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은 야구, 중국은 '봉구·곤구' 한국은 '타구·격구'로 불렀다

  • 기자명 최민규
  • 기사승인 2019.04.30 09: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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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12월 1일 대만 타이중 인터컨티넨탈구장에서는 한국과 대만의 야구 경기가 열리고 있었다. 이듬해 베이징올림픽 예선전을 겸한 아시아야구선수권 대회였다.

결과적으로 대실패로 끝났지만, ‘대륙’에서 열리는 올림픽 야구 종목에서 성과를 내야 한다는 인식은 대만 야구계와 팬들이 공유하고 있었다. 게다가 1차전 상대는 ‘숙적’ 한국이었다. 국가대표에는 불참했지만 당시 뉴욕 양키스 소속으로 대만 최고 스타로 군림하던 투수 왕젠밍은 야구장 앞 광장에서 팬들과 함께 응원을 했다. 야구계 뿐만이 아니었다. 이듬해 3월 총통 선거를 앞둔 대만 국민당은 한국전을 앞두고 신문 2면에 걸친 응원 광고를 냈다.

대만에 반한 감정이 지금보다 심했을 때다. 경기 내내 한국 팀에 대한 아유가 쏟아졌다. 한국 사람에 대한 비칭인 “까오리빵즈(高麗棒子)”라는 소리도 심심챦게 들렸다. 하지만 이 경기는 5회초 이종욱의 역전 석 점 홈런이 결승타가 돼 한국의 5-2 승리로 끝났다. 경기 뒤 이런 생각이 문득 들었다. ‘봉구에서 봉자(棒子)에게 졌군…’ 중국과 대만에서는 야구(野球)를 봉구(棒球)라고 한다.

야외에서 하는 공놀이 '야구'는 1894년 일본에서 탄생

야구는 미국에서 시작된 경기지만 정작 서구에선 그렇게 인기있는 종목이 아니다. 미국 다음으로 야구가 성한 지역은 동아시아다. 야구의 원래 이름인 베이스볼(Baseball)은 한자문화권인 동아시아에서 번역될 필요가 있었다. 하지만 표기법은 다르다.

야구는 일본에서 만들어진 용어다. 1872년 지금 도쿄대학의 전신인 제1중학교에서 영어와 역사를 가르쳤던 호레이스 윌슨이 학생들에게 야구를 가르친 것을 기원으로 삼는 게 통설이다. 아마도 다른 근대 문물들이 그랬듯이 특정 시기에 여러 경로로 도입됐다는 설명이 더 합리적일 것이다. 처음에는 베이스볼이라는 단어를 그대로 썼다. ‘야구;, 일본어로 ’야큐‘라는 번역어는 1894년에 만들어졌다.

당시 제국대학운동회 간사이자 제일고등학교 심판이던 주만 가나에가 야구라는 단어의 고안자다. 1895년은 일본에 야구가 도입된 지 20년 이상이 지난 때였다. 그리고 메이지유신 이후 일본이 처음으로 ‘전승국’이 된 청일전쟁이 끝난 해였다. 1890년대의 일본은 쇼비니즘의 시대였다. 그래서 야구라는 번역어의 등장을 외래 문화인 야구가 ‘일본화’되는 과정으로 해석하는 학자들도 있다. 오락의 성격이 강했던 미국의 베이스볼과는 달리 일본에서 야구의 수용은 엘리트 교육기관을 중심으로 이뤄졌다. 일본 야구인들은 야구에서 교육적 요소를 찾으려 했고 이 과정에서 ‘일본화’는 자연스러운 과정이었을 것이다. 이런 태도는 2차 대전 직전 정립된 일본식 ‘야구도’로 발전하게 된다.

하지만 야구라는 번역어 자체에는 그다지 특별한 의미가 있지 않다. 주만 가나에는 1897년 자신이 펴낸 일본 최초의 야구연구서에 ‘야구’라는 이름을 붙인다. 그리고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정원’이 아닌 야외에서 하는 구기라는 의미다.

 

“‘이 종목은 북미합중국 국기로서 그들은 Base Ball이라고 하며, 우리에게는 1893년 4월 제일고등중학교에서 행한 그 야외 유희와 비슷한 정구(lawn tennis)와 대비하여 야구라고 명명한다. 원명(原名)과 병용하며 지금에 이르렀고, 아주 새로운 종목으로 포함되었으나, 예로부터 우리나라에는 비슷한 종목조차 없었다.”
주만 가나에, <야구>, 8p

 

방망이와 공을 뜻하는 '봉구' 1914년 중국에서 처음 사용

중국의 야구 역사는 ‘중국 철도의 아버지’로 불리는 잔텐여우(첨천우)에게서 시작된다. 그는 청조 시절인 1872년 미국 유학생으로 파견돼 예일대학교에서 철도공학을 배웠다. 예일대 시절 중국 유학생들과 함께 야구팀을 만든 게 중국 야구의 기원으로 인정받고 있다.

 

청두체육교육연구소에서 1991년 발간한 저널에 따르면 1872년 첨천우가 예일대에서 중국 유학생들과 만든 야구팀이 중국 야구(봉구)의 기원이다.

 

1991년 청두체육교육연구소에서 발간된 저널은 이 팀의 이름을 ‘중화봉구대’로 기재하고 있다. 그가 봉구라는 단어까지 만들었는다는 문헌 증거는 아직 없다. 유학생 야구팀이었으니 번역 없이 ‘베이스볼’이라는 단어를 썼을 가능성이 크다. 중국봉구협회(CBA)의 입장은 ‘봉구’라는 단어는 1914년 처음 등장한다는 것이다. CBA는 중화권 야구전문가인 김윤석 KBO 코디네이터에게 보낸 답신에서 “칭화대학에서 발간한 <칭화주간> 1914년 4월 21일자호에 ‘봉구’라는 단어가 등장하는 게 최초 기록”이라고 밝혔다.
 

중국봉구(야구)협회는 1914년 칭화대학이 발간한 <칭화주간>에서 '봉구'라는 단어가 처음 등장한다고 밝혔다.

 

일본 교토대의 다카하시 고 교수는 ‘봉구’의 기원에 대해 보다 세밀한 연구(2017년 발간)를 했다. 1907년 발간된 잡지 <세계>에는 '베이스바얼(貝斯巴爾)'이라는 음역으로 야구가 소개된다. 이어 1908년에는 곤구(棍球)라는 번역이 등장한다. 몽둥이 곤(棍)으로 ‘봉구’와 비슷한 의미다.

1909년 <신보>가 전해 미군의 샤먼 주둔을 다룬 기사에서 “야구, 축구, 테니스, 요트 등 경기를 주최했다”는 문장이 등장한다. 여기에서 처음 ‘봉구’라는 이름이 등장한다. 하지만 통일된 번역은 아니었다. 1909년에서 1911년 사이 <신보>는 봉구, 또다른 매체인 <시보>는 ‘박구(拍球, 공치기)’, <동방잡지>는 ‘구희(球戲, 공놀이)’ 등 제각각으로 번역했다. 베이스볼의 직역에 가까운 루구(壘球)‘나 일본에서 건너온 ‘야구’라는 단어도 쓰였다.

‘봉구’라는 단어는 1915년이 되면 공식적인 지위를 획득한 것으로 보인다. 이해 상하이에서 열린 극동대회를 보도한 대다수 매체는 ‘봉구’로 표기를 통일했다. CBA에서 소개한 <칭화주간>은 1914년 3월17일자에서는 야구로 표기했다 이후에 봉구로 표기를 바꿨다. 대략 1910년대 후반이면 ‘봉구’가 다른 번역어들을 압도했다는 게 다카하시의 결론이다.

하지만 중화권의 야구 역사는 대륙과 대만으로 나뉘어 전개된다. 대만은 1895년 시모노세키조약으로 일본의 식민지가 된다. 대만 최초의 야구팀은 1906년 창단한 타이베이일중 야구부다. 이어 대만에 진출한 일본 기업과 기관들에 성인 야구팀이 생기기 시작했다. 하지만 당시 ‘대만 야구’의 주역은 일본인이었다. 대만야구협회는 1915년 결성됐는데 소속 선수는 전원 일본인이었다. 대만인들의 야구 참여는 대략 1920년대부터 가능했다. 이종성 한양대 교수는 “일본은 1922년부터 대만인들이 일본인과 함께 고등교육을 받을 수 있는 기회를 열어주기 시작했고 1924년에는 대만의 모든 학교가 1년에 한 번씩 운동회를 치르도록 했다”고 설명한다.

1928 Taiwan Chiayi Agriculture and Forestry Baseball Team ⓒwikimedia

식민지 시대 대만의 베이스볼은 물론 ‘야큐’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하지만 1949년 이후 대만의 야구는 ‘봉구’가 된다. 국공내전에서 패한 국민당 정부는 이해 이른바 ‘국부천대’로 근거지를 대만으로 옮긴다. 장개석의 국민당은 항일과 반공을 정체성으로 했다. 국민당은 ‘탈대만화ㆍ중국화’ 정책으로 일제 잔재를 일소하려 했다. 그 과정에서 야구 용어도 대폭 ‘탈일본화’됐다. 그래서 지금 대만의 프로야구 기구 이름은 중화직업봉구연맹(CPBL)이다.

야구용어의 측면에서 대륙과의 관계는 다소 아이러니하다. 국공내전 종료 뒤 중국에서도 한동안 야구 경기가 열렸다. 인민해방군도 예하 부대에서 야구팀을 운영했다. 하지만 문화대혁명 기간 야구는 자본주의 잔재로 인식돼 자취가 사라졌다. 지금의 CBA는 1979년에야 설립됐고 국제기구 가입은 1981년에야 했다. 지금 중국의 야구용어는 대부분 대만식을 따르고 있다. 중국식 용어가 대만으로 가 일본식을 대신한 뒤 다시 대륙으로 역수출된 셈이다.
 

조선에선 타구·격구·수구 사용하다 한일합방 이후 야구로 통일

한국은 어땠을까. 공식적으로 한국 야구의 기원 연도는 필립 질레트 선교사가 황성기독교청년회(YMCA) 회원들에게 야구를 보급한 1904년이다. 최초에는 베이스볼이라는 원래 이름이 그대로 쓰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후 타구(打球), 격구(擊毬) 등 번역어가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황성신문>은 1906년 2월 17일자는 YMCA와 독일어학교팀이 훈련원 마동산에서 치른 경기를 다룬다. 이 기사는 종목 이름을 ‘타구’로 표기하고 있다.

국민체육진흥공단에서 펴낸 <이야기 한국체육사> 야구편에는 1909년 동경유학생 야구단이 모국 방문 경기에서 ‘수구(手球)’라는 명칭을 알리려 했다는 일화가 소개돼 있다. 하지만 1910년 한일합방 이후에는 일본의 압도적인 영향력 아래 야구라는 용어가 정착됐다. 1911년 10월 <경성일보>는 조선 최초로 신문사주최 야구 경기를 연다. 선수는 전원 일본인이었고, 당연히 ‘야구’라는 용어가 쓰였다. 경성일보는 구한말 최대 민족지였던 대한매일신보를 흡수한 조선총독부 기관지였다. 

현재 시점에서 야구라는 용어의 기원을 따져 굳이 배척해야 할 이유는 없다. 그러기에는 야구는 너무 익숙해졌다. 옛 동아시아 사람들이 생소한 용어의 번역을 두고 머리를 싸맸던 것과 달리 지금은 야구 종주국 미국의 용어를 그대로 들여오는 분위기기도 하다. 가령 ‘퀄리파잉 오퍼’라는 메이저리그의 새로운 선수 이적 제도에 대해서는 일본 언론사들도 영문 그대로 소개하고 있다.

하지만 잠깐 시대를 뒤돌려 잘 알려지지 않은 한국식 번역어 하나는 소개하고 싶다. 국어학자 한결 김윤경 선생은 1926년 잡지 <동광> 지면에서 베이스볼의 번역어 하나를 제안한다. 그는 베이스볼이라는 영어를 굳이 일본식 한자인 야구로 번역할 필요가 있는가라는 의문을 제기했다.

 

“오늘 같이 온 세상 사람이 한 집안 같이 서로 사귀어 살게 된 이 때에는 여러나라 말이 많이 들어오아 섞이게 되는 것이 없을 수 없는 일이외다. 가령 「뻬쓰뽈」(BaseBall), 「펜」(Pen), 「잉크」(Ink)와 같은 말들이 쓰이게 된 것 같은 따위가 그것이외다. 그러하나 남의 말을 그대로 쓰는 것 밖게 그 말을 옴기거나 새로 짓어 쓰기도 함니다. 가령 「야구(野球)」, 「철필(鐵筆)」, 「양묵(洋墨)」과 같이 쓰는 따위외다. 그러하나 이것도 남의 말인즉 남의 말로 또 옴기어 쓸터이면 차라리 그대로 처음 그것이 생긴 나라 말대로 쓰는 것이 낫겠음니다. 만일 우리말로 옴기어 쓰려 할 것이면 「방석공」, 「쇠붓」, 「물감먹」이라 하여야 할 것이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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