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 신곡의 세계로 떠나는 노(老) 교수의 강의 여행

  • 기자명 이승윤
  • 기사승인 2022.07.22 11: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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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출처: 픽사베이)
[신곡]의 작가 단테 알리기에리의 조각상 (이미지 출처: 픽사베이)

1. 2022년 6월 18일(현재시간) 미국 텍사스 포트워스에서 개최되었던 반 클라이번 국제 피아노 콩쿠르에서 한국의 임윤찬 피아니스트가 우승을 차지했다. 그의 우승은 즉시 언론의 화제가 됐다. 약관 18세의 젊은 나이로 우승을 했다는 것도 대단한 일이지만, 무엇보다 그의 열정 가득한 뛰어난 피아노 솜씨가 세계 음악 애호인들의 감동을 불러일으켰기 때문이었다. 임윤찬의 놀라운 피아노 솜씨는 그와의 협연 연주를 지휘했던 여성 지휘자 마린 알솝을 눈물짓게 할 정도였다.

임윤찬의 음악 솜씨뿐 아니라 진솔한 인터뷰 내용 역시 많은 이들의 관심을 이끌었다. 그는 자신이 ‘산에 들어가서 피아노만 연주하고 싶은 사람’이라고 말했다. 또한 콩쿠르에 참가한 동기는 자신의 음악이 얼마나 성숙했는지 보고 싶었기 때문이며 여전히 공부할 것이 많다고 겸손한 태도를 보였다.

한편 임윤찬은 인터뷰를 통해 또 다른 흥미로운 모습을 내비쳤는데 바로 다독가로서의 모습이다. 임윤찬은 단테의 <신곡(神曲)>을 가장 즐겨 읽는다고 말했다. 리스트의 <단테 소나타>를 깊게 이해하기 위해 <신곡>을 접하게 됐다는 그는 여러 국내 출판사에서 나온 <신곡> 번역판을 두루 섭렵했다고 고백했다. '임윤찬' 효과에 힘 입어 7월 들어 대형 서점에서의 <신곡> 판매량이 크게 늘었다는 소식도 들린다. 피아니스트 임윤찬이 <신곡>을 탐독하고 있다는 이야기는 그의 뛰어난 피아노 솜씨만큼이나 눈여겨 볼 만하다. 솔직히 <신곡>은 전공자들조차 쉽게 접근하기 어려운 문학 텍스트로 정평이 나 있다. 책의 분량도 전화번호부를 연상케 할 만큼 두터울 뿐 아니라 그 내용 역시 헤브라이즘과 헬레니즘 사상 그리고 저작자 단테에 대한 깊이 있는 연구 없이는 쉽게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너무 많다.

사실 본 서평의 대상으로 단테의 <신곡> 대신 일본의 철학자이자 저술가인 이마미치 도모노부(今道友信) 교수가 저술한 <단테 신곡 강의>를 선택한 이유도 위에 언급한 설명과 연관이 있다. 비록 <신곡>이 대표적 고전 중의 하나이지만 그 분량과 난이도 때문에 일반인들에게 선뜻 권하기는 쉽지 않다. 그러나 <단테 신곡 강의>는 제목에서 이미 나타나듯이 저자 이마미치 교수가 강의의 형식으로 <신곡>을 자상히 안내하고 있어서 접근과 이해가 비교적 용이하다. 또 하나 장점은 <단테 신곡 강의>가 단지 <신곡>을 설명하는데 그치지 않고 <신곡>과 관련하여 그리스로부터 르네상스에 이르는 서양 문화사에 대한 해설까지 덧붙이고 있기 때문에 하나의 훌륭한 서양문화사 텍스트로 읽힐 수 있다는 점이다. 요컨대 <단테 신곡 강의>를 읽은 후 굳이 <신곡>을 읽지 않는다고 해서 헛된 독서는 아니라는 뜻이다. 우리는 이미 <신곡>이라는 문화적 아이콘을 중심 소재로 삼은 뛰어난 서양문화사를 한 권 읽게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2. <단테 신곡 강의>는 저자 이마미치 도모노부 교수가 책 머리말에서 설명한 대로 1997년 3월~1998년 7월까지, 매달 마지막 토요일에 행한 자신의 단테 <산곡> 강의(총 15회) 및 강의 후의 질문과 대답을 기록한 것이다.

<신곡>은 원래 구성적으로는 서곡 1편을 포함한 지옥편 34편, 연옥편, 천국편의 경우 각 33편 총 100편으로 구성되어 있다. 내용적 구조로 있어서는 지옥편은 9층(혹은 9원), 연옥편은 카톨릭의 7죄악(교만, 질투, 분노, 나태, 탐욕, 탐식, 색욕)에서 모티브를 삼아 7층, 천국편은 월성천에서 지고천에 이르는 10영역으로 나누어져 있다. 참고로 작중에서 단테는 지옥과 연옥에서 각 3일씩 머물지만 천국에서는 1일밖에 머물지 않는다.

<단테 신곡 강의>에서 저자는 <신곡>의 지옥편, 연옥편, 천국편을 서술하는데 있어, 각 단계별로 9층, 7층, 10영역을 일일이 세세하게 나누어 설명하는 방식은 지양하고 있다. 그 대신 지옥편, 연옥편, 천국편이 저마다 지니고 있는 큰 흐름 상의 의미와 그와 관련된 종교, 철학, 사회, 문화적 배경에 관심을 두고 설명하는 방식을 채택하고 있다. 나무보다는 숲 전체를 조망하는 방식으로 <신곡>의 내용을 안내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세세한 부분에 전혀 신경을 쓰지 않는 것은 아니다. 저자 자신의 시각에서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내용의 경우는 작품 상 분량이 짧다고 해도 상당한 지면을 할애하여 상술하고 있다. 이러한 방식의 의도는 분명해 보인다. 즉 <단테 신곡 강의>는 어디까지나 소개서의 차원일 뿐이며, <신곡>을 온전히 이해하기 위한다면 단연코 소개서가 아닌 본편을 읽어나가야 한다는 의도가 드러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상술한 바처럼, <단테 신곡 강의>가 결코 단순한 소개서의 차원에만 머물고 있지는 않다. 책의 시작을 그리스의 호메로스로부터 시작하여 로마의 키케로, 베르길리우스를 소개하고, 그리스도교에 대해서도 <신곡>과 관련하여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는 부분만 보아도 이 책은 이미 한 권의 훌륭한 서양 문화 안내서 역할을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뿐만 아니다. 저자는 <단테 신곡 강의>를 통해 단테가 지옥에서 연옥을 거쳐 천국에 이르는 과정을 우리 삶의 깨달음의 과정과 동일시하고 있다. 좀 더 쉽게 이야기하자면, 지옥과 연옥으로 상징되는 삶의 고통과 어려움을 거쳐야만 비로소 우리가 성숙해지고 천국의 길, 즉 삶의 구원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것을 <신곡>을 통해 깨달을 수 있다는 의미이다. 결국 <신곡>은 올바른 생의 방향으로 우리를 이끌어 줄 수 있는 뛰어난 삶의 지침서 성격도 지니고 있다고 보는 것이다.

 

3. 저자는 <신곡> 지옥편의 1행에서 3행까지의 구절을 세밀하게 분석한다.

<신곡>의 유명한 첫 3행은 다음과 같다.

“나, 올바른 길 잃고, 인생 나그네 길 반 고비에 어두운 수풀에 있었노라.” (지옥편, 1곡, 1행~3행)

1265년 피렌체에서 태어난 단테 알레기에리는 6인 행정장관의 고위직에 오르기도 한다. 하지만 1300년 정적들에 의해 추방된 후 죽을 때까지 피렌체로 돌아가지 못하고, 끝내 라벤나에서 죽음을 맞이한다. <신곡>은 추방 생활 속에서 이탈리아 각지를 떠돌아다닐 때 쓴 작품이다. 따라서 위 시 구절의 올바른 길을 잃은 ‘나’는 추방자의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는 단테 자신을 지칭한다. 그런데 다른 한편으로 ‘나’는 삶 속에서 너무나 쉽게 제 갈 길을 망각하는 우리들 인간을 상징하기도 한다. 따라서 어두운 수풀은 우리들로 하여금 올바른 길을 잃도록 만드는 힘겹고 괴로운 삶의 고통을 은유한다고 볼 수 있다. 결국 <신곡>에서 지옥, 연옥, 천국으로 향하는 단테의 7일 간의 여로는 우리들이 삶 속에서 겪어가는 삶의 행로와 다를 바 없는 것이다.

단테는 고국 피렌체에서 정적들로부터 추방을 당한 후 도망자의 삶을 살아가면서 필생의 대작인 [신곡]을 완성했다. 그러나 그는 끝내 피렌체로 돌아가지 못하고 죽었다.  (이미지 출처: 픽사베이)
단테는 고국 피렌체에서 정적들로부터 숙청을 당한 후 추방자의 삶을 살아가면서 필생의 대작인 [신곡]을 완성했다. 그러나 그는 끝내 피렌체로 돌아가지 못하고 타지에서 죽었다. (이미지 출처: 픽사베이)

수풀 속에서 제 갈 길을 잃은 단테를 인도해주는 이는 로마의 대표적 시인 베르길리우스이다. 그 둘은 지옥문을 거쳐 지옥으로 들어가게 된다. <신곡>의 뛰어난 문학성은 이 부분에도 있다. 단테를 인도해주는 이가 그리스의 신도, 기독교의 성인도 아닌 로마의 위대한 시인이라는 부분 자체가 인본주의를 상징하는 것이다. 저자에 따르면 베르길리우스는 그의 대표시 <아이네이스>의 첫 구절을 ‘전쟁과 영웅에 대해 내가 노래한다’ 라고 썼다. 이는 호메로스가 지은 <일리아스>와 분명히 차이가 난다.

<일리아스>의 첫 구절은 ‘분노를 노래하소서, 시의 여신이여’라고 되어있다. 즉 호메로스의 시대 때만 해도 ‘뮤즈’의 영감을 떠올리게 하는 대상이 신적 존재였다면, 이미 로마의 전성 시기에 이르면 그 대상이 시인 자신이 되어있다. 요컨대 <신곡>은 베르길리우스의 출현을 통해 신적 존재가 아닌 ‘인간’ 존재 그 자체가 지닌 존엄과 아름다움을 표현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신곡>이 르네상스 서막의 문을 열었다는 평가는 괜히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저자는 연옥편에서 예리한 관점으로 연옥의 진정한 의미를 파헤쳐 간다. 저자의 생각에 따르면 연옥은 천국과 지옥의 중간 지역으로서 지옥에 갈 정도로 사악한 이들도, 천국에 들어갈 수 있을 만큼 훌륭한 이들도 아닌 사람들을 위한 공간이다. 그들은 모두 그리스도의 길을 제대로 따르지 못한 사람들이기도 하다. 연옥편 초반 부분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그리하여 두 번째 왕국을 노래하노니, 이곳은 인간의 영혼이 씻기어 하늘로 오르게 하는 곳이더라.” (연옥편, 1곡, 4~6행)

저자는 이 구절이 연옥의 정의라고 주장한다. 여기서 인간의 영혼이 하늘에 오를 수 있다는 점이 중요하다. 저자의 설명을 살펴보자.

“연옥에는 혼이 씻길 수 있다는 희망이 있다. 어쩌면 천국에 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이처럼 희망이 있다는 점이 지옥과는 완전히 다르다.”

“연옥과 지옥의 근본적인 차이는 ‘절망’과 ‘희망’이다.”

저자는 지옥편 제3곡에서 ‘별 없는 드넓은 하늘에’ 라는 표현을 중요시한다. 별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은 희망이 보이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하지만 연옥의 하늘에는 ‘사랑에로 충동하는 아름다운 별’인 금성이 보인다. 금성은 별이기에 곧 희망을 의미한다. 저자는 이 부분에서 뛰어난 통찰을 보여준다. 즉 지옥이란 유황불과 가시밭길로 뒤덮인 곳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우리가 희망을 잃어버렸을 때 그때가 바로 지옥이 된다. 우리가 희망 없이 낙심 속에서만 살아간다면 우리는 영원히 지옥에서 빠져나갈 수 없는 것이다.

단 희망만으로 연옥을 빠져나올 수는 없다. 근원적인 반성이 필요하다.

“그리하여 성스러운 문의 문짝을 밀어젖히고 이르기를, 자 들어가시오. 하나, 그대들 내 경고를 들을지어다. 뒤돌아보는 자는 모두 밖으로 되돌아가리라.” (연옥편, 9곡, 130~132행)

저자에 따르면 그 반성이란,

“자신이 과거에 대하여 무엇을 했는가를 생각한다. 그러나 그러한 방식의 반성으로는 ‘밖으로 되돌아가게 되리니’ (중략) 진정으로 새로운 세계를 향해 나아가고자 하는 사람은 과거를 끊어내야 한다.”

“연옥 안에서는 단순히 자기가 과거에 무엇을 했던가를 반성하는 게 아니라 자기가 무엇이었던가를 생각해 봐야 한다.”

즉 자신의 진정한 모습을 거울을 바라보듯이 비추어보고 거짓의 모습을 근본적으로 반성해야 하는 것이다. 연옥의 마지막 30곡에서는 이제까지 그를 이끌었던 베르길리우스와 작별한다. 베르길리우스가 상징하는 학문과 예술의 힘만으로는 인간이 천국에 이를 수 없기 때문이다. 진실한 믿음과 사랑만이 우리를 천국으로 이끌어준다. 그 진실한 믿음과 사랑을 상징하는 존재가 베아트리체이다. 생전 단지 두 번의 만남으로 단테의 영원한 여성상이 되었으나 24살의 젊은 나이에 병사했던 그녀는 <신곡> 연옥편 30곡에서 베르길리우스가 사라진 직후 등장한다. 단테는 베아트리체에 이끌려 비로소 천국으로 들어간다.

그런데 천국에는 성문이 없다. 저자에 따르면 천국은 이 세상의 공명심 같은 것이 영향을 미치는 곳이 아닌, 내면이 순수한 세계이기 때문이다. 사실 천국편은 기행문 형식으로 상상이 주(主)가 되는 지옥편, 연옥편과는 그 구조가 조금 다르다. 저자는 천국편은 구조적으로는 당시 자연과학을 따르고 있으며 내용은 신학과 철학에 의지하고 있다고 말한다. 따라서 천국편은 천국의 의미 그 자체에 대해 신학적, 철학적 차원에서 설명하는 담론 형식의 문구가 상당수 포함되어 있다. 그렇기에 지옥편, 연옥편보다는 접근하기가 보다 어렵다. 하지만 내용상 접근이 쉽지 않다고 해도 말하고자 하는 핵심은 분명하다. 우선 ‘신’에게 다가가고자 하는 마음이 중요하다. ‘신’에게 다가가고자 하는 마음은 ‘믿음’을 상징한다. 천국의 공간 중 하나인 항성천에서 단테는 베드로에게 진정한 믿음에 대한 질문을 받을 때 다음과 같이 대답한다.

“믿음은 바라는 것의 실체이며 아직 오지 않은 것의 확증입니다. 이것이 신앙의 본질이겠지요.” (천국편 24곡 64~66행)

또한 소망 역시 소중하다. 성 야고보가 단테에게 소망에 대해 질문했을 때,

“소망은 미래의 영광을 확고한 믿음으로 기대하는 것, 은총과 공덕이 낳은 것입니다.” (천국편 25곡 67~69행)

마지막으로 요한이 사랑에 대하여 물을 때,

“신이 선으로 이해되면 이내 사랑에 불을 붙입니다. 선이 클수록 사랑도 큽니다.” (천국편, 26곡, 28~30행)

물론 여기서의 사랑이 개인적 차원에 머무는 사랑일 수는 없다.

“기다리고 기다리던 폭풍우 일어, 고물을 뱃머리 쪽으로 돌리고 곧이어 선단(船團)이 직항하면 꽃이 핀 뒤에는 열매가 맺히겠지요.” (천국편. 27곡, 145~148행)

저자는 '선단'의 의미를 흥미롭게 해석한다. '선단'은 결코 한 개인의 움직임을 지칭할 수 없다. '선단'은 한 척의 배가 아닌 여러 배들이 모인 구성체이기 때문이다. 즉 '선단'의 의미는 모든 인류를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모든 인류가 인류애의 마음을 품고 고물을 뱃머리 쪽으로 돌리며 인류사적인 대전환을 이루어 낼 때 비로소 우리는 천국이 가닿을 수 있다는 의미이다.

저자가 <신곡>을 바라보는 관점을 정리한다면, 희망을 잃어 저 마다의 지옥에 갇혀 있는 인간들이 구원받기 위해서는 다시 희망을 마음에 품고 진심으로 반성하는 자세로 자신을 개선시키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진정한 구원을 위해서는 그 구원의 범위가 개인 혹은 개체의 차원에 머물러서는 안된다.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 위에서의 희생을 통해 확장된 사랑 즉 에로스적인 차원을 벗어나 보편적인 인류애에 입각한 신적 사랑의 뜻을 진심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우리 모두 타자(他者)에의 관계성을 지향하는 존재가 될 때 천국의 문은 비로소 열릴 것이다. 이와 같은 사유의 연장선 상에서 저자는 강의의 끝부분을 다음과 같은 문장으로 결론짓는다. 

”인간은 신의 무한한 사랑을 담는 그릇으로 창조되었다. 그 점을 잊지 말자.“

프랑스의 조각가 로뎅의 명작 [생각하는 사람]이 [신곡]의 지옥문을 테마로 하여 조각되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생각하는 사람]은 인간이 어떠한 노력을 기울여야 비로소 지옥의 고통 속에서 빠져 나올 수 있을지 고뇌하는 모습처럼 보인다. (이미지 출처: 픽사베이)
프랑스의 조각가 로뎅의 명작 [생각하는 사람]이 [신곡]의 지옥문을 테마로 하여 조각되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생각하는 사람]은 인간이 어떠한 노력을 기울여야 비로소 삶이라는 지옥의 고통 속에서 빠져 나올 수 있을지 실존적인 고뇌에 잠겨있는 모습 같다.  (이미지 출처: 픽사베이)

4. 단테의 <신곡> 자체가 온전한 독해를 위해서 방대한 관련 지식을 필요로 하는 저작이다 보니 일종의 안내서인 <단테 신곡 강의> 조차 마냥 쉽게 접근하기는 어려웠다. 따라서 나름 만만치 않은 서평 작업이었다, 하지만 작업 기간 중에 얻은 작은 기쁨도 있었다. 오랫동안 품절 상태로 시중에서 쉽게 구입하기 어려웠던 <단테 신곡 강의>가 재출간된다는 소식을 접한 것이다.

한 권의 양서가 재출간되어 일반 독자들이 그 알찬 내용을 다시 접할 수 있게 된 것은 기쁜 일이 아닐 수 없다. 아마도 <단테 신곡 강의>를 읽고 <신곡>에 도전하고자 마음먹게 되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결코 쉽지 않은 여로(旅路)이겠으나, 아무쪼록 많은 것을 성취해 가실 수 있는 뜻깊은 경험이 되기를 희망한다.


<단테 신곡 강의>

이마미치 도모노부 지음/ 이영미 옮김/ 안티쿠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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