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팩트체크] 남북정상회담 직후 북한 핵개발?

  • 기자명 김준일 기자
  • 기사승인 2018.03.09 16: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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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7일 대북특사의 방북성과를 설명하기 위해 문재인 대통령이 여야 5당 대표를 초청한 조찬 회동에서 홍준표 자유한국당 대표가 방북성과와 남북정상회담에 대해 부정적 입장을 보였다. 홍 대표는 남북대화 무용론을 펼치며 그 이유로 남북정상회담 이후 북한의 핵개발을 들었다.

3월 7일 청와대 오찬회동에 참석한 여야 5당 대표. 앞줄 왼쪽부터 홍준표 자유한국당 대표, 추미애 더불어민주당 대표, 문재인 대통령, 유승민 바른미래당 대표, 조배숙 민주평화당 대표, 이정미 정의당 대표. 출처: 청와대

홍 대표는 "북핵 문제를 처리해 오면서 30년동안 북한에 참 많이 속았다"며 "김대중 대통령이 2000년 6월 평양에서 정상회담을 하고 돌아와서 '한반도에 전쟁은 없다'고 선언했지만 그 이튿날부터 김정일 위원장이 바로 핵전쟁을 준비했다"고 주장했다. 홍 대표는 또 "2007년 노무현 대통령이 남북 정상회담을 했지만 북한은 바로 핵실험을 계속했다. 2005년 6자회담에서 북핵 폐기 로드맵까지 다 만들어 놓고 또 거짓말을 했다"고 말했다. 

홍 대표는 남북대화에 대해 일관되게 부정적인 반응을 보여왔다. 대북특사 파견에 대해 지난 4일 "북핵 완성 시간만 벌어준다"고 평가했고, 1월 8일 한국당 대구시당 신년교례회에 참석했을 때 "남북대화는 북핵 개발 완성시간만 벌어준다"고 말한 바 있다. 보수야당 대표로서 남북대화를 부정적으로 평가할 수는 있다. 그러나 남북정상회담이 북한 핵개발로 이어졌다는 것은 검증이 필요한 주장이다. 뉴스톱에서 팩트체크했다.

1. 2000년 남북정상회담 직후 김정일 핵전쟁 준비?

홍 대표의 첫번째 주장은 2000년 6월 5일 김대중-김정일의 남북정상회담이 있은 뒤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이 핵전쟁을 준비했다는 것이다. 홍 대표의 주장이 사실이라면 2000년 북한의 핵무장 움직임이 있어야 한다. 

북한의 핵개발 역사를 알아보자. 1993년 핵확산금지조약(NPT) 탈퇴 선언 이후 북한은 핵무기 개발 의혹을 받았다. 북은 1994년 6월 13일 국제원자력기구(IAEA) 탈퇴를 선언했다. 미국은 북핵 시설 폭격까지 검토했다. 1994년 10월 21일 스위스 제네바에서 '북-미 기본핵 합의'가 발표된다. 북한에 경수로 2기와 중유를 제공하는 대신 북한은 핵시설을 동결하고 NPT 복귀, IAEA 사찰을 받는다는 내용이었다. 이에 따라 1997년 10월 31일 북한은 영변 원자로 폐연료봉 8000개를 밀봉했다. 1999년 9월 24일 북한은 미사일 발사 유예(모라토리엄) 선언을 하기도 했다. 2000년 남북정상회담 개최때 북한의 핵동결/폐기는 낙관적인 상황이었다. 

북한의 태도에 변화가 생긴 것은 2001년이었다. 미국 조지 부시 행정부 출범과 함께 북미간 대화가 중단됐고 북한은 미국의 태도를 예의주시했다. 부시 대통령은 2002년 1월 29일 북한을 '악의 축'으로 규정했고 이후 대량살상무기를 제거한다는 명분으로 이라크 전쟁을 일으켰다. 체제 위협을 느낀 북한은 핵무기 개발에 박차를 가했다. 북한은 2002년 10월 26일 제임스 켈리 미 국무부 차관보가 방북했을 당시 고농축 우라늄 핵개발을 시인하기에 이르렀다. 같은 해 12월 북한은 해동결 해제를 선언했고 2003년 1월 NPT를 탈퇴했다. 2006년 북한은 미사일 발사유예를 완전 폐기했다.

북한의 핵무기 개발 일지를 보면, 북한의 핵개발은 2000년 정상회담과는 직접적 관련이 없고 북한에 대한 미국의 태도변화와 관련이 있다. 2001년 9.11 테러 이후 '테러와의 전쟁' 등 국제정세 변화로 북미관계가 냉각되면서 북한이 핵개발을 재개한 것으로 봐야 한다. 게다가 북한의 1차 핵실험은 2006년 10월 9일로 2000년 남북정상회담과는 시점상 한참 거리가 있다.

 

2. 2007년 남북정상회담 뒤 북한이 바로 핵실험?

홍 대표는 2007년 10월 2~4일 개최된 노무현-김정일 남북정상회담 이후 바로 북한이 핵실험을 했다고 주장했다. '바로'가 모호한 표현이지만, 최소 1년 안에 핵실험을 했을 때 '바로'나 '직후'라는 표현이 타당할 것이다.

북한은 지금까지 총 6차례의 핵실험을 했다. 최초 핵실험은 2006년 10월 9일이었으며 가장 최근 6차 핵실험은 2017년 9월 3일이다. 2007년 남북정상회담은 1차 핵실험 1년뒤에 열렸다. 남북은 정상회담 합의서를 발표했다. 합의서엔 상호존중과 정전체제 종식, 항구적 평화체제 구축, 협력사업 증대 등이 담겼다.

이런 남북 화해 기조는 이명박 정부가 들어서면서 어긋나기 시작했다. 정부가 '비핵ㆍ개방ㆍ3000'이라는 3단계 이행방안을 제시하면서 북한이 강력하게 반발했기 때문이다. 북한이 비핵화를 하면 남한이 개방을 돕고, 북한 국민소득 3000달러로 이끌겠다는 내용이었다. 실용주의라고 불렸지만, 상호존중이 결여되어 북한과의 관계가 경색됐다. 2008년 7월 11일 금강산에서 관광객 피격사망사건이 발생하면서 사실상 단교 상태에 이르렀다.

이런 상황에서 2009년 5월 25일 북한의 2차 핵실험이 단행됐다. 이명박 정부 2년차였다. 따라서 홍 대표 주장(2007년 남북정상회담 뒤 바로 북 핵실험)은 사실에 부합하지 않는다. 북한의 2차 핵실험 원인은 종합적으로 따져봐야 하지만 가장 큰 책임은 당시 이명박 정부가 져야 한다.

 

뉴스톱의 판단

홍준표 대표는 2000년과 2007년 남북정상회담 직후 북한이 핵개발에 박차를 가하거나 핵실험을 했다고 주장했다. 2000년 남북정상회담의 경우 북한이 핵개발에 착수한 정확한 시점은 알 수 없으나 2002년 10월 고농축 우라늄 핵개발을 시인한 바 있다. 2007년 남북정상회담의 경우, 북한이 2차 핵실험을 한 것은 이명박 정부때인 2009년 5월이다. 

남북정상회담이 북핵 개발 시간만 벌어줬다는 것이 홍 대표의 인식이지만, 이는 정치적 관점에 따라 의견이 나뉘는 부분이다. 대체로 정권교체(클린턴-부시, 노무현-이명박)가 영향을 미친 것으로 분석된다. 다만 결과적으로 남북정상회담 이후 시차를 두고 핵개발이 이뤄진 것은 맞다. 종합적으로 판단해 홍 대표의 주장을 절반의 진실로 판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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