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경제 보복이 촉발한 한일 갈등은 현재진행형이다. 이 글을 쓰는 시점에도 언제 해결될지 짐작하기 힘들다. 언론 보도에 대한 평가는 사태가 마무리된 이후에 쓰는 것이 일반적이다. 하지만 최근 한일 갈등에 대한 언론 보도에 대해서는 여러 곳에서 문제점을 지적하고 있다. 진행 중인 사안이지만 평가하지 않을 수 없다.
먼저 ‘국익 보도’에 대해 간단히 언급하고자 한다. 최근 언론 보도를 바라보는 프레임 중 하나로 ‘애국’이란 단어가 등장했다. 조국 전 청와대 민정수석이 7월 18일 본인의 페이스북에 “대한민국은 경제전쟁 중”이라 며 “중요한 것은 진보냐 보수냐, 좌냐 우냐가 아니라, ‘애국이냐 이적이냐’다”라고 주장하면서 논란이 불거졌다. 현재 상황을 ‘전쟁’으로 규정하고 일본과의 전쟁에 동참하지 않는 것을 이적행위로 규정한 것이다. 이미 특정 언론 보도를 놓고 ‘매국’, ‘친일’이란 세간의 비판이 불거진 상황에서 조 전 수석의 발언은 불에 기름을 끼얹은 꼴이 됐다.
그동안 국익 보도 논쟁은 국민의 알 권리와 이른바 ‘국익’이 충돌하는 상황에서 주로 불거졌다. 1960년대 독일 ‘슈피겔지 사건’, 1970년대 일본 ‘니시야마 기자 사건’, 1990년대 걸프전과 2001년 9·11테러 당시 미국의 정보 통제 등이 대표적 예다. 정부 방침이나 비밀 문건 언론 보도가 국가 안보와 국익을 해치는 것이 아닌가 하는 논란이다. 한국의 경우 2005년 ‘황우석 사태’를 계기로 ‘국익 보도 자체의 정당성’에 대한 논쟁이 불거졌다. 황우석 박사의 논문 조작이 밝혀지기 전에 황 박사의 난자 채취 윤리 위반과 비리 의혹을 제기한 MBC
한국은 선, 일본은 악?
이 글은 한일관계 언론 보도를 ‘국익’의 관점에서 재단하지 않을 것이다. 국가적 갈등 상황에서 다양한 시각의 보도가 나오는 것은 당연하다. 인조가 남한산 성에 갇혀 있을 때도 주전론과 주화론이 부딪혔다. 이 글에서는 한국 언론이 얼마나 사태를 정확하게 보도했는지, 상황을 종합적으로 분석했는지, 사실관계의 왜곡은 없었는지 살펴본다.
한일 갈등 국면에서 한국 언론 보도의 특징은 ‘듣고 싶은 것'만 보도하는 경향이 매우 강했다는 것이다. 갈등 국면에서 ‘애국 프레임’과 ‘친일 프레임’이 작동하면서 문재인 정부 정책을 비판하는 언론은 강한 비난에 직면하게 됐다. 강한 톤으로 정부의 대일정책을 비판한 것은 보수 언론이었다. 이 중 조선일보와 동아일보는 과거 친일 행각 논란이 있던 곳이다. 결국 ‘정부 비판 언론=친일 언론’이란 등식이 대중에게 어느 정도 각인된 상태에서 언론은 일본을 조금이라도 우호적으로 평가하는 것에 상당한 부담을 느낄 수밖에 없다.
양국 갈등이 심화되면서 대부분 언론에선 ‘한국은 선, 일본은 악’이란 구도가 재연됐다. 이런 선악 구도 하에서 일본의 실패와 갈등은 최대한 부각하는 반면, 한국의 실패는 최대한 축소하는 경향도 나타났다. 문제는 이런 보도가 사실관계를 왜곡하고 잘못된 정보를 줄 수 있다는 것이다.
한국 언론의 외신 인용 기사를 보면, 한국 언론은 일본 언론이 ‘아베 정부의 이번 조치에 대해 우려한다’고 보도한 사실을 전달하는 데 주력했다. 반면 한국 정부의 책임을 지적하고 입장 변화를 촉구하는 내용에 대해선 보도하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아베 정부의 편을 들고 있는 언론은 극우 성향의 산케이신문 뿐이라는 일부 전문가들의 주장이 검증 없이 그대로 전달됐다. 최근 들어서는 그나마 나아졌지만 사태 초기에는 일본 언론의 한국 정부 비판 목소리는 아예 전달이 되지 않았다. 이와 관련해, 뉴스톱은 한국 언론의 ‘선별적 편집’을 비판하는 장부승 일본 관서외국어대 교수 의 <일본은 온통 아베 정부 비판? 국익에 도움 안되 는 한국 언론의 ‘선별적 편집’>을 게재한 바 있다.
일본 언론은 아베 정부의 수출제한 조치를 비판하면서도 책임은 한국에 있다고 주장했다. 예를 들면 중도 계열인 닛케이신문은 7월 1일자 사설에서 “징용공 문제의 일차적 책임은 한국 측에 있으니 시정을 요구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주장했다. 진보 성향의 아사히신문은 7월 3일자 사설에서 “징용공 문제 관련 한국 정부 대응에 문제가 있다. 지난달 한국 측이 보여준 대안은 일본 기업 자금이 전제라서 일본 측이 수용하기 어렵다”고 밝혔다. 진보 성향의 마이니치 신문도 7월 4일자 사설에서 “한국도 한일청구권협정으로 징용공에 대한 배상이 해결됐다고 해왔다. 한국은 일본 측이 제안한 중재위원 임명에 응하지 않고, 한일 양국 기업이 위자료를 갹출하는 안을 제안했다. 일본이 수용할 수 없는 것은 당연하다”고 썼다. 하지만 이런 내용은 거의 전달되지 않았다. (‘징용공’ 표현은 일본이 자국의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 사용하는 용어로 ‘강제동원 피해자’가 맞는 표현입니다. 이 글은 일본 신문의 보도 내용을 분석한 기사로 독자 여러분의 이해를 돕고자 원문 그대로 표기했음을 양지해주시기 바랍니다.)
거꾸로 생각해보자. 한국 언론이 “아베 정부의 한국 무역 보복 조치는 졸렬한 행동이며, 이번 사태를 시작한 아베 정부가 책임을 져야 하는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한국 정부가 잘못 대응한 부분은 없는지 돌아볼 필요가 있다”는 사설을 냈다고 가정하자. 이를 본 일본 언론이 <한국 언론, 한국 정부에 자성 촉구>라고 헤드라인을 뽑는다면, 한국 입장에서는 얼마나 우스울 것인가. 이건 단지 웃을 일로 끝날 게 아니다. 자국 내 여론을 호도해 정책 판단자의 오판을 이끌 수 있다. 결국 ‘국익’이라는 관점으로 봐도 도움이 되지 않는 것이다.
사실을 감춘 선별적 편집
동아일보 7월 4일자 <日경제단체도 공개비판…“피해발생 전에 정상으로 돌아와야”>기사는 ‘선별적 편집’의 예다. 일본의 대표적 경영자 단체인 경제동우회 사쿠라다 켄고(桜田謙悟) 대표간사의 기자회견 발언을 인용해 작성한 기사다. 일본 내 주요 경제단체가 수출규제 조치와 관련해 아베 정부를 공개 비판했다는 내용이다. 하지만 동영상과 기자회견 원문을 보면, 아베 정부를 비판한다기보다는 아베 정부의 조치를 사실상 지지하는 내용이다.
사쿠라다 간사는 “정치적으로 나라와 나라가 약속한 것이 일방적으로 뒤집히는 등 신뢰관계가 흔들리고 있고, 이대로는 정치는 말할 것도 없고 무역을 포함한 경제도 복구되지 않을 뿐 아니라 곤란해질 것이라는 것을 (아베 정부가) 메시지로서 전달하려는 것”이라고 정부 조치를 평가했다. 그는 “오히려 일본은 지금까지 정치적으로 또는 외교적으로 의연한 태도를 취해왔다. 일관되게 해온 것을 바꿔서는 안 되고, 우리들 경제계도 정부의 생각을 계속 존중하면서, 자유 무역은 (일본 경제에 있어서) 플러스라고 거듭해서 계속 (주장)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마지막으로 “만약 길어진다고 하면 별도의 방법을 생각해야 하고, 경제계로서도 더욱 더 목소리를 높이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하지만 지금은 그런 시기는 아닌 것 같다”고 말했다. 현재로서는 아베 정부 수출제한 조치를 사실상 지지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동아일보는 사쿠라다 켄고의 발언 중 “실제 피해가 확산되기 전에 정상적인 상태로 돌아가기를 바라고 있다”고 말한 부분만 발췌해 일본 경제계도 아베 정부를 공개 비판했다는 기사를 썼다. 사실상 왜곡보도가 아닐 수 없다. 동아일보를 보면 아베 정부가 각계의 비판에 못 이겨 금세 수출제재를 철회할 수도 있을 것 같은 느낌을 준다. 하지만 한국에 대한 수출제재는 대체적으로 일본 국민의 지지를 받았다.
뉴스1은 8월 12일 <日 내부에서도 韓日갈등 ‘자성론’…“수출규제 졸렬했다”>라는 기사를 냈다. 마이니치신문에 기고한 나카니시 히로시(中西寬) 교토대 교수 글, <‘시대의 바람’ 문재인 정권, 멈추지 않는 급진주의. 대한민국 외교, 전략은 있는가>를 인용한 것이다. 뉴스1 기사는 “아베 정부의 수출제재 조치가 그 대상과 해결 방안이 정확하지 않은 채 한국의 반일 감정만 자극한다며 일본 내에서도 ‘졸렬한 것’이라는 평가가 나왔다”고 전했다.
기자는 분명 아베를 졸렬하다고 비난한 것에 ‘꽂혀’ 기사를 작성했을 것이다. 하지만 나카니시 교수 칼럼 전체 내용을 보면 한국이 원인 제공을 했다는 시각을 담고 있다. “징용 문제, 레이더 조사 문제, 위안부재단 해체 등 관련 문재인 정부의 대응이 성실성을 결여하고 있다”는 것이다. 촛불 혁명이라는 중대한 국내정치적 격변을 겪은 한국 정부가 외교 역시 ‘혁명 외교’로 접근하고 있지만 (문재인 정부의) 급진적 대외정책 노선은 결국 벽에 부딪혀 온건 노선으로 바뀔 것으로 전망했다. 나카니시 교수는 문재인 정권과 한국 국민을 분리해서 봐야 한다고 강조했다. 한국이 민주국가라는 점을 인정하고, 한국 내부에서 급진 외교 노선에 대한 노선 변경 압력이 이뤄질 수 있도록 일본 정부가 성실하게 노력해야 한다고 주문했다. 한국은 일본 국민과 아베 정부를 분리해서 대응해야 하고 일본 내부로부터 노선 변경 압력이 일본 정부에 가해지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주장과 별반 다르지 않다.
이 시각이 옳은지 그른지는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일본의 대표적 진보 계열 신문의 주요 칼럼에 이런 내용이 실렸으며, 일본 사람들이 이런 시각을 읽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뉴스1은 나카니시 교수의 다양한 관점 중 ‘아베 정부가 졸렬하다’는 내용만 가지고 와서 기사를 썼다. 차라리 기사를 쓰지 않는 것만 못 하다. 이런 번역의 편향성, 선별적 편집의 배경엔 ‘잘 팔리는 기사’를 쓰겠다는 욕심, 정부에 비판적 여론을 전달했을 때 가해지는 압력에 대한 부담, 이른바 ‘야마잡기’의 부작용 등이 있다. 기자와 데스크 눈에 아베 정부에 비판적인 일본 여론만 들어오는 것을 어떻게 할 것인가. 기자 스스로 확증편향에 빠진 것은 아닌지 되돌아봐야 할 때다.
국제 여론을 정확히 알아야 하는 이유
영미권 외신을 소개하는 데도 이런 선별적 편집은 계속됐다. 뉴스톱은 7월 30일 <‘한일 무역갈등 외신 보도’ 듣고 싶은 내용만 보도했다>는 제목의 기사를 냈다. 한국 언론은 블룸버그, 타임스, 이코노미스트 등 외신이 수출규제 조치에 나선 일본의 행태에 대 해 비판적 관점을 보였다고 보도했다. 중앙일보 7월 22일자 <“아베, 바보 같은 무역전쟁서 탈출해야” 국제사회 비판 확산>, 조선일보 7월 23일자 <“자유무역 누린 日, 자유무역 지켜라”>, 같은 날 JTBC <‘싸늘한 해외 시선에’…일, 각국 외교관 불러 여론전>, 7월 24일 MBN <아베 향한 싸늘한 해외 시선…일, 외교관들 불러 여론전>, 7월 26일 YTN <미국 주요 언론, 한목소리로 “일본이 잘못했다”> 등이 대표적이다.
하지만 이들 외신은 아베의 조치를 강하게 비판하고 있긴 하지만 사태의 책임을 한일 양국 정부에 묻고 있다. <아베의 무역전쟁은 가망이 없다(Abe’s Trade War With South Korea Is Hopeless)>는 제목의 7월 23일자 블룸버그 사설은 “한일 양쪽 모두 자신의 주장에 갇혀 있다”고 밝혔다. 블룸버그는 문재인 대통령이 지난 2015년 한일 위안부 합의에 따라 설립된 화해 치유재단을 해산시킴으로써 “자신의 주장을 약화시켰다”고 주장하며 “그 어떤 사죄와 배상도 충분하지 않을 것이라는 일본 내 회의론에 불을 붙였다”고 밝혔다. 7월 15일자 뉴욕타임스는 “올바른 접근법은 아니지만 일본은 정당한 불만을 품고 있다”고 보도했다. 7월 18일자 워싱턴포스트 칼럼은 “문재인 정부가 화해치유재단을 해산시킴으로써 일본과의 관계 개선 입장을 손상시켰다”고 평가했고 한 발 더 나가 “문재인 정부가 경제와 북한 문제로부터 시선을 돌리기 위해 민족주의를 부추기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고 주장했다.
외신의 주장이 전적으로 옳은 것은 아니다. 오해도 있고 틀린 부분도 있다. 외신에 과도하게 의미를 부여할 필요도 없다. 서구 언론 역시 자신들만의 확증편향에 갇혀 있을 수 있고, 식민지배 피해국의 입장을 이해하지 못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외국에서는 이번 사태를 양측 공동의 책임으로 보고 있다는 것이다. 국제사회를 설득하고 대응하기 위해선 국제 여론을 정확히 알아야 한다. 국익 보도가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입맛에 맞는 내용만 골라 보도하는 행동은 결국 여론 왜곡으로 오판을 이끌어 국익에 도움이 되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