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연왕 풍홍의 '권력욕'과 동아시아 국제분쟁의 서막

  • 기자명 안정준
  • 기사승인 2019.06.03 1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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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연왕 풍홍(馮弘)의 고구려 망명 사건>

가끔 스릴러 영화에서 그런 경우를 본다. 그저 큰 소동 없이 지나갈 수 있었던 작은 일이 등장 인물들의 끝도 없는 욕망에 의해 본의 아니게 아주 큰 사건으로 확대되어 버리고, 급기야 그 사건에 개입했던 인물들 모두가 ‘욕망’의 대가로 인해 겉잡을 수없는 거대한 파멸의 소용돌이로 빨려들어 간다는 내용, 영화 각본에서나 주로 봤음직한 이런 스토리가 고대 역사상에서, 특히 동아시아라는 거대한 국제적 무대를 통해 전개되었다면 어떨까.

이 기나긴 사건을 풀어나가기 위해 우선 풍홍이라는 한 사내의 이력부터 간략히 살펴봐야겠다. 그가 역사상의 기록에 등장한 시기는 중국의 화북 지역이 5호라고 불리는 이민족들의 각축장이 되었던 이른바 ‘5호 16국’ 시대가 서서히 끝나가던 무렵이었다. 5호 16국 시대는 흉노․선비․저족 등의 여러 이민족들이 화북 지역으로 내려와 한족 왕조였던 서진을 멸망시키고 각각의 왕조를 세워 흥망을 거듭하였던 시기였다. 난립한 수많은 왕조들이 늑대처럼 서로 잡아먹으려고 달려들었던 혼란기 속에서 자기 왕조와 왕실만은 어떻게든 부지하려는 권력자들의 노력은 필사적이었고, 그 예하에 놓인 대다수 주민들의 삶은 더욱 피폐해져갔다. 전란을 피하기 위해 자기 고향을 버리고 떠도는 유랑민들의 행렬이 거리마다 가득했고, 군인들에게 짓밟힌 여성과 굶어죽은 아이들의 시체가 들판을 뒤덮었다. 풍홍이라는 인물의 무서운 권력욕과 정치적 생존을 위한 집요한 근성은 바로 이러한 어두운 시대적 분위기속에서 만들어진 것이기도 했다.

풍홍은 원래 한족 출신이었다. 그의 형인 풍발(馮跋)은 요서(遼西) 지역에 있던 후연이라는 왕조의 장수였는데, 당시 황제 모용희(慕容熙)가 포악하여 민심을 잃자 동생 풍홍과 더불어 정변을 일으켰다. 풍홍이 처음 역사서에 모습을 드러낸 것은 바로 이때였다. 황제 모용희를 죽임으로써 후연의 모용씨 왕조를 끝장내버린 풍씨 형제는 그 땅에 새로운 왕조인 북연을 세우는데 일조했다. 그리고 결국 서기 409년에 풍발이 북연 왕조의 2대 천왕으로 등극하기에 이르렀다. 당시 형인 풍발의 신임을 받았던 동생 풍홍도 북연에서 조정의 일을 총괄하는 높은 관직에 올랐다.

그러나 풍홍은 야심가였다. 그의 활동기에는 대부분의 통치자들이 제명에 죽지 못하고 정변에 의해 희생되는 등 왕권이 매우 불안정한 시기였다. 당시 천왕인 풍발의 아들이 이미 태자의 지위에 있었으나, 풍홍 역시 천왕의 가까운 혈육으로서 언젠가 가장 높은 용좌에 오를 날을 고대하고 있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풍홍에게 절호의 기회가 찾아왔다. 그의 형이자 천왕인 풍발이 병환으로 앓아눕게 된 것이다.

풍발은 그의 아들인 태자 풍익(馮翼)에게 국가의 정무를 대신 맡기고자 하였다. 그런데 당시 풍발의 총애를 받았던 송씨 부인이 자신의 아들을 후계자로 삼기 위해 태자 풍익을 비롯한 대신들과 풍발과의 사이를 단절시켰고, 스스로 국정을 농단하고자 했다. 송씨 부인의 계략을 눈치 챈 풍홍은 간신들의 전횡을 바로잡겠다는 명분으로 직접 군사들을 무장시켜서 궁궐로 쳐들어갔다. 정변을 통해 자신이 직접 정권을 장악할 것을 계획했던 것이다.

송씨 부인은 풍홍의 군대가 들어오지 못하게 급히 궁궐의 문을 닫았으나, 풍홍의 부하 한명이 잽싸게 궁궐 담을 넘어서 들어갔다. 그리고 천황인 풍발의 처서 인근으로 달려가서는 옆에서 시중을 들던 여인 한명을 활로 쏴서 죽였다. 가뜩이나 병약해져있던 풍발은 이 광경을 목도하고는 너무 크게 놀란 나머지 그 자리에 털썩 쓰러진 뒤 다시는 일어나지 못했다. 어이없게도 ‘쇼크사’하고 만 것이다. 천왕인 자신의 형이 이렇게 손쉽게 사망해 주었으니 사태는 풍홍의 계획보다 더욱 순조롭게 흘러갔다. 풍홍은 군대를 이끌고 궁궐에 들어와서는 송씨 부인 세력을 제거하고 스스로 천왕의 자리에 즉위하였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교지를 반포하였다.

 

“하늘에서 흉한 재앙이 내려와 천왕께서 임종하게 되었는데도 태자는 왕의 곁에 있지도 않고, 대신들은 문상도 하지 않고 숨어 있다. 내가 이를 지켜보니 사직이 위태롭다고 판단되어 천왕의 아우로서 친히 제위에 올랐다. 만약 국가를 안정시키기 위하여 대신으로서 궁궐의 문을 두드리고 순순히 들어와 항복하는 자가 있다면 그에게 벼슬을 2등급씩 올려주겠다.”

 

궁궐에서 한바탕 정변이 일어났다는 소식에 대부분의 신료들은 자기 집 대문을 걸어 잠그고 사태를 관망하고 있었다. 풍홍은 긴박한 정변의 와중에도 용의주도하게 조정 대신들을 대상으로 자신이 새로운 통치자가 되었다는 사실을 알리는 한편, 자기 쪽으로 순순히 귀순할 경우 좋은 대우를 약속한다는 회유 카드를 꺼내들었다. 신료들 입장에서는 어차피 오랜 세월 동안 숱한 통치자들이 줄줄이 제명에 못 죽는 꼴을 봐온 마당에 풍홍의 정통성 문제 따위로 반기를 들 생각은 없었다. 뒤늦게 풍홍의 속셈을 알아챈 풍발의 장남인 태자 풍익이 군사를 거느리고 나서서 저항해보았으나, 미리 단단히 대비를 하고 있던 풍홍의 군대에게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말았다. 풍홍은 그렇게 손쉽게 북연 정권을 손아귀에 넣었던 것이다.

정변의 와중에 사망한 풍발은 슬하에 태자 풍익을 비롯해 무려 백여 명이나 되는 아들을 두었다고 전한다. 아들만 백여 명이라니 참으로 놀라운 능력이 아닐 수 없지만, 이는 단순히 개인적인 성향 문제만은 아니었다. 당시는 권좌에서 끌어내려진 왕족들이 몰살당하는 일들이 무수히 벌어지던 엄혹한 시기였다. 풍발은 아마도 이러한 비상시국에 대한 대비책으로 자기 종족을 최대한 많이 남기고자 했던 것은 아닐까.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그의 혈족이었던 풍홍은 자신의 천왕 지위를 위협할 수 있는 백여 명의 조카들을 모조리 잡아들여 살해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권력 앞에선 정말 피를 나눈 혈육의 인연도 아무런 소용이 없던 시절이었다.

앞으로 줄곧 다루게 될 풍홍이라는 사내가 북연에서 천왕의 지위를 얻게 된 과정은 그렇게나 비정하고 무지막지한 것이었다. 그리고 이후 그가 북연이라는 국가의 운명을 이끌어간 방식 또한 그의 집권 과정에서 본 모습과 크게 다를 것이 없었다. 다만 풍홍이 무기로 삼았던 서슬 퍼런 권력의 칼은 국가 내부의 적들을 제압하는 데는 매우 효과적이었으나, 국경 밖으로부터의 적들에게는 별반 소용이 없었다. 바로 그것이 국내에서 탄탄대로를 달렸던 풍홍의 인생이 갑작스레 ‘꼬이기’ 시작한 주된 요인이었다.

 

● 안팎으로 무너지는 북연, 그러나 포기할 수 없는 권력

 

풍홍이 집권하였을 무렵은 5호 16국 시대가 사실상 마무리되어 가던 시기였다. 398년에 선비족의 일파인 탁발씨가 건국했던 북위 왕조는 유목민족 출신의 기병을 주축으로 한 막강한 군사력을 바탕으로 화북의 여러 왕조들을 정복하였다. 요서에 있던 북연이 내부적으로 풍씨 일족간의 피비린내 나는 상쟁으로 인해 대외적인 방비에 신경 쓸 여력이 없었던 430년경, 북위는 황제 태무제(太武帝)의 주도 하에 화북의 중심부를 대부분 장악하였고, 그 최후의 칼날을 요서 지역의 북연을 향해 겨누고 있었다.

432년 이래 북위가 강력한 군사력을 바탕으로 북연을 점차 압박해오자, 오랜 내홍으로 인해 지배층의 통합이 약화되고 군사 방비에 소홀했던 풍홍 정권은 큰 위기에 봉착하고 말았다. 사실 대비를 잘했더라도 북연은 이미 영토와 국력 면에서 북위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이제 화북 통일을 완수하려는 북위의 대대적인 침공은 점차 가시화되고 있었다. 북위 태무제는 북연을 압박하기 위해 사신을 파견하여 풍홍의 아들(태자)인 왕인을 북위에 보내도록 요구하였으며, 또 한편으로는 북연의 유력한 인사들을 대상으로 북위로 귀순할 경우 좋은 대우를 해주겠노라 약속하기도 했다. 풍홍의 갑작스러운 찬탈 등으로 북연 내부가 혼란스러운 정국이라는 점을 교묘하게 이용하여 내부의 균열을 꾀한 것이다. 이에 북연 지배층 내부는 크게 동요하기 시작했다.

사실 북연의 주축을 이루고 있던 여러 토착 유력자들은 이미 오래전부터 요서 지역에 정착해 살면서 그곳에 많은 토지와 인민들을 거느리고 있었다. 그들은 애초에 근본을 알 수 없는 풍발․풍홍 등의 무장 세력들을 목숨 걸고 따를 생각 따위는 없었다. 그저 왕위 다툼을 조용히 관망하는 가운데, 자신들의 지위와 부를 안정적으로 유지시켜줄 권력자에게 의탁하고 싶을 뿐이었다. 그들은 430년에 북연의 권력을 잡은 풍홍을 일단 따르긴 했지만, 이제 상황이 바뀌고 있었다. 천하의 형세가 북위 쪽으로 급격히 기울어져가고 있었던 것이다. 토착 유력자들은 내심 북연땅을 조만간 차지하게 될 북위에게 순순히 항복하는 편이 더 낫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반면, 풍홍의 일족과 더불어 그의 집권을 도왔던 무장 세력들의 경우에는 본래 요서 지역에 터전을 두었던 사람들이 적은 편이었다. 이들의 권력과 지위는 궁극적으로 천왕인 풍홍 정권으로부터 나오는 것이었으므로, 북위에게 왕조가 넘어가는 순간 자신들에게는 별반 남을 것이 없었다. 다만 이들도 거대 제국인 북위와 맞부딪쳐봐야 별로 승산이 없다는 점을 알고 있었다. 따라서 풍홍 일파는 일단 북위의 침공을 피해 북연 주민들을 이끌고 다른 곳으로 임시 이주해 있다가, 향후 천하의 정세가 변동하면 기회를 틈 타 다시 요서로 돌아오는 방안을 생각하기에 이르렀다. 즉 일종의 망명 정부를 구상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어디로 가서 머물 것인가. 일단 북위의 손이 미치지 못하는 곳이어야만 했다. 당시 북위의 가장 큰 적대세력이었던 남쪽의 송(宋)나라로 가는 방안이 거론되었으나, 지리적으로 너무 멀어서 많은 주민들이 이동하기 힘든데다, 나중에 다시 요서로 돌아올 수 있을지도 의문스러웠다. 또한 북쪽의 유연은 초원과 사막을 옮겨다니며 목축을 주로 하는 유목세력이었으므로, 주로 한족 농경민인 북연의 주민들이 순순히 따라나서지 않을 가능성이 높았다. 결국 남은 피난처는 단 한곳, 동쪽에 인접한 고구려뿐이었다.

당시 고구려는 장수왕의 재위기였다. 그의 부친인 광개토왕은 뛰어난 군사적 활약을 통해 고구려의 영토를 남쪽으로 한반도 중남부, 서쪽으로 요동 지역, 그리고 북쪽으로 부여 지역까지 크게 확대했으며, 인구도 과거 오나라의 손권 때인 동천왕 재위기보다 무려 3배 가까이 불리는 등 동북방에서 매우 안정된 형세를 구가하고 있었다. 북연은 건국 이후 시종일관 요하를 경계로 영토를 맞대고 있었던 고구려와 우호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던 풍홍은 동쪽의 고구려에 사신을 보내, 향후 위급한 상황이 발생할 경우 북연의 주민들을 이끌고 의탁하겠다는 의사를 전달하고자 했다.

그런데 풍홍이 북연 주민을 이끌고 고구려 망명을 계획하고 있다는 소문이 퍼지자, 북연 내에서 자기 기반을 두고 떠날 생각이 전혀 없었던 많은 유력자들이 풍홍에게 극렬히 반대하고 나섰다.

 

저 천하의 대국인 북위가 요서의 작은 모퉁이에 있는 우리 북연을 공격할 경우, 지금 군사력으로는 도저히 상대가 되지 않을 것입니다. 또한 천왕께서는 고구려로의 망명을 생각하고 계신듯한데, 본디 오랑캐인 그들을 우리가 어떻게 믿을 수 있단 말입니까. 만약 고구려가 처음에 우호적인 척하며 다가왔다가 나중에 갑자기 변심할 경우에는 어찌 하시겠습니까.

 

고구려로의 망명을 반대하는 것은 조정에 있던 많은 토착 유력자들의 입장을 대변한 말이기도 했다. 고구려가 정말 우리의 안전을 끝까지 보장해줄 것인가. 만약 고구려로 대규모 주민들과 함께 넘어갔다가 나중에 다시 요서 일대로 온전히 돌아올 수 없게 되면 어떻게 할 것인가. 특히 요서 일대에 자기 토지나 재산을 잔뜩 가지고 있는 유력자들의 경우에는 차라리 북위에 얌전하게 항복해서 원래의 정치․경제․사회적 기반을 유지하는 쪽이 더 매력적으로 느껴졌을 것이다. 풍홍은 주변 신료들이 점차 동요하는 것을 느꼈다. 저런 발언들을 계속 용인하다보면 북연 조정에서 이탈하는 세력만 더욱 늘어갈 뿐이다. 신료들 가운데 유훈이라는 자가 또다시 풍홍에게 대들고 나섰다.

 

만약 태자 왕인을 북위로 보내지 않으시다가 북위의 대군이 쳐들어와 우리를 멸망시키려고 하면 어찌 하시겠습니까. 옛날 촉나라와 오나라 모두 험난한 지형을 이용해 버텼지만 결국 사마씨의 서진에게 멸망했습니다. 하물며 지금 북위는 옛날의 서진보다도 훨씬 강력한데 비해 우리 북연은 과거에 남쪽에 있었던 오나라․촉나라보다도 국력이 훨씬 약합니다. 조속히 태자 왕인을 보내시어 대국인 북위의 명령에 따르십시오.

 

북위로 태자를 보내자는 것은 결국 항복하여 나라를 갖다 바치기 위한 사전 작업에 지나지 않았다. 더 이상 반대파의 발언들을 용인해서는 안 되겠다고 판단한 풍홍은 유훈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큰 칼을 든 부월수를 호출했다. 곧이어 풍홍이 살기 어린 표정을 한 채 소리쳤다. “당장 저자의 목을 쳐서 궐밖에 내걸어라!” 풍홍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꿇어앉아 있던 유훈의 목에서 피가 솟구쳤고, 백발의 머리가 땅바닥에 떨어져 힘없이 굴렀다.

 

“다시는 내 앞에서 태자를 북위에 보내겠다는 말을 입 밖에 꺼내지 말라!”

 

풍홍의 겁박은 효과적이었다. 그 후 풍홍 앞에서 그의 정책을 대놓고 비판하거나 반대하는 사람은 없었다. 다만 이는 일시적인 효과였을 뿐이다. 반대파들은 풍홍의 으름장에 기가 질려있긴 했지만, 그 가운데 어느 누구도 고구려로의 망명을 선뜻 찬성하고 나서지도 않았다. 그리고 풍홍은 점차 이들 반대파로부터 신변의 위협까지 느끼게 되었다. 이제 풍홍에게는 남은 시간이 많지 않았다. 그는 반대파 대신들 몰래 고구려로 사람을 보내어 향후의 망명의사를 계속 타진하게 했다. 하지만 고구려가 과연 당시 화북의 거대 제국으로 성장한 북위의 뜻을 거슬러가면서 풍홍 집단의 신변 안전과 망명정부 유지에 협력해줄 것인지는 미지수였다. 결국 망명 작전의 성패는 도통 속내를 알 수 없는 동쪽 ‘오랑캐’, 고구려에게 달려있었다.

(2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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