겨울전쟁이 1939년에 12월로 끝난 게 아니란 것이다.

(2편에서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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