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두환은 폭동을 유도했으나 광주는 의도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 기자명 이광수
  • 기사승인 2019.05.17 08: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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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에 대한 진실은 상당히 밝혀져 있다. 일반 대중은 가짜뉴스에 긴가민가 하는 정도로 의심하는 경우가 가끔 있긴 한데, 적어도 큰 부분에 있어서는, 전두환과 그 일당이 인정하는 여부를 떠나, 그 진실은 생각보다는 대부분 밝혀져 있다. 아직 밝혀져 있지 않은 큰 부분 가운데 몇 가지가 있는데, 한국과 미국의 정보요원으로 5.18 당시에 활동했던 김용장씨와 허장환씨의 지난 5월 13일과 14일 국회 및 광주 5.18기념재단에서의 증언으로 그 퍼즐이 얼추 맞춰졌다. 남아 있던 의문점들을 그들의 증언을 통해 풀어 사건을 재구성해보도록 하자.

 

 

5.18에 대한 논쟁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왜 광주냐?’ 즉 그들이 광주를 고의로 선택하였느냐의 부분일 것이다. 현재로서는 철저한 기획설 즉 서울은 너무 크고 휴전선과 가까워 위험하고, 부산은 그곳을 고향으로 둔 사람들이 많아 꺼려했고, 목포는 너무 외진 곳이라 효과가 미미했기 때문에 광주를 택했다는 주장이 있다. 반면에 기획을 했다기보다는 부마항쟁 때부터 진압이 아닌 체포 위주로 작전을 전개하여 공포를 준 것이 광주에서는 먹히지 않았다는 주장이 있다. 그리고 그 둘이 적당한 곳에서 섞였다는 주장이 있다. 현재로서는 논쟁이 완전히 해결될 수 없는 것으로 역사에서의 사실보다는 해석의 부분에 속하는 것이라고 본다. 이 과정에서 신군부는 그 기획을 어느 정도로 했을 것인지는 진실을 알고자 하는 사람들에게는 초미의 관심사다. 그 가운데 하나가 편의대 문제다.

 

이번 증언에 의해 5.18에서도 예의 편의대는 작동되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김용장씨는 그 편의대가 광주 비행장에 있었다는 확인된 사실을 보고했다고 했다. 편의대 운영은 있었지만, 그 효과는 미미했고, 단말적이었다. 신군부는 편의대를 통해 이간질, 신고, 유언비어, 자극 및 선동, 무기 탈취 등을 기획하였다. 하지만 그 기획에 의해 사건이 전개되었다고 할 수는 없다. 광주MBC, 세무서 방화와 관련해서 보면, 그들이 자극한 것은 충분한 개연성이 있지만, 그렇다고 그들의 자극 때문에 민심이 폭발한 것이라고 볼 수는 없다. 이미 군인들이 시민을 죽이고 그에 대한 분노가 시내 곳곳에서 하늘을 찔렀기 때문에 그 노도가 편의대에 의해 자극되어서라고 말 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한 갈래의 시민들이 방화를 한 것도 아니고, 여러 갈래 군중들이 불을 질렀으니 그 행위가 편의대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라고 보는 것은 분명한 과장이다. 무기 탈취 또한 마찬가지다. 광주 인근의 나주, 화순 등 경찰서로 가서 무기를 탈취한 시민이 수백 수천 명이었다는 사실 하나만 보더라도 편의대 몇 사람에 의해 이루어졌다고 볼 수는 없다.

 

다만, 아시아자동차 공장에 가서 가지고 나온 장갑차의 경우는 조금 다를 것이다. 시민군은 5월 21일 아시아자동차 공장에 쳐들어갔고, 그곳에서 버스, 지프차, 장갑차를 탈취했는데, 허장환씨의 증언은 그 과정에서 편의대가 장갑차를 몰고 나왔다고 한 것이다. 5.18 당시 장갑차는 여러 대가 아시아자동차공장에서 나와 시내를 활주했다. 21일 오후 1시 발포 직전, 그 가운데 맨 처음 몰고 나온 장갑차 한 대가 도청앞 공수부대를 향해 돌진했다. 당황한 공수부대 장갑차가 후진하다가 무전병 한 명이 깔려서 즉사했고, 이 부분에 대해 처음 전두환은 회고록에서 ‘권일병이 시위대의 장갑차를 미처 피하지 못해 숨졌다’라고 적었다. 장갑차가 돌진해서 군인을 죽였기 때문에 자위권 차원에서 발포를 했다는 논리다. 그러나 당시 진압군으로 투입된 이경남 목사는 그것이 거짓이라고 증언했다. 이 목사는 “정오경 차량 시위대가 화염병을 던지며 돌진해오자, 경비 중이던 우리 부대 장갑차가 당황해 급히 후진했다. 그러다 뒤에 있던 권 일병이 캐터필러 밑으로 깔렸다. 내 눈앞에서 권일병의 몸이 궤도 아래 깔려 입으로 피를 토하며 죽어가던 모습이 지금도 생생하다”고 증언한 바 있다. 그 후 얼마 있다가 사살 명령이 떨어져 학살이 본격화 되었다. 그 후 장갑차는 아시아자동차 공장에서 누군가에 의해 또 가지고 왔는데, 몇 대가 돌아다녔는지 알 수 없다. 그리고 어디다 버리고 갔는지, 누가 다 수거해서 원상복귀 시켰는지 모른다. 이에 대해 허장환씨는 오늘 5월 14일 518기념재단에서 이렇게 증언했다.

 

"편의대는 유언비어 유포, 장갑차 등 무기 탈취를 벌였다. 당시 아세아자동차는 방산업체로서 '보안목표'로 지정, 특별 방호시설을 갖췄다. 아무런 제지 없이 시민들이 장갑차를 탈취할 수 없다. 또 시제품이었던 APC(병력수송) 장갑차를 몰 수 있는 시민은 아무도 없다. 북한군도 못한다. 장갑차를 몰 수 있는 것은 헬기·전차 등 각종 장비의 운용능력을 훈련한 특전부대, 편의대 뿐이다."

 

오랫동안 풀리지 않았던, 그러면서 전두환이 주장한 자위권 발동 차원으로 현장에서 자발적으로 발포를 결정 이행했다는 주장에 상당한 빌미를 주었던 부분이 풀린 것이다. 그들은 편의대를 동원해 과격 시위를 자극했고, 그 가운데 편의대원 한 사람이 몬 장갑차 한 대가 사살 명령이 실질적으로 떨어진 - 전두환이가 12시 경에 광주비행장에 와서 사살 명령을 내리고 갔다 - 후에 공수부대에 돌진을 하고, 그 직후에 사살이 일어난 것이다. 결국 시민군의 과격한 행동 때문에 발포/사살이 일어난 게 아니고, 사살을 하기 위해 일부러 장갑차로 돌진을 했다는 것이다. (이 장갑차는 방향을 튼 후 수협 건너편 쪽으로 도주하여 사라지고 행방을 알 수 없다.) 이제 광주시민으로서는 장갑차 과격 시위를 일으켰다는 오명을 벗게 된다. 1차 사격이 일어난 후 공수부대는 그것을 신호탄으로 조준 사격을 집중적으로 한다. 2차, 3차 총격이 이루어지는데, 관광호텔 옥상까지 올라가 4인 1조 조준사격까지 한다. 만약 장갑차 과격 시위가 사살 명령의 원인이었다면, 1차 사격만 하지, 굳이 더 할 필요가 있었겠는가? 원인만 제거하지 왜 2차, 3차 조준사격까지 했겠는가? 즉, 학살은 미리 기획한 철저한 시나리오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다.

 

그들은 편의대를 통한 자극 선동의 기획을 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 효과는 미미하였다. 결국 편의대가 벌인 것으로는 독침 살해와 장갑차 탈취 밖에 없었다. 몇 사람이 선동한다고 물꼬가 바뀔 게 아닌 상황인 것이기 때문이다. 결국 시민 전체의 분노는 자극하거나 움직일 수 없었던 일이다. 감히 그 기획을 실행으로 옮기려고조차 하지 못했을 것으로 본다. 따라서 편의대원 단독으로 행위 한 경우만 결과로 드러났다. 그것이 독침과 장갑차 돌진이다. 이 가운데 전자는 광주 이외 지역으로의 확산을 저지하는데 역할을 했고, 후자는 집단 사살을 만들어냈다.

 

김용장 허장환 두 첩보요원의 증언에 의하면, 공수부대가 도청을 비우고 조선대로 퇴각한 것은 고의 전술이었다고 한다. 개인적으로 오래 전부터 의문이 풀리지 않은 부분이었는데, 어느 정도 퍼즐이 풀린 것 같다. 신군부의 의도는 퇴각하여 광주를 해방구로 만들고, 편의대라 부르는 쁘락치를 침투시켜 교란하고 자극하면 총기가 난무하는 그곳에서 은행도 털리고, 강절도 사건도 나고, 무법천지가 될 것이라고 계산했을 것이다. 그들이 ‘해방구’로서 무질서의 광주를 만드는 게 낫겠다라고 판단하여 전술적으로 일시 퇴각을 했든, 아니면 순전히 무장한 시민군에게 패배하여 쫓겨난 것이든 5.18의 역사적 의미를 찾는 데는 그리 큰 차이가 없을 것이라 본다. 결과적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시피, 광주에서는 1주일 동안 전당포조차도 단 한 군데도 털리지 않고, 총기는 다 회수하여 총기 사고도 안 났고, 이상하게 보이는 자들은 다 잡아다가 조사하는 등 질서 유지에 최선을 다 해 완벽한 성공을 거두었다. 결국 전두환과 신군부가 기획은 했고 전술은 짰으나 자신들 뜻대로 광주는 움직이지 않았던 것이다. 518 광주의 가장 큰 위대함은 바로 여기에 있다.

 

 

타자가 어떤 행위에 대해 기획을 했다 해서 그 기획대로 되지 않은 것은 행위 당사자의 주체성이 발휘되어서 그런 것이다. 그 기획을 했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해서 그 행위자의 행위가 평가절하 되는 것이 아니고 더 평가절상 되는 것이다. 5.18 광주는 그 발단에서부터 전개, 결말까지 신군부의 기획이 있었던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러나 그 어떤 단계에서도 그들의 기획대로 전개되지는 않았던 것 또한 역사적 사실이다. 광주 시민이 그 기획대로 움직여질 정도로 피동적 역사 주체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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