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골 대초원을 달리면 절로 나오는 말, "주게레(괜찮아)"

  • 기자명 탁재형
  • 기사승인 2019.09.17 08: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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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지하게 글을 써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백지가 주는 공포감에 동의할 것이다. 아무런 단어도, 방향도 정해지지 않은 순백의 평면. 무한히 많음과 아무 것도 없음이 웜홀처럼 이어져 있는 기괴한 공간. 그 안에서 길을 찾아야 하는 막막함. 몽골의 초원이 주는 느낌도 이와 비슷하다. 어디로든 이어질 듯 펼쳐진 대지. 하지만 그 위에서, 여행자들은 하루하루의 안전과 휴식을 제공할 캠프를 찾아내지 않으면 안된다. 그렇기에 그 일은, 초원에서의 내비게이션 능력이 본능 속에 탑재된 몽골 사람들의 전문영역이다. 러시아에서부터 단기필마로 말을 달려 몽골 초원에 있는 칸의 본진까지 돌아온 수베테이의 후예들답게, 그들은 이정표 하나 없는 초원에서 나침반도 보지 않고 벌판위의 목적지를 잘도 찾아낸다.

촬영: 탁재형

 

물론 초원 위에도 길은 있다. 요즘 들어 수도인 울란바타르를 기점으로 하는 포장도로가 늘어나고 있는 추세이긴 하지만, 여름과 겨울의 연교차가 100도를 넘어서는 몽골이다 보니 변경으로 갈수록 관리가 쉽지 않다. 남한의 16배 면적에 총 인구는 300만, 그리고 그 중 절반은 수도에 몰려 있는 상황에서 텅 비어있다시피 한 초원을 모두 포장도로로 잇는다는 것 자체가 일단 어불성설이다. 이렇다 보니, 40,000여 km의 도로망 중에서 포장된 것은 단 7%에 불과하다. 몽골 도로의 절대 면적을 차지하는 오프로드는 다른 나라와 큰 차이가 있다. 남미나 서남아시아의 오프로드가 지형 속에서 차량이 통과할 수 있는 경로를 찾아낸 선(線)의 개념이라면, 몽골의 초원길은 거점과 거점을 잇는 가장 이상적인 선을 포함하는 면(面)의 개념이다. 땅이 대체로 평평하다 보니, 같은 길을 간다고 하더라도 차량마다 조금씩 다른 경로를 달리게 된다. 또한 이는 앞의 차량이 일으키는 흙먼지의 영향을 덜 받으려는 노력의 일환이기도 하다. 이런 이유로, 아스팔트가 덮이지 않은 초원 위에는 보통 5~6차선, 많게는 10차선이 넘어가는 넓은 길이 생겨난다. 그리고 이 차선들은 서로 평행한 것이 아니라, 멀어졌다 가까와지길 반복하고 때론 서로 엇갈린다. 성긴 그물코를 가진 좁고 긴 그물이 어딘가를 향하고 있는 모양새를 떠올리면, 비교적 몽골의 비포장 도로에 근접하는 이미지가 될 것이다.

 

초원의 길은 자동차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가혹한 환경이다. 타이어의 반복되는 진동이 지표면에 만들어낸 빨래판 무늬의 요철, 즉 코러게이션(Corrugation)이 차량 하부의 내구성을 끊임없이 갉아먹고, 뜬금없이 나타나는 구덩이와 예측할 수 없는 노면의 경사가 운전자의 기량을 시험한다. 이렇다 보니, 세계 최고 성능의 SUV들의 각축장임에도 불구하고 차량이 고장나는 일이 일상이다. 몽골의 대지에서 요구되는 것은, 절대로 고장나지 않는다는 보증서가 아니라 언제 어떤 고장이든 대처할 수 있는 순발력과 유연성이다. 지난 달 다녀온 고비 여행을 책임져 준 우리의 운전사들은 이런 능력을 타고난 사람들이었다. 뙤약볕 아래서 차가 털털대다가 연기를 내뿜으며 서는 상황 속에서도 그들은 웃음을 잃지 않았다. 그저 웃기만 하고 아무 것도 하지 않았다는 말이 아니다. 사막의 태양 아래 채 식지 않은 엔진 아래로 들어가고, 임시 방편으로 볼트를 고정하고, 무거운 타이어를 갈아 끼우면서도 그들은 서로에게 농담을 던졌고, 장난을 쳤고, 심지어는 레슬링을 하기까지 했다. 

차량 한대가 결국 고칠 수 없는 상태가 되어 수도로 돌려보내야 했을 때에도, 그리고 그 곳이 크레인은 커녕 견인차 한 대 찾아볼 수 없는 사막 가장자리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웃었다. 자리에 주저앉아 무려 7만 달러에 이 차를 팔아먹은 빌어먹을 중고차 딜러놈을 원망하며 이를 갈고 욕을 내뱉는 대신, 그들은 웃으며 모래언덕에 홈을 팠다. 그리고 우리 같으면 아파트를 돌아다니며 야채장사나 겨우 할 것 같은 트럭을 몰고와 적재함을 그 홈에 끼우고, 육중한 SUV를 손으로 밀어 트럭에 실었다! 끊임없이 농담을 던지며, 한 단계 한 단계를 마칠 때마다 더없이 해맑은 미소를 지으며. 이쯤 되면 오후 4시에 울란바타르를 떠난 대체 차량이 8시간 만에 900km를 주파해 사막 캠프에 도착한 일은 놀라운 것도 아니게 되어 버린다. 그 차에서 내린 기사가 아무렇지도 않은 웃음을 지으며 보드카 한 잔을 쭉 들이켰음은 물론이다.

촬영: 탁재형
촬영: 탁재형

 

촬영: 탁재형
촬영: 탁재형
촬영: 탁재형

여행을 이끄는 이들의 태도는 참여하는 사람들에게 전염되기 마련이다. 처음엔 마을 주차장에서 보닛을 열고 있는 차량을 보며 ‘과연 이런 차를 타고 초원으로 나서도 괜찮은 걸까?’라는 의문을 품던 사람들이, 나중엔 허허벌판 한 가운데에서 차를 고칠 동안 맥주 파티를 벌이는 지경에 이르렀다. 언덕 하나 나무 한 그루 없는 광야에서, 차량이 만들어내는 한 뼘 너비의 그늘에 모여앉아 전날 먹다 남은 양고기를 안주로 술추렴을 하다 보면, 외려 차량이 일찍 고쳐지는 게 아쉽다고 느껴질 때마저 있었음을 고백한다.

 

지평선에 걸린 북두칠성이나 야트막한 언덕을 가득 메운 야생 허브의 향기보다도 초원을 진정으로 아름답게 느끼게 만들어준 것들은, 내려꽂히는 직사광선만큼이나 강렬했던 몽골 사람들의 미소였다. 혹독한 자연환경도, 광막한 벌판의 외로움도 결코 침범할 수 없는 그들의 정신이었다. 우리의 눈으로 보기에는 엄청난 시련의 연속 속에서, 그것들 하나하나에 좌절하거나 자기를 연민하지 않고 그저 웃음으로 맞서는 무심함. 그러면서도 때론 낙타처럼 우직하게, 때론 말처럼 격정적으로 필요한 일들을 해나가는 무던함. 그런 사내들의 기운으로 가득차 있었기에, 광막한 대초원은 쓸쓸하게 느껴질 틈이 없었다. 그런 생각들 때문이었을까. 몽골 운전사들이 입버릇처럼 달고 살던 단어 하나가 여행이 끝난 후에도 배낭에 담겨 한국까지 온 모양이다.

촬영: 탁재형

 

“주게레(괜찮아).”

 

그래, 주게레.

모두모두 괜찮으면 좋겠다.

당신의 오늘 하루도, 내일의 여행도,

초원 위의 바퀴자국처럼 주게레 하게 이어지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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