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차대전 당시 미군에는 기관총이 없었다'는 조선일보 칼럼은 거짓

  • 기자명 임영대
  • 기사승인 2019.04.24 0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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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4월 21일 아침, 조선일보 홈페이지에는 '미국서 홀대받은 기관총 최초 개발자유럽에서 대성공'이란 칼럼이 실렸다. 게재된 매체가 ‘이코노미조선’이기 때문이겠지만. 이 기사는 순수하게 무기에 관한 내용이 아니다. 개발국에서는 외면하는 획기적인 아이디어가 타국에서 대박을 터뜨린 예시로 한 한국 중소기업을 언급하면서, 유사 사례로 미국에서 개발했으나 미군에서는 채택되지 못하고 정작 유럽에서 먼저 성공한 두 가지 기관총의 사례를 든 것이다.

미국에 기관총이 없었다? 

▶ 1차대전 당시 1천여정 기관총 보유

기사의 전체적인 방향에는 뭐라고 할 부분이 없다. 필자의 눈에 들어온 대목은 여기였다.

 

항상 전쟁의 위기에 놓여 있던 유럽 열강들과 달리 고립주의를 주창한 미국은 주변에 강력한 적대국이 없다 보니 군비 증강에 소극적이었다. 미국은 전쟁에 뛰어든 다음에야 자신의 문제를 알게 됐고 결국 연합군의 지원을 받아서 야포, 전차, 전투기로 교전을 해야 했다. 그중 미국에 가장 치명적이었던 부분은 오늘날 보병 부대가 반드시 갖추는 무기인 기관총이 없다는 점이었다.
<이코노미 조선> 칼럼 중

 

이 문장을 보면 1917년 1차 세계대전 참전 당시 미군에는 단 한 자루의 기관총도 없었다고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당시 미군에는 분명히 기관총이 있었다. 그리고 미군은 세계 최초로 기관총을 실전에 투입한 군대이기도 했다. 세계 최초의 기관총, 개틀링이 발명된 나라가 바로 미국이기 때문이다. 미군은 남북전쟁에서 남군을 상대로 개틀링을 처음 실전에 투입했다.

 

최초의 개틀링, M1862

 

개틀링은 남북전쟁으로 그 활약을 끝내지 않았다. 서부에서는 백인들에게 맞서는 원주민을 상대로 불을 뿜었고, 미서전쟁(1898)에서는 스페인 군대를 향해서 재차 불을 뿜었다. 이후에도 미군은 1911년까지 개틀링 기관총 다수를 현역 장비로 채용하고 있었고, 1차 대전 당시에도 예비장비로 보관해두고 있었다.

다만 개틀링 기관총은 완전한 자동식 기관총은 아니었다. 기사에서 언급하는 맥심 기관총이 ‘버튼만 누르고 있으면’ 발포가 계속되는 데 반해 개틀링은 수동으로 크랭크를 돌려야만 총이 발사되기 때문이다. 그럼 당시 미군에 완전한 ‘자동식 기관총’은 없었던 게 맞을까? 그렇다면 ‘미군에 기관총이 없었다’는 위 문장도 맞는 게 아닐까?

 

미군이 채용한 최초의 자동식 기관총, M1895

 

아니다, 있었다. 기사에서도 언급한 명총, M1917을 제작한 발명가 존 브라우닝이 콜트와 협력해서 만들어낸 M1895 콜트-브라우닝 기관총이다. 탄띠를 사용해 급탄하는 공랭식 기관총으로, 1893년에 미 해병대가 처음 채용했다. 개틀링을 쓰던 육군도 흥미를 보여 소수 구매했으나, 그 수는 140정에 그쳐 대량으로 장비하지는 않았다.

이 총을 사용한 집단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미 해군은 군함과 육상기지 경비용으로 이 기관총을 설치했고 주방위군이나 사설 경비대도 이 기관총을 사용했다. 수출도 이루어졌다. 이 총을 수입한 나라들은 미국의 영향을 크게 받는 멕시코, 우루과이 같은 중남미 국가들뿐 아니라 캐나다, 프랑스, 러시아 같은 선진국들도 있었다.

캐나다군은 남아프리카에서 벌어진 2차 보어 전쟁(1899~1902)에서 이 기관총을 사용해보고 성능에 만족했다. 그래서 1차 대전에 참전할 때도 이 총을 가져갔다. 프랑스군과 러시아군은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면서 당장 무기가 부족하니 이 총을 수입했다.

하지만 미군은 1917년에 참전하면서 이 기관총을 본토에서 훈련할 때만 사용하고 일선에는 가져가지 않았다. 캐나다군과 프랑스군도 개전 초기에만 잠시 사용했을 뿐, 얼마 지나지 않아 맥심 계열 기관총으로 대체했다. 오직 러시아군만 계속 사용했다. 프랑스군이 방출한 물량도 러시아로 넘어갔을 정도였다. 왜 그랬을까?

그건 1차 대전 서부전선이 가진 특이사항 때문이다. 서부전선에서는 1914년에 이미 참호전(trench war)이 벌어졌는데, 여기서 기관총에게 요구된 특성은 장시간 쉬지 않고 사격을 할 수 있는 능력이었다. 당시의 기록을 보면 기관총 1문이 무려 12시간 동안 쉬지 않고 사격을 한 사례도 있을 정도이다.

이런 사격은 오직 수랭식 중기관총만 총열을 교환해 가면서 할 수 있었다. M1895와 같은 공랭식 기관총으로는 12시간이 아니라 12분도 쏠 수 없다. 과열된 총열이 망가지기 때문이다. 이런 지속사격 능력은 현대식 기관총도 낼 수 없다. 현대의 기관총들은 수백 발씩 연속사격을 하는 대신 몇 발씩 끊어서 쏘며, 수시로 총열을 교체해서 과열을 막는다.

미 육군이 처음 정식 채용한 기관총인 프랑스제 호치키스 M1909 기관총 역시 공랭식이라 똑같은 단점을 가지고 있었다. 그나마 이 총은 1911년에 발주를 끝내고 생산을 종료했다.

이런 까닭으로 참전을 결정했을 때 미군은 M1895, M1909 등을 합쳐 1100여 정에 달하는 기관총을 보유하고 있었으나, 1917년의 서부전선은 이 정도 기관총으로는 역부족임을 확실히 드러내고 있었다. 그래서 미국은 M1895 개량형이 아직 생산 중인데도 영국과 프랑스가 만든 맥심을 구입하고, 맥심 스타일의 수랭식 중기관총인 M1917을 새로 개발할 수밖에 없었다.

그럼 M1895는 전혀 실전에 투입되지 못했을까? 그것 역시 틀린 생각이다. 가벼운 M1895는 항공기용 기관총으로 각광을 받았다. 미 육군 항공대가 사용한 프랑스제 전투기 중 다수가 본래 달려 있던 프랑스제 기관총을 탈거하고 M1895를 장착했을 정도다. 그리고 참호전이 아니라 기동전이 벌어진 동부전선의 러시아군은 가벼운 M1895를 적백내전까지 계속 애용했다.

만약 위 기사에서 ‘쓸만한 기관총이 없었다’고 했으면 틀린 말이 아니었을 것이다. 여기에서 언급한 두 가지 기관총 모두 참호전에서 쓰기 어려운 성능이고, 육군보다는 해군과 해병대가 더 많이 가지고 있었던 것도 사실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미국에 기관총이 전혀 없었던 것처럼 보이게 만드는 서술은 문제가 있지 않을까?

 

'루이스 기관총'은 루이스가 만들었다?

▶ 루이스는 기관총을 개발한 게 아니라 개량한 사람

위 기사에서는 미국인이 만들었으나 미국에서 빛을 보지 못하고 외국으로 나간 기관총으로 맥심 외에도 한 가지, 루이스 경기관총을 들고 있다. 

1911년 개발된 루이스도 한때 미군 조병창에서 근무했던 아이작 루이스(Isaac Lewis)가 발명했다.
<이코노미 조선> 칼럼 중

엄밀하게 말하자면 루이스는 루이스 경기관총을 ‘개량’한 사람이지 ‘발명’한 사람이 아니다. 이 총을 최초로 발명한 사람은 새뮤얼 맥클린(Samuel McClean)이라는 사람으로, 본래는 이 총은 맥심처럼 수랭식 구조를 갖추고 있었다.

이 총의 특허권을 사들인 오토매틱 암스(Automatic Arms) 사는 미 육군에 이 총을 팔아먹으려고 예비역 중령이자 화포 전문가인 루이스에게 개량 의뢰를 했다. 맥클린의 기본 설계를 루이스가 개량한 결과물이 바로 루이스 경기관총이다.

맥클린의 원판에 비한다면 루이스가 만든 결과물은 환골탈태 수준이었고, 그래서 루이스의 이름이 새 총에 붙은 건 무리가 아니다. 특허권을 사들였으므로 법적인 문제도 없다. 하지만 아예 처음부터 새 총을 만든 게 아니고 다른 사람의 발명을 개량한 거라면 ‘발명’했다는 표현에는 문제가 있지 않을까?

 

미국은 언제나 철저히 중립을 지켰다?

▶미국은 중남미 국가 분쟁에 수시로 개입했다

더불어 주제인 총과는 직접 관련이 없는 부분에도 오류가 있다. 기사 맨 첫머리에 나오는 문단이다.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했을 때만 해도 미국에 전쟁은 남의 이야기였다. 전쟁터인 유럽 대륙이 지리적으로 너무 멀기도 하지만, 17세기 초에 제임스 먼로 대통령이 고립주의를 주창한 이후 미국은 자신의 안보와 관련 없다면 ‘제3국 간에 분쟁이 벌어질 경우 철저하게 중립을 지키겠다’는 것을 가장 중요한 외교 원칙으로 내세웠기 때문이다.
<이코노미 조선> 칼럼 중

 

미국의 5대 대통령 제임스 먼로(James Monroe, 1758~1831)가 대통령직에 재임한 기간은 1817년 3월 4일부터 1825년 3월 4일까지다. 이때는 19세기지 17세기가 아니다. 이 정도는 단순한 오타로 볼 수 있다. 하지만 1차 세계대전 이전까지는, 과연 미국이 제3국 간의 분쟁에 개입하려 시도한 적이 없었을까?

멕시코 전쟁(1846~1848)이라든가, 미서전쟁(1898) 같은 경우는 미국이 당사자로서 관련되어 있었으니 논외라고 할 수 있겠다. 하지만 미국은 자기들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전쟁에 실제로 개입하려고 시도한 적이 있다.

1879년, 칠레가 영토분쟁 중이던 볼리비아를 침공했다. 볼리비아와 동맹을 맺고 있던 페루 역시 연합군으로 참전하면서 전쟁이 커졌다. 이 전쟁을 태평양전쟁(War of the Pacific)이라고 한다. 2차 세계대전의 일부인 태평양전쟁(Pacific War)과 영문 표기는 다르다.

2:1이었지만 전쟁의 추이는 시종일관 칠레군에 유리했다. 볼리비아군은 서전에서 참패하여 태평양 해안의 영토를 잃고 안데스산맥 너머로 쫓겨났고, 페루 해군도 칠레 해군에게 연달아 패해 모든 함대를 잃었다. 심지어 페루 수도 리마까지 함락당했고, 두 나라는 칠레를 한 번도 이기지 못했다. 끝내 페루는 1883년, 볼리비아는 1884년에 굴욕적인 강화를 맺어야 했다.

그런데 미국이 이 전쟁에 개입하려고 했다. 페루에 미국 자본이 투자되어 있었기 때문에, 전쟁으로 자국 자본이 피해를 보지 않으려고 휴전협상을 중재하려고 한 것이다.

여기서는 미국이 이 전쟁을 중재하려고 했다는 사실을 문제 삼으려는 게 아니다. 자국민과 그 재산이 피해를 보지 않도록 보호하는 건 주권국가의 당연한 의무다. 문제는 그것이 미국을 지키는 ‘안보’와는 별로 상관이 없다는 데 있다. 영국 자본이 칠레를 좌우하게 될 것이 두려워 개입했다는 관측도 있지만, 이 전쟁 없이도 남미에서 가장 큰 자본은 이미 영국 자본이었다.

먼로주의, 먼로 독트린의 요지는 아메리카 대륙 전역을 미국의 세력권으로 설정하고 유럽에 있는 강대국들이 여기 손을 대지 못하게 하려는 데 있었다. 이는 당연히 중남미 각국 사이의 분쟁과 내정에 미국이 개입한다는 뜻도 된다. 이 남아메리카에서의 태평양전쟁 중재 시도도 같은 맥락에서 일어난 시도였으며, 20세기 이후 미국이 초강대국이 되면서 중남미는 완전한 미국의 뒷마당이 되어 미국의 노골적인 정치・군사・경제적 개입의 대상이 된다.

다만 미국이 아직 그만한 힘을 가지지 못했던 19세기 말까지는 시도는 시도에 그쳤을 뿐, 실제적인 위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태평양전쟁 중재 시도 때도 미국은 한참 승기를 타고 있던 칠레 측에게 아주 굴욕적인 취급을 당했다.

당시 칠레 항구 발파라이소를 방문한 미국 해군 태평양전대는 낡은 목조선으로만 구성되어 있었다. 하지만 칠레 해군은 12인치 장갑을 두르고 후장식 주포를 탑재한 최신 영국제 장갑함 두 척을 비롯한 신예 함선을 보유하고 있었다. 게다가 미국이 제시한 휴전 조건은 칠레 측이 지금까지 점령한 페루 영토를 반환하라는 거였다.

자기들보다 훨씬 빈약한 함대를 끌고 와서 자신들이 피 흘려 싸워서 얻은 전리품을 적에게 반환하라며 ‘권유’하는 미국인들을 보고, 어이가 없어진 칠레 측은 이렇게 답변했다.

“쓸데없이 끼어들면 용궁 구경을 시켜주겠다.”

다행스럽게도 미국-칠레 전쟁은 발발하지 않았다. 만약 그 전쟁이 터졌다면 칠레는 ‘미국과 정규전을 치러 이긴 나라’라는 세계에 하나밖에 없는 타이틀을 자랑할 수 있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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