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 독립운동은 3.1운동 영향을 받아 일어난 것이 아니다

  • 기자명 이영석
  • 기사승인 2019.03.12 1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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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사 전문가인 이광수 선생(부산외국어대)이 3.1운동이 인도 독립운동에 영향을 주었다고 믿는 국내 속설에 반론을 제기하고 페이스북을 통해 논쟁을 벌였다고 한다. 실제로 어느 경제학자와 논쟁을 소개하기도 했다(뉴스톱 기사, 기사에 대한 반론, 이에 대한 반박 및 재반박). 작년 인도 방문 당시 문대통령이 이런 내용을 언급했다고 하니까, 국내에 일반적으로 알려진 속설이 아닐까 한다. 왜 ‘俗說’이라고 하는가. 사실이 아니기 때문이다.

1919년 4월 13일 잘리안왈라공원(황금공원ㆍJalianwalla Bagh) 학살사건(암리차르 학살사건)은 한국의 3.1운동 뒤에 일어난 것은 맞지만, 그 영향을 받아 일어났다고 할 수 없다. 인도의 독립운동은 이미 1885년 국민회의 결성과 더불어 시작되었다. 물론 이 학살사건에 자극받아 1919-21년간 이전보다 더 적극적으로 비폭력ㆍ불복종 반영운동이 전개된 것은 사실이다. 이미 1915년부터 인도에서 자치를 향한 운동이 거세지고 국민회의도 더 적극적인 자치운동을 벌여나갔다. 1차 세계대전 당시 인도의 인적·물적 자원 동원에 크게 의존하던 영국 정부는 전후의 자치에 대해 여러 번 언급을 했고, 이에 따라 국민회의 중심의 자치운동이 더욱 더 강력하게 전개되었다.

문제는 이 학살사건이 3.1운동처럼 ‘독립’을 부르짖은 시위 군중을 영국이 탄압한 데서 비롯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는 점이다. 이 학살은 펀잡 주 시크교도들의 전통적인 바이사키(Baisakhi) 축제에 참가하기 위해 이 공원에 운집한 군중을 향해 영국군과 인도인 용병부대가 사격을 가한 사건이다.

1919년 4월 18일 벌어진 잘리안왈라 공원 학살사건을 묘사한 그림.

펀잡 주는 벵골 지역과 더불어 1차 세계대전기에 인도에서 가장 많은 인적·물적 자원이 동원된 주 가운데 하나였다. 이에 따라 영국 지배에 대한 반감이 전반적으로 높아졌다. 국민회의와 간디가 주도하는 비폭력운동을 지지하는 사람들이 증가했다. 특히 간디가 3월 30일(뒤에 4월 6일로 연기)의 전국 총파업에 참여해달라는 호소문을 발표해 각 주의 부총독과 군 지휘관들이 긴장하고 있었다. 펀잡 주 부총독은 지역사회에서 존경을 받는 자치운동가 두 사람을 대중으로부터 격리시키기로 결정했다. 그 명령에 따라 두 사람은 경찰에 체포되었다.

이 체포에 항의하는 시위가 여러 곳에서 발생했다. 특히 4월 9일 시위대가 시내에 진출해 영국계 은행을 공격해 사상자가 발생하고, 미션스쿨 교사로 있던 젊은 백인 여성을 사로잡아 구타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지역 군사령관 레기널드 다이어(Reginald Dyer) 대령은 13일 바시사키 축제에 대비해 인근 용병부대 병력들을 동원, 경계를 강화했다. 그는 1857년 용병반란을 머리에 떠올리기도 했다. 3월부터 시행하게 된 로폴드법(집회시위금지법)에 의거, 집회금지령을 공표했다.

원래 바이사키는 매년 봄에 개최되는 신년 맞이 축제이자, 이와 동시에 17세기말 구루 고빈드 싱(Gobind Sing) 휘하의 전사단 결성을 경축하는 행사이기도 했다. 그러나 학살극이 벌어진 그날 바이사키축제에 참가하러 공원을 찾은 사람들 대부분은 시내가 아닌 인근 지역 사람들이어서, 그 포고령을 알지 못했다. 그러니까 축제 참가자 다수는 영국인들이 경계하고 두려워할 만한 강력한 비폭력 독립운동을 위한 시위 계획을 세우지 않았던 것이다. 다만 일부 참가자들이 체포된 두 지도자의 석방을 요구했을 뿐이다.

축제 참가 인원이 갈수록 증가했을 때, 다이어는 로폴드법에 의거 집회를 인정할 수 없다는 성명을 발표하지도 또 사전 해산을 종용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오후에 참가자들이 공원 밖으로 나가려는 순간, 그는 네 출입구 앞에서 포위를 하고 있던 인도병사들에게 10분간 일제 사격 명령을 내린다. 말하자면 용병에게 동족을 향해 총을 쏘라고 명령한 것이다. 이 급작스런 사격 명령은 인도정청 조사위원회에서도 명백한 잘못이라고 지적했다. 아마 다이어는 이전의 산발적인 시위에 감정이 격해졌고 인도인들에게 본때를 보여주어야겠다는 다짐을 했는지도 모른다.

순식간에 수많은 참가자들이 총에 맞아 쓰러졌다. 공식적인 통계로도 그 순간에 379명이 사살되었고, 1,100명이 부상한다. 이 수치는 다이어 자신이 영국 의회에 보고한 내용일 뿐이다. 그 당시 인도국민회의 추계로는 사망 1,000명, 부상 1,500명에 이른다. 이 사건에 대한 항의 표시로 라빈 드라나드 타고르는 그 몇 년 전에 노벨상 수상 기념으로 받은 훈작사 작위를 반납했고, 국민회의의 적극적인 비타협운동이 곧바로 전개되었다. 물론 몇 년후 이 운동의 동력은 약화된다.

후일 인도정청 조사위원회에서 다이어 대령은 사람이 운집하지 않은 곳에 대해서만 사격 지시를 했다고 변명한다. 그러나 인도국민회의 자체보고에는 이런 서술이 나온다. 일부 병사들은 차마 군중을 향해 쏘지 못하고 하늘을 향해 사격했다는 것이다. 그것을 본 다이어 대령은 이렇게 호통을 쳤다고 한다. “총구를 낮춰 사격하라. 너희들은 여기 무엇 하러 왔는가?”

그뿐만 아니라, 학살 직후 다이어 대령은 4월 9일 여학교 백인 여선생이 피습 받은 장소를 확인한 다음 그 주위 사방 180m의 공간에 줄을 긋고, 아침 6시부터 저녁 8시까지 그곳을 통과하는 사람은 반드시 기어서 지나가야 한다는 명령을 내린다. 이 명령은 1주일간 지속되었다. 밤 시간을 제외한 것은 야간통행금지령이 발동되었기 때문이다.

1920년 6월 다이어 대령 문제에 관해 영국 하원에서 논란이 일었다. 대체로 절충론으로 끝난 것 같다. 과잉대응인가, 아니면 군인으로서 적절한 조치를 취한 것인가라는 문제는 양론으로 갈렸지만, 과잉대응이라는 견해가 조금 더 우세했다. 그러면서도 상당수 의원이 인도 국민의 정서를 고려해야 한다는 현실론에 동감을 표했다. 특히 당시 자유당 의원이었던 윈스턴 처칠은 그 학살이 영제국에 대한 모욕행위라고 하면서 다이어의 직위해제와 불명예 제대를 주장했다. 당시 장군 대우를 받고 있던 다이어는 대령 신분으로 면직당했다. 이 면직 조치만이 일본의 경우와 다른 것 같다. 아마 3.1운동 이후 다수 사상자가 발생했다는 이유로 일본인 관리나 군인이 일본에서 불이익을 당한 사례는 없었을 것이다.

잘리안왈라공원 학살과 그에 뒤이은 인도독립운동은 세계사적으로 1차 대전 이후 식민지에서 전개된 전반적인 탈식민운동의 한 사례로 3.1운동과 나란히 열거될 수 있지만, 3.1운동의 영향을 받아 일어났다고 하는 것은 너무 비약이다. 아마 우리 사회에서만 익숙한 견해일 것이다.

필자 이영석은 서양사학자로 광주대 명예교수다. 저서로 『영국 제국의 초상』(2009), 『공장의 역사』(2012), 『지식인과 사회』(2014), 『역사가를 사로잡은 역사들』(2015), 『영국사 깊이 읽기』(2016), 『삶으로서의 역사』(2017) 등 다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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