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이란? 혼자 기획하고 실행에 옮기는 '축제'

  • 기자명 탁재형
  • 기사승인 2019.07.23 09:25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인도네시아 발리에 와 있다. 7년째 진행중인 여행 팟캐스트 <탁PD의 여행수다>의 청취자들과 함께 떠나온 여행이다. 패키지이면서 패키지 같지 않은 맛이 있다. 모두를 아우를 수 있는 관심사(여행)가 있다 보니, 처음 보는 사람들끼리도 금세 친해진다. 아는 이들끼리 떠나온 듯한 느긋한 분위기가, 결코 작지 않은 규모의 사람들을 모나지 않게 만든다. 그렇다 보니, 다음날 진행될 복수의 일정들에 대해 바로 전날 선택을 하게 만드는, 어찌 보면 패키지에선 위험천만하기 짝이 없는 여행 컨셉에도 전폭적인 지지가 돌아온다. (물론 떠나기 전에 이렇게 진행됨을 미리 고지했다.) 지난 세월에 감사하는 요 며칠간이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적응을 힘들어하는 분이 보인다. 여행 경험의 많고 적음과는 무관하다. 애당초 바라는 바가 너무 크셨던 것이 아닐까 싶어 안타까운 마음이 든다. 개인적으로 가이드를 고용해 진행하는 여행이 아니다 보니, 어떤 부분에선 스스로 선택하고, 앞으로 나서고, 주도적으로 결정해야 하는 부분이 있음에도 그것들이 미리 준비되어 있지 않음에 섭섭해한다. 충분한 선택지가 주어졌음에도, 그 선택을 자기 앞에 놓아둔 것에 대해 불편해하고 노여워한다. 이런 분들을 만족시키는 방법은 딱 한가지다. 사전에 심리상담 수준의 미팅을 통해 정확한 니즈를 파악하고, 계속적인 계획 제시를 통해 모든 부분에 대한 컨펌을 받아내야 한다. 설령 그렇게 진행한다 한들, 막상 현지에 와서 자기 생각과 다른 부분에 대해서는 컴플레인을 늘어놓을 가능성이 높다. 이런 분들을 보며 드는 생각은, ‘아, 정말 축제를 즐기는 법을 너무 모르는구나’라는 안타까움이다.

인도네시아 발리 리자사 아궁 리조트. 촬영: 탁재형
인도네시아 발리 리자사 아궁 리조트. 촬영: 탁재형
인도네시아 발리 리자사 아궁 리조트. 촬영: 탁재형

 

여행과 여러 면에서 속성을 공유하는 것이 축제다. 둘은 공히 비일상이 우리 삶의 전면으로 나서는 순간이다. 전자가 좀 더 개인적인 것이라면, 후자는 조직적인 것이라는 데 차이가 있을 뿐이다. 비일상의 폭발적인 표출이라는 축제의 속성은, 남미의 카니발을 살펴보면 더욱 도드라진다. 굳이 브라질의 히우 카니발을 들먹이지 않더라도, 남미의 거의 모든 도시들은 저마다의 카니발을 기리고, 즐긴다. 카니발(Carnival)의 어원은 ‘고기여, 안녕’ 또는 ‘고기를 들어내다’는 뜻의 ‘Carne Levare’라는 라틴어다. 이 단어가 축제의 대명사가 된 것은 기독교의 절기인 사순절과 연관이 있다. 예수가 십자가에 못박히기 전, 로마인 총독에게 고난을 당했던 것을 생각하며 40일간 금식하고 기도하는 시기가 바로 사순절이다. 당연히 힘들고 고될 수 밖에 없다. 어지간히 종교적 열정으로 가득찬 사람이 아니고서는 돌아오는 것이 달갑지 않을 수밖에 없다. 이 시기를 나기 위한 고육지책으로, 그 직전의 일주일간 행했던 것이 바로 카니발이다. 이 시기엔 먹는 것은 물론 윤리적인 면에서도 어느 정도의 일탈이 용인되었다. 고난의 행군에 돌입하기 전, 고기와 술을 마음껏 먹고, 살아있음으로 인해 누릴 수 있는 기쁨을 마음껏 맛보라는 것이다. 겨울잠에 들어가기 전 양껏 배를 불리는 회색곰처럼, 행복의 에너지를 잔뜩 비축해 그것으로 어렵고 힘든 사순절을 정면돌파해 나가라는 선인들의 지혜가 아닐 수 없다. 그렇다면 가톨릭의 축일인 카니발이 남미 전역에 이토록 성공적으로 이식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남미를 여러 번 방문하면서 놀랐던 것은, 그 땅의 비옥함이었다. 무엇을 옮겨오던 무엇을 경작하던, 원산지보다 크고 무성하게 자란다. 이것이 남미에 대한 신의 축복이자, 저주였던 것이다. 소아시아 원산의 포도나, 남인도 태생의 사탕수수, 그리고 아프리카에서 건너온 커피는 현재 남미에서 훨씬 더 많이 재배되고 있다. 그리고 이런 농업의 초기 형태는(물론 지금도 일정부분 비슷하겠지만) 백인 농장주와 대규모 노예노동을 두 개의 축으로 하는 플랜테이션 체제였다. 농장주의 입장에서는 노예 하나하나가 노동의 단위이자 자산이다 보니, 이들의 일과를 철저히 노동의 효율이라는 가치 중심으로 통제할 수 밖에 없었다. ‘노예 12년’이라는 영화를 보면(물론 이것은 북미의 목화밭을 무대로 하긴 하지만) 이 당시의 노예노동이 어떤 것이었는가에 대한 대략의 인상을 얻을 수 있다. 일어나서, 농장으로 가서, 강제 노동을 하고, 그 날의 작업량에 대한 평가를 받고, 이에 대한 포상이나 체벌을 받고, 휴식을 취하고, 잠을 자고, 다시 일터로 향한다. 이 루틴에는 어떠한 개인적 자유도 – 심지어는 인간적인 따뜻함과 사랑을 나눌 시간마저도 – 포함되어 있지 않다. 이런 생활이 1년 365일 반복되면, 당연히 배기관이 막힌 압력밥솥처럼 어느 순간 폭발할 수밖에 없다. 적절한 시점에 고조되는 압력을 배출해주는 것이야말로, 노예들의 불만을 최소화하며 이윤을 최대화할 수 있는 농장 경영의 비법이기도 했다. 이런 이유로 농장주들이 흑인 노예들에게 소개했던 문화가 바로 카니발이다. 1년에 단 한 주. 이 시기만큼은 마음껏 먹고, 마시고, 쉬고, 심지어 섹스할 자유가 주어진다. 노동력의 재생산이라는 점에서도 이 정책은 영리하기 짝이 없다. 평시에 노예들의 에너지가 ‘그’ 방면으로 낭비되는 것을 막는 동시에, 비슷한 시기에 다음 세대의 노예를 임신하도록 유도해 농장 경영의 지속성을 담보한다. 노예들의 입장에서는 잊을 수 없는 달콤한 기억을 1년 내내 기억하며, 오로지 그 날만 보고 살아가게 된다. 그래서 축제는 행복한 동시에 슬프고, 충만한 동시에 허무하다.

 

그 도입에 얽힌 스토리야 어찌되었건, 사는 내내 계속되는 사순절을 견디기 위한 힘을 얻는 행위로서의 축제는 행복한 삶을 위해 없어서는 안되는 요소가 되어버렸다. 애당초 허무하기에 축제가 필요없다는 논리는 어차피 죽을 것이기에 사랑할 필요가 없다는 논리만큼이나 공허하다. 하나의 축제가 탄생하기 위해선 많은 사람들의 협업이 필요하다. 때로는 한 단체가, 도시가, 국가가 나서서 조직하고 기획해서 선보이는 것이 축제다. 이 축제를 가장 재미있게 즐기는 사람들은 바로, 직접 나서서 이번엔 어떤 가면을 준비할지, 어떤 춤을 출지, 어떤 행렬을 앞세울지 결정하고 직접 그 판에 뛰어드는 사람들이다. 축제 중에는 많은 사람이 필요하지 않는 것도 있다. 혼밥, 혼술, 혼영의 시대에 딱 맞는, 혼자서 기획하고 혼자 실행에 옮겨 혼자 즐길 수 있는 축제. 그것이 바로 여행이다. 아무리 패키지 여행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을 선택하기까지의 과정은 개인적 선택의 연속이다. 그리고 그 실행과정에서 주어지는 여러 옵션에 대한 선택의 주체는 다름아닌 그 축제의 준비 및 실행위원장인 자기 자신인 것이다. 선택지가 많은 여행일수록 성공적인 여행이 될 수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축제의 결정권을 모두 남에게 미룬 채, 그것이 주는 달콤함에만 관심을 두는 사람들을 200년 전의 브라질에서는 이렇게 불렀다.

‘이스끄라보’(Escravo).

‘노예’라는 뜻이다.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오늘의 이슈
모바일버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