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기' 논의는 박정희, 탄생은 노태우 정부때

  • 기자명 김형민
  • 기사승인 2018.01.23 2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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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단은 한반도에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 그리고 그들이 영위하는 삶의 모든 영역에 드리워진 그림자였다. 스포츠 분야도 예외가 될 수 없었다. 아니 오히려 가장 두드러졌다고 하는 것이 옳겠다. 시산혈해를 이룬 전쟁이 휴전으로 대충 마무리된 뒤 스포츠는 남과 북의 대리전의 현장이었고, 남북대결이라도 벌어질라치면 출전하는 선수들은 그야말로 “지면 죽는다”는 듯 눈에 불을 켜야 했다. 평화의 제전이건 세계인의 축제이건 뭐건 관계 없었다. 북한이 뭘 하려면 무조건 막아야 했고 남조선이 까불면 덮어놓고 밟아야 했다. 

국제올림픽위원회(IOC) 관계자와 남북한 체육계 인사들이 1월 20일 스위스 로잔에서 2018 평창올림픽 남북단일팀을 합의한 뒤 '올림픽 한반도 선언문'을 발표하고 있다. 왼쪽부터 이희범 2018 평창 동계 올림픽 조직위원장, 김일국 북한 체육상, 토마스 바흐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총재, 도종환 한국 문화체육관광부 장관과 이기흥 대한체육회장. IOC 제공

남한 해방직후 NOC 먼저 결성, 북한은 63년에야 IOC 가입

역대 올림픽의 역사에서도 안쓰럽기까지 한 남북한의 대결 구도는 선연히 드러난다. 올림픽 무대에서 선수를 친 것은 남쪽이었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전 미군정청 시대에 남한은 KOC, 즉 조선 (대한민국 국호 성립 이전이었으므로) 올림픽 위원회를 결성하고 국제올림픽위원회(IOC)의 문을 두들겼다. 여기에는 일본 체육계에서조차 두어 수 접고 존경했던 한국 체육계의 거물 이상백의 활약이 있었다. IOC 가입은 최소 5개 경기단체가 국제 경기 연맹 정식 회원으로 등록해야 가능했는데 이상백은 후다닥 여섯 개 단체의 정관을 국제 경기 연맹에 제출하는 한편 베를린 올림픽 등에 임원으로 참여하면서 쌓은 인맥을 발휘, 정부 수립도 안된 나라를 IOC 회원국으로 만들어 놓았다. 

1947년 6월 20일 제 41차 IOC 총회였다. 북한은 한 발 늦게 명함을 내밀었지만 IOC에 번번이 ‘까였다’. 그도 그럴 것이 IOC의 원칙은 “1국가 1NOC”였다. 즉 한 나라에는 하나의 올림픽 위원회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동서독은 꽤 오랫 동안 단일팀을 구성해 올림픽에 출전한 바 있다) 한국은 UN의 결의로 한반도 유일의 합법정부로 인정받고 있었고 이 현실은 올림픽 무대에도 그렇게 적용됐다. 그 결과 북한의 가입 신청은 번번이 까였다. 여기엔 당연히 한국의 적극적인 방해 공작(?)이 작용했음은 물론이다. 1957년에야 IOC는 북한 올림픽 위원회를 승인하긴 하지만 활동은 북한 지역에 국한되며 올림픽 출전은 KOC, 즉 한국 올림픽 위원회의 일원으로 한다는 조건을 달았다. 북한으로서는 복장이 터질 노릇. 북한은 ‘단일팀’을 구성하자고 연신 제안을 날리게 된다. “국제올림픽위원회에서 남측과 협의하라고 했으니 좀 만나자.” 

그러나 남한은 단호했다. 한 축구 심판이 AFP 통신과의 인터뷰에서 했다는 말은 그대로 당시 남한 사람들의 심기를 반영한다. “우리는 북한 괴뢰와 우리를 동등하게 취급할 수 없다. 그것은 사실상 북한 괴뢰를 승인하는 일이다.” (1959년 9월 13일 석간 동아일보 2면 '단일팀 편성거부') 이 정도에 그쳤으면 분단의 시대가 아니다. 남한 언론은 이렇게 약을 올리기도 했다. “북한 지역 선수 중 아마튜어리즘을 어기지 않고 있는 자는 누구든 태극기 밑에 뭉쳐 올림픽에 참석할 수 있는 것이다.” (1960년 8월 6일 석간 경향신문 4면 '남북한 혼성문제 괴뢰의 속셈은') 결국 북한은 1960년 로마 올림픽을 구경하지 못하고 말았다. 

60년대 이미 남북한 단일팀 구성과 한반도기 사용 논의

1963년 북한은 IOC 정식 가입에 성공한다. 그러나 IOC는 여전히 단일팀을 원하고 있었다. 심지어 이런 경고까지 날리고 있었다. “단일팀을 만들어라. 어느 쪽이든 이를 거부하면 올림픽에서 제외될 수 있다.” (경향신문 1962년 12월 6일 '남북단일팀 조직을 포기, 별개팀 출전건의') 밉든 곱든 남북은 얼굴을 맞댈 수 밖에 없었다. 대한민국 국호와 태극기를 고수하는 게 우리측 공식 입장이었으나 북한으로서는 어림도 없는 일이었고 IOC가 봐도 그건 아니었다. 협상을 거듭하던 중 하나의 중요한 합의가 세워진다. 국가 연주시 ‘아리랑’을 국가로 한다는 것이었다. 이건 남한측 제안이었는데 이에 맞선 북한의 제안은 매우 깜찍하고 기계적이다. “앞의 25초는 남반부 애국가를, 뒤의 25초는 우리 애국가를 연주합시다레.” 아무튼 북한은 남한의 제안을 수용했다. 이제는 깃발이 문제였다. 여기서도 북한의 제안은 파격적이다. 앞면은 태극기 뒷면은 인공기로 하자! 2안이 한반도 지도를 넣고 중심부에 오륜 표시를 한 것이었는데 여기에 IOC가 KOREA 표기를 넣자고 제안하고 남북이 모두 동의했지만 이 깃발은 쓰이지 못한다. 단일팀 구성에 실패한 것이다. (한겨레21 726호, “냉전의 추억 코리아팀의 아리랑이 그리워라”) 

1972년 뮌헨올림픽에서 북한에 금메달을 안겨준 리호준 선수. 리선수의 사진은 1991년 3월 21일자 경향신문 기사에 나왔다. 1970년대에는 감히 북한 선수의 얼굴을 신문에 싣지 못했다.

하지만 기억하자. 한반도 지도가 그려진 깃발은 이미 1960년대에 물망에 올랐다는 점. 북한은 선수단을 일본에 파견했으나 국호(國號) 문제와 IOC에 반기를 든 국제대회 참석자에 대한 징계 문제로 (저 유명한 천재적 육상선수 신금단을 비롯하여) 스스로 대회 출전을 포기하고 말았다. 1968년 멕시코시티 올림픽 때도 쿠바까지 날아갔다가 "North Korea"거부를 외치다가 다시 평양으로 백홈해 버렸다. 북한이 DPRK의 정식 국호를 획득한 건 1972년 뮌헨 올림픽 때부터였고 처녀 출전한 북한은 사격에서 금메달을 거머쥐어 그때껏 노 골드에 시달리던 남한의 코를 납작하게 만들어 놓았다. 어디 그뿐이랴. 금메달리스트 리호준은 “원수의 심장을 겨누는 마음으로 쏘았다”고 해서 남한 사람들의 속까지 뒤집어 놓았다. 

그 후 올림픽이나 아시안 게임 및 기타 국제대회에서 남과 북은 그야말로 사생결단 건곤일척의 스포츠 대리전(代理戰)을 치르게 된다. 북한만큼은 이겨야 했고 남조선만큼은 잡아야 했다. 이기지 못하면 깽판이라도 쳐야 했다. 그런데 그렇게 서로를 이겨 보겠다고 낑낑댄 뒤에는 둔탁한 서글픔이 물감 번지듯 가슴을 채웠다. 말이 통하는 한민족끼리 이게 뭐하는 짓인가 하는 자조감과 남과 북이 전력을 합쳐 나가면 세계에서도 통할 텐데 하는 아쉬움의 결합이었다. 그렇게 이를 갈고 눈에 불 켜고 싸우다가도 단일팀 얘기는 남과 북을 가리지 않고 흘러나왔다. “북남이 단일팀을 구성하면 무적일 텐데.” (1976년 아시아 청소년 축구대회에 참석한 북한 임원 길창덕) “공동우승보다는 단일팀을 만들어 단독우승을 노리는 것이 선수들에게 얼마나 편한 것일까.” (경향신문 1978년 12월 21일자, 방콕 아시안게임 남북 축구 공동우승 후) 1979년 세계 탁구 선수권대회 때나 1980년 모스크바 올림픽, 84년 LA 올림픽, 90년 북경 아시안 게임 등 이른바 건수가 있을 때마다 남북 단일팀이 논의됐으나 서로의 견해차만 확인하고 돌아앉는 일이 되풀이됐다. 

1990년 아시안게임 앞두고 한반도기 도안 남북 합의

그런데 북경 아시안 게임 단일팀 관련 체육회담에서 소기의 성과 하나가 이룩된다. 바로 단일팀이 구성됐을 때 사용할 깃발의 도안에 대한 합의였다. 깃발의 탄생 과정도 무척 난산이었다. 한반도 지도를 깃발에 넣는 것은 남북 모두 고개를 끄덕였으나 남측은 흰색바탕에 녹색 한반도지도가 그려지고 그 아래에 KOREA 라는 문구를 새긴 기를 제시했고 북측은 흰색바탕에 황토색 한반도지도에다가 KORYO 즉 고려를 영문으로 새긴기를 내밀었다. 남과 북은 논의를 거듭한 끝에 결국 흰색바탕에 파란색 한반도지도가 새겨진 깃발에 합의 도장을 찍는다. 이른바 한반도기의 탄생이었다. 여기서 잠깐. 이 한반도기는 박정희 대통령의 첫 임기 즈음 원형이 만들어졌고 노태우 정권 때 공식화됐다. 즉 ‘보수’(참다운 의미의 보수 같지는 않으나) 정권이 주도해서 만든 깃발이었던 것이다. 

한반도기는 노태우 정부때 처음 공식 사용되었다. 야당 일부가 한반도기 사용을 반대하는 가운데 여야 의원 96%가 찬성한 평창올림픽 특례법에 의거해 한반도기 반대는 위법이라는 주장도 나오고 있다. YTN 화면캡처

결과적으로 남과 북은 각각 북경아시안게임에 별개로 참가해서 한반도기의 공식적인 사용은 이뤄지지 않았다. 하지만 남한 선수들을 응원하던 뽀빠이 이상용과 북한 응원단장이 한데 어우러져 화제가 되었던 모습처럼, 한껏 달아오른 현장에서 하얀 바탕의 하늘색 한반도기는 응원의 깃발로 종종 수줍게, 때론 힘차게 휘날렸다. 단일팀 이전에 단일팀 깃발이 먼저 휘날린 것이다. 이제는 깃발에 값하는 팀이 만들어져야 했다. 기대도 컸다. 남북을 합치면 아시안 게임 종합우승도 가능하다 (한겨레신문 1990년 1월 1일 9면)는 생각은 북한을 적으로 생각하든 한 겨레로 여기든 공감대를 키워가고 있었다. 북경 아시안 게임 기간 중 북한은 또 다시 단일팀을 제안한다. “41차 세계 탁구 선수권대회와 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 단일팀 구성 문제를 협의하자.” (김유순 북한 IOC 위원장, 1990년 9월 18일) 북경 아시안 게임 탁구 남자단체전에서 이변이 일어났다. 세계 최강을 자랑하는, 아니 세계 최강을 자랑할 필요도 없는 세계 최강국 중국이 결승 진출에 실패한 것이다. 

결승에서 만난 것은 남과 북이었다. 88올림픽 금메달리스트에 빛나는 유남규가 이끄는 한국 대표팀이 김성희, 이근상 등이 버티는 북한과 맞붙었다. 한국 인구만큼의 탁구 선수가 있다는 중국이다. 신들린 듯 라켓을 휘둘러 중국 남자 탁구 대표팀을 세트 스코어 5대 1로 넉아웃시킨 북한. 86 아시안게임에서 중국의 벽을 무너뜨려 본 남한. 용호상박의 접전이었다. 선수들도 혼신의 힘을 기울였다. 그날따라 좀 저조했던 남한의 에이스 유남규를 무너뜨렸을 때 북한의 김성희는 미친 듯이 기뻐하다가 그만 졸도해서 의무실로 실려가는 해프닝까지 있었다. 

1990년 북경아시안게임 탁구 단체전 결승에서 북한의 김성희가 남한 에이스 유남규를 꺽은 뒤 졸도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MBC 화면 캡처 http://imnews.imbc.com/20dbnews/history/1990/1839271_19370.html

새벽 1시까지 경기가 이어졌지만 1만5000명 중국 관중들도 넋을 잃고 결승전을 지켜보았다. 그날 ‘그분이 오신 듯한’ 신들린 플레이를 펼친 남한의 김택수의 맹활약으로 북경 아시안 게임 남자단체전 금메달은 남한이 가져갔다. 남한 선수들은 잠깐 맹렬하게 환호했으나 이내 북한 선수들에로 다가갔다. 그리고 뜻밖의, 아니 적어도 남북한 사람들에게는 뜻밖이 아닐 멘트를 던진다. “이겨서 미안합니다.” (1990년 9월 29일 한겨레신문, '정상서 어우러진 한민족 탁구기량') 북한의 대답이 돌아왔다. “아닙니다 축하할 일이지요.” “모두 원없이 싸웠습니다.” 그건 방송을 지켜보던 한국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으아아 이겼다!를 외친 다음에는 이내 처연해졌다. “야 남북이 한 팀 만들면 중국도 별 것 아니겠구나.” 

90년 남북통일축구 교류 이후 단일팀 분위기 무르익어

아시안 게임이 끝난 직후 또 한 번 남북 사람들을 들뜨게 한 이벤트가 열렸다. 남북 통일 축구. 남과 북의 축구 대표팀이 번갈아 서울과 평양을 방문하여 축구 경기를 열었던 것이다. 이때 한국 축구의 전설의 스트라이커이자 90년 이탈리아 월드컵 대표팀 감독이었던 이회택은 남측 고문 자격으로 북한을 방문한다. 그에게는 사연이 있었다. 6.25 당시 그의 아버지와 삼촌은 의용군에 입대한 뒤 월북했던 것이다. 이회택은 북한 축구의 영웅 박두익 (1966년 영국 월드컵 때 이탈리아를 침몰시킨 결승골의 주인공)과 국제 대회에서 만나 친분을 쌓았고 그의 주선으로 부친과 삼촌이 살아 있음을 알게 됐고 1990년 통일축구 때 부친과 삼촌과의 감격적인 해후를 하게 된다.

그때까지만 해도 분단은 남의 일이 아니었다. 당시 40대 중반 나이의 이회택이 겪은 일이라면 인구의 절반이 분단의 아픔을 피부로, 또는 극히 가까운 위치에서 받아들이고 있었음을 뜻하지 않겠는가. 그런 한국 사람들에게 90년 아시안 게임과 통일 축구가 던진 파문은 적지 않았다. 양쪽 정권의 이해와도 맞아떨어졌다. 또 북한이 남한보다 경제적으로 현격하게 뒤처지고 있긴 했지만 나름 북한이 자존심을 세울 정도의 국격은 유지하고 있었다. 즉 대등한 입장에서의 단일팀이 수면위로 부상할 수 있는 분위기가 무르익고 있었다. 마침내 열매를 맺은 것도 탁구, 그리고 축구에서였다.

<2부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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