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 '희망'에 관한 쓸쓸하고도 진솔한 이야기

  • 기자명 이승윤
  • 기사승인 2022.09.13 15: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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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조각의 빵이 우리의 삶을 구원할 수는 없을지라도 주어진 삶을 그래도 지속해야 하는 까닭에 대한 그 어떤 설명의 역할은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비록 그 설명이 그다지 온전치도, 미덥지도 않다고 해도. (이미지 출처: 픽사베이)
이미지 출처: 픽사베이

1. 2022년 8월 18일 광주 광산구에서는 보육원 출신 새내기 대학생 B씨가 18세의 젊은 나이에 경제적 문제와 미래와 대한 고민을 못 이겨 스스로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그 뒤를 이어 동일 지역(광주 광산구)에 거주하는 A씨 여성 역시 불과 엿새 만에 19세의 나이에 스스로 목숨을 끊는 가슴 아픈 선택을 했다. 친구의 죽음으로 충격을 받았다는 유서를 남긴 채였다. A씨 여성 역시 보육원 출신으로서 최근 대학 생활을 그만둔 상태라고 전해졌다.

복지 시스템과 사회적 관심의 사각지대에 놓인 젊은이들의 안타까운 죽음에 대한 뉴스가 연일 언론에 보도되자 정부는 대책 마련에 바빠졌다. 보건복지부는 성인이 되어 보육원을 떠나는 보호 종료 청년에 대해 5년 동안 지급하는 자립수당을 기존의 35만원에서 내년부터 월 40만원으로 인상하기로 결정했다. 또한 자립청년 사후관리를 맡는 ‘지원전담기관’을 올해 안에 17개 시·도 모두에 설치 완료하고 관리 대상자 역시 현재의 1천470명에서 2천 명까지 늘리기로 했다. 아울러 지난 9월 1일 보건복지부는 추가 대책의 하나로 '복지 사각지대 발굴·지원체계 개선 전담팀(TF)'을 발족한다고 밝혔다. 또한 9월 7일에는 서울시가 자립 준비 청년들을 위한 정착금을 기존의 1천만원에서 1천5백만원으로 인상하겠다고 발표했다. 

‘사후약방문’ 이라는 비난이 있을 수도 있지만 늦게나마 복지 사각 지대에 놓인 사회적 약자에 대한 정부 지원이 강화되는 것은 그나마 다행스러운 일이다. 하지만 정부의 재정적, 행정적 지원이 늘어난다고 해서 힘겨운 삶과 맞부닥쳐야 하는 사회적 약자의 문제가 쉽게 해결될 수 있을지는 여전히 의문이다.

2020년에 실시한 ‘보호종료아동 자립 실태 및 욕구 조사’에 따르면 만 18세가 되어 보육원 혹은 위탁 가정에서 나오게 된 자립 준비 청년 3천104명 중 50%인 1천552명이 죽음을 생각한 적이 있다고 한다. 이는 2018년 19~29세 전체 청년을 대상으로 삼은 자살 실태 조사 때의 16.3%와 비교하여 세 배가 넘는 높은 비율이다.

자립 준비 청년들이 죽음을 생각한 이유는 조사 대상 청년 중 33.4%가 '경제적인 문제'를 꼽았으나 '가정생활 문제'(19.5%), '정신과적 문제'(11.2%) 등 경제 외적인 문제를 꼽은 이도 30%를 넘었다.

통계 조사를 살펴보아도, 의지할 곳 없는 젊은 청년들의 삶의 고단함에 대한 해결은 단순히 경제적 어려움을 경감시키는 것만으로 이루기 어렵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삶의 고단함에 대한 문제는 사회적, 경제적 문제임과 동시에 실존의 문제이기도 하다. 견디기 어려운 삶의 힘겨움 앞에 직면한 이들에게 무엇보다 필요한 것은 주어진 삶을 지속해야만 하는 이유, 짧게 줄여 말하면 ‘희망’이기 때문이다. 결국 희망은 구원이라는 문제와 직결된다. 그러나 인간이 인간을 구원한다는 문제가 그리 쉬운 일인가.

 

2. 때와 장소 그리고 경우는 다르지만 여기 감당하기 힘든 삶의 어려움에 맞닥뜨린 또 다른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가 있다. 미국의 작가 레이먼드 카버의 단편소설집 <대성당> 에 수록된 소설 ‘별 것 아닌 것 같지만, 도움이 되는(A small good thing)’ 에 등장하는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1980년대의 미국 어느 마을, 평범한 백인 중산층 가정의 아이 엄마 앤은 이틀 후 맞이하게 될 외아들 스코티의 8번째 생일을 위해 쇼핑센터의 빵 가게에서 생일 축하 케이크를 주문한다. 그런데 이틀 후 아들 스코티가 자신의 생일 날 뺑소니 자동차에 치여 정신을 잃은 채 병원에 입원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스코티의 아빠 하워드는 아내 앤과 함께 병원 입원실에 머물며 정신을 잃은 아들의 쾌유를 기원한다. 병원의 의사 프랜시스는 비록 아이의 뇌에 실금이 가긴 했지만 가벼운 뇌진탕 증상만 있을 뿐 곧 깨어날 것이라고 낙관적인 진단을 내린다. 하지만 하루가 지나도 스코티는 깨어날 줄을 모른다.

차도를 모르는 아이의 병환 앞에서 하워드와 앤은 점점 초조해진다. 스코티가 병원에 입원한 다음 날, 엄마 앤은 잠시 휴식을 위해 집으로 가려는 도중 병원 안에서 한 흑인 가족과 마주친다. 그들 역시 자식과 관련하여 앤과 유사한 입장에 있었다. 흑인 가족 중 남자 하나가 앤에게 자신들의 고통스러운 처지를 이야기 한다.

“우리 애 프랭클린은 수술대 위에 있어요. 어떤 사람이 칼로 찔렀습니다. 죽이려고 했죠, 싸움에 휘말렸어요. 파티에서 말이죠. 사람들 말로는 우리 애는 그냥 서서 구경만 하고 있었대요. 누굴 해코지하지도 않았고요.”

앤은 자신과 엇비슷한 처지에 놓인 흑인 가족의 사연이 남의 일 같지가 않다. 하워드와 앤은 아이의 간호를 위해 병원과 집 사이를 교대로 오간다. 하워드와 앤은 잠시 집에 머무를 때 정체불명의 전화를 계속 받는다. 난데없이 아들 스코티에 대해 묻는 전화이다. 하지만 깨어날 줄 모르는 아이의 병 상태 때문에 다른 일에 신경 쓸 겨를이 없는 하워드와 앤은 할 일 없는 사이코패스의 장난전화으로 치부해 버린다.

스코티가 병원에 입원한 지 이틀 째 되는 수요일, 앤은 전날 보았던 흑인 가족의 아들 프랭클린이 결국 사망했다는 소식을 접한다. 그리고 같은 날 스코티 역시 세상을 떠난다. 사인은 히든 오클루전(hidden occlusion: 눈에 보이지 않는 혈관폐색증상)이라는, 백만 명당 한 명꼴로 발생하는 특이증상이었다.

좀 더 명확한 사인(死因0 규명을 위해 아들의 부검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의사 프랜시스에게 하워드는 소리친다.

“이해해요.” 하워드가 말했다. 그리고 말을 이었다. “아, 하느님, 맙소사. 아니야. 이해하긴 뭘 이해해. 의사 선생. 나는 이해 못해요. 이해 못해요. 절대로 이해 못해요 ”

당연한 소리침이다. 이 세상 그 어느 부모도 8살 어린 자식의 죽음을 이해할 수는 없는 것이다. 아들 사후 처리해야 하는 일들을 위해 하워드와 앤은 비통한 마음으로 집으로 돌아온다. 하지만 아들 스코티의 추억으로 가득한 집안에서 하워드와 앤의 절망감은 더욱 커질 뿐이다. 그때 또 다시 스코티에 대하여 묻는 전화가 걸려왔다가 끊어진다. 순간 앤은 비로소 전화를 거는 이의 정체를 파악하게 된다. 그는 바로 스코티의 생일 축하를 위해 주문했던 케이크를 만든 빵집 주인이었다. 생일 날짜가 지나도 케이크를 가져가지 않아서 상하게 되자, 거듭 전화를 했던 것이다. 앤은 아들의 죽음 앞에서 절망에 빠진 자신들에게 고작 케이크 문제로 귀찮게 전화를 거는 빵집 주인에게 분노를 느낀다. 그녀는 남편에게 항의하러 가자고 이야기한다. 둘은 추운 밤거리를 운전하여 빵집에 도착한다.

마침 빵집 주인은 빵을 만들고 있던 중이었다. 그는 늦은 밤 느닷없이 찾아온 앤과 하워드에게 심한 경계심을 보인다. 그러한 빵집 주인에게 앤은 비통한 목소리로 소리친다

“우리 아들은 죽었어요.” 그녀가 냉정하고 침착한 목소리로 잘라 말했다. “월요일 아침에 차에 치였어요. 우리가 줄곧 곁에 있었지만, 결국 죽고 말았어요. 물론 당신이야 그 사실을 알 수는 없었겠죠. 빵장수라고 해서 모든 것을 알 수는 없을 테니까. 안 그래요. 빵장수 아저씨? 하지만 그애는 죽었어요. 그 애는 죽었다구. 이 못된 놈아!”

순간 무엇인가 큰 실수를 했다고 느낀 빵집 주인의 태도가 돌변한다.

빵집 주인은 밀대를 조리대 위에 내려놓았다. 그는 앞치마도 풀어 조리대 위에 던졌다. 그는 그들을 바라보더니 천천히 머리를 흔들었다. (중략) “여기 좀 앉으시오.” 그가 말했다.

빵집 주인은 탁자 앞에 두 사람을 앉도록 권유한 후 자신의 무례했던 행위에 대하여 용서를 빈다. 그리고 따듯한 커피와 갓 구운 빵을 권한다.

“아마 제대로 드신 것도 없겠죠.” 빵집 주인이 말했다. “내가 만든 따듯한 롤빵을 좀 드시지요. 뭘 좀 드시고 기운을 차리는 게 좋겠소. 이럴 때 뭘 좀 먹는 일은 별 것 아닌 것 같지만, 도움이 될 거요.” 그가 말했다.

독신의 늙은 빵집 주인과 아이를 잃은 상심한 젊은 부부는 함께 커피와 빵을 마시며 밤새 이야기를 나눈다. 소설의 마지막은 다음과 같이 마무리된다.

그들은 검은 빵을 삼켰다. 형광등 불빛 아래에 있는데, 그 빛이 마치 햇빛처럼 느껴졌다. 그들은 이른 아침이 될 때까지, 창으로 희미한 햇살이 높게 비칠 때까지 이야기를 나눴는데도 떠날 생각을 하지 않았다.

 

3. 물론 소설의 마지막 부분에 등장하는 빵은 분명 희망 혹은 구원을 상징한다. 하지만 우리가 흔하디 흔한 이야기들 속에서 접하게 되는 그런 통속적인 희망은 아니다. 저자 레이먼드 카버가 ‘별것 아닌 것 같지만, 도움이 되는’ 이라는 단편 속에서 내보이는 희망은 사실은 어둡고 슬픈 희망이다. 그렇지 않은가. 도대체 사랑하는 아이의 죽음 앞에서 고작 빵 한 조각이 무슨 도움이 될 수 있을까. 하워드와 앤 그들 젊은 부부는 빵집 주인이 건네는 빵과 커피를 마신 후 잠시 힘을 낼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다시 집으로 돌아가게 될 그들 부부가 맞부닥치게 되는 것은 그들의 힘으로는 도저히 어쩔 수 없는, 사랑하는 아들의 죽음이라는 참혹한 현실이다. 그들이 아무리 따듯하고 맛 좋은 빵을 삼킨다고 해도 그 현실은 결코 뒤바뀔 일이 없다. 요컨대 저자가 보기에는 구원은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자는 이야기하고 있는 듯하다. 삶 속에서 돌이킬 수 없는 것은 끝끝내 돌이킬 수 없는 일이라고. 삶이라는 건 원래부터 그러한 것이라고. 하지만 우리는 결국 그토록 참혹하고 무거운 삶의 무게를 겨우 그 빵 한 조각의 따스함으로 견디어 낼 수 있을 뿐이라고. 그리고 바로 그 빵 한 조각의 따스함이 희망이라고 말이다.

 

4. 희망에 대하여 너무 어둡고 무력한 관점으로 이야기하고 있는 것일까. 꼭 그렇게 생각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어찌 되었건 희망은 희망이니까 말이다. 적어도 희망이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은 아닌 것이다.

사실 저자 자신이 1970년대 알코올 중독과 생활고로 고통받았고 이혼의 아픔까지 겪은 바 있다. 그 자신이 삶의 아픔을 몹시 심하게 느꼈기에 어느 누구보다도 희망이 절실했을 것이다. 저자는 오랜 시간 힘겨웠던 삶의 시련들을 이겨낸 후 이윽고 1980년대에 이르러 미국 단편 소설 르네상스를 주도하는 저명 작가로 재탄생한다. 저자는 단편 소설 ‘별것 아닌 것 같지만, 도움이 되는’ 이 수록되어 있는 단편소설집 <대성당>으로 1984년 퓰리처상 수상 후보에까지 오른다. 저자가 삶의 어려움을 극복하고 성공한 작가가 될 수 있었던 이유 중에는 기어이 희망을 놓지 않는 마음가짐 역시 나름 역할을 했을 것이 틀림없다.

 

5. 솔직히 이야기하자면, 별 것 아닌 고작 빵 한 조각 같은 ‘희망’이 경제적, 정서적 어려움에 처한 이 땅의 젊은이들을 온전히 구원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주어진 삶을 그래도 이어 나가야 하는 까닭에 대한 그 어떤 설명의 역할은 할 수 있을 지도 모르겠다. 비록 그 설명이 그다지 온전치도, 미덥지도 않다고 해도 말이다.

비단 자립 준비 청년들 뿐 아니라 이 세상의 모든 힘든 이들을 위한 도움의 시도는 결국 투트랙으로 갈 수밖에는 없는 것으로 보인다. 하나는 사회 제도적 차원에서의 접근이며 또 다른 하나는 실존적 차원에서의 접근이 될 것이다. 사회 제도적 차원에서의 접근은 물론 사회 복지망을 좀 더 촘촘하게 깔아 복지 사각 지대를 최소화하는 방식이 되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 실존적 차원에서의 접근은 우리 모두가 우리 주변의 도움을 원하는 이들에 대하여 좀 더 따스한 시선으로 바라보며 그들을 이해하고자 하는 마음의 자세가 될 것 같다. 그리하여 삶을 포기하고자 하는 이들 중 열의 하나라도 그 생각을 돌리게 할 수 있다면…….

아마도 그것이야말로 ‘별것 아닌 것 같지만, 도움이 되는’ 그런 종류의 일이 될 수 있을지 모른다.


<대성당>

- 레이먼드 카버 지음

- 김연수 옮김

- 문학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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