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공과 민주주의' 토대로 '극일'과 '지일'을 오간 김대중

  • 기자명 김수민
  • 기사승인 2019.08.16 08: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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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손잡이' 김대중과 압축현대 정치사  

오는 18일은 김대중 전 대통령 서거 10주기다. 이에 앞선 지난 13일, 연세대학교 김대중도서관은 그동안 드러나지 않았던 김대중 전 대통령의 기록물을 공개했다. 현재 시국과 맞물려 눈길을 모을 수밖에 없는 '대일인식' 기록물이었다. 청년기 건국준비위원회 목포지부에 가담할 만큼 독립의식이 끓었으면서도 1960년대에는 일본과의 외교정상화에 찬성한 그의 복합적인 대일인식이 나타난다.

"악독한 공산침략에 직면해 전 자유진영이 그의 생존을 위해 굳게 단결해야 할 차제(此際)". "태평양반공동맹에 있어서도 같이 중추적 역할을 해야 할 한일 양국의 반목 대립은 아주(亞洲) 반공세력의 강화는 물론 전기(前記) 반공동맹의 추진에도 치명적 지장을 초래할 것". "우리는 단호히 일본의 옳지 못한 태도의 시정을 얻음으로써만이 진실로 영원한 양국 친선의 튼튼한 기초를 닦을 수 있는 것." 1953년 10월 2일 언론에 게재한 '한일 우호의 길'의 일부다. 그리고 20여년이 지난 1973년 1월, 김대중은 일본 '주오공론'(中央公論)에 기고한 '조국 한국의 비통한 현실, 독재정치의 도미노적 파급'에서는 '아시아 민주공동체'(가칭)의 조직을 제안한다.

이번에 공개된 일련의 기록물을 보면, 대일인식도 대일인식이지만, '양손잡이'라고 부를 만한 김대중의 사상구조가 엿보인다. 그가 한일관계의 두 주춧돌로 제시한 것은 '반공'과 '민주주의'다. 반공은 한일을 포괄하는 현실의 블록이었고, 민주주의는 한일 양쪽이 다 표방하는 이상이었다. 물론 한일 역사에서 번번이 민주주의와 반공이 충돌했던 역사를 아는 사람이라면, 둘 모두를 추구하는 것이 강제된 길로 비쳐질 수도 있고, 나아가 억지를 무릅쓴 접합이거나 심지어 모순으로 여겨질 수도 있다. 하지만 김대중의 생애에서 민주주의와 반공은 통합되어 있었다.

1953년 10월 2일 '한일 우호의 길' 기고문. "악독한 공산침략에 직면해 전 자유진영이 그의 생존을 위해 굳게 단결해야 할 차제(此際)"라며 "태평양반공동맹에 있어서도 같이 중추적 역할을 해야 할 한일 양국의 반목 대립은 아주(亞洲) 반공세력의 강화는 물론 전기(前記) 반공동맹의 추진에도 치명적 지장을 초래할 것"이라고 적혀 있다. 김대중도서관 제공.

 

민주주의와 반공, 사민주의와 신자유주의

김대중은 해방정국기 한때 좌익인 조선신민당에 참여했다가 공산주의자들이 소련을 조국처럼 여기는 풍토에 분개해 이탈했다. 미국에서 오래 살다 돌아온 서재필을 존경해서 대통령 후보로 강력하게 추천했던 김대중의 근본적이고 1차적인 정체성은 '개화파'였다고도 볼 수 있고, 그에게는 자유민주주의•자본주의 시장경제•미국과 서구(+전후 일본)가 인민민주주의•공산주의•소련과 중국보다 더 개화적으로 보였을 터이다. 그는 분단과 전쟁을 거친 대한민국의 현실을 인정했고, 무엇보다도 그 자신이 전쟁 도중에 인민군에게 학살을 당할 뻔했다.

 

김대중의 '반공민주주의'가 한반도나 동북아시아에 국한된 사상인 것도 아니다. 그가 '한일 우호의 길'을 쓰기 2년 전인 1951년, 세계 사회민주주의 정당의 모임인 사회주의인터내셔널은 '프랑크푸르트 선언'을 발표한다. 이들은 소련 스탈린주의를 위시한 당대의 현실 공산주의를 '일당독재', '전체주의', '새로운 제국주의', '새로운 계급사회'라고 비난했다. 반면 자신들의 '사회주의'는 민주주의를 기반으로 하면서 민주주의를 발전시키는 운동 및 사상으로 정의했다. 프랑크푸르트 선언은 김대중이 '자본주의 대 사회주의'의 대결에 관해 줄곧 견지했던 '민주적인 자본주의와 민주적인 사회주의가 승리할 것이고, 자본주의든 사회주의든 독재를 하는 쪽은 질 것'이라는 전망과 상통한다. SI의 '반공 사회주의'가 성립될 수 있다면, 김대중의 '반공 민주주의' 역시 성립가능하다.

 

그렇다면 김대중의 정치경제사상은 민주주의의 스펙트럼 가운데 어디쯤 위치하고 있는가. SI처럼 사회민주주의인가, 아니면 그와 다른 영역에 있는가. 이에 관해서도 그에 대한 평가는 당대에서든 역사적으로든 그의 '양손'을 가리키고 있다. 그는 국회의원이 되기 전 시사평론가로 활동하면서 노동 문제에 가장 깊은 관심을 가진 진보 논객이었다. 1970년대 들어 대선주자급으로 발돋움하면서는 서민중심의 적극적 분배를 주축으로 하는 '대중경제론'을 폈다. 이는 좌파 경제학자인 박현채의 '민족경제론'을 현실정치적으로 번역한 산물이었다. 대통령 김대중은 ▲기초생활보장법 ▲건강보험통합 ▲국민연금 시행 ▲고용산재 보험 확대 ▲의약분업 등 '시혜가 아닌 권리로서의 복지'의 밑바탕을 마련했다. 정치가 김대중은 국외에서도 빌리 브란트(서독), 올로프 팔메(스웨덴) 같은 사민주의 계열의 정치가들과도 교분을 맺었고 그의 소속정당인 새천년민주당은 SI에 옵저버 자격으로 참석하기도 했다. 국제정치에서도 그는 '중도좌파 사회민주주의자'로 비쳐지기 쉽다.

 

하지만 노년 정치인 김대중이 청장년 논객 김대중과 같지는 않았다. '대중경제론'의 브레인이 박현채에서 유종근으로 옮겨가며 1990년대 나온 '대중경제참여론'은 시장주의적 색채를 띠기 시작한다. 그러면서 그는 슬슬 '보수'를 자임하기도 했는데, 따지고 보면 그는 진보정당 또는 그 선배격인 '혁신정당'에 몸담은 적이 없었다. 집권 이후에도 넬슨 만델라처럼 '민주화로 집권하여 신자유주의적 정책을 폈다'는 평가를 들었다. 강도높은 구조조정이나 철도민영화 추진이 그 대표 사례다. 김대중 정부의 '생산적 복지'는 단지 '생산성도 높이는 복지'가 아니라 신자유주의를 보완하는 복지의 성격도 짙다. 1970년대 말부터 불어닥쳤고, 미국 레이건 정부나 영국 대처 정부에 앞서 영국 노동당 같은 좌파세력이 먼저 추진했던 신자유주의의 파고, 그러니까 시장화, 금융화, 작은정부, 균형재정 이데올로기 등등을, 그것도 IMF 국면에서 넘어서는 것은 그로서도 힘에 부치는 일이었을지 모른다.

 

분명한 건 정치가 김대중은 극일과 지일에, 반공과 민주주의에, 사회민주주의와 신자유주의에 걸쳐져 있는 양손잡이 정치인이었다. 그는 오랫동안 정치를 했고 그가 살았던 시대는 긴 만큼이나 파란만장했다. 1인 1역에 그치기에는 너무나 변화무쌍한 드라마였다. 그랬기에 길항하거나 상충하는 가치나 기조들을 자연스레 양손에 들게 되었다. 김대중의 이런 특징은 정치체제•선거제도•정부형태(권력구조)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우선 김대중이 정치인생 대부분을 대통령제 지지에 쓴 것은 사실이다. 장면 총리를 존경했던 그도 그 총리가 서 있었던 의원내각제까지 복원하려 하지는 않았다. 그는 회고록에 이렇게 썼다. "나는 오랫동안 대통령 중심제를 지지해왔다. 이를 관철하기 위해서 목숨을 걸고 싸웠다. 그리고 국민과 함께 직선 대통령제를 쟁취하여 대통령직을 수행했다." 전두환 정권 후반기에는 집권세력과 야권 일각에서 함께 제기된 의원내각제 개헌론을, 김영삼과 손잡고 거부했다. 1992년, 1996년 총선에서도 야당 지도자 김대중은 '(의원내각제 등의) 개헌을 저지할 의석을 달라'고 했다. 1997년 대선을 앞두고는 새정치국민회의 김대중 후보는 자유민주연합 김종필 총재와 단일화하며 의원내각제 개헌을 약속했다. 그러나 "국회에서 3분의 2 이상의 찬성표를 얻어야 할 개헌은 어차피 어렵다", "국민회의, 자민련의 연합은 김대중 정권 중간에 깨질 것"이라는 관측은 현실로 나타났다. 거기다 대선 경쟁자였던 이회창과 그 소속당 한나라당도 의원내각제를 거부함으로써 개헌 가능성은 되레 바닥에 가까워졌다.

 

김대중은 회고록에서 대통령제의 여러 유형중에서도 '4년 중임 정•부통령제'를 원했다고 썼다. "우리나라에도 부통령이 있어야 한다. 정•부통령이 있다면 한쪽이 개혁적이라면 다른 한쪽은 보수적 인물일 수 있고, 한쪽이 동쪽 출신이면 다른 한 사람은 서쪽 출신일 수도 있다. 또 대통령에 집중된 의전 부담도 줄일 수 있고, 대통령 유고시에 국정 중단을 막을 수도 있다. 이렇듯 권력 상층부가 서로를 인정하면 망국적 이념 공세나 지역 감정을 넘어설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런 이유로 1987년 이후 민주화 항쟁 이후 직선제 개헌을 할 때 4년 중임제의 정•부통령제를 주장했다. 그러나 이미 알려진 대로 여당이 나와 김영삼 씨의 연대를 두려워해서 이를 극력 반대한 것이다."

 

4년 중임 정•부통령제는 미국식이다. 미국 부통령의 권한은 그리 강하지 않다. 다만 출신 지역이나 이념 성향을 고려해 대통령(후보)과 부통령(후보)을 짝 짓는 것은 국민통합의 강한 제스춰로 비쳐질 수 있다. 더 확실한 것은 거대정당의 통합성을 제고하는 효과가 있다. 큰 정당을 만드느라 이질성이 강한 세력이 모여들 경우, 이 정파 저 파벌이 자리를 나눠갖는 건 당의 대오를 유지하는 유력한 방법이다. 단지 정•부통령제 때문만은 아니겠지만 미국 정치에는 양당제를 구성할 만한 거대정당이 자리잡고 있다.

유신정권에 맞서 일본에서 망명투쟁을 하던 김대중의 1973년 4월 10일 친필 메모. "일본(日本)의 경제력(經濟力), 팽창(膨脹) - 재군비(再軍備), 핵무장(核武裝) - 대국야욕(大國野慾), 그들은 지배(支配)냐 종속(從屬)밖에 모른다. 연결(連結)될 것인가?"라고 적혀있다.

 

양당제와 다당체제의 교차로에서

김대중은 또 하나의 '미국적 구조'인 양당제도 지향했다. 1954년 제3대 국회의원 선거에 도전할 때만 해도 노조의 지지를 받는 무소속 후보로 나서서 낙선했으나, 1956년 민주당 신파의 일원이 되면서 거대정당 노선을 걷는다. 그는 이승만-박정희 독재 정권의 대항마를 통합야당 바깥에서 찾을 수 없었다고 볼 수 있다. 예외적 시기는 1987년의 민주화 직후였다. 야당통합 대신 자신이 확고하게 주도하는 평화민주당의 창당을 택했고, 1988년 총선을 통해 얻은 제1야당의 지위를 갖고 노태우 정부를 상대로 능동적인 투쟁과 협상을 벌였다.

 

이 시기의 다당체제는 3당합당으로 깨어지게 되는데, 이후 김대중은 다시 양당체제를 굳히는 행보에 들어간다. 3당합당에 동참하지 않은 세력이나 재야 운동가들과 통합에 나서며 1992년 대선을 준비했고, 1997년 대선에서는 기존의 여권에서 떨어져나온 김종필세력(자민련)과 연합했다. 김대중세력은 결국 충청 지역 기반이 강한 김종필세력과 결별했지만, 또다른 충청 지역 대선주자인 이인제를 끌어들여두었다. 덕분에 2000년 총선에서 자민련을 멀찍이 따돌리고 제1야당 한나라당과 함께 87년 이후 가장 양당제의 성격이 강한 정당체제를 이룬다. 2002년 민주당 노무현 후보가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를 상대로 접전 끝에 승리한 것은 김대중식 '양당제 프로젝트'의 절정이었다. 그는 노무현 정권기에도 민주당-열린우리당 분당에 비판적이었고, 2007년 대선을 앞두고도 통합을 강하게 주문했다.

 

그렇다면 그는 대통령제 및 양당제뿐 아니라 선거제도까지도 미국식을 지향했는가? 상당히 그렇다. 유신•제5공화국기 총선에서 쓰인 2인선거구제(1개 선거구에서 1, 2위 득표자 두 명을 당선시키는 제도)를 한 선거구당 한 당선자가 나오는 소선거구제로 바꾸는 데 그가 가장 앞장섰다. 이 소선거구제는 지역할거구도 때문에 당장의 1988년 총선에서는 4당체제를 만들었지만, 두고두고 거대양당체제의 거름으로 쓰인 것이 사실이다. 이러한 대통령제-양당제-소선거구제는 정권교체의 가능성을 높여주는, 다시 말해 김대중세력의 집권에 용이한 종합세트였다. 그리고 동시에 신진세력의 등장과 다당체제를 가로막는 장벽이었다.

 

다만 김대중노선이 다원주의적 정치를 궁극적으로 차단한 것은 아니다. 그가 집권한 뒤 민주노총과 전교조가 합법화되고 진보적이고 독자적인 노동자정당의 활로가 열렸다. 정권교체 자체가 새로운 정당에 관심을 돌릴 수 있는 배경이기도 했다. 헌법재판소의 판결이 결정적이긴 했지만,  어쨌거나 정당명부 비례대표제의 도입도 그가 대통령이던 시절에 이뤄졌다. 김대중 정부 나름의 선거제도 개혁안도 있었다. 지역구 의원수와 비례대표 의원수를 1대1로 만드는 방안이 나온 것이다. 연동형 비례대표제를 실시하기 어려운 환경에서 그나마 비례성을 증대하는 방안이었다. 비례대표를 권역별로 선출한다는 구체안은 '영남 지역에서도 민주당 의원이 나온다'는 수준의 목적을 띠고 있지만, 그 틈새로 소수정당이 들어갈 여지도 얼마간 열릴 수 있었다. 이 방안은 실현되지 않았으나, 선거제도 개혁운동측이 '김대중 정부부터 이미 선거제도 개혁을 추진했다'며 두고두고 민주당을 압박할 수 있는 징표가 되었다.

 

무엇보다 김대중과 그를 중심으로 한 정당이나 정부 스스로가 다당체제의 긍정성을 만끽했던 적이 있었음을 상기시켜야겠다. 4당체제였던 1988~1990년은 협상이 원활했던 정국이었다. 1997년 대선의 4자구도에서도, 김대중은 남의 표밭(김종필 지지층)을 자신에게 연결시키는 동시에, 상대 표밭은 이회창과 이인제 후보로 분할되는 특수를 누렸다. 김대중이 일단 양당제를 추구한 배경에는 지역구도에 따른 다당체제보다는 이념과 정책에 따른 양당제가 더 낫다는 확신도 깔려 있었을 것이다. 인도를 포함한 나라들의 정치체제를 보면 꼭 다당체제라고 해서 민주적인 것은 아님을 알 수 있다. 김대중의 양당제 선호가 한쪽을 자기 중심으로 뭉치게 만들려는 그의 권력의지와 얽힌 것이라고 비판할 수도 있겠지만, 이를 달리 보면 김대중 세대 이후의 한국정치에는 양당제가 필요하지 않다는 의미일 수 있다.

 

생을 마감하기 전 김대중이 그린 한국정치의 미래는 어땠을까. 앞서 인용한 회고록의 대목 바로 다음에는 뜻밖의 내용들이 나온다. "지금도 정·부통령제를 마음에 두고 있지만 또 한편으로는 생각이 많이 달라졌다. 대통령제 하에서 10명의 대통령이 있었다.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 같은 독재자들이 비극적 종말을 맞았지만 그 후로도 독재자나 그 아류들이 출현했다. 이를 막기 위해 이제는 대통령 중심제를 바꾸는 것도 고려해봄직하다. 5년 단임제는 책임을 물을 방법이 없다. 이제는 민의를 따르지 않는 독재자는 민의로 퇴출시켜야 할 때가 되었다. 이원 집정부제나 내각 책임제를 도입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본다. 10년 동안의 민주 정부가 많은 것을 변화시켰고, 우리 국민의 민주주의에 대한 의식이 매우 성숙했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가 돌아가고 이 회고록이 남겨진 것은 이명박 정권기다. "그나마 대통령제라서 김대중•노무현이라는 카리스마적 인물을 내세워 민주당이 집권할 수 있었지, 국회가 정부를 꾸리는 체제에서는 한나라당이 계속 집권하기 쉽다"는 진단이 매우 설득력 있던 시점이었다. 그럼에도 김대중은 이제는 한국민의 민주주의 의식이 성숙했다며 이원정부제와 내각책임제를 꺼내들었다. 민의를 따르지 않는 지도자를 민의로 퇴출시켜야 한다는 대목은 박근혜게이트를 예견한 것 같은 착각을 불러 일으킨다. 박근혜는 국회의원 2/3 이상의 탄핵소추안 찬성과 헌법재판관의 인용 판결을 거쳐서야 파면당했다. 의원내각제나 이원정부제에서라면 박근혜와 같은 총리는 국회의원 과반이 동의한 내각불신임만으로 권좌에서 내려와야 한다.

1983년 '옥중서신' 친필 서문. 김대중 대통령은 자신을 위해 구명운동을 진행하는 일본인들에게 감사의 뜻을 표하며 "몇 겹으로 닫힌 한일(韓日) 양국민(兩國民) 사이의 문(門)을 뜻있는 동지(同志)들과의 협력(協力)으로 하루 속(速)히 열어젖혀야 한다"고 적었다. 김대중도서관 제공

 

역사가 발전해도 왜 지도자의 잘못을 못 바로잡는가

돌아보면 김대중이 의원내각제나 이원정부제에 호의를 열어둔 것이 의외는 아니다. 4.19 이후 청년정치인 김대중이 집권 민주당의 대변인을 맡았을 때 정부형태는 의원내각제였다. 5.16 이후 36년만에 그가 대통령이 되면서는 2개의 여당이 연정으로 정부를 꾸렸다. 한국 헌정사상 청와대 대비 내각의 힘 그리고 대통령 대비 여당의 힘이 가장 강했던 시절, 그러니까 가장 의원내각제적으로 대통령제가 운용된 시절이었다. 그와 교분을 맺은 빌리 브란트, 올로프 팔메 같은 정치인들 상당수도 의원내각제에서 배출되었다. 김대중은 왜 정부형태를 바꿔야 하는지, 각 정부형태의 차이가 무엇인지, 회고록에서 구체적으로 제시하지는 않았다. 노 정치인 치고는 나이브한 감도 있다. 하지만 생애 막바지에 남은 사람들을 향해 꺼낸 이야기가 저것이었다.

 

개헌으로 새로 만들어야 할 정부형태가 어떤 것인지, 한국사회는 갈피도 못 잡을 뿐더러 논쟁도 활발하지 않다. 하지만 김대중의 마지막 고민은 한국을 넘어섰다. 그는 한국만이 아니라 미국을 향해서도 대통령제의 중간 결산 혹은 극복을 시사했다. 미국이 대통령제 본산국가임을 감안하면, 대통령제를 근본적으로 회의한 것이라고 본다. 이어지는 회고록 문장이다. "미국도 마찬가지다. 한때는 성공한 대통령 중심제 나라의 표본이었지만 부시 대통령의 8년 실정은 참담하다. 지구촌과 그 속의 인류에게 끼친 해악이 크다. 내정•외교 모든 분야에서 실패했다. 그러면서도 어떤 제어도 하지 못하고 꼼짝없이 그 속에서 살아야 했다."

 

김대중은 "인생은 아름답고 역사는 발전한다"고 믿었다. 그러나 인생 막바지에 부시나 이명박이라는 국가지도자를 보고도 역사발전의 진리만을 믿고 낙관할 수는 없었던 것 같다. 그들 지도자의 수준이 낮아서가 아니라, 한미 양국의 정치체제가 그런 통치자를 제어 내지 제거하지 못하게 설계되었기 때문에 절망한 것이다. 이르게 답을 내릴 수 없더라도, 문제풀이의 실마리조차 잡히지 않는다 할지라도, 김대중 전 대통령 10주기를 맞아 다음의 구절은 같이 곱씹어보자. "그토록 우리가 문명과 이성을 발달시켰어도 지도자의 잘못 하나 바로잡을 수 없음이 속상하다. 그것이 변함없는 권력의 속성이라면 제도를 통해 예방책을 모색해야 할 것이다."

 

*참고문헌

김대중, <김대중 자서전 1, 2>, 삼인, 2010

연합뉴스, '김대중도서관, DJ '대일인식' 기록물 첫 공개(종합)', 2019.8.13.

김유 편역, <사회주의 인터내셔널과 사회민주주의 정당>, 인간과사회, 2003

안수찬, '청년 DJ와 대통령 DJ의 가상대화', <한겨레21> 제775호, 2009.8.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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