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을 '잃어버린' 시대, 빛을 '쥐고 있는' 영화

  • 기자명 홍상현
  • 기사승인 2019.10.24 1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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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상현의 인터뷰] 영화 <조용한 비>로 부산국제영화제 찾은 나카가와 류타로 감독

Ты небо недавно кругом облегала,

И молния грозно тебя обвивала;

И ты издавала таинственный гром

И алчную землю поила дождем.

 

“너는 조금 전까지 저 하늘을 온통 뒤덮고,

번개는 사납게 너를 감싸 안았다.

너는 비밀스러운 천둥소리를 내지르며

메마른 대지를 소나기로 적셨노라.”

 

플로샤디 레볼루치(Площадь Революции). '혁명광장'이라는 다소 전투적인 이름의 모스크바 지하철역을 방문했던 기억을 떠올린 건, 태풍이 지나간 뒤 따스한 햇살이 떨어지는 거리가 거대한 남향의 베란다처럼 느껴지는 일요일 아침이었다. 모스크바 남쪽의 중소도시, 포돌스크(Подольск)에서 출신의 친구는 푸치니가 <나비부인>을 발표한 해 크리스마스이브에 태어난 설계자가 역 곳곳에 배치해놓은 76개의 청동조각상에 대해 설명했지만, 정작 지금 이 순간까지 필자의 의식에 각인되어 있는 것은 갑작스런 부탁에 잠시 머뭇거리던 그녀가, 차분한 목소리로 낭송해준 푸시킨의 시, '먹구름(Туча)'의 한 구절이다.

우연한 연상(association)은 아니다. 그도 그럴 것이, 오늘 인터뷰의 주인공, 나카가와 류타로는 이 플래시백의 배경인 도시에서 올해로 개최 84주년을 맞은 모스크바국제영화제가 사랑하는 감독이니까. 39회 때인 2017년 <4월의 영원한 꿈(영제: Summer Blooms)>으로 국제비평가연맹(FIPRESCI)상을 수상한 그는 지난 4월 <나는 빛을 쥐고 있다(영제: Mio on the Shore)>의 특별 초청으로 다시 로씨야시어터의 레드카펫을 밟았다.

물론 이것이 나카가와 감독의 첫 국제영화제 나들이는 아니다. 자주제작(自主制作) 형태로 만든 데뷔작 <Calling>으로 보스턴국제영화제 최우수 촬영상을 수상한 그는, 도쿄국제영화제에 2년 연속 초청 감독의 영예를 안긴 두 작품, <사랑의 작은 역사(영제: August in Tokyo)>와 <달려라, 절망이 따라잡을 수 없는 속도로(영제: Tokyo Sunrise)>로 프랑스의 영화평론가이자 이론가 앙드레 바쟁이 창간한 영화잡지 《카이에 뒤 시네마》의 극찬을 받았다. 열일곱에 시인으로 등단하고 문학상을 받았지만 독학으로 영화인의 길을 걷기 시작한지 3년 만에 거둔 성과였다.

롯데시네마 센텀시티 5관, 12시 20분, 혹은 25분.

한쪽 다리가 불편한 대학의 연구조수 유키스케(나카노 타이가)와 붕어빵집의 코요미(에도 미사). 두 사람의 사랑이 막 시작되려는 순간 찾아온 사고로 코요미가 새로운 기억이 하루 단위로 리셋(reset)되는 후유증을 앓게 된다는 스토리의 <조용한 비(영제: It Stopped Raining)>로 부산국제영화제에 온 나카가와 감독이 모더레이터(moderator)와 함께 등장해 또박또박한 한국어로 인사했다. “불세출의 예술가” 정도의 수식이 어울리는 이력과는 다소 언밸런스한 느낌마저 드는 천진한 웃음. 칸영화제 3회 수상에 빛나는 가와세 나오미 감독의 특별출연에 관한 문답이 끝나자마자 극장을 빠져나왔다. 잠시 후에 있을 인터뷰의 재미가 반감될 지도 모른다는 우려 때문이었다.

열일곱에 시인으로 등단하고 문학상을 받았지만 독학으로 영화를 공부해 감독으로 데뷔한 나카가와 류타로 감독. 그의 언어는 따듯하고 유쾌하면서도 자연스러운 아름다움이 배어나오는 낭만주의 시를 떠올리게 한다. 제공: 부산국제영화제

홍상현:

데뷔 이래 거의 매년 화제작을 발표하며 국제적으로 활약하다 지석상에 노미네이트되어 부산국제영화제에 오셨다. 감회가 깊으실 것 같은데.

나카가와 류타로:

촬영이 끝났을 때, 막연하게 ‘부산에서 불러주시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더라. 한국 관객 여러분께서 좋아해주실 것 같은 직감. 마치 어떤 일이 제 의지와 상관없이 흘러가는 것처럼. (웃음)

 

홍상현:

낭만이 가득한 작품으로 부산에 오신 감독다운 도입부인데, 게스트 뷰(GV)의 모더레이터를 맡은 옥미나 평론가도 작품을 호평했으니 직감이 정확하지 않았나 싶다. (웃음)

나카가와 류타로:

따듯한 말씀에 감사드린다. 너무나 기뻐서 드려본 말씀이다. (웃음)

요즘 걱정이 많았다. 한국과 일본의 사이가 계속 나빠져서. 하지만 이제 와 생각하면 정부 사이의 관계가 힘든 와중에 월드프리미어를 한국에서 할 수 있으니, 오히려 자랑스러운 일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실제로 와보니 다들 얼마나 친절히 대해주시는지. 당연한 일이겠지만 세상일이란 역시 뉴스만 봐서는 모른다. 직접 체감해봐야지. 부산에서 며칠을 보내면서 한국을 더 좋아하게 되었다.

 

홍상현:

한국영화와에 대한 애정도 남다르시지 않나?

나카가와 류타로:

좋아하는 작품, 감독, 배우가 너무 많다. 우리 세대는 한국영화의 황금기와 맞물려 성장했다. 단순히 영향을 받는 것을 넘어 정말 큰 힘을 얻었다. 제 추억의 작품은 <서편제>다. 부친께서 한국을 너무 좋아하셔서 VHS 테이프를 사오셨다. 당시 대여섯 살 쯤이던 저는 <서편제>를 보며 한국어를 공부하던 아버지의 모습을 또렷하게 기억한다. 먼발치에서 그 모습을 바라보며 동경하던 당시의 기분도. 이제는 세상에 없는 친구가 양익준 감독의 <똥파리>같은 작품을 소개해주었다. 하지만 뭐니 뭐니 해도 가장 좋아하는 한국 영화인을 한 분만 꼽아보라면 단연 이창동 감독. 압도적으로 멋진 분이다.

주인공 유키스케 역으로 출연하는 나카노 타이가(오른쪽)는 나카가와 류타로 감독에게 2년 연속 도쿄국제영화제 초청의 영예를 안긴 <달려라, 절망이 따라잡을 수 없는 속도로(영제: Tokyo Sunrise)>에서도 주연을 맡았다. 제공: 부산국제영화제

홍상현:

고등학생 시절 등단했지만 문단에 머물러 있지 않고, 독학으로 영화를 공부해 감독으로 데뷔하셨다.

나카가와 류타로:

워낙 시를 좋아해 즐겨 쓰다 보니 상을 받거나 책을 낼 기회도 주어졌다. 그 와중에 <달려라, 절망이 따라잡을 수 없는 속도로>라는 제 작품의 모델이 되는 친구를 만났다. 그는 영화를 엄청나게 좋아해서 프랑스와 한국, 그 밖에 수많은 아시아 영화를 차례차례 소개해주었고, 덕분에 영화를 만들어봐야겠다는 생각도 하게 되었지. 하지만 제가 도쿄국제영화제에 초청을 받은 대학 4학년 이듬해 자살했다. 그렇게 <달려라, 절망이 따라잡을 수 없는 속도로>가 세상에 나왔다. 친구를 떠나보내고 나니 ‘만약 여기서 영화를 그만두게 된다면 그의 기억이나 존재가 점점 희미해지다, 결국 애초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되어버리지 않을까’ 하는 불감이 들더라. 취직도 단념하고 전업 영화감독의 길에 접어들었다.

 

홍상현:

필모그래피의 작품들을 보면, 스타일상으로 회화적인 조형미가 돋보이면서 내용 면에서는 엘레지와 서정시의 느낌이 도드라진다. 특별히 영향을 받은 예술가가 있으신가.

나카가와 류타로:

60년대에 발표된 작품들을 좋아한다. 영화가 처음으로 ‘색채’를 손에 넣은 시대의 신선함과 생기 넘치는 기쁨이 느껴져서다. 당시 필름이 가지고 있던 기술적 제약으로 인해 거무스레한 파스텔 톤으로 보일 수도 있지만, 제게는 좀 다른 느낌이다. 많은 영향을 받았다. 컬러TV가 등장했던 70년대에 방영된 <상처투성이 천사><태양을 향해 짖어라!> 같은 형사드라마의 색조와 세계관에서도.

 

홍상현:

20대의 마지막에 연출한 작품의 원작이 마침 나오키 상 후보작 『양과 강철의 숲』으로 한국에도 팬이 많은 미야시타 나츠 작가의 데뷔작이다. 뭔가 특별한 의미가 있을 것 같은데.

나카가와 류타로:

‘소설’이라는 서사장르 자체에 큰 의미를 두었다. 그간의 제 커리어를 돌아보면서 오리지널 시나리오를 너무 고집하다가 도리어 오리지널리티(originality) 사라져 버릴 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으니까.

한쪽 다리가 불편한 대학의 연구조수 유키스케(나카노 타이가)와 붕어빵집의 코요미(에도 미사). 두 사람의 사랑이 막 시작되려는 순간 찾아온 사고로 코요미는 새로운 기억이 하루 단위로 리셋(reset)되는 후유증을 앓게 된다. 제공: 부산국제영화제

 

홍상현:

무슨 말씀인지 알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일부 평론가들은 “원작물(原作物)” 운운하며 문학작품을 그대로 영화화해 놓은 양 매도하지만, 막상 결과물을 보면 설정정도를 가져왔을 뿐. 전혀 새로운 작품이 한둘이 아니었으니까.

나카가와 류타로:

<조용한 비>의 경우도 두 남녀가 있고, 한쪽이 기억상실을 겪는다는 설정 정도만 원작에서 가져왔을 뿐, 그 밖의 등장인물이나 이야기는 모두 제가 시나리오를 쓰면서 창작했다. 오히려 원래의 스토리가 있기 때문에 지금껏 해보지 못한 대담한 도전이 이루어질 수 있었다고 할까. 오리지널의 세계도 결국 자신이 만드는 것이니 보수적이 되기 쉽다고 생각한다. 도리어 ‘타인의 세계’일수록 대담한 각색을 위해 저만의 연출 포인트와 ‘빛’을 찾아낼 수 있으리란 생각으로 작품에 임했다.

 

홍상현:

만약 그렇다면 충분한 성공을 거두셨다. 한 줄로 된 시놉시스만 읽으면 흔히 접하는 청춘멜로 같은 작품이, 감독의 터치에 의해 정적(靜的)이지만 결코 지루하지 않은, 아니, 대단히 몰입감이 있는 이야기로 다시 태어났으니까. 시나리오를 쓰시면서 어떤 부분에 가장 힘을 쏟으셨나?

나카가와 류타로:

오늘날 일본의 젊은이들은 미래의 희망을 전혀 갖고 있지 않다. 이를 한쪽 다리가 불편한 주인공으로서 상징화하고 싶었다. 1990년생인 저는 버블경기가 붕괴하고 사회주의가 사라지던 해 태어났다. 자기연민이라고 해도 어쩔 수 없지만, 이는 억지로 끌려 다니는 것과도, 혹은 순응적이지 않은 태도로 살아가는 것과도 다른 이야기다. 이런 시대인 까닭에 진정한 인간의 품성에 대한 물음이 가능해지는 것이랄까. <조용한 비>의 주인공은 이 불우한 시대에 태어나 느끼는 고독을 조건 없는 ‘나눔’을 통해 충족시키려 한다. 원작의 테마와는 다르지만, 시나리오를 쓰면서 어떻게 내용을 바꿔도 상관없다고 원작자가 양해해주었기 때문에 좀 더 철저하게 작품의 주제와 마주하며, 고독을 메우기 위한 ‘나눔’에 초점을 맞춰갔다.

 

홍상현:

대표작 <달려라, 절망이 따라잡을 수 없는 속도로>와 마찬가지로 나카노 타이가가 주연이다. 필자는 그가 아무리 봐도 당신의 페르소나 같다.

나카가와 류타로:

그렇게 말씀해주시니 기쁘다. (웃음)

<달려라, 절망이 따라잡을 수 없는 속도로> 제작 당시는 앞서 말씀드린 친구의 1주기를 맞는 시점이기도 했다. 저와 캐릭터가 겹치는 배우는 누구일까 생각하는데 그가 있더라. 저와 마찬가지로 장래가 불안했고, 실력은 있었지만 지금처럼 높은 지명도를 가지고 있지도 않았다. 하지만 저는 감독ㆍ배우 관계가 아니라 같은 눈높이의 동료로서 함께 싸워나갈 사람을 찾고 있었는지라 타이가 군 이상의 적격자가 없었다.

신장도 비슷하고 성격도 비슷하게 격한 타입이라 매번 둘이 엄청나게 싸워 가면서 영화를 완성한다. 친구사이라 이내 풀어버리지만. (웃음) 다이렉트로 부딪쳐 툭탁거리면서 작품을 만들어 갈 수 있다는 게 제게는 오히려 축복이란 생각이 든다.

<조용한 비>는 나오키 상 후보작『양과 강철의 숲』으로 한국에도 팬이 많은 미야시타 나츠의 소설이 원작이지만 두 남녀가 있고, 한쪽이 기억상실을 겪는다는 설정 정도만 가져왔을 뿐, 그 밖의 등장인물이나 이야기는 모두 나카가와 류타로 감독이 시나리오를 통해 창조되었다. 제공: 부산국제영화제

홍상현:

히로인인 에도 미사는 이번 작품으로 영화에 데뷔하기 직전까지 근 10년을 ‘아이돌’로 살았다. 캐스팅 당시 우려의 목소리도 있었던 걸로 아는데, 상당히 안정감 있는 연기를 보여주더라.

나카가와 류타로:

영화 데뷔 이전까지 그녀의 커리어는 긍정적인 의미에서든, 부정적인 의미에서든 고려하지 않았다. 다만, 우리의 목표가 그녀를 통해 ‘가장 일상적 캐릭터를 끌어내는 일’이었기에 차별화된 디랙션(direction)이 필요했다. 그래서 일단 작품 속 캐릭터대로 그녀를 일주일동안 붕어빵집에서 일하게 했다. 무거운 틀을 뒤집으며 여러 개의 붕어빵을 구워내는 과정이 이어질수록 자연스러운 어조의 대사처리가 가능해졌다. 이전까지의 자의식이 풍화되면서 영화 속으로 스며드는 과정을 경험한 거다. 정해진 대사를 순서에 따라 암송하지 않고, 즉흥적으로 말을 받으며 대화를 이어가도록 한 것도 효과적이었다.

 

홍상현:

<조용한 비>의 서사의 중심에 있는 키워드는 ‘기억’이다. 이, 지극히 추상적이면서 깊은 주제에 어떤 식으로 접근하셨는지 궁금하다.

나카가와 류타로:

전작인 <나는 빛을 쥐고 있다>, <달려라, 절망이 따라잡을 수 없는 속도로>도 어떤 의미에선 잃어버린 무언가(장소ㆍ사람)에 관한 이야기다. <조용한 비>에서 중요한 지점은 코요미가 기억을 잃는 것을 반드시 부정적인 의미로만 볼 수는 없다는 사실이다. 미래에 희망을 가질 수 없는 까닭에 오늘을 사는 젊은이들은 무기력하다. 하지만 조금 다른 시선으로 조망한다면 어떨까. 표면적으로 무기력해 보일지 몰라도, 실은 미래를 생각하고 있지 않을까? 하루하루를 지금 이 순간뿐이라는 생각으로 살아간다면 멋진 만남이 이어지고, 날씨도 상쾌하며, 한 모금의 물조차 너무나 맛있게 느껴질 것이다. 얼마나 행복할까. 특정한 시점에서 끊임없이 리셋(reset)되는 내용의 멜로드라마라지만, 그대로만 밀어붙이면 청량감을 잃어버릴 수도 있다. 삶 속에서 부딪치는 순간순간을 사랑하자는 메시지를 담아내고 싶었다.

 

홍상현:

감독이 소개하는 <비가 그친 후>의 볼거리는?

나카가와 류타로:

눈앞의 빛, 그리고 바람을 얼마나 사랑할 수 있을까. 옛사람들은 꽃꽂이나 정원 가꾸기, 분재 등으로 그 순간을 즐기려고 했을 것이다. <비가 그친 후>는 이런 지극히 작으면서도 아름다운 것들에 더 눈길을 주는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아울러 이 영화 속의 ‘빛’에 주목해 주셨으면 좋겠다.

지극한 정중함 속에서도 초면 같지 않은 친밀감이 느껴지는 인터뷰를 끝내고 일어설 때, 나카가와 류타로 감독은 공손히 머리를 조아리며 인사한 뒤 B5 규격으로 만든 <조용한 비>의 팸플릿 한 부를 건넸다. 표지부터 마지막 페이지까지 정확하고도 유려한 한글이 원문과 꼼꼼히 병기되어 있는. (사진은 부산국제영화제 개막식에서) 제공: 부산국제영화제

“지금껏 수많은 한국영화를 보고 공부하면서 영화를 만들어왔습니다. 당연히 기회가 주어진다면 한국 분들과 영화를 만들어보고 싶죠. 이런 제 의지에 따라 현재 진행 중인 프로젝트도 있고요. 한국 배우 분들과도 많은 작품을 해 보고 싶습니다. 최근 한일관계가 무척 어려운 상황인데요. 이런 때일수록 영화가 세계의 창과도 같은 역할을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영화는 예술의 장르이지만 세계 많은 나라의 정보를 고스란히 전해주는 역할도 하니까요. 제가 살고 있는 일본 뿐만 아니라 아시아의 모든 분들과 하나의 목표를 위해 함께함으로써 이 창을 통해 서로에게 더 많은 바람이 전해지기를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 더 말씀드린다면 좀 더 많은 한국의 관객 여러분께서 꼭 이 작품을 봐주시고, 도쿄의 한구석에서 조용히 살아가는 두 젊은이의 이야기에 자신을 대입해보셨으면 좋겠어요. 페이스북이나 홈페이지를 통해 감상을 공유해주시면 감사하겠고요.”

지극한 정중함 속에서도 초면 같지 않은 친밀감이 느껴지는 인터뷰를 끝내고 일어설 때, 나카가와 감독은 공손히 머리를 조아리며 인사한 뒤 B5 규격으로 만든 <조용한 비>의 팸플릿 한 부를 건넸다. 표지부터 마지막 페이지까지 정확하고도 유려한 한글이 원문과 꼼꼼히 병기되어 있는. 아직 개봉날짜조차 정해지지 않은, 아니, 정확하게는 언제 일반 관객을 만나게 될지 알 수 없는 영화의 한글 팸플릿. 게다가 보통 인터뷰룸에 배석하거나 인터뷰를 마친 뒤 인사를 건네기 마련인 프로듀서나 배급사 직원이 단 한 사람도 보이지 않았다. 모든 상황을 짐작하며 고개를 끄덕인 것은 다른 게스트들보다 적게는 1.5배, 많게는 두 배에 달하던 그의 체류기간과 “예정되어 있지 않은 GV를 감독의 희망에 따라 진행한다”고 설명한 당일 상영 시작 전 자원 활동가의 안내멘트였다.

스물아홉의 그는, 손을 건네고 있었던 것이다.

따듯했던 유년의 기억이 멈춰있는 한국이라는 나라의 관객들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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