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 참전 여성들이 들려준 전쟁의 민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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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참전 여성들이 들려준 전쟁의 민낯
  • 이승윤
  • 승인 2022.06.22 16: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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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윤의 책의 재발견]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

1. 일어나야 할 일은 기어이 일어나고야 마는 것인가. 2022년 2월 24일 러시아는 전격적으로 우크라이나를 침공했다. 세인들 대부분은 전쟁이 단기전으로 막을 내릴 것이라고 예상했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양국 간의 전력(戰力) 차이가 너무 막대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전쟁은 애초의 예상과는 다른 형태로 흘러갔다.

러시아는 우크라이나의 전력을 너무 얕잡아 보았다. 우크라이나 북부, 동부, 남부에 걸쳐 지나치게 산개된 침공 루트는 선택과 집중이라는 ‘전술’의 기본을 망각한 것이었다. 방대해진 전역(戰域)으로 인해 병참선 곳곳에 구멍이 뚫렸고 우크라이나군은 그 허점을 놓치지 않았다. 또한 우크라이나의 지도자 젤렌스키가 전쟁 초기 보여준 죽음을 각오한 리더십은 우크라이나 국민들을 하나로 묶는 기폭제가 되었다. 뜻밖의 우크라이나의 선전(善戰)은 군사 지원을 망설였던 서방 세계의 마음을 돌려놓았다. 우크라이나는 애국심으로 뭉친 국민의 단결력과 서방 세계의 지원을 바탕으로 결사 항쟁을 부르짖고 있다.

그러나……. 역시 문제는 러시아이다. 러시아의 지도자 푸틴은 서방 세계의 경제 제재와 날로 늘어나고 있는 군인 사상자 숫자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있다. 러시아는 여전히 우세인 군사력을 바탕으로 기점령한 우크라이나 지역을 자국령으로 완전히 편입할 태세이다. 물론 우크라이나 입장에서는 절대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이다. 2022년 6월 말 현재, 결국 전쟁의 장기화는 불가피한 것으로 보인다.

 

2. 2015년 노벨문학상 수상작인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는 우크라이나 태생 벨라루스의 여성 작가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의 소설 작품이다. 소설의 끝부분 옮긴이의 말에는 러시아의 문호 톨스토이의 글들이 인용되어 있다.

“전쟁처럼 악하고 소름 끼치는 일은 이 세상 어디에도 없다.”

톨스토이의 말은 분명 진심일 것이다. 톨스토이 자신이 크림전쟁(1853~1856)에 장교로 참여하여 전쟁의 잔인함과 비참함을 몸소 경험했기 때문이다.

톨스토이는 또한 이렇게 탄식했다.

“어째서 인간들은 전쟁 없이 살지 못하는가? 나는 도저히 그 까닭을 모르겠다.”

톨스토이의 질문에 수많은 전쟁 연구자들은 저마다의 대답을 내놓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인류사에 있어 전쟁의 종식이 가능할 지에 대해서는 어느 누구도 선뜻 대답을 하지 못한다.

아마도 전쟁에 관한 한, 오직 하나의 대답만이 가능할 뿐일 것이다. 톨스토이의 말 그대로 전쟁처럼 악하고 소름 끼치는 일은 이 세상 어디에도 없다는 것 말이다.

 

3. 전쟁에 참혹함에 관하여 기술한 책은 무수히 많다. 하지만 소설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는 그러한 기존의 작품들과 결을 달리한다. 이 소설은 전쟁에 참여했던 여성의 관점에서 전쟁을 바라본다. 즉 이 소설에 등장하는 여성들 대부분이 전쟁에 실제 자원입대하였던 참전군인이다. 작가는 전쟁을 직접 경험했던 200여 명의 여성을 일일이 인터뷰하며 그들의 증언을 모아 이 소설을 완성했다. 그 어떤 한 사람의 관점이 아닌, 수없이 많은 사람들의 증언들을 모아 하나의 주제로 엮어 이야기를 풀어나갔기에, 이 소설은 ‘목소리 소설’로 불리기도 한다. 작가는 자신의 작품을 ‘소설 – 코러스’ 라고 지칭한다.

이 소설의 작가는 제목 그대로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옳은 말이다. 그러나 더 정확히 이야기 한다면 전쟁은 아이의 얼굴도, 심지어 남자의 얼굴조차 하지 않는다. 전쟁은 오직 악마의 얼굴을 할 뿐이다.
전쟁은 수많은 사람들로부터 미소를 빼앗아간다. 특히나 여자와 아이들로부터. 그것만으로도 이미 전쟁은 용납될 수 없는 죄악이다 (이미지 출처: 픽사베이)

4. 이 소설에 등장하는 여성들이 경험했던 전쟁은 독일의 전쟁광 히틀러가 일으켰던 독소전쟁(1941~1945)이었다. 인종주의자였던 히틀러는 소련 슬라브 민족을 열등민족이라고 깔보았고, 그들을 노예화하려고 했다. 애초부터 노예 대상이었던 소련인들이기에 독소전쟁에 인권이니, 인류애 같은 ‘사치스러운’ 관념들이 끼어들 여지는 전혀 없었다.

독소전쟁 초기 전황은 일방적이었다. 전쟁 발발 이후 겨우 3개월 남짓한 1941년 9월까지 이미 소련은 200만명이 넘는 군인을 잃었다. 서방 세계의 지도자들은 소련이 곧 전쟁에서 패배할 것이라고 예상했다. 국가의 패망이 눈앞에 보이는 상황에서 전쟁놀이조차 한 번 해보지 않은 여성들이 실제 전쟁에 참여하게 되었다.

그녀들의 전쟁 참여 동기는 저마다 다양했다. 국가를 위한 애국심에서, 가족이나 지인을 잃은 복수심에서, 또는 주위 모두들 군대에 지원하는 분위기에 휩쓸렸기 때문에…….

군대에 입대한 후 수행한 임무 역시 제각각이었다. 어떤 이들은 간호 업무를 맡았고 또 어떤 이들은 정찰병의 임무를, 또 다른 이들은 저격병의 임무를 맡기도 했다. 남자들과 똑같이 전투병의 임무를 수행한 이들 역시 적지 않았다. 물론 여성이라고 총탄이 피해가는 일은 결코 없었다.

 

5.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가 이 소설을 쓰기 위해 인터뷰를 시작했을 때, 이미 독소전쟁이 끝나고 30년이 넘은 때였다. 하지만 작가는 곧 하나의 사실을 깨닫는다. 자신이 인터뷰 하는 여성들의 마음 속에서 여전히 전쟁은 끝나지 않고 영원히 지속되고 있다는 사실.

작가가 한 여성에게 전쟁을 잊고 싶었느냐고 묻자, 그녀가 답한다.

“우리는 전쟁을 잊고 말고 할 능력이 안 돼요. 우리 힘으로 어떻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니까.”

작가에게 전쟁의 기억을 털어놓을 때, 어느 한 사람도 마음의 평정을 유지하지 못한다. 처음에는 차분하게 이야기를 시작하기도 하지만 끝내는 고통을 못 이겨 자지러진다.

“그랬다. 그들은 많이 울었다. 소리도 질렀다. 내가 떠나고 나면 그네들은 심장약을 먹었다. 구급차가 왔다…….”

그 이유는 물론 전쟁을 경험했던 그녀들 마음의 밑바닥까지 각인되어 버린 전쟁의 참혹함 때문이다.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에서 그려지는 수없이 많은 전쟁의 참상에 대하여 일일이 열거하는 것이 과연 의미가 있을까. 두어 가지 사례를 소개하는 것만으로도 전쟁의 진상을 깨닫기에 충분할 것이다.

“어떤 집 옆에 웬 여자가 서서 아이에게 젖을 물리고 있는 게 보였어. (중략) 아무도 그 여자를 건드리지 않았어. (독일군) 지휘관이 그 광경을 보고는, 여자한테로 달려가 아이를 휙 낚아채더니……. 거기 물 펌프가 있었거든. 거기에다 대고 아이를 냅다 내리찍는 거야. (중략) 아이의 엄마가 쓰러졌어. 나는 알 수가 있었어. 사실 나는 의사였으니까……. 그 여자의 심장이 터져버린 걸…….”

“아이는 울어댔어. 아이는 울지, 독일군 추격대는 코앞에 있지. 수색견까지 데리고. 만약 개들이 아이 울음소리를 듣기라도 하면 우리는 다 죽은 목숨이나 마찬가지였어. (중략) 그녀가 스스로 알아차리더군. 그녀는 (자신의) 아이를 감싼 포대기를 물속에 담그더니 한참을 그대로 있었어……. 아이는 더 이상 울지 않았지…….”

 

6. 어쩌면 당연한 일이겠지만 전쟁을 직접 경험했던 여성들 모두 전쟁을 경험하지 않았던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 전쟁을 체험하기 전, 그녀들은 열아홉, 스무 살의 꽃다운 처녀들이었으나, 전쟁이 끝나고 나서는 그 순수한 젊음을 다시 되찾을 수 없었다. 전쟁기간 동안 흘러가 버린 시간의 문제 혹은 부상과 같은 육체의 문제 때문만은 아니었다. 영혼의 문제 때문이라고 보는 것이 더 옳을지 모른다. 그녀들은 전쟁을 통해 너무나 많은 것들을 경험해야 했다. 그 경험 대부분은 젊은 그네들이 온전히 받아들이기에는 지나치게 벅찬 것들이었다. 어떤 이들은 스무 살에 벌써 노파가 되어버리고 말았다. 전쟁의 참상에 정신이 짓눌려버린 노파.

“전쟁이 끝나고 나서 나는 몇 년 동안 피냄새에 시달렸어. 정말 지긋지긋하게 오래도록 나를 괴롭혔지. 빨래를 하려고 해도 피남새가 풍기고 식사를 준비하려고 해도 또 다시 그 냄새고…….”

붉은 피에 트라우마가 걸린 한 여성은 붉은 색 옷도 입지 못하고 심지어 정육점에도 갈 수 없었다.

 

7.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 이 소설이 단순히 여성의 시선에서 바라본 전쟁의 비극성만을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소설 속 어떤 여인의 말처럼 ‘끝없는 장례식’인 전쟁 속에서도 휴머니즘은 피어난다. 부상을 당해 같은 병실에 누워 있게 된 독일군 병사와 소비에트 병사 사이에 우정이 싹터 서로를 걱정하는 장면도 나오고 전쟁 막바지 베를린에 도착한 한 소련 여성 병사가 독일 소년병을 발견한 후 목숨을 지켜주기 위해 안전한 곳으로 인도하는 장면도 있다. 여성 병사와 소년병은 서로 눈물을 흘린다. 여성 병사는 소년병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며 위로해 준다.

작가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여자]의 전쟁에는 여자만의 색깔과 냄새, 여자만의 해석과 여자만이 느끼는 공간이 있다. 그리고 여자만의 언어가 있다. 그곳엔 영웅도, 허무맹랑한 무용담도 없으며, 다만 사람들, 때론 비인간적인 짓을 저지르고 때론 지극히 인간적인 사람들만이 있다.”

“여자들이 전쟁에 대해 아무리 이러니저러니 떠들어도, 기본적으로 여자들의 머릿속에는 ‘전쟁은 살인행위’라는 생각이 또렷이 박혀 있다.”

“여자들의 마음 깊은 곳에는 죽음에 대한 참을 수 없는 혐오와 두려움이 감춰져 있다. 하지만 여자들이 그보다 더 견딜 수 없는, 원치 않는 일은 사람을 죽이는 것이다. 여자는 생명을 주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생명을 선물하는 존재. 여자는 오랫동안 자신 안에 생명을 품고 또 생명을 낳아 기른다. 나는 여자에게는 죽는 것보다 생명을 죽이는 일이 훨씬 더 가혹한 일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분명 그럴 것이다. 하지만 여성들의 그러한 평화에 대한 갈망에도, 현실은 전쟁 앞에서 때때로 몹시도 무력해진다.

2022년 6월 말 현재 러시아 우크라이나 전쟁은 장기전의 양상으로 흐르고 있다. 희생자는 나날이 늘어나고 그와 함께 비극 역시 계속된다. 사진 출처: 픽사베이
2022년 6월 말 현재 러시아 우크라이나 전쟁은 장기전의 양상으로 흐르고 있다. 희생자는 나날이 늘어나고 그와 함께 비극 역시 계속된다. (이미지 출처: 픽사베이)

8. 러시아 우크라이나 전쟁의 과정에서 밝혀지게 된 학살 사건이 있다. 바로 우크라이나 부차 학살 사건이다. 부차는 우크라이나 수도 키이우 북서쪽에 자리한 소도시이다. 전쟁 초반 키이우 부근까지 압박해 들어갔던 러시아군이 그 일대에서 퇴각한 후 비로소 끔찍한 민간인 학살이 있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러시아군이 우크라이나 민간인들에게 벌였던 만행은 80여 년 전 똑같은 땅에서 독일군이 저질렀던 만행과 판박이처럼 닮아있다. 오직 한 가지만 다를 뿐이다. 80년 전 악역의 주인공이 정반대로 바뀌었다는 점이다. 피해자였던 러시아인들이 가해자로 변모했다는 것.

21세기가 되었어도 톨스토이의 탄식처럼 전쟁은 되풀이된다. 그리고 우크라이나 부차의 학살 사건이 이야기하듯 전쟁의 희생자는 결코 여성들에게 국한되지 않는다. 수많은 여성들뿐 아니라, 수많은 아이들이, 그리고 수많은 남성들 역시 희생자가 되어 쓰러지고 있다. 전쟁이 장기화 되면 될수록 그 희생자들은 늘어날 것이다.

전쟁에 대해 기술한 무수히 많은 글들처럼 평화가 빨리 찾아오기를 바란다는 식의 진부한 결론으로 이 서평을 끝마치고 싶지는 않다. 솔직히 그것은 무의미하다. 이 세상 그 어떤 전쟁도 단순한 바램만으로 끝을 맺은 경우는 없다.

다만……. 다만, 한 가지만 이야기하자. 이 소설의 작가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는 제목 그대로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분명 그 말은 진실이겠지만 또 다른 진실도 있다. 전쟁은 여자뿐 아니라 아이의 얼굴도 하지 않는다. 심지어 남자의 얼굴조차 하지 않는다. 전쟁은 오직 악마의 얼굴을 할 뿐이다.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 지음/ 박은정 옮김/ 문학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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