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가리'를 쓰면 망발인가?

  • 기자명 정재환
  • 기사승인 2017.12.04 0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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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5년 8월 12일 한국방송공사 9시 뉴스에서 ‘4천 억설’ 수사 담당 검사가 수사 결과를 발표하면서 “한마디로 나가리죠”라는 발언을 했고, 웃는 기자들의 모습을 내보냈다. 당시 한겨레신문의 여론마당엔 은 이 보도에 대해 온 국민의 관심이 쏠린 수사 결과를 발표하는 검사의 태도와 기자들의 의미를 파악하기 힘든 웃음, 그 장면까지 삽입해 방영한 한국방송공사의 태도 등을 지적하는 글이 실렸다. 원고를 보낸 김지웅씨는 해방 50돌을 눈앞에 둔 시점에서 ‘나가리라는 일본말을, 게다가 저급한 문화 용어를 거침없이 쓸 수 있는가’ 하고 개탄했다. 

김지웅씨의 지적이 옳다면 ‘나가리’는 일본말인데다가 저급한 문화 용어며, 검사가 ‘나가리’를 입에 올린 것은 망발이었다. 이 기사를 읽다가 문득 3가지 의문이 생겼다. 첫째, 일본말인가? 둘째, 저급한 문화 용어인가? 셋째, ‘나가리’라는 말을 쓰는 것이 과연 망발인가? 그럼 이제 조사를 좀 해보자.

나가리: 고스톱 따위의 게임에서, 승자가 없이 판이 끝나는 일. ⇒ 규범 표기는 미확정이다.

예문: 전주에서는 3점이 난 사람이 돈을 받지 않고 ‘나가리’를 선언하면 다음 판은 배판이 적용된다.≪한국일보 2003년 9월≫  -국립국어대사전

뜻풀이 아래 제시된 예문은 2003년 9월의 한국일보 기사에서 발췌한 것이다. 신문에도 버젓이 등장한 ‘나가리’는 과연 어떤 맥락해서 사용되었을까? 전주의 특별한 고스톱 문화를 소개하는 기사였을까?

“아무도 3점 이상을 내지 못한 경우 나가리라고 한다. 누가 고를 했으나 추가 점수가 나지 않고 상대도 3점 이상을 획득하지 못한 경우도 나가리에 속한다. 나가리가 되면 그 다음 판은 판돈이 2배가 된다”는 설명은 고스톱에 대해 친절하게 설명하고 있는 어느 블로거의 글에서 나온 것이다.

나가리는 고스톱 판에서 자주 쓰이는 용어다.

일단 ‘나가리’가 화투에서 사용하는 용어임은 확인되었다. 저급한 문화 용어라는 지적은 바로 이것을 언급한 것으로 보인다. ‘열고, 흔들기, 뻑, 자뻑, 피박, 설사’와 같은 말들도 저급한 문화 용어로 도매금으로 넘어가는 순간이다.

그런데 ‘열고’나 ‘피박’ 같은 말들은 엄연한 한국어다. ‘열고’는 ‘열+고(go)’로 외래어 고가 붙었지만, ‘열 받아서 계속 한다’는 뜻이고, ‘피박’은 피로 점수가 났을 경우, 피가 5장이 되지 않는 이들은 난 점수의 두 배를 주어야 할 때 쓰는 용어다. 많은 다른 고스톱 용어에 대해서는 나보다 훨씬 빠삭한 분들이 많을 테니 여기까지만 하자.

문제는 고스톱 용어 중 ‘쇼당’과 함께 ‘나가리’가 일본말로 취급되고 있다는 점인데, - ‘쇼당(しょうだん: 商談)’은 우리말 ‘상담’에 해당한다 - 국어원의 설명에서 ‘규범 표기 미확정’이란 것은 이것이 표준말이 아니라는 뜻이고, 일본어 투 생활 용어 순화 고시 자료 (문화체육부 고시 제1995-32호, 1995년 8월 31일)는 ‘나가리’ 대신 ‘깨짐’이란 말을 쓸 것을 권유하고 있다.

최 여사: 너 피박이야!

박 여사: 아니야, 이번 판은 깨짐이야!

아마도 ‘판이 깨졌다’는 의미로 ‘깨짐’을 권유한 것 같은데, 좀 어색하긴 하다. 여하간 국어원에서 ‘일본어 투’라고 설명하는 것을 보면, ‘나가리’가 일본말에서 왔을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일본어에서 ‘나가리’를 찾을 수 없다. 이럴 때에는 융통성을 발휘해야 한다. 일본어에서 ‘나가리’와 가까운 낱말은 ‘나가레(ながれ)’다. 이 ‘나가레’는 흐름, 물결, 추이, 추세 등등 많은 뜻을 가지고 있는데, 우리의 ‘나가리’와 의미가 통하는 것은 다음 두 설명이다.

⑨ 質物を受け出す期限が切れて所有権がなくなること。また、その質物。

→ (전당포 등에서) 물건을 찾는 기한이 지나서 소유권이 없어지는 것, 또는 그 물건.

⑩(「おながれ」の形で)計画や予定が中止になること。

→ (오나가레의 형태로) 계획이나 예정이 중지되는 것. 「旅行がお-になる」(여행이 중지되다.)  출처: 코토반쿠

 

영화 <신세계>에서 최민식(강과장)이 자신을 죽이러 온 킬러를 보자 "후~ 이러면 완전히 나가린데..."라고 독백을 하는 장면이 있다. 나가리는 화투판 뿐 아니라 일상생활에서도 종종 쓰인다.

그렇다면 일본어 ‘나가레’가 음이 살짝 변해서 ‘나가리’가 된 것으로 볼 수 있다. 개연성이 높다. 정리하면 ⓵ 나가리는 일본어 ‘나가레’에서 왔고, ⓶ 고스톱에서 주로 쓰이는 저급한 문화 용어로 간주되었지만, 이에 대한 가치 판단은 독자에게 맡긴다. 끝으로 ⓷ 점잖은 검사가 ‘나가리’를 입에 올리는 것은 망발이다. ⓷에 대한 의견도 인격에 따라 분분할 수 있다. 불현듯이 나가리를 끔찍하게 사랑하는 지인이 생각난다. 

‘아니 그게 왜 망발이야? 그런 말도 못하고 사나? 그래 나 허구한 날 나가리 끼고 저급하게 산다. 지난 번 주식 투자한 거 나가리 됐고, 집사람이랑 단 둘이 여행가는 것도 나가리 됐고, 우 사장하고 점심 약속한 것도 나가리 됐다. 당신, 이 글도 나가리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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