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번 도전' 에드워드 윔퍼, 1865년 알프스 마터호른 정상에 서다

  • 기자명 탁재형
  • 기사승인 2019.03.27 09: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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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탁재형의 여행 에세이] ③ 마터호른과 침보라소 등정한 에드워드 윔퍼

스위스 남서부의 산골마을, 체르마트(Zermatt)의 한 귀퉁이엔 화강암으로 된 기념비가 하나 서 있다. 윗 부분엔 십자가가, 그 바로 아래엔 절벽에 매달린 사람의 손이 조각되어 있다. 이 마을 출신으로 등반 중 목숨을 잃은 산악 가이드들을 추모하는 기념비다. 비석에 부착된 25개의 명판은 한 때 이 곳이 얼마나 치열한 산악인들의 격전지였는지를 말없이 웅변해준다. 이게 다, 체르마트의 어느 곳에서나 뚜렷이 눈에 들어오는 봉우리, 마터호른(Matterhorn) 때문이다.

스위스 체르마트에 있는, 마터호른을 오르다 사망한 산악인을 기념하는 추모비. 사진제공: 탁재형

마터호른은 100여 개가 넘는 알프스의 미답봉에 인간의 족적이 남겨지기 시작한 등반의 황금기 동안, 많은 모험가들이 차지하고 싶어했던 성배(聖杯)였다. 양 옆에 아무런 위성봉도 거느리지 않고 홀로 우뚝 선 4,478m의 이 산은 알프스의 여러 산들 중에서도 극악의 난이도를 자랑했다. 보통 세계의 3대 미봉(美峰)이라고 하면, 히말라야의 마차푸차레(6,993m)와 아마다블람(6,812m), 그리고 마터호른을 꼽는 이들이 많다. 셋의 공통점은 수직과 예각으로 이루어진 가파르고 뾰족한 능선이다. 그만큼 오르기가 쉽지 않다. 심지어 마차푸차레의 정상은 아직도 사람의 발걸음이 한 번도 닿은 일이 없다. (난이도 문제도 있지만, 네팔 정부에서 신성한 곳으로 규정하여 등정 허가 자체를 내주지 않는다.) 가지기 힘든 것이 아름다워 보이는 현상이 산만큼 두드러지는 곳도 없는 듯 하다.

주변에 위성산을 두지 않고 우뚝 선 마터호른. 사진제공: 탁재형

1857년, 이탈리아의 위대한 산악 영웅 장 앙투안 카렐이 최초의 등정 시도를 한 이래, 마터호른 정상에는 수많은 산악인들의 집요한 공격이 이어졌다. 마터호른은 정상을 동서로 가로지르는 능선을 경계로 이탈리아와 스위스가 만나는 국경지역이기도 하다. 따라서 최초의 시도는 이탈리아 산악인들과, 당시 스위스 알프스를 제 집처럼 드나들던 영국 산악인들에게 집중되었다. 수직으로 솟은 마터호른 정상부의 벽은, 현대에도 이미 설치되어 있는 고정 로프를 이용하지 않으면 쉽지 않은 구간이다. 하물며, 아이젠, 카라비나, 피켈 등의 기본적인 등산장비가 개발되기 이전의 사람들이 산 아래에서 입던 것과 별 다를 바 없는 의복을 입고 지팡이와 삼으로 꼰 밧줄에 의지해 마터호른의 정상에 오른다는 것은, 지금과는 차원이 다른 도전이었다. 계속되는 실패와 함께, ‘결코 오를 수 없는 산’이라는 신화도 굳어져 갔다.

1860년 3,960m, 61년 4,032m, 62년 4,248m로 등반기록이 조금씩 높아지던 마터호른에 새롭게 도전장을 낸 이는, 영국에서 온 20대 초반의 판화공 에드워드 윔퍼(Edward Whymper 1840~1911)였다. 목판화 공방을 운영하는 집안에서 태어나 어렸을 때부터 도제교육을 받았던 그는, 1860년 알프스 일대의 풍경화 시리즈를 제작할 목적으로 산과 처음 인연을 맺는다. 눈덮인 봉우리들이 그의 마음을 온통 빼앗아 버린 것은 그리 오래 지나지 않아서였다. 곧 그는 자신이 주도적으로 원정대를 조직해 몽펠부(4,103m)를 시작으로 알프스의 봉우리들을 오르기 시작했고, 에귀유 베르트(4,122m), 그랑조라스(4,208m)등을 처음 오른 사람으로 등산 역사에 이름을 남긴다.

알프스의 아름다운 풍경을 직접 보고 묘사한 인기 판화 작가로, 고산 등반가로 거칠 것 없이 뻗어나가던 그였지만, 마터호른은 결코 쉽게 품을 내어주지 않았다. 1861년 첫 도전에서 실패를 맛본 그는, 5년간 여덟 번을 실패하면서도 결코 꿈을 포기하지 않았다. 마침내 운명의 1865년 7월 13일, 그는 여섯 명의 일행과 함께 또 다시 마터호른으로 향한다. 윈래 함께 가고 싶었던 이탈리아 최고의 가이드, 장 앙투안 카렐이 자국의 등반대와 함께 정상에 서고 싶다며 먼저 떠났던 터라, 그는 체르마트에서 부자가 함께 가이드 일을 하던 페터 타우크발더를 안내인으로 고용했다. 전에 이미 이탈리아 쪽 사면에서 좌절을 경험한 바 있는 윔퍼는, 현재 회른리(Hörnli) 능선이라고 불리는 북동쪽의 암릉을 공격 루트 삼아 정상으로 향했다. 이틀 먼저 출발한 이탈리아 등반대가 정상에 이미 도착했을지도 몰랐기에, 끝까지 긴장을 늦출 수 없었다. 체르마트를 출발한지 31시간째가 되던 7월 14일 오후 1시 40분, 윔퍼 일행은 마터호른의 정상에 섰다. 그는 이 감격을 ‘온 세상이 우리 발 밑에 놓였다’고 표현했다.

하지만 기쁨도 잠시. 그는 등산 역사상 최고의 업적을 이룬 사람에서 최악의 비극을 막지 못한 사람으로 전락한다. 하산 도중 등반대에서 가장 어리고 경험이 없었던 일행 하나가 발을 헛디디며, 그와 로프로 몸이 연결되어 있던 세 명이 함께 1,200m 아래의 빙하로 추락하고 만 것이다. 원래 전원이 서로의 몸을 연결하고 있던 터였지만, 가장 낡았던 부분이 끊어져 나가며 아래쪽 네 명만 떨어져 나가고 윔퍼와 가이드였던 타우크발더 부자만 목숨을 건졌다. 불행중 다행이라는 말도 무색한 참극이었다. 이 일로 윔퍼는 더 이상 알프스를 찾지 못하게 될 정도로 비난을 받았다. 자신들만 살기 위해 일부러 로프를 끊은 것이 아니냐는 음모론이 제기되었고(법정 다툼까지 갔지만 사실 무근인 것으로 판명되었다.), 영국에선 아예 등산 자체를 법으로 금지해야 한다는 주장까지 나올 정도였다. 스물 다섯 젊은이에겐 견디기 어려운 상처였을 것이다. 결국 그는 알프스를 떠나게 되지만, 이제 불붙기 시작한 산을 향한 열정을 꺼뜨릴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마터호른에 동이 트고 있다. 사진제공: 탁재형

1880년, 윔퍼는 알프스에서 마터호른 초등을 놓고 경쟁했던, 그래서 결국 두 번째로 정상에 오르는 데 성공했던 이탈리아 산악인 장 앙투안 카렐과 함께 남미 원정을 떠난다. 그리고 안데스의 고봉들에 차례로 도전한다. 같은 해 1월 4일, 그들은 안데스 산맥의 침보라소(6,263m)에 최초로 오른 사람이 되었다. 당시로서는 인류가 도달했던 최고 높이였고, 그 사실은 지금도 일정 부분 유효하다. 지구는 완벽한 구체가 아니라, 원심력의 작용으로 위아래가 살짝 납작한 형태를 띠고 있기 때문이다. 이 관점에서 보자면, 지구상에서 가장 높은 지점 혹은 지구 중심으로부터 가장 먼 지점은 에베레스트가 아니다. 바로 윔퍼와 카렐이 최초로 올랐던, 안데스의 침보라소다. 또한 이들의 원정은 유럽 산악인들이 알프스를 벗어나 다른 대륙의 산으로 향했던 최초의 사례로 평가받는다. 비로소 알피니스트(Alpinist)들이 세계로 눈을 돌리려 하고 있었다.

(다음 회에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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