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운동 이승만 기획설'은 역사 왜곡이다

  • 기자명 정재환
  • 기사승인 2019.03.22 06: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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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 100년이 되는 해를 맞아 3.1운동을 기리는 행사가 여느 때보다 많았다. 정부·지자체·역사학계·시민사회단체·각급학교·문화예술단체 등등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이 기념식, 기념공연, 독립선언서 다시읽기 ,독립선언서 필사하기, 독립선언서 널리 전파하기 등등 다양한 형태로 3.1운동을 기념하고 축하하면서 ‘선언서’가 표방했던 독립과 자주·평화의 정신을 기렸고 대한민국의 희망찬 미래를 설계했다.

그런데 한국기독교총연합회가 주최한 ‘3.1절 범국민대회’에서 묘한 주장이 나왔다. 행사에 모인 참석자들이 3.1운동의 정신을 이어 받아 독립과 자유, 평화를 소중히 지켜나가자고 다짐하는가 싶더니, 이승만 전 대통령에 대한 찬양과 1948년 건국절에 대한 주장이 이어졌다. 이승만 찬양이나 건국절 주장은 이미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온 뉴라이트의 단골 메뉴여서 전혀 새로울 것이 없지만, 자신을 한기총의 대표 목사라고 소개한 전광훈 목사의 ‘3.1운동 이승만 기획설’은 과문한 탓인지 생전 처음 듣는 얘기였다.

공부도 안한 녀석들이 오늘도 전국에서 여러 곳에서 3.1독립 운동 행사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그중에서도 지금 정부가 주도하는, 광화문에서 이 행사를 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3.1절 행사가 아니라 범죄행위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3.1 독립운동은 이승만이가 일으킨 것입니다.

 

3.1운동은 윌슨의 민족자결주의에 고무된 국내외의 민족지사들이 독립운동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천도교·기독교·불교계의 민족대표 33인을 중심으로 기획되었고, 종단의 애국 신자들과 청년·학생들이 중책을 맡아 실행했다는 것이 일반의 상식이다. 독립운동사가 전공은 아니지만, 한국사를 공부하면서 3.1운동에 관한 기록을 볼 기회가 자주 있었지만, 그 어디에서도 ‘이승만이 3.1운동을 기획했다’는 얘기를 본 기억이 없다.

3월 5일자 CBS의 후속 보도에 따르면, 전 목사는 “우드로 윌슨이 민족자결주의를 외칠 때에 그 기회를 우리의 기회로 만들기 위해 한국 독립운동단체가 일어나라고 지시한 겁니다. 그 말을 들은 독립운동 단체들이 일어난 것이 3.1독립운동인 것입니다.”라고 말했는데, 이 발언 속에 ‘이승만’의 이름이 빠졌지만, 앞뒤 맥락상 ‘윌슨이 민족자결주의를 외칠 때, 이승만이 그것을 우리의 기회로 만들기 위해 독립운동 단체에게 일어나라고 지시했다.’는 주장이다.

이 같은 3.1운동 이승만 기획설에 대해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김승태 소장은 “이승만 전 대통령이 3.1독립운동을 지시했다는 역사적 사실이나 근거가 전혀 없다”고 정면으로 반박했다. 이승만이 서재필 박사를 통해 3.1운동이 일어난 것을 알게 된 것은 9일 후인 3월 10일이었다고 하면서, “3.1운동에 대해서 언급도 없었고 계획을 알지도 못한 사람이 그걸(3.1운동을) 주도했다는 것은 어불성설이죠.”라고 말했다.

이승만 자신이 남긴 문서들이 많이 있는데, 그 문서들에도 3.1운동에 대해서 자신이 일으켰다. 자신이 지시했다는 자료가 하나도 남아있지 않습니다.(김승태 소장/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김 소장은 이승만이 남긴 많은 문서들 가운데 이승만 자신이 3.1운동을 지시했다는 자료는 없다고 말한다. 김 소장이 말한 ‘자료’는 역사학에서 다루는 ‘직접사료’를 뜻하는 것으로 봐야 한다. 역사가가 역사를 복원할 때 활용하는 자료는 대체로 직접사료와 간접사료 또는 1차사료와 2차사료 등으로 구분하는데, 중요하게 고려하는 것은 직접사료/1차사료이다.

직접사료는 당사자 또는 당대인에 의해 이루어진 것으로서 일기·편지·어록·조사 보고·회의 기록·유물 등이고, 회고록·여행기·답사기 등 당사자가 훗날 기록한 것도 포함되며, 같은 시대의 사람이 사건을 바로 듣고 보고 전해들은 것을 기록한 것이나 사관(史官)의 기사나 신문의 보도 등이다. 간접 사료는 뒷사람에 의해 편찬된 역사책이나 모조 또는 개조된 유물이나 구비 전설을 전재한 기록 등이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따라서 간접사료/2차사료에 담긴 내용은 부정확하거나 왜곡되었을 가능성을 고려해야 한다. 물론 직접사료/1차사료라고 해서 그 내용을 100% 믿을 수는 없다. 당대인의 기록이라는 점에서 간접사료/2차사료와 비교해 좀 더 신뢰할 수 있다고 보지만, 기록의 진위를 가리기 위해 다른 자료들과 교차 검토도 하고 작성자의 사관을 파악하는 등 엄격한 사료 비판을 통해 검증된 내용을 역사 복원의 근거로 삼는다.

CBS 유튜브 화면 캡처

김 소장은 이승만이 3.1운동을 기획했다는 직접사료/1차사료가 남아있지 않다고 지적하고 있는 반면에 전 목사는 이승만이 3.1운동을 기획했다고 주장할 뿐 근거를 제시하지 않았다. 이는 증거도 없이 피의자를 범인으로 판결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와중에 눈길을 끈 것은 3월 1일 『뉴스데일리』에서 올린 「인보길의 우남이야기 8화 - 3.1운동 기획자 이승만」이라는 동영상이었다.(관련 기사) 인보길은 3.운동 이승만 기획설의 근거 두 가지를 제시했는데, 하나는 『인촌 김성수 - 인촌 김성수의 사상과 일화』이고 다른 하나는 『승당 임영신의 나의 40년 투쟁사』에 나오는 임영신의 증언(?)이다.

1918년 12월 어느 날 「워싱턴」에서 재미 동포들과 구국운동을 하고 있던 우남 이승만이 밀사를 보내왔다.

“윌슨 대통령의 민족자결론의 원칙이 정식으로 제출될 이번 강화회의를 이용하여 한민족의 노예생활을 호소하고 자주권을 회복시켜야 한다. 미국에 있는 동지들도 이 구국운동을 추진시키고 있으니 국내에서도 이에 호응해 주기 바란다.”

그런 내용의 밀서를 휴대하고 있었다.

인촌·고하·기당 등 세 사람은 이제야 말로 가만히 있을 수 없다는 절박감을 느끼고 (중략) 그러나 당장 묘안이 없었다. 거국적인 항일 독립운동을 주도해야 된다는 목표는 설정되었다.

- 이희승, 『인촌 김성수 - 인촌 김성수의 사상과 일화』, 동아일보사, 1985, 123쪽.

 

인촌은 김성수, 고하는 송진우, 기당은 현상윤인데, 당시 김성수가 교장을 맡고 있던 중앙학교에서 함께 숙식을 하다시피 하며 민족문제를 논의하던 세 사람이 이승만의 밀사가 가지고 온 밀서를 읽고 독립운동을 해야겠다는 결심을 굳혔다는 것이다. 그러나 당시 그 밀사가 누구였는지도 알 수 없고 그 밀서는 남아있지 않다. 책의 저자는 3인과 밀사의 회동에 대한 신뢰할 수 있는 그 어떤 근거 자료도 없이 그저 ‘그랬다’라고 기록하고 있을 뿐이다.

설령 밀사가 와서 구국운동을 호소하는 이승만의 뜻을 전했다 해도 이것을 바로 3월 1일 독립 선언과 만세 시위 기획으로 연결할 수는 없다. 2014년 개관한 국립한글박물관은 한글운동가들이 오래 전부터 갈망해온 것이었다. 이구동성으로 한글박물관 건립을 주장하고 요로에 호소했다. 나도 그 중 한 사람이었다. 훗날 박물관 건립의 중책을 맡은 담당자에게 사업 착수 수년 전에 한글박물관 건립의 필요성에 대해 열변을 토했다. 그렇다고 해서 나를 한글박물관 기획자나 설립자라고 할 수 있을까?

위의 두 책은 직접사료/1차사료가 아닌 간접사료/2차사료다. 직접사료/1차사료인 ‘밀서’를 본 것도 아니고, 고하가 1945년, 기당이 1950년, 인촌이 1955년에 유명을 달리했으므로 이들에게서 직접 밀사를 만났다는 증언을 들은 것도 아니다. 서문에 따르면, 책을 쓰기 위해 인촌과 관련이 있는 자료를 수집했고, 인촌과 친교가 있었던 200명가량의 인사들의 구술을 참고하여 1976년에 출간된 인촌의 전기에 누락된 내용을 보충했다고 한다.

그러면 이승만 밀서 관련 내용은 어디서 온 것일까? 인보길은 3.1운동 이승만 기획설의 근거로 『승당 임영신의 나의 40년 투쟁사』를 제시하고 있는데, 이 책에 1918년 경 지하운동을 시작한 임영신이 이승만으로부터 한 메시지를 받는다는 내용이 나온다.

상하이를 통해서 우리들은 이 박사로부터의 한 메시지를 받았다.

“미국의 윌슨 대통령은 세계 평화를 위하여 14조문을 선언하였다. 그 중 한 조문이 민족 자결권이다. 여러분은 이 조문을 최대한으로 이용해야만 된다. 여러분의 의사 표시가 국제적으로 알려져야만 한다. 윌슨 대통령은 확실히 여러분을 도울 것이다.”

- 임영신, 『승당 임영신의 나의 40년 투쟁사』, 민지사, 2008, 121쪽.

 

이 내용은 앞서 살펴본 『인촌 김성수 - 인촌 김성수의 사상과 일화』의 기록과 대동소이하지만, ‘밀사’는 등장하지 않고 그저 ‘한 메시지’를 받았다고 되어 있다. 두 책의 출간 순서를 고려하면 1985년에 나온 인촌의 책이 1951년에 미국에서 출판된 『승당 임영신의 나의 40년 투쟁사』의 초판을 참고한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인보길이 언급하고 있지 않지만 1949년 서정주가 쓴 『우남 이승만』에도 비슷한 내용이 적혀 있으니(212~213쪽), 임영신이 이것을 봤을 가능성도 있을 것이다.

회고록은 개인의 관찰과 경험을 통해 쓴 역사나 기록이어서 이에 대한 신뢰는 필자의 기억력과 집필 의도나 태도에 크게 좌우된다. 부정확한 기억력으로 잘못 기록하기도 하고, 특별한 의도나 목적을 가지고 경험하지도 않은 일을 기록하거나 사실을 왜곡하기도 한다. 허위 사실 유포 혹은 역사 왜곡이다. 그러면 임영신의 회고록 『승당 임영신의 나의 40년 투쟁사』는 어떨까? 간단히 그의 경력을 살펴보고 회고록의 내용 몇 가지를 확인해 보자.

임영신은 1899년 금산 출신으로 전주의 기전여학교, 히로시마전문학교, 남캘리포니아대학 등을 졸업했다. 전주에서 3.1운동에 참여했고, 조선여자기독교청년회연합회(YWCA) 등에서 활동하다가 1941년 친일단체인 조선임전보국단에 중앙보육학교 대표로 참여했다. 1945년 중앙여자전문학교를 설립하여 교장이 되었고, 1946년 중앙여자대학을 설립하여 학장이 되었으며, 1953년 중앙대학교 총장이 되었다. 1948년 8월 이승만 초대내각의 상공부장관이 되었으나, 1949년 국회의원 보궐 선거 때 독직사건으로 기소되어 장관직에서 물러났다.

책장을 넘기다가 처음 눈에 들어온 것은 3.1운동에 관한 기록이다.

정오가 되자 파고다 공원의 종소리가 울렸다. (중략) 서울에 온 많은 사람들은 파고다 공원으로 밀고 들어가며 만세를 불렀다.

기관총을 재빨리 설치하고 총들은 사람들을 향해 불을 뿜었다. 일본 경찰은 맨손으로 시위하는 사람들을 마구 찔러대면서 시가지를 누볐다. 여자들은 겁탈당하고 팔다리를 절단당하였고, 아이들도 살해당했다. 수천 명의 사람들이 죽고 수만 명의 사람들이 체포되었다. 그러나 그 날의 시위는 다음 수일 동안 일어난 보다 큰 시위들의 불씨가 되었다.

- 임영신의 책 127쪽

 

위는 탑골공원에서 만세시위가 시작된 직후 일제의 만행을 묘사하고 있지만, 과연 3월 1일 서울에서 ‘여성들이 겁탈당하고 팔다리가 잘리고 아이들이 살해당하는’ 끔찍한 일이 발생했을까? 만세 시위 발생 초기 일제는 당황했고, 시위대를 진압하기 위해 두들겨 패고 총검으로 찌르는 등 폭력을 행사했지만, 3월 1일 하루 동안 수천 명이 죽고 수만 명이 체포되지는 않았다. 3월 1일에서 3월 5일 사이 검거된 조선인은 300인을 조금 넘었고, 박은식의 『한국독립운동지혈사』에 따르면 3.1운동 수감자는 4만6948명. 부상자는 1만5761명이었고, 7509명이 목숨을 잃었다.

다음은 1949년 발생한 국회의원 보궐선거 독직사건과 관련한 기록이다.

나는 경무대로 갔다. 신문들이 그의 책상 위에 놓여 있었다. 내가 들어갔을 때 그는 돌아앉아 있었다. 그가 나를 향해 돌아앉자, 나는 그가 아주 긴장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는 손가락을 후후 불고 있었다. 그 습관은 1901년, 일본인들에 의해 투옥당하고, 손톱 밑에 성냥불로 지지는 고문을 당한 후 얻은 습관이었다.

- 임영신 책 333~334쪽.

 

여기서 임영신은 이승만이 1901년 일본인들에 의해 투옥당했다고 기록하고 있지만 거짓말이다. 이승만은 일제에 의해 감옥에 간 적이 없다. 이승만이 한성감옥에 간 것은 1899년 1월 박영효와 관련된 고종 황제 폐위 음모 사건에 연루된 것으로 1904년 8월까지 5년 7개월 간이었다. 1901년이라는 것도 틀리고, 대한제국이 아닌 일본인들에 의해 투옥당했다는 것, 고문당했다는 것은 명백한 역사 왜곡이다. 굳이 맞는 사실 하나를 꼽자면 이승만이 사람들 앞에서 가끔씩 손가락을 후후 불며 일제의 고문으로 고통받고 있는 것처럼 연기를 했다는 점이다.

다음은 한국전쟁에 관한 기록인데, 두 차례의 미소공동위원회가 성과 없이 끝나고, 한국문제가 유엔으로 이관된 뒤, 1947년 11월 14일 유엔총회에서 유엔 감시 하의 남북 총선거안이 결의되기 직전인 10월의 상황을 설명하는 대목이다.

그러나 우리는 25만 명에 가까운 북한인이 무장되었으며, 중국 공산당 소속 팔로군이 북한에서 훈련받고 있다는 사실 등을 걱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우리의 타협안이 받아들여진다면 전망이 좋아질 수 있을 것 같았다.

- 임영신의 책 322쪽.

 

1947년 25만에 가까운 북한인이 무장되었고 중국의 팔로군이 북한에 들어와 있었다고 서술하고 있으나, 1948년 이전까지 북한에는 소수의 경비대가 있었을 뿐이고, 오히려 북한이 중국의 혁명을 지원하기 위해 수만의 병사를 파견하고 있었다. 북한의 전쟁 도발을 지원하기 위해 중국에 있던 조선인부대가 북한으로 들어 온 것은 1948년 이후로 전체 숫자는 7만5000~10만명이었다(브루스 커밍스, 『한국현대사』). 1950년 6월 한국전쟁 발발 시 북한의 지상군은 13만5000명 정도였다.

임영신의 회고록에는 오류가 많다. 좀 더 꼼꼼히 들여다본다면 더 많은 잘못이나 왜곡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신뢰할 수 있는 기록과 그렇지 않은 기록을 가려내는 것은 일차적으로 역사가의 임무지만 독자들도 옥석을 구분하는 혜안을 가져야 한다. 문자로 기록되었다고 해서 사실이나 진실은 아니다. 이승만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개별적으로 고인에게 러브레터를 보내는 것이야 굳이 말릴 필요 없겠지만, 근거 없는 이야기, 시쳇말로 ‘아무말대잔치’에 가까운 얘기를 줄줄이 나열하며 3.1운동의 기획자 이승만 운운하는 것은 뻔뻔스러운 견강부회이자 역사 왜곡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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